사두개인(Sadducees)은 어떤 사람들인가
복음서의 자주 등장하는 사두개인들은 바리새인들과 함께 유대 지도계급의 양대산맥을 이루었다. 바리새인들처럼 신앙이 변질되면 어떻게 되는지, 경건을 잃어버린 종교가 어떻게 변질되는지를 잘 대변해주는 사람들이다.
I. 사두개인의 기원
가.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 이름이 대제사장 '사독'에게서 왔다고 본다. 사독은 다윗 시대에 있었던 대제사장 가운데 한 명이었다(참조, 삼하 8:17; 15:24).
후에 솔로몬은 아비아달이 아도니야의 반역을 도운 것을 인해(참조, 왕상 2:26-27)그를 쫓아내고 사독을 유일한 대제사장으로 인정했다(참조, 왕상 2:35).
레위족속은 성전에서의 사역을 감당하도록 선택을 받았다. 바벨론 포로기 이후에 이 제사장의 계보는 여호수아에게 이어지며 재확립되었다(참조, 학 1:1).
"다리오왕 이년 유월 곧 그 달 초하루에 여호와의 말씀이 선지자 학개로 말미암아 스알디엘의 아들 유다 총독 스룹바벨과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에게 임하니라"(학 1:1)
후에 이러한 제사장의 가계와 그들의 지지자들은 '사독 가족' 혹은 '사두개인(Sadducees)으로 불렸다.
나. 주후 9 세기의 랍비적 전통(랍비 나단의 아봇)은 사독이 소코(주전 2 세기)의 '안티고누스'의 제자였다고 말한다. 사독은 “죽음 이후의 상”과 관련하여 자기 스승이 한 유명한 말을 오해하여 사후의 세계를 부인하는 신학을 정립했다. 따라서 그들은 몸의 부활도 부인했다. 그들의 이러한 전통은 복음서에도 자주 등장하며 이것은 부활을 믿는 바리새인인들과 논쟁거리가 되곤 하였다.
"부활이 없다 하는 사두개인들이 그 날에 예수께 와서 물어 가로되..."(마 22:23)
또한 사두개인들은 구약성경중 토라 혹은 율법(창세기-신명기)만을 권위있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다. 후기 유대교에서 사두개인들은 '뵈수시안'으로 불린다. 뵈수스 역시 소코의 안티고누스의 한 제자였다. 그는 사독과 비슷한 신학을 발전시켰고, 그도 사후의 삶을 부인했다.
라. 사두개인이라는 명칭은 요한 힐카누스(주전 135-104 년)의 시대에 이르러서야 사용되었는데, 이 기록을 요세푸스가 전하고 있다(참조, 유대 고대사 13:10:5-6). 유대 고대사 13:5:9 에서 요세푸스는 “세 학파”인 바리새인, 사두개인, 에센파가 있었다고 말한다.
마. 한편 안티오쿠스 IV 에피파네스(주전 175-163 년) 때에 셀루시드 통치자들이 제사장들을 헬라화 시키려는 시기에 이들이 출현했다고 주장하는 또 다른 설이 있다. 마카비 반란기 동안 새 제사장제도가 시몬 마카비(주전 142-135 년)와 그의 자손(참조, 마카비상 14:41)들에 의해 시작되었다. 이하스모니안 계열의 새 대제사장들은 귀족정치적인 사두개인들의 시작이 되었을 것이다. 바리새인들은 같은 시기에 하시딤(즉, “분리된 자들,” 참조, 마카비상 2:42; 7:5-23)에서 발전되었다.
바. 오늘날에 제기된 이론에 의하면 사두개인들은 헬라어 용어인 '쉰디코이'의 철자에서 왔다고 주장한다.
이 용어는 로마의 권력과 결부한 지도자들을 가리킨다. 이 설은 왜 어떤 사두개인들은 귀족정치적 제사장이 아니었지만 산헤드린의 구성원이 되었는가를 설명할 수 있다.
II. 독특한 신앙
가. 그들은 하스모니아와 로마의 통치 기간에 살았던 유대인 가운데 보수적인 제사장으로 이루어진 분파였다.
나. 그들은 특별히 성전의 예배, 의전, 의식, 예배등에 특별한 관심을 가졌다.
다. 그들은 기록된 토라(즉, 창세기-신명기)의 권위를 받아들인 반면 구전(즉, 탈무드)을 배격했다.
라. 그들은 따라서 바리새인들이 소중히 여기며 발전시킨 여러 교리들을 거부했다.
1) 몸의 부활(참조, 마 22:23; 막 12:18; 눅 20:27; 행 4:1-2; 23:8)
2) 영혼의 불멸성(참조, 유대 고대사 18.1.3-4; 전쟁 2.8.14)
3) 천사의 세분화된 계급의 존재(참조, 행 23:8)
4) 그들은 “눈에는 눈”(즉, 렠스 탈리오니스)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였고 육체적 형벌과 사형제도(벌금형 대신에)를 지지했다.
마. 신학적 논란을 가져온 또 다른 영역은 예정 대 자유의지와 관련된 내용이었다. 요세푸스가 언급한 세 그룹의 사람들인 1) 에센파는 일종의 결정론을 받아들였다. 2) 사두개인들은 인간의 자유의지에 강조점을 두었다(참조, 유대 고대사 13.5.9; 전쟁 2.8.14) . 3) 바리새인들은 앞의 두 견해의 중간 입장을 취했다.
바. 어떤 면에서 이 두 그룹(즉, 사두개인 – 바리새인)의 갈등은 구약에서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의 갈등을 보여준다.
또 다른 종류의 갈등은 사두개인들이 사회적으로 지위를 갖고 땅을 소유한 자들을 대표한다는 점에 기인한다. 그들은 귀족들이었지만(참조, 요세푸스의 유대 고대사 13.10.6; 18.1.4-5; 20.9.1),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학자였고 일반 백성 가운데 경건한 자들이었다. 이러한 긴장은 예루살렘 대 전역에 있는 각 지역의 회당으로 대별되었다.
또 다른 갈등은 바리새인들의 신학에 영향을 미쳤던 조로아스터교를 사두개인들이 거부한 사실에서 유래했을 것이다. 그러한 신학의 예로서는 정교하게 발전된 천사론, 야웨와 사탄의 이원론, 사후세계를 강력하게 육체적인 용어로 이해한 점을 들 수 있다. 에센파와 바리새인들에게서 볼수 있는 이러한 과도한 견해는 사두개인들의 반대를 야기했다. 사두개인들은 다른 유대 종파의 사람들의 견해를 좌절시키기위해 오직 모세의 글에 나타난 신학만을 강조하는 보수적인 입장을 취했다.
그들은 지역적인 안정을 추구했는데, 1 세기의 환경에서 이것을 누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로마에 협력하는 방법 밖에 없었다(참조, 요 11:48-50).
"만일 저를 이대로 두면 모든 사람이 저를 믿을 것이요 그리고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 땅과 민족을 빼앗아 가리라 하니 그 중에 한 사람 그 해 대제사장인 가야바가 저희에게 말하되 너희가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도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지 아니하는도다 하였으니"(요 11:48-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