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2-04-17 22:06
구약성경에 나타난 부활 사상
인쇄
 글쓴이 : 웹섬김이
조회 : 2,335  

구약성경에 나타난 부활 사상


1. 구약성경의 부활사상에 대한 학자들의 견해

 

(1) 구약성경에 내세와 부활에 관한 사상이 들어있지 않다는 견해
T. H. Gaster 등 많은 수의 성서학자들은 이스라엘에서는 헬라시대가 되기까지 부활 교리가 발전하지 못했다고 주장한다.
(2) 구약성경에 내세와 부활에 관한 사상이 들어있다는 견해
J. A. Schep 등은 구약성경에는 매우 명료한 것으로부터 조금 모호한 구절에 이르기까지 죽은 자의 부활에 관한 것이 다양하게 나타난다고 주장한다.


2. 구약성경에 나타난 죽은 자의 살아남에 대한 역사적 기록

 

(1) 사르밧에 사는 과부의 아들(왕상 17:17-23)
(2) 수넴 여인의 아들(왕하 4: 17-37, 특히, 32-35절)
(3) 그 시체가 엘리사의 묘실에 던져졌던 사람(왕하 13:21)
비록 이 세 가지 경우의 부활이 지상의 삶으로 잠정적으로 되살아난 것을 의미한다고 할지라도, 이러한 실례들은 죽은 자를 부활시킬 수도 있는 여호와 하나님의 전능하신 권능에 대한 신앙의 한 면을 보여 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3. 구약성경에 나타난 부활과 그 희망

 

1) 에녹과 엘리야의 승천

창세기 5:22-24과 열왕기하 2:11 이하는 각각 에녹과 엘리야의 승천을 기록하고 있다. 창세기 5장에서, 아담과 그의 후손에 대하여 일반적으로 말할 때 사용된 "그가 죽었다"라는 단조로운 표현과 지상에서 에녹의 마지막 생애에 사용된 "하나님께서 그를 데려가셨다"라는 표현 사이에는 명백한 대조가 나타난다. 이 대조로부터 에녹이 죽지 않았다고 추론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열왕기하 2:11 이하에서는 엘리야가 "하늘로 올라갔다"고 진술하고 있다. 성경은 엘리야가 하늘로 올라갔다는 사실에 대하여 결코 의심하지 않는다. 예수님 당시에, 엘리야가 다시 몸으로 지상에 올 것이라고(마 17:10; 요 1:21) 하는 유대인들의 기대에 나타났던 바와 같이 이스라엘에서 엘리야의 승천은 일반적으로 널리 인식되었다.
에녹과 엘리야의 승천은 두 가지 중요한 의미가 있다. 첫째로, 이 승천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여호와의 능력은 스올과 죽음에 의하여 제한을 받지 않는다는 것을 보장해 주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는 악의 세력에 의해 희생되었던 사람들을 다시 소생시킬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 자신에게로 데려오기 원하는 사람을 스올과 죽음이 만지지도 못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부활 신앙에 대한 후기의 표현을 이국적인 요소로 간주할 수 없다.
둘째 의미는, 육체가 하나님과 함께 하는 영원에 생명에 합당치도 않고 가능하지도 않다고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이다. 에녹과 엘리야는 육체적인 사람으로서 영원한 생명을 부여받았고, 파괴적인 죽음을 맛보지도 않았다. 그들이 더 이상 육체적인 사람들이 아니라고 추정할 만한 어떤 근거도 찾을 수 없다.

 

2) 사무엘상 2:6

사무엘상 2:6에서 한나는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음부에 내리게도 하시고 올리기도 하시는도다"라고 찬양하였다.
오래된 여러 주석가들과 함께 고스링거(C. J. Goslinga)는 이것을 무덤 속에 있는 죽은 자들을 살리시고 끌어내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으로 해석하였다. 여기서 음부(sheol)는 '무덤'과 거의 동의어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만일 이 해석이 타당하다면, 우리는 여기서 인간이 육체적인 몸으로 부활할 수 있다는 강력한 주장을 보게 된다. 그러나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여호와는 죽음과 죽음의 위험에 내던지기도 하시고, 위험에 처한 사람의 생명을 건져 죽지 않도록 구할 수도 있다"고 비유적인 의미로 해석한다. 여기서 음부는 죽음과 동의어이다.

 

3) 욥기 19:25-27

내가 알기에는 나의 구속자가 살아 계시니 후일에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나의 이 가죽, 이것이 썩은 후에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내가 친히 그를 보리니 내 눈으로 그를 보기를 외인처럼 않을 것이라.

대부분의 현대 주석가들은 욥이 여기서 그의 육체적인 몸의 미래 부활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는 것을 부인한다. 그러나 욥이 자신의 육체적인 몸의 부활에 대하여 암시적으로 말하고 있다는 인상은 피할 수 없다.
26절 하반절의 히브리어 전치사 '민'은 영어의 'from'처럼 두 가지 번역이 가능하다: "~로부터 멀리"(away form) 혹은 "~로부터"(from, out of, in). 그러므로 26절 하반절을 다음과 같이 번역할 수 있을 것이다: "내 육체로부터[(from my flesh), 내 육체 안에서(in my flesh)] 내가 하나님을 볼 것이다."
단지 조심스러운 견해를 피력한 이 해석이 타당하다면, 이 본문은 인간의 육체적인 몸의 부활을 증거하는 표준구절(a locus classicus)로서의 위치를 차지할 것이다.

 

4) 시편 16:9-11

"이러므로 내 마음이 기쁘고 내 영광도 즐거워 하며 내 육체도 안전히 거하리니,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 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지 않게 하실 것임이니이다. 주께서 생명의 길로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기쁨이 충만하고, 주의 우편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이 구절에 육체적인 부활에 대한 직접적인 표현이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시인이 전인(즉 마음, 영혼, 그리고 육체)을 파멸되지 않는 영광스러운 생명이라고 하는, 절대적이며 엄청난 주장을 하는 표현 속에 부활 사상이 암시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5) 이사야의 예언

소위 "이사야의 묵시"(24-27장)라고 부르는 것 중에서 25:8a과 26:19은 특별히 관찰해 볼 만한 구절이다.

사망을 영원히 멸할 것이라. 주 여호와께서 모든 얼굴에서 눈물을 씻기시며(사 25:8a)

주의 죽은 자들이 살아나고 우리의 시체들은 일어나리이다. 티끌에 거하는 자들아 너희는 깨어 노래하라. 주의 이슬은 빛난 이슬이니 땅이 죽은 자들을 내어 놓으리로다. (사 26:19)

이사야서 25:8 상반절은 문자 그대로의 표현인 육체적인 부활을 가리키지 않는다. 그러나 사용된 절대적인 언어는 육체적인 부활에 대한 암시를 확실히 담고 있다. 죽음이 없고, 그래서 슬픔과 애통이 없는 세상은 하나님의 자녀들의 신체들이 닫힌 무덤 안에서 사망의 권세 아래 있는 그런 것일 수 없다. 죽은 모든 성도들이 그들의 무덤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다시 살고, 사망이 장악했던 것과 똑같은 몸으로 다시 부활할 그 때만이 사망은 "영원히 삼킨 바 될 것이다."
이사야서 26:19은 개인의 종말론적, 육체적 부활에 관하여 분명하게 언급하고 있다. 이 구절은 일반적인 부활에 대해 말하고 있다기 보다는, 죽은 의로운 자들의 부활, 특히 13절의 "다른 지배자들" 밑에서 죽은 이스라엘의 신실한 자들의 부활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이에 근거하여 많은 학자들이 그 당시에는 일반적인 부활이 알려지지 않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같은 주장은 입증될 수 없다. 이사야서 26:19은 이스라엘이 죽은 의로운 자들에 대하여 애곡할 그 때에, 살아 있는 신실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는 위로의 말씀이다. 이 구절은 일반적인 부활이 알려지지 않았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사야서 25:8 상반절과 더불어 일반적인 부활신앙을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6) 에스겔의 환상

골짜기의 마른 뼈 환상인 에스겔서 37:1-10은 비록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있지만, 환상이 특별한 상태로 주어진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만일 선지자와 그 백성이 하나의 종말론적인 사건으로서 죽은 자의 몸의 부활 개념에 익숙하다는 것을 가정하지 않으면, 이 상징적 언어는 납득할 수 없는 것이 된다. 환상을 이해할 수 있는 전제는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원한다면 언제라도 죽은 자를 육체적인 몸으로 일으킬 수 있다'는 믿음이다. 그렇게 하시는 여호와의 능력은 이 구절, 특히 3절에 분명히 전제되어 있다. 3절에서 마른 뼈들이 살아날 수 있는지에 대한 여호와의 질문에 "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라고 하는 선지자의 대답은 그러한 부활이 하나님에게 가능하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무덤에서 시체를 일으켜 세우시는 여호와의 능력을 믿는 이 신앙은 에스겔의 환상을 이해하는 데 충분한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에스겔 시대에 육체적인 미래의 부활을 믿는 신앙이 일반화되어 있었다고 주장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구절은 부활체의 본질을 규명하는 데는 명쾌한 기여를 하지 못한다.

 

7) 다니엘서 12:2-3

땅의 티끌 가운데서 자는 자 중에 많이 깨어 영생을 얻는 자도 있겠고, 수욕을 받아서 무궁히 부끄러움을 입을 자도 있을 것이며, 지혜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추리라.

죽은 자의 부활을 믿는 것 중에 가장 유력하고 명료한 구약의 증거가 이 본문에 기록되어 있다. 이 본문은 전체 국가에 대해 말하지 않고 특수한 그룹, 즉 2절의 "많은 사람"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이 "많은 사람"은 다시 살아나는 자들의 전혀 다른 조건으로서 두 그룹으로 구별되는데, 영원한 생명으로 혹은 부끄러움과 영원한 수욕으로 깨어나는 그룹들이다.
12:1에서는 임박한 환난 가운데서 죽음에 이를지라도 신실하게 여호와께 남아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구원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이 구절은 임박한 역사적 사실들을 예언하는 동시에 최종적인 성취를 내다보는 종말론적인 미래를 가리킨다.
이런 구조 안에서 2절 상반절의 "땅의 티끌 가운데서 자는 자 중에 많이 깰 것이다"라는 자연스런 설명을 얻게 된다. 1절에서 언급된 구원은 구원이 이를 때에 살아있는 자들, 즉 신실히 남은 자들에게 관심을 가진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야기시킨다: "그러나 여호와를 신실히 섬기던 중에 순교자로 그들의 생명을 내놓거나 죽었던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가?
신실히 남은 자가 구원의 즐거움을 즐길 수 있는 것에 반하여 그들에게는 보상이 없는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해 2절 상반절에서 대답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 즉 환난의 기간 동안 죽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부활이 있을 것이다. 그들은 "땅의 티끌" 가운데 있는 그들의 사망의 잠, 즉 그들의 무덤에서 깨어나 그들의 환난 기간 동안의 행동에 따라서 하나님께 복이나 벌을 받게 될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영원한 생명으로 또 어떤 사람들은 영원한 부끄러움으로"(2절) 깨어날 것이다.
한편, 다니엘서 12:2-3은 일반적인 부활에 대하여 직접적으로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의 부활만을 언급하고 있다. 이방 국가는 언급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이같은 생략되는 표현 때문에 다니엘서에서 일반적인 부활을 부인한다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 다니엘서의 저자는 일반적인 부활에 관한 교리가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순교의 죽음을 당했던 이스라엘 역사의 구체적인 상황에서 위로의 말씀을 쓰고 있었다. 이와 같은 이유에서 볼 때, 이스라엘의 죽은 자만이 언급되었다고 하는 것은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

 

8) 호세아서 13:14

"내가 저희를 음부의 권세에서 속량하며 사망에서 구속하리니 사망아 네 재앙이 어디 있느냐 음부야 네 멸망이 어디 있느냐 뉘우침이 내 목전에 숨으리라"

좀 오래된 학자들과 최근의 일부 학자들은 이 본문을 구원의 약속이라고 해석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현대 주석가들은 이 본문이 구원의 약속일 수 없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다음에 오는 문맥뿐만 아니라 앞에 있는 문맥도 의심할 바 없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내리시는 심판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본문은 이스라엘 국가의 회복에 관한 약속일 뿐이다. 개인 부활의 사상은 이 본문이 속해 있는 호세아서 13장의 내용과 일치되지 않는다. 호세아서 13:14에서는 부활체의 본질에 관한 암시를 찾을 수 없다.

구약성경에는 종말론적인 부활 희망에 대하여 명백한 증거를 제시해 주는 구절이 많지 않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부활에 대한 희망이 알려져 있지 않았다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구약시대의 사람들은 인간의 영원한 미래에 대해서 막연하고 어렴풋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속사업이 점진적으로 계시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을 정복할 때까지 사람들은 완전한 부활에 대한 희망을 알지도 못했고 향유하지도 못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역사를 믿는 참 이스라엘 사람들은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하는"(신 32:39 -315-)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들의 몸뿐만 아니라 영을 위하여 이생의 삶보다 더 큰 것을 마련하셨을 것이라 생각했음이 분명하다.
히브리서 기자는 아브라함에 대하여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히브리서 11: 19 -366-)고 말한다. 또한 히브리서 11:8-16 (365)에서는 이스라엘의 족장들이 가나안보다 "더 나은 본향"을 염원하면서 "(하나님께서)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대망하다가 "이들 모두가 믿음 안에서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구절들은 구약시대에도 비록 모호한 형태이긴 하지만 부활에 대한 희망이 알려져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구약에서는 육체적인 부활에 대하여 점진적인 명료성을 가르친다고 할 수 있다. 더욱이 다니엘의 예언에서 보여주는 것처럼 부활신앙은 이국적인 영향, 페르시아의 영향이라고 볼 수 없다. "부활신앙은 이스라엘 내부에서 기원했으며 이 신앙의 깊은 뿌리를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계시에서 찾아볼 수 있다"는 것을 주장하기 위한 충분한 근거가 구약성경에 들어있다고 할 수 있다.
부활된 몸이 육체적인 몸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만이 아는 고유한 특징이다. 물질을 본질적으로 악하다고 보는 헬라 개념은 이스라엘의 사상과 완전히 다르다.
후기 묵시문학과 랍비 문헌에서 이 종말론적인 소망이 괄목할만하게 물질적인 특징을 띠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그것은 비성경적이며 또한 교부들의 어떤 개념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러한 발전은 혈과 육체의 전인적인 부활을 믿는 강한 구약 신앙의 존재 바탕에서만 가능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일반형 뉴스형 사진형 Total 3,522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3170 캠퍼스 이단 엔데믹 웹섬김이 05-03 1605
3169 구약성경에 나타난 부활 사상 웹섬김이 04-17 2336
3168 탈무드에 나온 종교인의(바리새인)의 7가지 … 웹섬김이 04-17 2293
3167 누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는가? - A. W. … 웹섬김이 04-17 1528
3166 이런 설교한다면 나쁜 설교일 가능성 높아 웹섬김이 04-17 2216
3165 [2]예배란 무엇인가? 웹섬김이 04-17 1720
3164 [1]예배란 무엇인가? 웹섬김이 04-17 2042
3163 목사가 아내와 사별 후 재혼하려면 어떻게 해… 웹섬김이 04-17 2774
3162 당신의 교회 자가진단이 필요한 6가지 이유 웹섬김이 04-17 1631
3161 바울종교의 기원 웹섬김이 04-05 1847
3160 교회에 못된 성도들이 있는 8가지 이유 웹섬김이 03-19 1745
3159 목회자 1200명 신천지와 교류 충격 웹섬김이 03-19 1884
3158 사도바울의 16년 동안 선교사역 연대기 웹섬김이 03-19 1792
3157 예정론은 ‘선택’의 교리인가 ‘유기’의 … 웹섬김이 03-19 1716
3156 기도 인도시 기억할 사항 10가지 웹섬김이 03-19 1926
3155 [2]비유해석학-비유에 대한 이해 웹섬김이 03-19 1842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