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종교의 기원 제1장 서론 기독교의 기원 본서의 의도는 어떤 특별한 관점 하에서 기독교의 기원문 제를 취급하려는 것이다. 그 문제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문제인 동시에 실제적으로도 중요한 문제이다. 그것이(기독교의 기원 문제가) 역사적으로 중요한 문제가 되는 이유는, 기독교가 중세와 근세에서 차지해 온 비중이 막중했을 뿐 아니라, 아무리 냉정하고 피상적으로 연구해 보더라도 기독교운동의 초기에는 어떤 독특한 특징이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기독교의 기원 문제는 또한 실제적으로도 중요한 문제이다. 좋든 나쁘든, 기독교 경험은 보통 기독교 운동의 기원에 관한 하나의 특정한 관념과 연관되어 왔었는데, 그 관념이 포기되어졌을 때, 그 경험도 없어졌다. 기독교는 그 기원과 그 창설자에 관한 어느 특정한 개념에 의존한다는 사상은 오늘날 맹렬한 공격의 표적이 되고 있다. 이 생각은 사실 널리 펴져 있지만 결코 보편적인 것은 아니다. 그러한 사람들에게 있어서 기독교의 기원에 관한 문제는 도리어 기독교의 진리문제라고 불리워져야 하며 이 문제는 그들에게 생활상의 가장 중요한 실제적 문제이다. 최근에는 기독교 기원에 관한 논의를 사도바울에다 기초를 두는 것이 하나의 관습처럼 되고 있다. 확실히 바울의 증언은 기독교의 기원문제에 중요하게 관련되어 있다. 바울은 예수와 동시대의 사람이었다. 이와 같이 기독교 기원의 문제는 바울의 증언을 출입구로 삼아 접근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이 문제에 접근하는 유일한 길은 아니다. 또 다른 하나의 길은 예수의 인격을 그리고 있는 복음서가 제공해 준다. 더욱이 복음서의 예수는 어떤 고귀한 사상을 주창하는 자로서 묘사되어 있다. 그는 그 자신을, 하늘의 구름을 타고 와서 세상을 심판하는 자로서 예정되었다고 여겼다. 그러므로 기독교기원에 관한 근본적인 증거는 이중적이다. 즉 복음서의 예수와 바울의 종교가 해명되어야 하는 것이다. 원시 기독교의 문제는 이 두 가지 방법 중 어느 하나를 택해서도 접근할 수 있지만, 결국에 가서는 이 두 가지 방법으로 접근해야 한다. 본서는 기독교의 문제에 접근하는 두 가지 방법 중 어느 하나만을 취급하고자 한다. 즉 바울의 종교의 기원은 무엇인가? 바울의 종교의 기원 사도 바울을 논하게 되면, 역사가는 그것이 예수에 관해 전제로 하는 것의 중요성은 차지하고라도, 그것 자체로 중요한 어떤 주제를 다루게 될 것이다. 의심할 여지도 없이 바울은 뛰어난 인물로서 그후의 역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 바울이 끼친 영향력의 성격과 범위를 간략하게 서론적으로 보다 자세히 규정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 영향력은 두 가지 양상으로 파급되었다. 맨 먼저 그것은 바울의 생존 시에 파급되었고, 후에는 바울서신이라는 매개를 통하여 후세에 파급되었다. 두 번째 종류의 영향에 관해서는 이미 일반적으로 높은 평가가 당연시되어 왔던 터이다. 그러나 이탈된 점이 있다는 사실을 아주 부정할 수는 없다. 이 이탈에 관해서는 다양한 해석이 제기되었다. 바우어는 고대 가톨릭교회의 비바울적 성격을 율법주의적인 유대 기독교와의 타협의 탓으로 돌렸다. 릿츨은 그것을 순수한 이방인 기독교의 기반위에서의 당연한 퇴보의 과정 탓이라고 했다. 하르낙은 그것을 바울시대 이후로 헬라적 사고방식이 침입한 탓이라 설명했다. 반면 독실한 신자들은 단순히 바울의 은총론이 너무 놀랍고 너무나 신성한 것이어서 인간의 이성과 감성으로서는 충분히 이해하기 어렵다고 할 것이다. 2세기의 교회가 바울의 구원론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먼저 하르낙이 내린 단정이 참된 것인지에 대해서는 의심해볼 여지가 있다. 둘째로 비록 하르낙이 내린 단정이 참되다고 가정하더라도 바울이 끼친 영향력의 중요성은 줄어들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바울의 영향은 그가 살아있을 당시에도 그의 서신뿐만 아니라 그의 말을 통해서 파급되었다. 이와 같은 주장은 여러 가지 반론에 대향하여 옹호될 필요가 있고 그와 동시에 오해와 과장이 되지 않아야 한다. 첫째로, 바울의 이방인 전도는 사실 하나의 강력한 역사적 과정의 일부라고 말할 수 있다. 바울의 종교와 동방의 종교들 사이에는 한 가지 명백한 차이점이 있다. 동방의 모든 종교는 다른 종교에 대해 관용적이었다. 그러나 바울의 종교는 이스라엘의 고대종교처럼 절대적으로 배타적인 헌신을 요구한다. 그러나 만일 동방 종교들의 성공이 바울의 업적의 가치를 감소시키지 않는다면, 기독교이전의 유대교의 성공에 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면 좋겠는가? 헬라-로마세계의 전 도시에 산재해 있던 무수한 유대인 회당은 오늘날의 유대인 회당처럼 유대인만이 출석하는 곳이 아니라, 이방인들의 무리로 차득 차 있었다. 유대인 회당이 바울의 선교에 끼친 공헌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더욱이 유대인 회당에서 바울은 유대인 청중뿐만 아니라 이방인 청중도 발견했으니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을 어느 곳에서나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선별된 청중이었다. 그의 개종자의 대부분을 그러한 방법(예비교육을 전제한 방법)으로 시작할 수 있었다. 기독교 이전의 유대교 그러나 이러한 사실을 인정한다고 해도 그것이 곧 바울의 선교가 기독교 이전 유대교의 선교활동의 연장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반대로 유대인이 그들의 이웃인 이방인을 개종시키기 위해서 기울인 바로 그 진지한 노력이야말로 그들의 수고가 소망이 없다는 것을 더 한층 맹백하게 시위하는 것에 불과하다. 어떤 이방인들은 안식일에 관한 규정이나 음식에 관한 조항 등과 같은 율법의 일부만을 지키는 것으로 공덕을 쌓으려고 애썼다. 또한 명백하게도 유대교의 의식적인 국면과 구별되는 소위 정신적 국면만을 수용하는 듯한 태도를 취할 사람도 널리 퍼져 있었다. 선교활동을 위하여 그 요청들을 포기한다는 것은 실천을 위해서 원리를 희생하는 것을 의미했다. 그것은 선교사의 열심과 선한 양심을 희생한다는 의미였으며 아울러 개종자의 진정한 속죄를 희생하는 것이 되기도 했다. 유대교가 그 시대에 가장 매력을 주었던 것 중의 하나는 오래되고 권위 있는 경전을 소유하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이방인 개종자들은 기껏해야 하나님의 정통 가계의 주변 외곽에만 들어올 수 있었을 뿐이었다. 그러므로 기독교 이전의 유대교가 제공할 수 있었던 것은 확실히 불충분하였다. 바울에 의할 것 같으면 이방인의 자유란 실제적인 선교사역을 위하여 엄격한 율법의 요구를 완화시키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 바울의 선교 바울의 선교는 단순한 하나의 동방종교의 발전의 표명이 아니며, 또 단순히 기독교 이전의 유대인 선교의 연장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새로운 그 어떤 것이었다. 예수가 유대인으로서 유대인에 대하여 이야기 한 것이 아니고 유대인 내부에 있는 인간에게 말할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으로 인해서 이방인 교회를 수립하는데 있어서 중추적 역할을 한 바울의 공적이 당연시될 수는 없다. 그러나 예수는 명백하게 제자들에게 그의 사후 이방인 전도에 주력할 것을 명령하지 않았던가? 마태복음 28:19-20의 대 명령이 예수의 말로서 인정된다 할지라도 이방인 자유의 문제가 쉽사리 해결되었느냐 하는 것은 결코 분명하지가 않다. 예수의 발언 중 몇 대목에 볼 것 같으면, 예수는 의식적 율법에 대하여 적어도 율법 학자들에 의한 의식적 율법 해석에 대하여, 그 시대 유대교의 관습적이었던 태도와는 아주 다른 태도를 취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므로 제자들이 예수가 그들을 떠난 후에도 계속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만 사역했다 하더라도 그들이 예수의 가르침에 불충실하지 않았다는 것은 자명해진다. 그러나 바울의 업적이 예수 자신의 가르침 가운데 분명히 예시되지 않았다고 해서 교회내의 다른 이들이 예시하지 못했거나 동참하지 않았던가? 사도행전에 의하면 이방인 고넬료와 그의 가족은 최초 사도들의 지도자인 베드로에 의하여 할례를 요구받지 않고 직접 세례를 받았다. 다른 사람들의 수고에도 불구하고 복음을 실제로 일련이 대도시에 심은 사람은 정작 바울이었다. 그러나 바울의 두드러진 업적은 교회 경계선의 단순한 지리적 확장만은 아니었다. 구약의 특정한 구원주의는 실제적 고려에 의해서 극복되어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런 방법은 관용주의적 방법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었다. 다행스럽게도 관용주의는 바울의 방법이 아니었다. 진정한 이방인 사도로서의 바울은, 실천적 선교사로서의 바울을 뜻하기 보다는 신학자로서의 바울을 의미하였다. 그의 신학으로써 그는 자신의 신변에 존재있는 어떤 종류의 오류도 피하였다. 마르시온의 오류, 소위 "바나바 서신"이란 오류도 피했다. 바울은 그러한 모든 오류를 피하면서 완전히 선한 양심을 지닌 채 그의 선교사업 속에 구약성경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귀중한 지지를 받아들였으며 그와 동시에 구약성경이 과하고 있는 의식적인 요구를 이방인 개종자에 한해서는 거부하였던 것이다. 이방인 선교에 대한 바울의 기초 그러나 이방인 선교에 관한 바울의 기초를 "그러면 율법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그의 특수한 답변에 한정시켜서는 안 된다. 그것은 오히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미를 그가 전면적으로 해명한데까지 확장시켜야 한다. 의심할 여지도 없이 그 당시 상황에서 그보다 앞선 선구자들도 있었다. 그보다 앞서 제자가 되었던 자들에게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미가 전혀 알려지지 않고 있었던 것을 결코 아니었다. 바울 자신은 그리스도가 "성경에 따라 우리의 죄를 위하여 죽었다"라는 주장을 "그가 받았던" 사건의 하나로 취급을 하였다. 진실로 초기 예루살렘의 사도들은 내면적으로는 율법의 대해 자유로 왔다. 바꾸어 말하면 초기 예루살렘 교회의 자유는 예수 사역의 의미라는 포괄적인 견지에서 볼 때 충분한 기초가 잡혀 있지 않았다. 그런 자유는 영속적일 수 없었다. 그것은 논쟁적 공격을 받을 소지가 다분하였는데, 사실 그러한 공격은 오래지 않아 부딪혀 왔다. 기독교는 신학 없이 존재할 수 없다. 그리고 최초의 위대한 신학자는 바울 이었다. 따라서 이방인 전도의 원리를 확립한 사람은 바울 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국부적으로 활동하였지만 그 운동의 중심부에서 활약한 자는 바울이었다. 그 업적의 중요성은 비록 아무리 기독교의 내용에 냉정한 태도를 취하는 역사가라 할지라도, 모든 역사가에게 명백하게 인식되어지는 것임에 틀림없다. 서양문명이라 일컬어지는 근대 유럽세계는 헬라와 로마문명의 계통을 이어 받았다. 그러나 지극히 이질적이고도 전혀 예상치 않았던 근원으로부터 하나의 요소가 이 인도 유럽 문명 조류 속으로 흘러 들어왔다. 근대 비평학이 발전하여 가는 중에 기독교 기원연구가들은 실제적인 바울의 종교생활에 의해서 제시되는 도전에 응했다. 게다가 인간이 위대하면 할수록 그가 접촉하는 환경의 영역은 더욱 광범위해지며, 영적인 영역 속으로의 그의 통찰력을 더욱 심오해져간다. 바울의 종교는? 그러나 본질적으로 여기서 역사적 의미를 연구해야만 한다는 사실은 무엇을 뜻하는가? 바울의 종교는 무엇이었던가? 여기서는 그 문제에 상세하게 답변할 어떠한 시도도 하지 않겠다. 바울의 종교는 철저히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에 그 뿌리를 두었다. 근본적으로 바울에게 있어서 예수는 계시자가 아니라 구세주였다. 구속종교로서의 바울주의의 특징은 구원자에 관하여 어떤 개념을 가지고 있는데 그 개념은 바울서신에 명백히 나타나 있다. 예수에 대한 바울의 입장은 단순히 스승과 제자사이의 관계가 아니고 진실로 종교적인 관계였다는 것이다. 어떠한 경우에도 바울에게 있어서 예수는 종교적 신앙의 대상이었다. 바울은 다신교도도 범신론자도 아니고 , 유일신론을 생명 그 자체로 신봉하는 유대인이었다는 사실을 역사가가 상기하게 될 때에 그의 놀라움은 절정에 다다른다. 실제로 그 사람은 최고의 종교적인 용어인 "주"로 지칭했고 그 용어가 가장 경외로운 이름인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번역하기 위해 사용된 헬라어 구약성경 구절들을 그분께 적용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던 사람이 바로 이 유일신교도였다. 바울의 종교는 역사가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히 값어치가 있는 현상이다. 최근에 이 현상을 4가지 방법으로 설명되는데 첫째는, 초자연주의적 설명법이며 다른 세 가지 설명법은 어느 것이나 초자연주의를 거부한다는 점에서 공통관계에 있다. 바울의 종교이 자연주의적 설명 가운데 가장 널리 보급되어 있는 것은 <자유주의적>견해라 일컬어지는 것이다. 수많은 형태를 갖는 자유주의적 견해가 다른 자연주의적 가설과 다른 점은 그것이 바울의 종교형성에 있어서 최고의 중요사를 현실적 역사적 인물인 나사렛 예수의 영향이라고 규정짓고 있는데 있다. 이상이 바울주의의 기원과 기독교의 기원에 관한 자유주의적 개요이다. 자유주의적 견해 최근에는 자유주의적 바울주의 기원론을 더 급진적인 견해를 위해 거부하는 자들이 두 가지의 설명방법을 택했다. 그러나 이 두 노선은 어떤 점까지는 일치하고 있다. 예수의 역사적 인물을 거부하는 견해 비평은 브레데에 의해 1904년 이루어졌다. 그는 바울을 예수의 제자가 아니라 기독교 제2의 창립자라고 선언했다. 만일 바울주의가 나사렛 예수로부터 나오지 않았다면 어디서 나왔단 말인가? 여기서 급진주의 견해의 두 노선을 갈라지기 시작한다. 기독교 이전의 유대교와 비교해 볼 때 바울에게 있어서 새로운 점은 천상적 메시아가 이미 지상에 내려와서 구원의 사역을 수행하였다는 믿음이다. 아주 최근에 바울주의의 기원에 관한 또 다른 주장이 서서히 우세해 가고 있다. 이 주장은 바울의 종교관을 예수라는 역사적 인물의 인상에서 구하려는 자유주의적 견해를 거부하는 점에서 브레데와 일치한다. 뷰셑에 의하면 예수의 역사성은 옹호되어져야 한다. 뷰셑은 바울의 팔레스틴의 원시 기독교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믿고 있다. 바울에 관한 정보의 자료는 거의 전부가 신약성경가운데 내포되어 있다. 그 첫째는 바울서신에 들어 있으며 둘째는 사도행전에 들어있다. 바울서신중의 4권(갈, 고전, 고후, 롬)은 19세기 전반에 성행한 튜빙겐 학파의 창시자인 바우어에 의해서 확실히 진작이라고 인정받았다. 그러나 목회서신의 진작성에 관해 토론을 두드러지게 드러난다. 한편 사도행전의 문제는 현 연구의 입장에 있어서조차 지대한 중요성을 지니고 있다. 독특한 힘을 지닌 문헌적 증거는 사도행전의 전승이 확인하는 것같이 진정 바울의 동반자에 의해 쓰여 졌다는 견해에 힘입어 이끌어 낼 수 있다. 교회 기원론은 바울의 지극히 중요한 증언, 특히 바울이 원시 전승을 다시 기록한 고린도전서 15:3-8에 적합하다고 생각되고 있다. 그래서 바울이 예수의 매장에 대해 언급한 것은 결코 복음서에 나타난 빈 무덤에 관계된 사건들을 확증해주지 않는다는 점을 주장하기 위하여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 나타난 진술과는 아주 정반대이다. 사도행전의 누가 저작설에 관한 반론 두 번째는 사도행전과 바울서신 사이에 존재한다고 생각되는바 모순에 근거하고 있다. 이러한 주장은 바우어, 쩰러 그리고 그들의 동조자로 구성된 튜빙겐학파에 의해서 전개되었다. 비평에 의해 사도행전의 기록 연대는 2세기로 되었다. 바우어의 학설은 얼마 안 가서 전적으로는 유지할 수 없는 것이 되었다. 게다가 신약문서의 튜빙겐적인 연대결정법은 초대 기독교문헌을 더욱 완전히 검토함으로써 포기되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우어와 쩰러의 비평은 전체적으로는 수용이 되지 않으면서도 아직도 영향력을 갖고 있다. 사도행전이 신빙할 만한 가치 있는 기록을 지니고 있다고 인정한다면 그것이 서신의 해석에 조명을 준다는 것도 받아들여야 한다. 제2장 개종이전 다소의 바울 바울은 길리기아의 수도 다소에서 태어났다. 바울서신에 관한 최초의 문헌학적 연구는 저자가 헬라어를 너무 유창하게 구사하고 있으므로, 그의 생애의 지극히 어린시대부터 헬라어에 익숙했을 것이 틀림없다는 사실을 증명하기에 이르렀다. 제롬에 의해서 전해진 매우 재미있는 전승은 바울을 갈릴리의 기스카라 태생으로 보는 것이다. 다소는 중요한 도시였다. 그 도시의 상업성은 안디옥이나 고린도보다는 못하지만 상당한 것이었다. 다소에서 바울집안의 사회적 지위는 그리 천하지 않은 듯하다. 아버지도 로마의 시민권을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헬라대학 도시에서의 탄생과 로마시민권과의 바울을 동시대의 광범위한 이방세계와 일찍부터 연결시키는 두 가지 사실이 되었다. 바울은 히브리인 중에 히브리인이라 기록한다. 더욱더 중요한 것은 바울이 율법을 바리새인으로서 가르친 자로서 표현된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그의 생애의 초기를 관용주의적 유대주의의 분위기 속에서 보냈다고 생각할 수 있는 약간의 증거도 존재하지 않는다. 사도행전에 따르면 바울은 젊을때 예루살렘에 가서 거기서 유명한 랍비 가말리엘에게 가르침을 받고 마침내는 그의 회심 직전까지 예루살렘 교회를 핍박하였다. 회심 이전의 바울 바울이 회심 전에 예루살렘에 거주하였다는 경우에 관한 한 그 증언은 너무나 생생한 상술을 지닌 채 강렬하고도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어서 그것을 믿지 않는다는 것은 지극히 급진적인 회의주의를 의미하게 되어 버렸다. 바울이 스데반을 돌로 칠 때에 그 자리에 있었다는 사실이 신빙성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의 초기 예루살렘 거주론은 사도행전에 의해 강력히 입증되고 있고 바울이 그의 지난날의 바리새적 이력에 대해 이야기한 모든 것과 완전히 조화를 이룬다. 그러나 누가의 증언가운데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은 아닌데 바울이 몇 살에 예루살렘에 갔는가 하는 것 등은 단정 지을 수 없다. 바울은 십자가 이전에 예수를 본적이 있는가? 바울은 예수의 공생애 전후 모두 예루살렘에 있었다. 바울은 그 사이에 어디에 있었는가? 그 문제는 사도행전이나 바울서신 등에 나타나 있는 실제적 증언에 근거하여서만 결정되어질 수 있다. 고린도후서 5:16에 '그리스도를 육체로 알았으나'라는 표현 정도가 고작인데 그래서 바울이 예수를 수난 이전에 보았다고 추정할만한 어떤 명백한 증거도 없다. 그러나 서신의 침묵은 바울과 예수 사이에 어떠한 지속적 접촉도 특히 청년 바울의 예수에 대한 어떠한 적극적 박해도 없었음을 반증하는 것 같다. 그러나 한 가지는 확실한데 비록 바울이 예수를 팔레스틴에서 한 번도 본 일이 없을지라도 그가 예수에 관해 듣고 있었던 것만은 확실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을 회심에 이르게 할 수 있었던 심리적 발전과정을 추적해 보려는 여러 가지 시도가 있었다. 바울은 부활의 그리스도를 봄으로써 회심하게 되었다. 우선 첫째로 그 주체의 신체적 조직에서 그 경험에 대한 어떤 근거를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그 진단은 아주 불충분한 근거를 갖고 있는 것이다. 다메섹 체험을 환각으로 인정한다 할지라도 그 근거를 사도바울의 육체적 연약함으로서 찾아내려는 것을 충분하지 않다. 다메섹 도상 회심을 설명하는 또 하나의 방법은 로마서 7장과 바울이 율법 하에서 체험했다고 생각되는 불만족감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죄의식은 가시 없는 매로서 바울로 하여금 구주를 받아들이도록 한 것이었다는데 그 죄의식에 대해 말하자면 회심전의 바울이 진실로 죄의 회오리 아래 있었다는 아무증거가 없다. 한편 바울이 그가 박해했던 자들의 용감성에 호감을 느꼈다는 설은 지극히 수긍하기 곤란하다.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만난 것은 환상도 아니요, 단순한 표적도 아닌 진실한 인물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의 회심증언을 어떠한 도덕적 또는 심리적인 반대도 있을 수 없다. 제3장 이방인의 자유의 승리 회심 직후의 바울 사도행전에 의하면 바울은 회심 후 아나니아의 인도를 받아서 세례를 받았다. 하나 이 그의 아들을 바울에게 나타내신 후에 바울은 아라비아로 갔다고 고백한다. 즉 회심하고 난 후의 첫 여행은 예루살렘 여행이 아니라 아라비아 여행이었다. 사도행전은 아라비아의 여행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그는 바울이 예루살렘에 가기 전에 상당한 기간을 다메섹의 회당에서 전도하고 있던 사실을 기록하는 것만으로 만족하였다. 아라비아 여행의 범위는 지리적으로나 시간적으로나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바울은 자신의 주장을 유리하게 하기 위해서 아라비아의 여행을 그가 부인하고 있는 예루살렘의 여행과 비교하는 데에 그칠 뿐이다. 바울이 첫 예루살렘 방문 직전에 다메섹으로부터 은둔한 사건은 사도행전 9:23-25과 고린도후서 11:32-33에 기록되어 있다. 회심 후의 바울이 예루살렘 첫 방문한 것이 사도행전 9:26-30, 22:17-21, 갈라디아서 1:18-19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만일 바울이 아라비아에서 그 3년의 대부분을 보냈다고 한다면 또한 그의 소식을 거기에서부터 쉽사리 얻어낼 수 없었다면 바울의 회심에 관한 보고는 먼 뜬소문처럼 보였을 것이다. 다소와 안디옥에서의 바울 예루살렘을 떠난 후 바울은 시리아와 길리기아 지방에 갔다. 바나바는 바울이야 말로 안디옥의 이방인을 상대로 한 전도활동에 적임자라고 생각하였고 또 사실 그는 이미 그 적격성을 입증해 보였는지도 모른다.뷰셑이나 하이트뮬러에 의해서 안디옥에 있는 기독교공동체에 커다란 중요성이 부여되었다. 사도회의 갈라디아서 2:1-10을 사도행전 15:1-29과 자세하게 비교해보면 다른 난점이 생긴다. 첫째, 행15은 예루살렘 지도자들이 바울적 원리를 지지한 것처럼 묘사하지만 갈2은 근본적인 상이점이 있는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베드로를 책망함 예루살렘 회의 후에 바울과 바나바는 안디옥에 돌아왔다. 한편 유대인 기독교 신자는 그들 조상 전래의 생활양식을 포기하도록 요구받지 않는다. 한편 베드로가 새로온 사람들이 두려워서 이방인의 교제에서 몸을 빼어 버렸다면 그는 그의 참 확신을 숨긴 것이 된다. 이대 바울이 질책할 필요를 느낀 것은 베드로의 행동이 앞뒤가 맞지 않은 점이었다. 그 모순된 행동이 이방인 기독교신자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베드로가 이방인 기독교도들로부터 몸을 도사린 그 영향이 곧 나타나기 시작했다. 바울에게는 복음의 완전한 의미내용이 계시되었다. 그러므로 그 사실을 통해 바울과 베드로 사이에 근본적인 불일치가 확립되었다고 단정하는 것은 잘못이다. 이때 바울이 베드로를 질책한 것은 베드로가 사람을 두려워해서 그의 올바른 원리를 숨겼기 때문이다. 그에 대한 베드로의 태도는 어떠했는가? 자세한 것은 확실히 알지 못한다. 제4장 바울과 예수 바울의 예수에 대한 증언 바울종교의 기원은 무엇인가? 그 대답은 예수를 근거로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바울은 자기 스스로를 그리스도의 종이라 여기고서 그의 모든 생활을 그리스도가 하셨던 일과 그리스도가 계속하시고 있는 것들 위에다 구축하였다. 그러므로 바울서신에는 역사적 인물 예수와 신적 하나님 그리스도 사이에 영지주의적 분리와 같은 그런 흔적은 조금도 없다. 바울의 증언은 분명하다. 그는 그리스도를 주이며, 대주재로 인정했다. 바울과 초대 사도들의 완전한 일치 이상이 바울의 증언이다. 그러나 그와 동시대 사람의 증언은 어떠한 것이었던가? 그 관계는 근본적으로 투쟁의 관계였다고 바우어는 믿었다. 바우어에 의하면 바울과 베드로는 기껏해야 단지 가협정을 수립하는 데에 그쳤다. 진실로 그들은 원리상 뿌리 깊은 차이에 의해서 분리되고 있다. 고대 가톨릭교회가 바울 한사람만을 취하지 아니하고 또한 베드로 한사람을 취하지도 않고 어떻게 바울과 베드로를 함께 받아들여 교회의 기초를 그 위에 어찌 세울 수 있었겠는가? 바우어는 교회가 베드로와 바울 양자에 의해 이끌려 존속했다는 그 원리로서 그에 반대하여 제기된 근본적 반대론을 극복하는데에 성공하지 못했다. 그러나 바우어는 순수하게 석의적 방법에 의해서 바울과 베드로의 투쟁이라는 가설을 바울 서신에 기초를 두고 수립했다. 초대교회의 신자들 예루살렘의 초대교회 신자들은 유대인의 금식이나 절기 등을 계속해서 지키고 있었다. 그들은 성전예배에도 계속해서 근면하게 출석하고 있었다. 외형상으로는 그들은 단순히 경건한 유대인이었다. 그르므로 그들의 생활 태도 때문에 유대주의자들이 자신들의 주장에 얼마간의 구실을 붙였을지도 모른다. 따라서 초대 예루살렘 교회는 동시대 유대교와는 실제로 전혀 다른 것이었다. 그 생활 원리는 진정 새롭고 신선한 것이었다. 나중에는 초대사도들의 실천조차 유대적 관심과 일치하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초기 예루살렘에서는 유대 국민들이 복음의 메시지를 거절하는 사태가 일어나기 전까지는 사도들은 율법을 준수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유대주의자들에게 어떤 투의 지지구실을 부여했다. 여하튼 비록 유대주의자들이 그들이 메시지 내용을 초대사도들에게 호소했다면 그 호소는 잘못된 호소였다. 초대사도는 유대주의를 나무랐으며 바울은 그들 자신과 마찬가지로 직접적인 권위를 부여하여 참사도로 인정했다. 고린도의 바울 반대자들은 바울의 가르침이 불충분하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예수에 관해서, 성령에 관해서 도 복음에 관해서 더욱 완전한 지식을 갖고 있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로 바울은 고린도인들에게 온전한 예수, 온전한 성령, 그리고 온전한 복음을 주고 있었다. 바울서신은 그리스도의 인격에 관해서 어떤 알력의 최소한의 영향도 포함하지 않는다. 바울서신에서 실제로 가장 중요시할 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바울 교리의 변명이 완전히 부재한다는 것이며 실로 그 교리의 조직적인 제의에 있어서도 완전히 결핍하다는 것이다. 바울은 예수의 긴밀한 친구들에 의해 예수에 대하여 존경심을 갖는 개혁자로서 간주되지는 않았다. 바울은 어떻게 예수의 생애에 관한 필수적인 지식을 얻을 수 있었는가? 바울이 예수의 관한 지식을 습득하지 않은 채 그러한 교회와 접촉을 가졌다는 것은 거의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바울의 고후의 기사를 적용하면 바울은 단지 예수에 관한 일반적 소문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일반사람에 관해서도 일반적인 소문에는 관심이 없는 자로 여김을 받게 된다. 그러나 사실 바울은 인간일반에 관해서 일상적 소문에 절대 무관하지 않았다. 그는 정확성이 있는 소식을 얻는 일에 아주 조심성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래서 바울이 육체에 따라 아무도 알지 않았다고 말하였다고 해서 그것이 곧 시각이나 청각에 의해서 오는 일반적 지식을 무시했다는 뜻은 아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리스도에 관한 일반적 보도 자료에 무관심했다고 말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고린도후서 5:16을 바르게 해석한다면 그것은 예수의 제자들과의 접촉을 통해서 바울에게 주어진 예수에 관한 보도에 대해서 바울이 어떠한 관심도 없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이 아니다. 그 답으로 고린도전서 15:1-11을 지적하는데 바울은 전승에 무관심했는가? 그는 그 반대이다. 그는 전숭을 그의 전도설교의 토대로 삼고 있다. 그리스도에게 직접 받았다는 의미 바울이 갈리디아서에서 그의 복음을 그리스도로부터 직접 받았다고 했는데 어떤 의미가 있는가? 사실 예수에 관한 있는 그대로의 사실이 복음을 구성한다고 생각한다는 것은 바울에게는 상상 밖의 일이었다. 바울은 예수의 생애에 관한 전승에 대해서 자기 쪽에서 어느 정도는 무관심했음을 조금도 직접적으로는 표명하지 않았다. 이 질문에 대답하는데 있어서 먼저 인정해야할 것은 바울서신에서 예수의 말을 직접적으로 인용한 사실이나 예수의 생애의 세부적인 면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이 놀랄 만큼 적다는 사실이다. 흔히 바울은 예수에 관한 두 가지 사실, 즉 죽음과 부활에만 관심을 갖고 있었다고 하나 고린도전서 11:23에서 그는 사소한 것조차 언급을 하고, 그것이 발생한 때를 '그가 배신자에 의해 넘겨지던 밤'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복음서에서 예수의 윤곽이란 예수는 거처가 없이 선을 행하면서 여기저기 떠돌아다니고,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그런 자였다. 그래서 바울서신에서 예수의 설교와 모범에 대한 언급이 적다고 하는 것은 때로는 과장에 지니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의심할 것도 없이 바울은 예수에 관해서 그가 서신을 쓰는데에 적합하다고 생각한 그 이상으로 훨씬 더 상세히 알고 있었다. 이처럼 바울이 예수의 생애와 가르침에 대해서 언급한 그 언급의 부수적 특징은 바울이 서신 안에서 가르치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한 그 이상으로 훨씬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복음서의 예수와 바울서신의 그리스도 그러므로 바울이 예수의 참 제자였다는 사실을 추측할 수 있다. 바울은 자신을 제자로 간주했다. 그러나 이 추측은 정당화 될 수 있는가? 바울이 추종했던 자는 참 예수란 말인가? 이러한 질문은 바울에 관하여 알려진 것과 예수에 관해서 알려진 것을 비교해 봄으로써만 해결이 가능해질 수 있다. 복음서를 신뢰할 수 있다면 그때에 바울이 예수의 참 제자였다는 것을 인정할 수 있다. 왜냐하면 복음서를 전체적으로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바울의 생활의 총화였고 실체였던 거룩한 주님과 본질적으로 유사한 예수를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울과 복음서의 예수를 비교해보면 양자사이에는 완전한 일치가 있다. 그러나 복음서의 예수와 바울서신의 그리스도가 닮았다는 그 유사성은 때때로 바울이 예수의 제자였다는 인식에 의거한다기 보다는 복음서가 바울에 의존한다는 가설을 이끌어내기도 했다. 그러므로 바울은 예수와 비교하려면, 바울적 요소를 복음서에서 먼저 분리시켜야 만 한다고들 말한다. 그래서 현대의 자연주의적 이론에 의할 것 같으면 바울과 비교되어야 마땅한 예수는 복음서의 예수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가령 이 분리가 완성되었다고 치자 거의 희망 없는 추한 색깔로 채색한 그의 초상화속에서 역사적 예수를 발견했다고 가정하자. 그렇다고 할지라도 아직 역사가의 미혹은 끝나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 역사적 예수는 현대 자유주의적인 이 인간 예수는 기형물이기 때문이다. 최근의 비평에서 지금 논한 것과 같은 그러한 급진주의는 일반적으로 회피되고 있다. 예수와 바울과의 일치 예수와 바울과의 일치는 근대 자연주의적 비평에 의해서 인정된 복음서의 예수에 관한 설명의 모든 요소요소에까지 미치고 있는 것이다 첫째로, 예수와 바울은 하나님의 나라에 관해서 동일한 견해를 제시하고 있다. 둘째로, 바울은 하나님의 부성에 관한 교리에 있어서도 예수와 마찬가지였다. 셋째로, 바울은 은혜의 교리를 제시하는 점에서 예수와 동일하다. 바울과 예수와의 관계 그러면 바울과 예수의 진정한 관계는 어떠한 것이었나? 예수의 지상전도의 모든 사실은 의심할 여지도 없이 바울의 사색에 있어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바울의 종교는 구속의 종교이다. 그러므로 바울에 의하면 예수는 교사가 아니라 구속주였다. 확실히 바울의 신학과 종교를 분리한다는 사고방식은 버려야한다. 만일 예수가 인간의 죄를 위해서 죽기 위하여 하늘에서 애려운 신적 구속자라고 한다면 바울은 예수의 참 추종자일수 있었다. 제5장 유대적 환경 바울종교에 대한 브레데의 견해 바울의 유대적 환경 바울의 유대적 환경에 관한 간단한 개관을 보면, 바울시대의 유대교내의 가장 현저한 분파는 팔레스틴의 유대교와 이산된 유대교이다. 바울의 이방전도를 이산된 자유주의적 유대교로부터 자연적으로 발현됐다고 설명하는 것을 중대한 오류이다. 그러므로 바울에게 있어서 다소에서 출생하였다는 것이 팔레스틴의 유대교와 엄격히 구별되어지는 것으로서 자유주의적 유대교를 고집한다는 그런 의미가 아니었다. 바리새파, 사도개파, 엣센파 세 가지 주요한 유대교의 분파가 요세프스에 의해서 구별되어진다. 그것들은 바리새파, 사두개파, 엣센파 등 이다. 메시아 대망 발덴스페르거에 의하면 기독교이전의 유대교가 그 주변을 맴돌고 있던 또 다른 촛점을 메시아 대망이었다. 보통의 비평적 견해에 따르념 개인으로서의 메시아 교회, 또한 특별히 초월자로서의 메시아 교리는 이스라엘 역사의 후기에 가서 발생했다. 초자연주의적 구약성경관은 이사야서 53장과 같은 구절들을 개인적인 의미로 해석하는 점에 있어서는 그레스만과 일치하지만 그러나 그렇게 얻어진 주장에 객관적 확실성을 부여한다는 점에서 그레스만과는 다르다. 메시아 대망이 1세기 유대교에 널리 퍼져 있었다고 한다면 그 대망의 본성은 무엇인가? 여기에 관해선 보통 두 유형의 메시아 대망으로 구별된다. 첫째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온 지상적 왕에 대한 대망이었으며, 둘째는 이미 천상에 존재하고 있는 천상적 존재로서의 개념이었다고들 한다. 묵시문학에서의 메시아 개념 제1세기 묵시문학에 의해서 입증되어진 초월적 메시아관은 당시 유포괴고 있던 유일한 개념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브뤽크너에 반대하여 주장하지 않으면 안 된다. 묵시문학에서의 그 개념은 지배적인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반 민중의 교리로서는 아마 적절치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비록 묵시문학에서 발견되는 초월적 메시아 개념이 기독교 이전의 유대교가 지니고 있던 유일한 개념은 아니라 할지라도, 그것은 특히 재미있는 일이며, 더욱 검토해 볼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비유 편에서 천상적인 존재는 세상의 종말에 나타나서 심판할 때에 하나님의 대리자가 될 자인데, 그는 선택된 자 내가 선택학자, 인자 또는 그 인자라 보통 불리운다. 비유 편에서 빈번하게 사용되고 있는 인자라는 칭호는 특히 복음서에서 예수가 자신의 칭호로써 사용했기 때문에 커다란 논란의 씨앗이 되었다. 인자는 또한 선택된 자는 비유 편에서 가장 고귀한 속성을 갖고 나타난다. 비유편의 진술전체는 초자연적이다. 후기 유대교 종말론의 특징 후대의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후기 유대교 종말론의 본질적 특징은 모두 그 근원을 구약성경의 모든 정경 중에서 갖고 있다는 사실을 관찰하는 것은 흥미롭다. 첫째로 후기 주장인 초월성은 구약 성경적 근거를 갖고 있다. 둘째로 후기주장의 개인주의에도 구약성경의 근거가 있다. 그러므로 만일 사도바울이 그 기원과 기능면에 있어서 초자연적인 천상적 메시아를 회심 전에도 믿고 있었다면, 그는 실제로 구약성경에 불충실한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회심 전 메시아관이 참으로 바울서신의 그리스도의 근원이었을까? 브레데아 브뤽크너는 그렇다고 주장했다. 이 가설의 검토 초두에 회심이전의 바울이 묵시문학 메시아 관을 갖고 있었는지 어떤지에 대해서 의문을 품게 되지도 모른다. 그러나 회심 이전의 바울의 교리에 묵시문학의 천상적 인자와 같은 초월적 메시아가 나타나는지에 대해서는 그렇게 확실하지는 않다. 그래서 바울서신과 묵시문학의 용어 사용법은 청년 바울에게 묵시문학적 메시아관이 영향을 기치고 있다는 입장에는 다소 불리하다. 묵시문학과 바울 그러므로 회심 이전의 바울이 묵시문학의 메시아와 같은 천상적인 선재의 메시아를 믿었는지의 여부는 완전히 분명하지 않다. 비록 회시전의 바울이 묵시문학적 메시아의 신봉자였다 할지라도, 그것만으로는 순전한 바울적 기독론의 기원을 설명할 수 없다. 왜냐하면 묵시문학의 메시아는 서신에 나오는 그리스도와는 여러 가지 중요한 관점에서 다르기 때문이다. 첫째로, 묵시문학에는 고린도전서 8:6, 골로새서 1:16에 나오는 메시아의 창조활동에 관한 교의가 없다. 둘째로, 묵시문학에는 신자와 바울적 그리스도와의 사이에 존재하는 듯한 따뜻한 인격관계는 흔적조차도 없다. 그러나 바울은 어떻게 해서 그리스도의 죽음을 메시아의 대리사라고 생각하게 되었는가? 그것은 회심전이 바울이 이미 메시아의 대리사의 교리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게 되었을 것이다. 셋째로, 바울개념의 중심점과 관련이 되는 것이다. 제6장 헬레니즘 시대의 종교 헬라의 종교 바울시대에 있어서 문명화된 세계는 정치적으로 로마제국아래 통일되고 있었다. 가장 중요한 변화는 헬라와의 접촉에 의해서 생겼다. 헬라의 영향은 종교분야에까지 미쳤다. 호머시대 이전에도 헬라의 종교는 발전을 거듭해 왔다. 호머의 시로 단정해 보건대 헬라인의 종교는 철저하게 의인적 유형에 속하는 고도로 발달된 다신교였었다. 헬라의 종교에 있어서 밀의적 또는 영광적 요소는 특히 디오니소스 숭배와 관계가 있다. 헬라종교 붕괴의 원인 헬라의 종교는 드디어 적어도 3가지의 동인에 의해서 결국 붕괴되고 말았다. 첫째로, 철학은 신들에 대한 신앙을 파괴하기에 이르렀다. 둘째로, 고대 헬라의 종교는 도시국가와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었기 때문에, 국가의 멸망은 종교에 중대한 변화를 가져왔다. 셋째로 동방 모든 종교의 영향은 더욱더 강력하게 느껴지기 시작하였다. 헬레니즘시대의 특징 : 세계 시민주의 밀의 종교 기베레종교 이시스와 오시리스 바울과 이교적 관습 헬레니즘 시대의 혼합종교는 여러 가지 종교가 한없이 결합되었다. 또한 종교와 철학의 혼합도 이루어졌다. 오늘날 바울종교의 발생 원인은 이러한 헬라철학과 동방종교와의 연합적 다양한 산물에서 구하는 경우가 많다. 이 가설은 하나의 명백한 난관에 부딪힌다. 이 난관은 보다 자료의 대다수의 연대가 늦다는 점이다. 이 반론은 현대비교종교학파에 의해서 다음과 같은 응하는데, 첫째로 기독교 이후의 이교적 관습이 어는 경우에건 연구대상이 되는 한 분명히 기독교로부터의 영향은 받지 않았다. 둘째로 단순히 우연한 유사성으로 경시되어질 수 없다. 셋째로 이 이교적 관습은 기독교의 관습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기독교적 관습이 이 이교적 관습에 의존하여야만 한다. 그러나 이러한 추론의 연약성을 알 수 있는 데 모든 단계는 불확실히다. 첫째로 이교적 관습이 기독교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는 사실은 대개의 경우 결코 분명하지는 않다. 둘째로 이교의 관습과 기독교적 관습과의 유사성은 종종 터무니없이 과장되어 진다. 기독교 이전의 신비적 종교 헤르메스 문서의 기원 주술적 파피루스 제7장 이교종교의 속죄관과 바울의 속죄관 바울은 이교적 밀의교의 영향을 받았는가? 만일 바울이 이교적 밀의교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면 그것은 단지 제1세기의 유대교와 그와 관계를 맺고 있을 수 없다. 다소에서 받은 이교적 영향이란 것은 단지 무의식적인 것에 불과하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만일 이교적 영향이 바울의 종교생활의 심장부에 진입해 왔다면, 그것은 바울이 다소에서 보았었던 것을 그의 마음속에 단순히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더욱 미묘한 과정을 통해서 그렇게 되었으리라고 추정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이 가설은 하이트륨러나 뷰셑에 의해서 강력하게 주창되어졌다. 특별히 바울서신내의 바울적 요소를 바울 이전의 헬레니즘적 기독교로부터 유래되었다고 생각되어지는 형태의 요소와 어떻게 분리할 수 있겠는가? 분리의 과정이 어렵다는 것은 인정해야만 한다. 그러나 뷰셑과 화이트뮬러에 의하면 그것을 불가능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 바울 이전의 헬레니즘적 기독교를 재구성하기 위해서는 바울이 받았었던 것을 바울 자신이 산출했던 것으로 부터 구별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게다가 뷰셑과 화이트물러가 안디옥의 기독교를 재구성하는데 있어서 무슨 권리로 로마서를 이용할 것인가? 마지막으로, 다메섹과 안디옥의 기독교가 예루살렘의 기독교와 본질적으로 달랐다고 생각할 만한 이유는 무엇인가? 이 연구는 많은 점에서 중복되는 일이 있겠지만 3부분으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바울종교의3가지의 근본적인 요소는 헬라-동양적 혼합주의에서 유래되었다. 첫째, 구원을 얻는 문제에 관련된 복합관념, 둘째, 예전, 셋째, 기독론이 속죄에 있어서의 그리스도의 사역이다. 바울이 사용한 그노시스의 개념 위 세 가지 구분중의 첫째 주안점은 특히 라이첸슈타인과 관계가 깊다. 라이첸슈타인은 어구적 연구방법을 강조하는데 바울서신 안에서 헬레니즘족 밀의교로 부터 유래된 전문단어를 보여 주려한다. 특히 지식과 영에 관한 용어가 있다. 라치첸슈타인은 말하기를 바울시대의 밀의교에서는 그노시스란 연구나 추리의 과정을 통해 얻어진 지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에게서 온 직접적인 계시에 의한 지식을 말하는 것이다. 라이첸슈타인이 믿는 바로는 이 그노시스의 개념은 바울서신에서 발견되어지는 개념이다. 그러나 바울에게 있어서 하나님이 지식은 인성의 변화를 만들어 내기에 바울적 개념이 구약성경의 그것을 초월한다는 것이 반박될 수 있을 것인가? 바울의 메시지는 복음, 즉 이미 일어났던 것에 관한 한조각의 소식에 불과했다. 앞서 관찰한 대로, 신약성경의 특징적인 말은 복음, 가르침 또한 역사적 메시지의 전달에 관련된 말이다. 그래서 지식의 관념에 관한한 라이첸슈타인은 바울이 밀의교에 어떠한 의존관계를 가졌다는 것을 보여주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 그러나 바울의 영에 관한 교리가 이교적 밀의교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도대체 어디에서 나왔는가? 그 대답은 명백하다. 그것은 궁극적으로는 구약성경에서 나온 것이다. 바울의 육의 개념 속죄에 대한 갈망은 바람직스럽든 아니든 간에 역사의 근본적 사실이고 또한 많은 곳에서 독립적으로 발생했다는 사실을 입증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바울의 육이란 용어사용의 복잡한 문제에 대해서는 어떠한 해결책이 발견되어지든 간에 인간의 본성에 관한 바울적 비관주의는 확실히 헬레니즘 시대의 이원론적 비관론과 전혀 다르다. 바울의 구원론과 밀의교 바울에게 있어서 인간이 불완전성에 대한 인식은 본질적으로 죄의식이다. 또한 속죄를 갈구하는 것은 의에 굶주리고 목마름을 채우기 위함이다. 바울의 종교는 구속의 종교라는 점에 있어서는 밀의교와 비슷하다. 그러나 그 유사성은 거기에서 그치고 더 이상 진전하지 않는다. 성례전 제8장 예수의 주 되심 예수의 주 되심에 대한 부셋의 견해 뷰셑에 따르면 예루살렘의 원시 그리스도관은 예수를 주로 인자로 인정하고 있었다. 인자란 유대묵시문학이 가르치고 있는 신비적 인물이다. 뷰셑은 인자라는 칭호를 예수 자신이 썼다는 사실에 대해서 의심한다. 그러나 그의 저서의 경향은 결정적으로 예수의 메시아 의식을 철저히 부정하고 있다. 그러나 상세하게 검토할 필요가 있는 것은 원시 예루살렘교회의 신앙이다. 뷰셑은 주장하기를 이 신앙에는 예수가 주라는 개념이 조금도 들어있지 않다는 것이다. 뷰셑은 원시 예루살렘교회가 주라는 용어를 예수에게 적용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는가? 주요한 논증은 공과녹음서의 검토에서 나온 것이다. 무엇보다도 주라는 칭호가 복음전승의 2차적 요소에만 나와 있다는 사실이 완전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복음서에 있어서는 주 칭호의 사용이 드문 것이라 분명한 것은 바울자신이 주라는 이 말을 예수의 특징적 칭호로 사용하였다는 사실이다. 바울은 이전부터 기독교인이었던 사람들로부터 주 칭호를 계승하였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예루살렘교회로부터가 아니라 안디옥, 다소 또는 다메섹 등의 도시의 기독교회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라고 뷰셑은 믿는다. 주의 형제 야고보 갈라디아서 1:19에서 주의 형제야고보에 관해서 말하는데 당연히 추측이 가능한 것을 주의 형제가 예루살렘에 대해서 쓴 칭호였다는 사실이다. 마라나다(고전 16:22) 고린도전서 16:22에 마라나다가 나타나는 것에 더욱 강조점이 주어진다. 마라나다는 아람어도 우리들의 '주여 오시옵소서'라는 의미이다. 이 말은 아람어를 말하는 교회에서 사용됨으로써 이어졌다는 것인데 주 칭호의 사용 시기를 원시기독교교회 교단까지 소급시키는 것이 된다. 예수에게 적용한 주라는 칭호 뷰셑이 믿는 바로는 예수에게 적용이 되는 주라는 칭호는 안디옥 제자들의 집회에서 발생했다. 이 단정은 뷰셑의 재구성에서는 중요한 일보를 형성한다. 그러나 비록 뷰셑의 재구성에 따르면 주라는 칭호가 교회의 집회에서 지배적이었던 황홀한 상태의 영향 하에서 예수에게 적용되어졌다 할지라도 이 칭호의 기원은 아직 설명이 되지 않는다. 제1세기의 큐리오스 바울의 성령론 뷰셑이 믿는 바에 의하면 바울적 성령론은 헬레니즘 시대의 이교적 밀의교에서 나온 것이다. 용어법의 문제를 떠나서 바울의 근본적인 비관주의적 2원론은 뷰셑에 따르면, 밀의 종교나 헤르메스 문서에 나오는 널리 보급된 사상과 생활의 유형을 근거로 하는 것이었다. 뷰셑은 계속해서 말하기를 사도 바울의 의하면 이 초자연주의, 신생 안에 나타나는 신적 능력의 통치라는 개념을 제사 또는 환각체험의 한계를 훨씬 넘어서서 확장되었다는 것이다. 성령은 기독교생활의 지배적인 원리가 되었다. 성령의 9가지 열매도 인정받았다. 바울의 성령론은 동시대의 이교종교에서 나온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뷰셑은 이 성령은 주와 동일시되었다. 그래서 바울은 그리스도안에 있는 또는 주안에 있는 이라는 놀랄만한 말을 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 뷰셑은 신약성경의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야기는 원래 이교 신화에서 생겨난 것은 아니지만 이교적 개념의 영향을 느끼게 하는 것은 바울이 이야기에 첨가한 해석이었다고 주장할 것이다. 확실히 죽었다가 소생하는 신의 개념과 그 종교적 의미가 대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다고 단언하는 것은 지나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개념이 설사 바울 이전 시대에 존재했다 할지라도, 그것 때문에 보편적이었다는 것은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비록 죽어서 부활하는 하나님이라는 개념과 그 종교적 의미가 옛날부터 퍼져 있었다는 사실이 오늘날 이상으로 휼륭하게 확립되었다 하더라도 이 개념에 대한 바울의 의존 관계는 절대로 증명되지 않을 것이다. 뷰셑은 신자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소생한다는 바울적 개념이 예전의 집행으로부터 파생되었다고 하는 것을 보여주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이것 이상으로 근본적인 오류는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바울과 동시대의 종교와의 차이 여기에 바울과 동시대이 모든 종교와는 깊은 차이가 있다. 바울주의는 철학은 아니었다. 그러나 바울주의의 성격은 하나의 구절에 의존되어있지는 않다. 서신의 여러 곳에서 바울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관해서 자신이 말하는 진리에 생명을 걸고 있다. 이 진술이 진리였다면 바울주의의 기원은 설명이 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진리가 아니었다면 교회는 설명이 안 되는 오류위에 기초를 두고 있는 셈이 된다. 그러나 만일 바울주의에 있어서 본질적인 것이 예수로부터 파생되지 않았다고 한다면 그것은 브레데가 믿는 바와 같이 기독교이전의 묵시문학적 개념에서 온 것이 아니다. 만일 바울주의를 해명하려면 설명되어야 할 것은 일군의 관념이 아니라, 바울의 구주에 대한 사랑이다. 이 사랑은 그리스도가 말한 사실에서가 아니라, 그리스도가 하신 일에 기초를 두고 있다. 여기에 바울종교의 기초가 있다. 여기에 기독교 일반의 기초가 있다. 이 기초는 복음서에서 주어져있고, 또 진실로 모든 자료에서 주어진 예수에 관한 보도에 의해 굳혀져 있다. 바울의 종교는 유대교나 이교종교에서 끌어낸 관념의 복합체에 입각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역사적 예수에 기초를 두는 것이었다. 그러나 거기에 기초를 갖는바 역사적 예수는 현대적 재구성이 예수가 아니라, 신약성경 전체의 예수이며 기독교신앙의 예수였다. 제자들의 기억 안에서 만 살아남은 교사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속죄사역을 완성하신 후에도 계속 살아 계시며 또한 계속 사랑할 수 있는 구주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