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유해석학-비유에 대한 이해
< 표2: 각 복음서의 비교 대조표 >
| 마태복음
| 마가복음
| 누가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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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씨뿌리는 자의 비유
| 마13:3-8
| 막4:2-8
| 눅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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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가라지의 비유
| 마13:2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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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겨자씨의 비유
| 마13:32-32
| 막4:30-32
| 눅13: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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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누룩비유
| 마1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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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눅13: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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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감추인 보화의 비유
| 마1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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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값진 진주의 비유
| 마13:4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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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그물 비유
| 마13:4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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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잃어버린 양의 비유
| 마18: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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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눅1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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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무지비한 종의 비유
| 마18:2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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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포도원의 품꾼 비유
| 마20: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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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두 아들의 비유
| 마21:2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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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악한 소작인의 비유
| 마21:33-46
| 막12:1-9
| 눅2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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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혼인 잔치의 비유
| 마22: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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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충성된 종과 어리석은 종의 비유
| 마24:4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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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눅12:2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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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열처녀의 비유
| 마25: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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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달란트의 비유
| 마25: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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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눅19: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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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자라는 씨앗의 비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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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막4:2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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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깨어있는 종의 비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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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막13:3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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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의원아 너를 고치라 비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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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눅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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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빚을 탕감 받은 두 사람의 비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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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눅7:4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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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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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눅10:3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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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밤중의 친구 비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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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눅11: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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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어리석은 부자의 비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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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눅12: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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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열매없는 무화과의 비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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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눅13: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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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상석의 비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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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눅14: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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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큰잔치의 비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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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눅14:1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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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잃어버린 동전의 비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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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눅15: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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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탕자의 비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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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눅15: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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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불의한 청지기의 비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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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눅16: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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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종의 의무에 관한 비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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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눅17: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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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불의한 재판관의 비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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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눅1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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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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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눅18: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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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3: 요점에 따른 분류>
단순한 세 요점의 비유
| 복잡한 세 요점의 비유
| 두 요점의 비유
| 한 요점의 비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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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탕자의 비유(눅15:11-32) ②잃어버린 양과 잃어 버린 은전의 비유(눅15:4-10참조 마18:12-14)) ③두 빚진 사람의 비유 (눅7:14-43) ④두 아들의 비유 (마21:28-32) ⑤충성스런 종과 충성스럽지 않은 종의 비유(눅12:42-48;마24:45-51) ⑥열처녀의 비유 (마25:1-13) ⑦알곡과 가라지의 비유(마13:24-30, 36-43) ⑧그물비유 (마13:47-50) ⑨부자와 나사로비유 (눅16:19;눅7:31-35) ⑩장터의 아이비유 (마11:16-19;눅7:31-35)
| ① 달란트의 비유(마25:14-30;참조눅19:12-27) ②포도원의 품꾼비유(마20:1-16) ③씨뿌리는 자의 비유(막4:3-9,13-20 병행구) ④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눅10:25-37) ⑤큰 만찬의 비유 (눅14:15-24;참조 마22:1-14) ⑥용서하지 않는 종의 비유(마18:23-35) ⑦불의한 청지기(눅16:1-13) ⑧불의한 소작인들의 비유(막12:1-12병행구)
| ①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눅18:9-14) ②두 건축자의 비유(마7:24-27;눅6:47-49) ③무익한 종의 비유(눅17:7-10) ④몰래 자라는 씨의 비유(막4:26-29) ⑤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눅12:16-21) ⑥열매맺지못하는 무화과 나무의 비유(눅13:6-9) ⑦불의한 재판장의 비유(눅18:5-8) ⑧밤중에 찾아온 친구의 비유 (눅11:5-8) ⑨집주인과 도둑의 비유(마24:43-44,눅12:39-40)
| ①감추인 보화의 비유와 극히 값진 진주의 비유(마13:44-46) ②망대를 세우는 사람과 전쟁하는 왕의 비유(눅14:28-33) ③겨자씨의 비유와 누룩의 비유 (눅13:18-21병행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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Ⅳ. 예수님의 말씀 속 비유에 대한 실례
사복음서에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비유의 기록 가운데 겨자씨의 비유와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골라 예수님이 비유를 들어 말씀하시고자 하는 의도가 무엇이며 비유를 어떻게 이해하고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교훈을 삼고자 한다.
1. 겨자씨의 비유 (마가복음 4: 30-32, 마태복음13:31-32): 하나님의 나라
겨자씨는 그 크기는 작으나 약 3∼5m까지 자라는 팔레스틴의 일년생 식물의 씨이다. 본문에서는 하나님 나라가 작게 시작하여 크게 확장됨을 비유하는 좋은 예로 사용되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비하며 어떻게 해야 내가 너희에게 하나님 나라의 계획을 이해시킬꼬?" 하나님의 나라는 겨자씨 한 알과 같다. 그리스도는 전에 하나님 나라를 씨 뿌리는 것에 비유했지만 여기서는 겨자씨 한 알에 비유하여 다음과 같은 사실을 나타내고자 한다.
'땅 위의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라고 하신 것처럼 겨자씨는 당시 농경사회의 유대인들에게는 '하찮은 것'의 상징이었다. 그래서 주님도 한때 제자들에게 '겨자씨 만한 믿음이라도 가지라'(참조 마 17:20)고 꾸짖은 적이 있었다. 당시 사람들은 예수님으로 인해 도래한 하나님의 나라를 하찮고 가치 없고 보잘것없는 것으로 여기고 있었다. 예수님은 이러한 점을 지적하신 것이다. 오늘날도 불신앙인들의 눈에는 주님과 교회와 성도들이 겨자씨처럼 하찮은 존재로 보이고 있다. 이러한 불신자들의 눈으로 주님과 하나님의 나라를 살펴보아야 한다.
1) 사회적인 면
말구유에서 태어나시고 예수님께서 자라신 곳은 나사렛 동네였고 어버지를 도와 목수 일을 하였으며 가난한 부친으로부터 물려받은 것은 장자권과 더불어 홀어머니와 그때까지 경제력이 없는 동생들 뿐 이었다.
2) 정치적인 면
무력한 피지배국인 유대인이었으며, 게다가 현실적 정치 참여 의식은 없었고(참고, 요6:15)
하나님의 나라는 눈에 보이지 않는 이상적인 것이며, 그나마도 미래적인 것이었다(참고, 막 13:13 ; 눅 17:20, 21). 예수님의 말씀은 오해받기 십상이었는데, 끌고 가면 적극적으로 호응하고, 때리면 맞고, 정부에서 달라면 속옷까지'(참조, 마 5:38-44) 벗어주는 행위로 민족주의자들에게 비난과 멸시를 당하고 로마 정부에겐 버림받아 십자가 처형을 당했다.
3) 종교적인 면
외적인 능력들은 풍성히 나타났다. 신유, 이적으로 인한 예수님의 능력은 무식자, 무산자, 병자, 정신 이상자, 문둥이 같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다르게 했다(참조, 마4:24 ;고전 1:26). 그러나 예수님의 비유의 말씀은 너무 난해하여 핵심 제자들마저도 이해하기가 어려웠으며(참조, 막 4:10-13), 대중들에게는 과대 망상적으로 보였고(참조, 요 6:60, 66), 당시 종교계의 지도자들에게는 위험한 급진 이단 사상이었다(참조, 행 24:5). 게다가 정치 종교의 지도층 인사들과는 도무지 사귈 줄을 모르고 다투기 일수였으며(참조, 마 23:1-34), 끝내 산헤드린 최고 회의에서 '신성 모독죄'로 사형 언도를 받고(참조, 막 14:61-64), 십자가에 달려 죽었는데, 종교적인 면으로 볼 때 예수님의 제자들은 부활한 것을 보았다고 하지만 그 사실을 객관적으로 증명해 줄 만한 근거가 없다.
① 겨자씨 비유의 의미
팔레스틴에는 세 가지 종류의 겨자가 있다. 그중에 흑겨자는 음식에 넣는 양념으로 기르기도 한다. 모든 겨자는 팔레스틴 지방의 기후 조건에 알맞아 그 씨는 비록 들깨씨 정도의 작은 것이지만(참조, 마 17:20 ; 눅 17:6) 다자란 후에는 새들이 와서 앉을 정도로 큰 나무가 되는 것이다. 새가 날아와 앉는다고 해서 새들이 그곳에 둥우리를 틀 정도의 나무가 된다는 뜻은 아니고, 새들이 잠시 앉아서 쉴 정도라는 뜻이다.'나물보다 커서 나무가 된다'는 것은 겨자는 그 씨에 비해서 대단히 크게 자란다는 뜻이다. 보통의 나무들은 다년생이지만, 이 겨자는 1년생이다. 갈릴리 중부에서 자라는 겨자나무는 4월이면 3-4미터나 되는 큰 나무로 자란다. 그것도 아주 속성으로 자라난다. 가지들은 사방으로 쭉쭉뻗어 울창한 숲을 이루어 보는 이로 하여금 시원한 생각을 하게 한다. 그러나 그 가지들은 별로 강해 보이지 않지만 그곳에는 새가 앉아 쉴 수 있는 것이다.
② 겨자씨 비유의 의미
예수님은 마태복음 17:20에서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일이 없으리라'고 하셨다. 그것은 믿음의 분량이 겨자씨 한 알만큼의 작은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겨자씨의 성장하는 모습을 상징하는 것이다. 겨자씨가 땅에 떨어져 싹이 나고 성장해 가는 것과 같이 믿음의 씨가 생기면 그 믿음은 태산을 옮길 만큼 큰 역사를 나타내게 된다는 뜻이다.
③ 겨자씨로 비유된 믿음
겨자씨 한 알은 우리가 영적으로 변화하기 전 한 걸음 내디딘 선한 결단의 모습이다. 그것은 아직 믿음의 온전한 형상을 갖추지는 못했어도 우리가 소유한 믿음의 시작이다.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 만한 믿음이 있었다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우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눅 17:6). 작은 씨가 자라 큰 능력을 나타낼 수 있음을 의미하는 이 같은 말씀은 믿음의 자람을 상징하고 있다. 겨자씨의 처음 모습은 다른 채소의 씨나 별다를 것이 없다. 그러나 그 씨가 자라 새들이 깃들 수 있을 만큼 큰 나무로 성장한다는 것은 겨자씨의 품성을 믿음의 성장과 잘 대비하고 있는 것이다. 겨자는 풀도 아니고 나무도 아니다. 그러나 그 매운 맛은 사람의 마음을 흔들어 놓을 만큼 강한 것이다. 얼핏 보기에 전혀 눈여겨 볼만한 것 같지 않은 믿음도 그런 것이다.
2.무화과나무의 비유(누가복음13:1-9): 갈릴리인의 죽음과 회개에의 부르심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을 죽이고 그들의 피를 저희의 제물에 섞은 소식이 그리스도에게 고해졌다. 이것은 실로 비통한 소식이었다. 이 사실은 이곳에 간단하게 언급되었을 뿐 그 당시의 어떠한 역사 기록에서도 이것을 찾아볼 수가 없다. 갈릴리는 헤롯의 통치구역 이었으므로, 빌라도에 의하여 저질러진 이 불법 살인으로 인해 누가복음 23:12에서 볼 수 있는 빌라도와 헤롯사이의 분쟁이 일어났음을 추측할 수 있다. 살해된 갈릴리 인들의 수는 얼마인지 기록이 없고 다만 '어떤'이란 말로 표현되어 있다. 그러나 주목할 상황은 빌라도가 그들의 피를 그들의 제물에 섞은 것이었다. 비록 그들은 빌라도의 학살을 두려워할 만한 이유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예루살렘에서 도망치지 않았던 것이다. 율법은 그들에게 제물을 가지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갈 것을 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성전이나 제사의 성스러움 의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인간을 무시하는' 불의한 재판관의 광포로부터 그들을 보호해 줄 수 없었다. 성역이고 안식처였던 제단이 이제 함정이 되고 위험과 살육의 장소로 변하였다.
왜 지금 "이 시각에" 그 이야기가 우리 주 예수께 보고되었는가. 아마도 단순히 그가 전에 이 사건을 듣지 못했으며 그들이 애통해하는 일이므로 그 역시 애통해 하리라고 여겼기 때문일 것이다. 또는 적당한 시간에 하나님과 화해할 필요성에 관해 말씀하셨던 것의 한 증거로서 제시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스도의 대답은 그들이 마음속으로 악의에 차서 빗대어 이것을 그에게 말했음을 암시하고 있다. 오히려 그들을 순교자로 인정하는 대신 뚜렷한 증거 없이 행악자라고 낙인찍어 버렸던 것이다. 갈릴리인들의 이러한 운명은 아름다울 뿐 아니라 영광스러운 본이었다. 이 보고를 들으신 그리스도께서 답하신다(2-5절).
그는 이 사건과 같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갑작스런 죽음을 당한 또 다른 사건을 말씀하셨다. 당시는 실로암의 망대가 무너져 열 여덟 사람이 치어 죽은지 얼마되지 않았던 때였다. 이 사건 역시 슬픈 것으로 우리는 종종 이와 같이 침울한 얘기를 듣는다. 안전을 위해 세운 망대가 때로는 인간의 파멸을 가져오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말씀을 듣는 자들에게 이와 유사한 사건들을 악용하지 말 것을, 그리하여 마치 그들이 받는 큰 고통으로 보아 그들을 흉악한 죄를 지은 자들로 단정하여 그러한 큰 고통받는 저들을 비난할 기회로 삼지 말 것을 경고하셨다. 너희는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같이 해 받음으로써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2,3절). 아마도 그리스도께 갈릴리인들의 이야기를 한 자들은 유대인으로 그들은 이처럼 갈릴리인들을 비난할 그 어떤 문제를 가진 것을 기뻐했을 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때 아닌 결말을 가져온 예루살렘 사람들의 이야기로 응수하셨던 것이다. "이제 너희는 실로암 연못가에서 치료받기를 기다리고 있는 동안 실로암의 망대가 무너져 죽임을 당한 그들 열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모든 사람보다 하나님께 더 빚진 자들이었다고 생각하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우리는 이 세상에서 그들이 받는 고난으로 그 사람들의 죄를 판단할 수 없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이 불에 타서 없어질 가치 없는 찌꺼기나 쓰레기로서가 아니라 불에 단련되어지는 정금으로서 용광로에 던지우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슬픔에 슬픔을 더하지 않도록, 이웃보다 더 고통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가혹하게 비난해서는 안된다. 만일 우리가 심판할 능력이 있다면 바로 우리 자신을 심판하는 것으로 충분히여겨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권력을 소유한 박해자들과 성공한 자들을 훌륭한 성인으로, 반면 박해받는 자들을 흉악한 죄인들로 단정하기도 한다. 다른 사람을 비난하는 바로 그 비난으로 우리 자신도 비난받는 것을 알아야 한다.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마 7:1). 이 이야기를 근거로 다음과 같은 각성의 말씀을 더하여 회개에의 부름을 선포하셨다.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3-5절). 이 말씀은 우리 모두가 그들이 당했던 만큼 당연히 멸망하여야함을 의미하고 있다. 우리도 죄인일 뿐만 아니라 그들보다 더 나을 것도 없는 큰 죄인으로 그들이 고난 받은 것 못지않게 회개해야 할 큰 죄를 지은 자들이기에 다른 사람들에 대한 비난을 누그러뜨릴 수 있어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회개하기를 힘써 잘못했던 모든 것을 뉘우치고 더 이상 죄를 범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다른 사람에게 임한 하나님의 심판이 큰 소리로 우리에게 회개할 것을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 회개만이 멸망으로부터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이며 가장 확실한 길이다.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음으로 회개하라고 외치신 그 예수께서 또한 우리에게 멸망하지 않으려면 회개하라고 명하시고 계시다. 이처럼 그는 우리 앞에 죽음과 생명, 선과 악을 놓으시고 우리로 하여금 선택하도록 요구하신다.
Ⅵ. 결 론
비유 해석의 가장 어려움 점은 비유과 알레고리의 구별이 가장 어려웠다. 지금도 이것은 난해하다. 우리뿐 아니라 해석학의 역사가 어떻게 보면 비유 혹은 알레고리냐는 논쟁의 연속이었기 때문이다. 알레고리가 너무 주관적이고 너무 세부적인 사항에 집착하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예수님의 비유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는 도움이 되었던 것 같다. 그리고 예수님은 비유에 있어서 당대 어떠한 랍비들보다. 혹은 히브리의 전승들보다 비유 사용에 탁월한 분이였다는 것이다. 그분의 비유를 통해서 진정 말하고자 하는 바를 이해한다면 하나님의 나라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이 세상에서 더 풍성한 삶을 누릴 수 있으리라고 본다. 그러한 이유로 우리는 이전 학자들의 시행착오와 색다른 견해 및 정설로 따라오던 일반화된 견해 등을 견주어 비교해보고 계속적으로 해석에 해석을 거듭해 나가는 과정을 통해 목표에 도달해야 한다. 물론 신앙적인 연구가 밑받침되어야 할 것이다. 전례 등을 볼 때 신앙이 없는 연구가 야기하는 결과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학자이기 이전에 신앙인이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본다면 우리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진정한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서 계속적으로 비유에 대한 해석을 해나가야 하며 어떠한 방법론적인 면을 넘어서 우리 삶과 신앙의 방향을 맞추어 나아가는 것에 필수 불가결한 요서로써 계속적인 해석 연구가 필요할 것이다. 우리가 연구하는 말씀에 정답은 없다. 이전의 학자들도 그래왔으며 이후의 학자들도 그러할 것이다. 그 말씀의 정답은 오로지 주님만이 아실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러 연구 방법과 진정한 의미를 찾고자하는 열정을 믿고 나아간다면 우리는 결국 비유에 담긴 의미를 넘어서 진정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메시지를 파악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가져야 할 삶의 목적이 아닐까 한다.
< 참 고 자 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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