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창조와 노동
1. 노동은 하나님의 창조명령이다.
하나님께서는 천지만물을 말씀으로 창조하시고 마지막 인간을
만들었다. 그리고 인간에게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라는 문화명령을 주셨다(창 1:28).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문화창달을 위해서는
노동을 해야 할 것을 가르친다. 생육, 번성, 충만, 정복, 다스림은 먹고, 자고, 놀고, 게으름을 피우는 것이 아니라 힘써
에덴동산을 관리하고 경작하고 개척하는 노동이 필수적이었다. 죤 밀턴(J. Milton)은 “하나님이야말로 위대한 고용주다”라고
했다.. 그러므로 인간의 노동은 하나님의 명령이다. 죄가 들어오기 전에 노동은 사람의 기쁨과 환희가 되었고 사람은 일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었다.
2. 노동은 하나님이 주신 은혜요 축복이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안식일을 제정하신 이유는 바로 열심히 노동하고 난
다음에 주는 안식의 복을 주기 위함이었다. 즉, 안식은 곧 노동을 전제한 것이며 안식일에 하나님께 예배로서 영광을 돌리지만
노동을 통해서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 준다. 그래서 어떤 이는 좀 지나치기는 하지만 “노동을 예배의 한
부분”이라고 했다. 모든 칼빈주의자들은 노동을 하나님의 은헤와 축복으로 보고 있다. 특히 바빙크(J. H. Bavinck)는
하나님의 창조의 관점에서 살펴보면 우리 인간의 노동에 대한 소명은 하나님의 축복의 선물이라고 했다. 그리고 얀 메이스터(Jan
Meester)목사는 “노동은 바로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봉사”라고 규정했다. 그러므로 종교생활은 거룩하지만 노동은 속되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이론적인 생각이다.
인간타락과 노동
인간이 죄로 말미암아 타락한 것은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가 깨어짐을 의미한다. 인간의 죄는 곧 하나님께
대한 반역이며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인 하나님을 대신하려는 망동이었다. 이때부터 인간의 노동의 의미는 변해 버렸다. 하나님 없는
노동은 비록 땀을 많이 흘린다고 해도 하나님과는 무관한 것이 되고 말았다.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주신 문화적 명령이 취소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인간이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전에는 노동의 의미도 목적도 없는 것이다. 땀을 흘려 노동을 하지만 그 열매를 가지고
죄를 짓는데 사용하게 되고 그 노동을 통해서 얻어진 문화는 소돔과 고모라와 같은 타락한 탕자 문화를 만들어 낼뿐이다. 노동에는
육체적 노동도 있고 정신적 노동도 있지만 인간은 근본적으로 타락했기 때문에 어느 쪽이든 간에 불 신앙의 열매를 맺을 수밖에
없다(창 3:17-19). 인간의 범죄로 종신토록 수고해서 그 소산을 먹을 것이고 땅에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고 얼굴에 땀을
흘려야 식물을 먹을 것이고 결국 흙으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이 말씀은 사회가 인간을 망하게 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죄가 사회를
병들게 했고 환경의 오염이 있기 전에 인간의 오염이 있었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 다시 말하면 죄가 노동의 의미를 바꾸어 놓았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속과 노동
타락한 인간은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구속함을 받았다. 이것은 또한 인간의
노동에서도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되었다. 인간이 타락했을 때에는 노동이 하나님 없이 내 욕심을 위해서 또는 죽지 못해서 하는
고통스러운 노동이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재창조함을 얻은 그리스도 인들의 노동은 자연히 예수그리스도의 구원의 은혜에 감사
감격하여 기쁨으로 일하는 것이 되었다. 같은 일인데도 죄 가운데 살 때의 노동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속함을 받은 후의 노동은
그야말로 하늘과 땅 같은 차이가 나게 된 것이다. 예수그리스도의 구속이 우리의 모든 분야에 미치듯이 노동의 의미도 달라진 것이다.
노동은 저주가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이며 하나님의 부르시는 소명이다. 노동을 통해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칼빈주의자들의
노동관이다. 칼빈은 노동을 기독교적인 삶과 엄격히 관련시켰다. 그는 복음이 노동을 하나님의 일에 참여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음을
강조했다. 그러므로 노동은 신앙생활의 또 다른 표현이 될 수 있다.
노동의 윤리
하나님의 면전에서(Coram Deo) 사는 것이 노동윤리의 표준이다. 노동하고 일용할 양식을 먹음으로서
하나님의 창조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 된다(살후 3:10). 노동을 하고 일용할 양식을 얻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깨끗하고 정직하게
사는 것이다(살전 2:12, 엡 4:28). 노동을 통해서 선한 일 곧 다른 사람에게 이웃사랑을 실천할 수 있게 한다. 노동과
직업에는 귀천이 따로 없다고 하나 비도덕적이고 반기독교적인 직업이 정당화 될 수 는 없다. 노동자와 고용주의 관계는 수직적 관계로
이해해서는 안되고 그들은 수평적인 관계로 놓으면서 수직적으로는 위에 다 하나님을 두어야 한다(엡 6:5-9).
(5) 칼빈주의 문화관
들어가는 말
종교와 문화는 우리 인간적 삶의 두 가지 차원이다. 양자를 피차 구분되나 서로 불가분적인 관계 속에 있다.
틸리히의 유명한 명제를 빌려서 양자의 관계를 표현한다면, “종교는 문화의 실체요, 문화는 종교의 형식이다.” 양자는 실체와
형식의 관계를 갖는다. 종교적인 정신이 저변에 없는 문화는 없다. 이렇게 볼 때 문화에 대한 기독교적인 답변과 대안은 무엇인가?
도대체 문화를 어떻게 정의하고 이해해야 하며 문화의 유형은 어떤 것이 있으며 기독교적인 문화관은 무엇이고, 그 이념은 도대체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에 대하여 논하고자 한다.
문화란 무엇인가?
문화란 말은 “경작한다”“개간한다”(“to till” or “to Cultivate”)라는 뜻은
라틴어“Colore”에서 온 말이다. 이것은 땅을 가는 것뿐만 아니라 정신, 마음, 또는 감정을 도안하는 것이라는 의미도 지닌다.
넓은 의미에서 문화란 “도구, 언어, 추상적 사유의 체계를 사용하여 지식을 배우고 다음 세대로 전달할 수 있는 사람의 능력에
종속하며, 사고와 언어와 행위와 가공물의 형태로 구체화된 인간의 제반 행동 양상(文化)과 그 산물(文明)이다.”이렇게 볼 때
문화란 하나님의 피조계를 경작한 결과라고 말해도 그리 틀린 것은 아닐 것이다. 자연과 반대되는 개념으로 ∼생각과 ∼가치관이
표현되는 행위양식이 문화이다
문화의 유형
1. 분리모델
이는 사회의 구조에 참여하는 것을 거부하거나 문화 창조에 활동적인 노력을 하지 않음으로서 어떻게 해서든지 이 세상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온갖 시도를 다 포함한다.(EX : 터툴리안- 중세기 수도원 규정이나 소종파 운동)
2. 동일시 모델
이는 문화와 타협하거나 문화와의 긴장을 인정함으로써 삶의 구조에 참여하는 것을 옹호하는 모델이다. (EX :릿출을 중심으로 19C 자유주의 신학)
3. 변혁적 모델
이 모델은 삶의 구조란 복음을 통해 지금 여기서 또 궁극적인 역사의 목표를 통해서 미래에 변화될 수 있다고 믿는다. (EX :바울, 요한, 어거스틴, 칼빈, 카이퍼)
기독교적 문화 상대주의
1. 문화 상대주의 : 긍정
각 문화는 그 자체의 기준에 의해서만 평가되어질 수 있을 뿐 아니라 모든 문화는 상대적으로 가치 있고 인정해야 한다.
2. 윤리적 상대주의 : 비판
문화 상대주의는 윤리적 상대주의를 말하지 않는다. 즉, 반대한다. 윤리적 상대주의란 상황윤리(Situation Ethics)를 말하는 것으로 객관적 규범을 부정한다.
3. 절대적 문화 상대주의 : 비판
모든 문화에 대하여 어떠한 가치 평가나 판단도 가할 수 없다는 엄격한 중립적 입장을 표방한다. 즉, 인간주의적 세계관을 가진 자로 문화 상대주의를 절대화시키는 자들이다.
4. 기독교적 문화 상대주의
문화 상대주의를 공정하지만 기독교적인 문화의 긍극성을 주장한다 창조의 명령과 문화 인간 범죄로 문화의 부패성을 가져옴 인간 문화의 잠전성과 신율적 문화의 궁극성
기독교적 문화의 이념(理念)
1. 자율적 문화의 변혁
하나님을 떠나서 자기의 뜻과 의지에 따라서 살고자 하는 자율적 문화를 변혁하는 것이다. 이것은 무신(無信)사상에서 온 것이다. 인간의 자율(自律)을 강조하는 Humanism에서 온 것이다.
2. 타율적 문화의 변혁
타율적 문화란 초월자 내지 초자연적인 규범에 의해서 지배되는 문화이다. 이것은 초월적 신사상에 의해서 지배됨 이들은 은둔, 도피, 내지는 패배주의가 특징이다.
3. 신율적 문화 창조
신율적이란 신의 섭리와 뜻에 의해 지배되는 문화활동 등을 말하는 것으로 신율적 문화의 본질은
인간과 신, 그리고 우주와의 완전한 조화를 말한다. 그리고 신율적 문화의 전제는 인간의 변화 즉 중생 구원 및 성화이다. 즉 인간
됨으로부터 시작 가능하다.
마치는 말
기독교 신앙은 문화에 대한 하나님의 일반은총 창조명령을 인정한다. 기독교 신앙은 구체적인 역사와 세계 속에 문화를 변혁하고자 한다. 기독교 신앙은 신율적 문화를 지고의 이상으로 삼는다.
※ 참고문헌
김영한, 한국 기독교 문화신학, 서울: 성광문화사, 1992.
Niebuhr, H. Richard. 그리스도와 문화, 김재준역, 서울: 대한 기독교서회, 1996.
Webber, Robert E. 기독교와 문화, 이승구역, 서울: 도서출판 엠마오, 1984.
(6) 칼빈주의 예술관
칼빈주의와 예술
유물론과 합리론에 의하여 위축되어 있는 인간 마음이 자연스럽게 시들어져 가는 과정에 대한 해독제를
예술적 본능에서 찾는다. 냉랭하고 비종교적이고 실제적인 시대에 예술에 대한 이 헌신의 따뜻함은 우리 영혼의 많은 고상한 열망을
여전히 살아있도록 했다. 우리는 예술적 본능이 보편적 인간 현상이지만 민족 유형과 기후와 나라와 관련되면서 그 예술적 본능의
발전이 국민가운데 전혀 다르게 구분된다.
예술은 종교에서 가장 부요로운 동기를 이끌어내었다. 종교와 예술의 동맹이 종교적
발전 그리고 일반적으로 인간적 발전의 저급한 단계를 표상한다. 행정관과 성직자의 리더쉽 아래서 거대한 구조물의 막대한 비용을
부담하고 그것들을 꾸미고 장식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게 된다. 칼빈주의는 종교의 영역에서 국가의 권력을 부수었고 상당한 정도로
사제주의의 종언을 고하게 했다. 이 결과, 상징적 예배형식을 버리고 예술의 요구에 따라 화려한 기념물로 종교적 정신을 구현하기를
거부했다.
종교와 예술은 최고의 발전단계에 도달했을 때 독자적 실존을 요구한다. 칼빈주의의 더욱 고상한 노력은 종교와 신적 경배를 감각적 형식에서 점점 해방시키고 그 활기찬 영성을 고무시키는 일이다.
우
리의 지적, 도덕적, 종교적, 미적 생활은 자신의 영역을 요구한다. 이 영역은 평행선을 달린다. 물론 예술은 우리의 사유 방식이나
우리의 윤리적 본질보다 종교에 훨씬 가까이 결합되어있다. 전 포괄적인 예술 양식은 우리의 가정 내면적 존재에서 작용하는
무한자로부터 온 독특한 충동의 결과가 아니고는 일어날 수 없다.
칼빈주의는 오직 종교적 원리의 도움을 받아 일반적 예술 양식을 창출했으며, 칼빈주의가 종교적 발달의 훨씬 높은 단계에 도달했기 때문에 그 원리는 가시적 감각적 형상으로 이루어지는 종교의 상징적 표현을 금지했다.
예
술의 본성에 대한 어떤 해석이 칼빈주의에서 나오는가? 칼빈이 예술의 합법적 사용을 반대한 것이 아니라 격려하고 심지어 권장했다는
것은 그의 말을 보면 바로 입증된다. 그는 하나님이 예술적 본능으로 유발과 그의 후손을 희귀한 재능으로 부유케 하셨음을 선언한다.
그리고 그는 예술의 창조적 능력이 하나님의 관대하심에 대한 가장 분명한 증거임을 솔직하게 말한다. 칼빈에 따르면, 자연 생활의 이
고귀한 것들은 원래 성령님 덕택이다.
예술은 저주에 의한 삶과 자연의 부패를 막는다.
우리의 오락과 향유를 위하여
베푸신 하나님의 탁월한 호의 가운데 예술은 칼빈의 마음에서 가장 놓은 자리를 차지한다. 예술을 자연에 대한 단순한 모방으로 결코
보지않고 이 죄악되고 부패한 세계가 우리에게 주는 것보다 높은 실재를 인간에게 열어 보이는 고상한 소명을 칼빈이 예술에 돌렸다고
말할 수 있다.
예술은 이 죄악된 세계가 제공하는 것보다 높은 실재를 우리에게 제시한다. 예술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마음대로 이용하도록 하신 은사를 드러내는데, 이제 죄의 슬픈 결과로서 참으로 아름다운 것이 우리에게서 달아나 버렸다. 예술은
잃었던 아름다움의 산물로 우리에게 그 완전한 장차의 광채를 기대하게 하는 신비한 과제를 갖고 있다. 예술적 능력, 예술적 재능
자체가 인간 본성에 자리잡을 수 있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을 받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신의 예술
양식이 없음이 칼빈주의에 대한 반론이 되기는커녕 반대로 칼빈주의의 점더 높은 발전 단계를 가리킨다는 것을 발견했다. 중세의 학문과
예술은 교회의 보호를 받지않고는 번창할 수 없었다. 그리고 여기서 특별히 기독교적인 예술이 생겼다.
종교는 좀더 높은 영적 수준으로 올라간 다음 생명을 불어넣는 호흡이 온 세상을 활기있게 하도록 상징적인 옷을 벗어던져야 했다. 그것을 최초로 파악한 것이 칼빈주의이다.
이스라엘이 종교를 위하여 택함을 받았다면, 이는 그리스도인이 철학의 영역과 예술의 계시를 위하여 똑같이 선택받은 것과 로마인이 법률과 국가의 영역에서 고전적인 발전을 위하여 선택받은 것이다.
르네상스는 칼빈주의에 죄악된 영향으로 제시되지않고 하나님이 정하신 운동으로 제시되었다. 예술은 학문이나 정치나 종교 생활이나 심지어 계시가 비출 수 없는 창조의 규례를 드러낸다.
칼
빈은 예술과 학문과 종교를 나누지 않는다. 그가 원하는 것은 이 세가지 핵심적 세력 모두가 모든 인간 생활에 침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인생의 단일 부분을 무시하지 않고서 자신의 찬란한 세계로 종교를 포함한 인간 생활의 전체를 받아들이는 예술이 있어야
한다.
예술에 관한 칼빈주의의 공로는 인간 마음에서 자발적으로 일어나는 좀더 주관적인 예술에서만 공로를 발견할 수 있다.
그림 : 16-17세기에 솔과 조각침으로 만든 화란의 작품들, 칼빈주의의 보호를 받아 후대 민주주의 생활을 예언하는 그림
예술은 맨 처음으로 국민의 성숙성을 선언했다. 이제 하나님이 자신을 위한 짐꾼과 노동자를 어떻게 택하셨는지 보면서 예술가는 세상
사람의 머리와 모습과 전체 개성에 관심을 가질 뿐만 아니라 모든 계급과 지위에 대한 인간적 표현을 재생하기 시작했다. 교회 권력은
더 이상 예술가를 속박하지 못했으며 왕의 황금이 예술가를 더 이상 족쇄에 채우지 못했다. 칼빈주의가 열방의 마음에 일깨웠던
사람들의 성숙성과 자유사랑에 대한 선언으로 말미암아, 일반적이지만 풍부한 생활이 예술에 전혀 새로운 세계를 열었다.
음악 : 그레고리우스의 평범한 성가가 지배적이었다. 교회만이 음악을 만들 수 있는 특권을 가졌으며, 반면에 백성들이 만든
것은 예술의 위엄에 끼지 못하는 것으로 무시되었다. 소예배당에서도 백성들은 거룩한 음악을 듣기만 했지, 찬송에 참여하지 못했다.
그래서 예술로서 음악은 독립된 위치를 거의 갖추지 못했다. 그러나 칼빈주의는 전통 성악에 얽매었던 줄을 끊고 대중의 선율을 뽑아
썼으며 신자 일반의 제사장됨의 개념을 가지고 모든 이의 음악이 되게 했다. 후대에는 칼빈주의가 음악에서 그 지위를 잃었다.
(7) 칼빈주의 학문관
칼빈주의적 학문의 자세
칼빈주의자는 학문을 함에 있어서 절대적으로 새 것을 발견하려고 하기보다는 하나님의 해석을 확인하기 위하여 자신을 하나님의 창조 속에 맞추어간다.
따
라서 자기의 기술과 함께 자신의 지식의 한도를 깨달음으로써 하나님을 계속적으로 의지하면서 활동을 지속한다. 하나님의 도움을
바란다고 해서 과학적 연구의 일반적인 방법을 무시한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전공분야에서 증명된 최신의 기술을 이용하되 자신의
과오의 가능성을 깊이 자각하고, 또 진리의 성령이 객관적으로 정확하게 지켜줌으로 더욱 깊은 원리까지 알 수 있게 하실수 있다는
것을 확신한다. 칼빈주의는 주권적이고 인격적인 창조주, 구속주 하나님이신 것을 고백함으로 시작하여 이 우주가 합리적 세계라는
확신을 갖고 마친다. 참된 과학적인 진전은 신을 전제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과학이 '하나'의 우주를 전제로 하고 있으며, 이
우주가 '우연'의 소산이 아니고 '확고한 질서'에 따라서 '하나의 불변의 경륜'을 목표로 '하나의 원리'로부터 존재하고
발달해왔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이는 칼빈주의적인 신앙과 일치한다.
이원설 교수는 신앙과 학문을 이분법적으로 나누어서 생각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을 학문의 세계에서도 인정하고 '하나님
중심 사상'으로 학문연구를 재조명하자면서, 이 '하나님 중심 사상'으로 학문을 연구하면 숭배 대상이 아닌 이해의 대상인 자연의
원리를 관찰함으로 자연과학의 실험연구 발전에 큰 이익을 주게될 것이라고 말한다.
카이퍼는 신앙과 과학 사이의 대립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오히려 모든 과학은 어떠한 신앙으로 출발한다고 보고, 과학의 대립이 우주가 정상적 상태인가 아니면
비정상적인 상태인가 하는 '상태론'과 '변태론'의 문제에 있다고 지적한다. 그에 따르면, 모든 학문하는 사람들은 이 두 세계관으로
나뉘어서 다투고있는 것이다. '상태론자'는 자연적 논거를 통해 모든 현상의 동일한 해석을 발견하기 위하여 원인과 결과의 논리적
추론을 시도한다. 따라서 이들은 실질적으로 창조의 관념을 거부하고 단지 진화론만을 승인한다. 철저하게 자연적 논거의 권내에
국한시켜 출발점과 끝이 모호한 영원하고도 끝없는 진화를 숭배한다. '변태론자'는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반영하는 독립적인 종이며
죄에 의해 인간 본성이 파괴되었으며 이런 비정상적인 상태를 회복하기 위한 유일한 수단으로 기적을 요구하며 주장한다. 따라서 자연적
논거에서 이상적인 규범을 찾을 수가 없어서 하나님 가운데서 발견하고자 한다. 한편, 상대적 진화론을 공정하게 평가한다. 이
대립은 출발점이 근본적으로 다른 평행선처럼 계속적으로 투쟁하여야 할 대립이다. 따라서 칼빈주의자는 이 대립의 본질적인 문제로서
'인간의식'을 명확하게 파악하고 있어야한다. 모든 학문의 전제는 인간의식의 문제이다. 칼빈주의자는 다음과 같은 의식을 가진다.
즉, '죄의 의식', '신앙의 확실성', '성령의 증거' 등이다. 저들은 이를 부인한다. 오직 동일한 의식만을 강요한다.
인간의식의 다양성을 말하는 우리들에 대한 저들의 태도는 곧 저들의 논리적 모순됨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우리들의 자세는
상태론자들의 과학적인 자유를 논파하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의 과학적 자유와 권리를 지킨다. 그들이 우리를 공격하고 압도하는 것을
피할 수 없다. 그들이 우리와 다른 의식을 갖는다고 해서 그들의 자유를 빼앗을 수 없다. 우리는 저들의 정력과 철저성을 자극으로
받아들이고 자신의 신앙과 원리로 돌아가 자신의 책임을 심각하게 느끼는 자세를 가져야한다. 다른 분야는 저들의 손에 맡기고 신학만
파수하겠다고 하는 생각은 타조의 어리석음과 같다. 결코 안전지대는 없음을 알고 우리의 학문적 자세를 모든 분야에서 기본적인 의식과
원리를 가지고 주신 사명을 감당한다는 책임감으로 무장해야 한다고 카이퍼는 강하게 주장한다.
칼빈주의적 학문연구에 있어서 성경적인 개혁사상이 기초가 됨은 명확하게 논증되었다. 이어서 제기되는 문제는 개혁사상을 학문의 전제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이성에 의함인가 아니면 신앙에 의함인가 하는 것이다.
미터가 성경을 진리로 받아들이는 세가지 방법에 대한 비교는 우리의 논의에 해결점을 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1)비교종교학적인 방법
각
종 종교를 비교 검토하여 참된 종교를 결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결정 위해서는 어떤 표준을 사용해야만 한다. 기독교 국가권에
속한 자라면 기독교가 무비의 종교라 할 것이다. 이 방법은 상당히 주관적인 요소의 개입이 크기 때문에 그다지 신빙성이 크다고 할 수
없다.
(2)기독교 변증론과 증험론적 방법
기독교가 참 종교라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전개가능한 모든 논증을 찾는다.
변증론적 논증은 신자 자신에게 자기 신앙의 합리성에 대해 충분한 근거를 제공한다. 그러나 최후의 결정은 개인 자신의 이성적
평가에 의존하므로 의견의 많은 갈랫길을 갖게됨을 피할 수 없다. 따라서 절대 유효한 논증이 되게 하지는 못한다.
(3)신앙적 방법
신
앙은 합리적 논증에 기인하지 않는다. 합리적 논증을 가지고 성경이 하나님 말씀이라는 결론에 이른다고 할찌라도 그것은 기껏해야
역사적 신앙을 알게할 뿐 구원의 신앙에 이르게 할 수는 없다. 구원신앙은 성령의 증거를 통하여 영혼에 새겨져 확신에 이르게 한다.
성령께서 우리의 이성을 밝혀 사물을 보게한다. 즉, 새로운 통찰력으로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게한다고 하겠다. 그러나,
여기에도 합리주의적인 생각이 숨어있다. 곧, 밝혀진 이성으로 증명할 수 있는 것을 믿는 자가 된다고 하는 것이다. 신앙은
직관적이다. 곧, 추리적 이론을 거쳐서얻은 결과인 확신이 아니라, 직접으로 영혼에 오는 확신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렇게 말할
때에도 역시 이성적임을 배제할 수 없다. 구원신앙은 어떤 진리에 대하여 지적으로 승인하는 이외에 인격적 신뢰의 요소를 포함한다.
신앙 그 자체는 하나님께 근거한다. 성령의 증거는 성경 이외에 하늘에서 어떤 새로운 계시나 생각으,ㄹ 주는 것이 아니다. 성령께서
신자로 하여금 성령의 힘을 체험케 함으로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 하게 하는 것으로 성립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성령께서
신자로 하여금 그의 밝혀진 이성과 합리적 논증의 결과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결론을 내리게하는 것으로도 성립되지 않는다. 오직
성령께서 신자로 하여금 성경 자체가 소유한 신적 권위를 자유롭게 또는 자발적으로 승복하게 하는 것이다. 이 신적 권위가 그
신자에게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복종하게 만든다. 성령이 신자의 영혼에 신성성을 인쳐놓는 것이다.그 다음에 신자가 그러한
확신의 힘에 의하여 성경을 참된 것으로 인정한다. 그 확신의 근거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우리는 솔직하게 말한다. "모른다."
성경의 초이성적인 부분은 성령에 의하여 밝혀진 이성이 그것들을 참되다고 증명하기에 믿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하나님의 말씀에
가르친 대로 그렇다'는 하나님의 증거 때문이다. 이러한 신앙고백이 우리에게 있었기 때문에 학문연구는 가능하고 성경적인 개혁사상이
그에 기초가 되고있음을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학문적 자세
(1)학문은 기독교를 이해하며 보수하기 위해서 필요하다.
(2)학문연구에 있어 성령의 힘에 완전히 의뢰한다.
(3)모든 재능, 능력이 성령의 선물임을 알아야 한다.
(4)학문연구는 하나님의 영광을 더욱 빛나게 하기 위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5)지식의 전분야는 그리스도인의 연구와 탐구를 고대하고 있다.
(6)하나님의 창조, 보증, 구속하신 실재를 이해하는 것은 사람의 본분이다.
(7)학문이 자신에게 법칙처럼 자신의 본성을 잃게해서는 안된다.
(8)하나님의 생각에 따라서 성경과 창조, 역사에 계시된 신의 생각을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