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1-07-21 11:18
 조회 : 12,410
|
우리는 흔히 요가하면, 매스컴에서 보여준 이미지대로, 건강하고 날씬해 보이는 여자가 책상 다리를 하고 앉아 호흡을 하거나, 스트레칭을 하는 모습을 연상하게 된다. 그래서인지 많은 사람들이 요가를 체조 같은 단순한 신체 운동으로 착각하는 우를 범하는 것이다.
하지만 요가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백과사전은 바크티요가(감정순화에 의한 헌신獻身의 요가), 지나나요가(이성 개발에 의한 지식의 요가), 라자요가(심리적 통제에 의한 심신과학의 요가), 카르마요가(사회활동에 대한 행동규제의 요가), 탄트라요가(욕정통제慾情統制에 의한 육신해방의 요가), 하타요가(음양조화陰陽調和에 의한 심신조화의 요가) 및 신경력을 개발하는 쿤달리니요가와 발성(發聲) 통제를 통한 만트라요가 등이 있다고 소개한다.
이 가운데 오늘날 한국 사람들이 주로 배우고자 하는 요가는 「하타요가」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몸으로만의 하타요가를 배우고자 할 때에도 우리는 결코 거기에만 머무를 수 가 없다. 그 기본 및 궁극적인 정향성은 결국 영성(靈性) 혹은 종교성(宗敎性)이기 때문이다.
『요가란 단순하게 몇 가지 동작만을 가르치거나 체형을 교정하는 기술만 배우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건강과 영혼을 맑게 만드는 영적(靈的)인 귀감이 되는 진정한 스승(구루)이 되시기를 권유하는 것입니다』(홍익요가연구원)
실제로, 한국에 퍼져있는 요가 협회들의 설명을 들어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들이 나온다.
-『요가는 모든 종교의 핵심인 명상을 수행의 중심으로 하기 때문에, 붓다, 예수, 마호메트, 선승 등의 깨달음, 계시, 신통력 등이 모두 요가 즉 명상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요가 코리아)
-『요가의 입장은 사람을 처음부터 죄를 저지른 존재(原罪說)로 보지 않고, 자기를 더럽게 보기(不淨)의 입장이 아니며, 이 세상을 환상(maya)으로 보지 않는다』(요가라이프)
-『요가는 의타적 자세가 아니고 스스로 괴로움의 원인을 찾아내어 새롭게 배우고 깨치는 자기 믿음의 길이고 자신과 주변에 대한 이해의 길이다. 요가는 예속된 종의 길이 아니고 자유로운 주인의 길이며, 저 세상으로의 도피적 태도와 사후 지옥에 대한 공포의 태도가 아니고, 이 세상에 대한 탐구와 인간 스스로 해결을 짓는 창조적 성장의 길』이다.(요가라이프)
여기서 우리는 예수를 다른 종교창시자처럼 요가명상가로 보는 점, 인간의 죄성을 부인하는 점, 자력구원을 내세우며 하느님을 불필요한 존재로 만든다는 점 등이 그리스도교 신앙과 정면으로 대치되는 요소들이라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제대로 된 신앙인이라면 자신 안에 저런 사유방식들과 그리스도교 고유의 신앙이 조화를 이루며 공존할 수 있다고 여기고 통합을 도모할 수는 없는 일이다. 이는 영적 만용이다. 물론 비슷한 것들이 있다. 하지만 영성에서만은 뜻대로 되지 않는다. 공통의 것들만 모으려 해도 그것이 뜻대로 되지 않는다. 반드시 차이점들이 따라와서 충돌하고 말썽을 부리게 되어있다. 그래서 종교에서 혼합주의(syncreticism)는 금물인 것이다. 이를 어긴 이들이 바로 사이비 종교의 교주들로 불리고 있는 것이다.
이 단계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면, 요가의 모체인 힌두교 신앙 안으로 들어가게 되어 있다. 알려져 있듯이 힌두교는 기본적으로 3억 3천만여 신을 숭배하는 다신교를 배경으로 생겨났다. 힌두교는 승려를 정점으로한 엄격한 계급주의(카스트제도)와 나중에 불교의 기본개념이 된 업(業), 윤회(輪廻), 그리고 고행(苦行) 등을 핵심교리로 삼고 있는 종교이다.
오늘날과 같은 종교간 대화의 시대에 필자는 결코 「그것들은 틀려먹었다」고 공격적으로 말하고자 하지 않는다. 이것은 그들의 신앙이라고 인정한다. 다만 이것들이 그리스도교 신앙인 안에서는 공존할 수 없는 신앙요소들이라는 점을 지적하고자 하는 것이다. 만일 그리스도교 신자가 자신 안에 저런 신앙요소를 받아들이게 된다면 그 때는 문제가 안 될 수 없다.
가톨릭 신자인 경우를 가정해 보자. 어떻게 「업」(숙명, 팔자소관, 자기잘못은 스스로 책임질 것 등)을 수용하면서 「고해성사」를 볼 수 있으며, 어떻게 「윤회」를 믿으면서 동시에 「부활」을 믿을 수 있으며, 어떻게 「고행」을 중히 여기면서 「은총」 신앙을 견지할 수 있으랴. 그것은 괜한 욕심일 것이다.
이는 결국 무엇을 말해 주고 있는가? 이는 요가의 이론 체계에 깊이 빠지면, 반드시 갈등이나 혼란에 처하게 되어있고 궁극적으로는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기로에 서게 되고 마침내는 「떠나느냐 남느냐」의 선택 앞에 서게 된다는 사실을 얘기해 주고 있는 것이다. 혹시 『요가를 깊이 배우고도 가톨릭 신앙생활 잘만 하더라』라고 반문할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다. 이런 분에게 필자는 묻고 싶다. 그것이 정말 「깊이」 였을까? 그것이 정말 예수님이 원하는 「신앙」일까?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