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1-10-14 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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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 살펴본 히브리서 본문의 맥락에서, 성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사랑하고, 교제하고, 돌아보는 일에 명령을 받았다. 이러한 영적 교제와 격려의 상황들은 교회에서 모이는 집회를 통해 성취되는 것이므로, 비록 모임을 가지라는 것은 명령이 아니고 권고라 하더라도, 모이기를 폐할 수 없다.
다른 성도의 궁핍과 부족함을 외면하는 것은 성경적 교회가 지향할 목표라고 할 수 없다.
교회가 모임을 갖지 않으면, 우리의 재림 신앙과 하나님 중심의 삶은 황폐한 상태로 변질될 것이다. 반대로 어떠한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경건한 모임을 갖고 간절히 기도하는 자기 백성들을, 하나님께서는 마냥 고난과 슬픔 속에 버려두시지는 않는다(히브리서 13:5).
우리 성도들 사이에서도 교회의 다른 동료들을 무시하거나, 그냥 간과할 수 없다. 우리는 교회 안에서 다른 성도와 의견이 심하게 차이가 나거나, 서로 느끼는 감정이 크게 차이가 난다 해서 교회를 떠나버리는 행위를 금해야 한다. 이것은 너무나 개인주의, 이기주의, 자아집착이기 때문이다.
교회에 속한 성도들이 다른 성도에 대해서 무관심 하는 것은 하나님에게 거역하는 행위이자, 배교 행위와 같은 것이다.
히브리서 10장 25절에 나오는 ‘모임’은 과연 무엇을 위한 집회인가? 여기에 ‘교회’라는 단어, ‘에클레시아’가 사용되지 않았음에 유의해야 한다.
성도들에게 참석하도록 격려하는 모임은 아마도 각 지역 회당(synagogue)에 속한 기독교인들의 추가적 집회와 모임이라고 해설하는 주장도 있다.
이미 문맥에서 채택된 단어를 검토하면서 교회라는 단어가 없으므로, 혹시 회당에서 즉 아직은 교회로는 완전하게 차별화된 모임이라고 주장하는 학자가 있다. 어쩌면 초대교회의 모임은 회당 주변에서 모이던 작은 공동체의 회합일 수도 있을 것이다.
사도행전에서 자주 언급되듯 초창기 교회는 이방인들의 지역에서 다양한 형태로 발전하였고, 흩어진 유대인들이 모이던 회당과 같이 작은 모임을 통해서 발전하였다. 주후 70년경, 예루살렘이 무너진 후, 가이사랴, 안디옥, 에베소, 로마 등 사도들은 여러 형태의 초대 교회를 건설해 나갔다.
사도 바울은 수없이 회당에 들어가서 전도했었다. 초기 형태의 교회가 자리를 잡아갈 무렵, 유대인으로서 기독교인이 된 성도들은 회당에 모였을 것인데, 아마도 각 지역에서 교제의 모임을 가졌을 것이다.
유대인들의 ‘회당’이라는 장소도 역시 오늘날로 말하자면 유대인들의 지역별 종교집회소였는데, 초대교회의 예배당 규모는 이들보다 훨씬 적었다. 이방 지역에 살던 유대인들 상당수가 사도 바울처럼 기독교인으로 개종했을 것이다.
그러나 초대교회의 배경과 당시 상황에 근거하여, 히브리서 10장 25절에 나오는 모임이라는 것을 이렇게 회당 집회 이후의 소그룹 모임으로 해석할 때에도 명확하게 설명되는 것은 아니다.
이런 집회 장소로 사용되었으리라 추정되는 ‘회당’이라는 단어도 역시 여기 본문에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또 초대교회는 회당과는 정체성이 완전히 달랐다. 그 두 그룹은 서로 본질상 완전히 다른 공동체였다.
히브리서 10장 25절의 모임을 ‘가정집에서 모이던 교회의 집회’, ‘가정교회(house church)’로 해석하는 신학자도 있다. 비록 초대교회 시대에는 교인들의 규모가 아주 작았을지라도, 또한 그들이 모이던 장소도 역시 비좁고 열악한 곳이었더라도, 혹 신앙심이 돈독하면서도 약간 넉넉한 중산층의 집이었을지라도,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 공적으로 인정된 장소였을 것으로 본다.
초대교회는 ‘가정교회’였다. 사도 바울은 “아시아의 교회들이 너희에게 문안하고 아굴라와 브리스가와 및 그 집에 있는 교회가 너희에게 간절히 문안한다”고 하였다(고전 16:19). 로마서 말미에서는 “그들 집에서 모이는 교회”에도 문안했다(롬 16:5).
초대교회 시대에는 수천 명, 수만 명이 모이는 대형교회는 없었다. 그래서 브루스 박사도 또 다른 해석의 가능성으로 ‘가정 교회’의 모임일 수 있다는 여지를 열어놓았다.
각 지역마다 여러 곳에 흩어져 모이던 작은 교회들이 있는데, 일부 성도들은 각기 다른 지역에 모이던 모임을 무시해버리는 경우가 있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다행스럽게도 교회의 초기 역사를 증거하는 자료들을 많이 가지고 있다.
예루살렘에 세워진 최초의 교회도 마가라 하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에서 모였다(행 1:13). 예루살렘 교회는 베드로의 체포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기도하였는데, 그가 석방된 직후에 제일 먼저 찾아간 곳도 역시 그 작은 교회였다(사도행전 12:12).
가정에서 모이는 교회는 비록 작지만, 이처럼 강력한 힘을 발휘했다. 두 세 사람이 모여서 기도할 때에 하나님의 놀라운 응답을 체험하였다.
초대교회가 가정에서 모이는 경우에, 가정 교회는 숫자는 대략 오십여 명 안팎으로 추정할 수 있을 것이다. 어느 가정의 헌신으로 마련된 예배와 기도의 집회 장소들에 모여서 서로 돌아보면서 격려하고, 소속된 성도들끼리 긴밀한 연대를 갖고 있었다.
비록 건물은 웅장하지는 않았지만, 각 도시마다 은혜를 입은 성도가 제공하는 가정교회가 왕성하게 세워지고 있었다.
여러 곳의 작은 가정에서 모여 차츰 구체적으로 형성된 초대교회의 본질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는 신앙에 기초하였다.
그 도시 안에 거주하는 성도들 사이의 교제와 연대의식이 매우 긴밀하였다. 때로는 전체가 큰 규모로 모여서 예배와 교훈을 듣기도 했을 것이다(사도행전 5:12, 19:9).
가정교회 집회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일은 하나님을 향한 예배였다. 예배는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는 일에 초점을 두고 시행되는 경배의 시간이다.
하나님께서는 예배하는 자를 찾으신다. 따라서, 예배는 철저히 하나님 중심적이다. 또한 이렇게 예배로 부르시는 가운데서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에게 은혜와 복을 내려주시고자 하심이다(히 11:6). 예배에 참석한 성도가 생명의 은혜를 입게 되는 경건의 체험 현장이기도 하다.
참된 성도는 교회에서의 예배로 나아가 함께 경배를 올리는 모임을 포기할 수 없다. 히브리서에서 지적한 바, 아주 오래전부터 거짓 신앙을 가진 자들은 함께 모이는 성도의 교제와 공적인 예배 모임을 포기해 버렸다.
교회 안에서의 교제는 하나님과의 만남이라는 수직적인 차원과, 동료 성도들과 만남을 통해서 수평적 교제로 이뤄진다.
성도는 세상 속에서 살아가고 있지만,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 아니다. 이 땅 위에 살아가는 동안에 육체의 더러운 것과 인생의 자랑과 안목의 정욕으로 휩싸여 있다.
성도는 이런 것들에 빠진 자들과 확고하게 단절해 버리고, 오직 믿음을 가진 자들과 교제를 통해서 하늘나라의 위로와 상급을 소망해야만 한다.
믿음의 공동체는 사탄의 계략 때문에 거짓 교훈들로 속임수에 넘어가기도 하고, 함정에 빠지기도 하고, 심각한 위험에 처하기도 한다. 이단들이 감언이설로 속이는 자들에게 넘어가기도 한다.
성도들은 영적인 성장을 하지 못하고 침체에 빠지거나 영적인 무력증에 휩싸일 수도 있다. 불신앙의 미혹에 넘어가게 되면 처음 사랑을 잃어버리거나, 은혜의 감격이 소멸되는 것이다.
이런 자들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모임에 참석하지 않는데, 이런 것들이 습관적으로 되어 버린 자들도 있다.
주님의 재림이 가까이 올수록, 이러한 이유들로 인해 교회에 모이는 집회를 멀리하는 자들이 늘어날 것이다. 주님께서는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라고 탄식하였다(눅 18:8).
초대교회의 모임은 이러한 주님의 경고를 기억하고 깨어 있으면서, 믿음을 강화하는 일에 최선을
3. 예배자들에게 내리시는 생명의 양식
왜 모이기를 힘써야 하고, 그 모임은 무엇을 위한 것인가?
예수님께서는 교회와 함께하시는 성령님을 통해 은혜를 부어주신다고 약속하셨다. 성도의 삶은 교회 공동체 안에서 일평생 동안 경건의 교육을 받아야 한다. 성도는 교회의 머리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연합되어 있기에, 교회 밖에서는 그 어떤 경건의 진보라도 이룰 수 없다.
경건한 성도로 우리가 장성하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설립된 교회와 관계를 맺어야만 한다. 믿는 자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연합되어 나가는 모든 일들은 교회 안에서 이루어진다.
그 누구도 개인적인 경건생활로 이룩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성도는 눈에 보이는 지역 교회를 통해서 자라나고, 양육을 받는다.
다음 3장에서도 우리는 하나님의 특별한 임재를 살펴볼 것이다. 교회는 예배 공동체로서 부름을 받은 성도들의 모임이다.
성경의 전체 교훈들을 구조적으로 연결하여 보면,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고 경배하는 일이 사람의 임무로서 가장 강조되어 있다. 혼란된 인간의 삶 가운데 하나님을 향한 예배자로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빛과 생명을 찾아서 문제를 해결하는 첩경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생명과 호흡을 가지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인간의 기술과 문명이 번성해서 첨단 산업을 발전을 도모하여 엄청난 재화를 만들어낸 후에는 어떻게 될 것인가? 영원한 제국을 건설할 수 있을까?
결국 모든 인간은 죄악된 문화와 향락에 젖어 정신없이 살다가 멸망하게 될 것이다. 지나간 역사와 문명사가 보여주듯, 이집트 문명, 헬라철학, 로마 제국에서 이미 보았고, 히틀러의 광란적인 독재 정권도 몰락했다. 하나님을 거부하는 현대인들의 광란적인 도모들은 결국 처절한 진노를 초래할 것밖에는 없다.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를 싫어하는 자들은 마지막 날 영원히 멸망하게 되는 것이고, 반대로 은혜를 입은 자들은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찬양하면서 감격스러운 영생을 얻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성도에게 지금 가장 중요한 일이 무엇인가를 잊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을 기억하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영광을 올리며, 그의 인도하심에 따라가야만 하는 것이다.
이런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의 이야기들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이미 성경을 통해 제시된 엄청난 은혜의 역사를 기억해야 한다. 성경은 유기적 영감을 받은 인간 저자들이 기록을 했기 때문에, 구속역사를 다루는 연속성과 다양성이 풍성하고도 분명하다.
성경의 권위를 부정하고, 계시된 가르침을 벗어난 사람들의 제안들은 결코 믿을 수 없다. 하나님으로부터만 구원하시는 진리이자, 거룩하게 하는 진리가 나온다.
예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당신의 말씀은 진리니이다”고 기도했다(요 17:17). 우리가 구원을 얻은 믿음의 공동체를 벗어나서는 결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질 수 없다.
1) 경배를 받으시는 하나님의 엄중한 지시들
우리가 땅 위에 있는 어떤 교회에 모여 공적인 집회로 드리는 것은 그 예배장소와 관계없이 하늘나라에 연결되어 있다. 승천하여 지금도 우편 보좌에 앉으사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는 주님에게 속한 공동체이다.
히브리서 12장 18-21절에 설명된 바와 같이, 지상의 교회가 드리는 예배는 온 우주 만물의 통치자에게 올리는 것이요, 하늘에 속한 천상 공동체로서의 예배에 연결되어 있다.
지상의 교회는 아직 완전하지 못하다. 땅 위에 있는 교회의 모임은 온전한 모습을 갖추기 위한 노력을 멈출 수 없다.
세상의 모든 지역에 있는 다양한 형태의 교회들은 여전히 부족하고, 문제가 많고, 죄악에 물들어 있지만, 전능하신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께서 보살피고 계신다.
신실한 예배는 반드시 성경이 가르치는 교훈들로 구성되고, 진행되어야 한다. 사람들이 인터넷에 연결되어 가상공간에서 예배를 드린다고 주장하는데, 과연 이것이 하나님에게 열납되고, 응답이 주어지는 신실한 믿음으로 올리는 경배요, 참된 예배가 될 것인가?
온라인 예배를 드린다고 하는 사람들은 너무나 예배를 쉽게 생각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사람들이 편리하다 해서, 또한 크게 흥행하는 방법이라 해서 다 하나님께서 받아주신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산이다.
예배의 성공 여부를 판단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목숨을 다해서 예배하고 경배하기를 원하신다.
주일 오전에 예배를 드려야만 하나님께서 받으신다는 주장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오해하지 마시라. 다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참된 예배의 본질이 무엇이냐에 대한 것이다.
바른 예배는 하나님께서 친히 지시하신 방식에 따라서 올리는 것이다. 사람들이 마음대로 조절하거나, 그저 적당히 시간을 때우는 예배가 얼마나 허망한 행동인가를 알아야 한다.
예배란 매우 엄중한 행동을 포함하는 것임을 성경이 강조하고 있는데, 결코 우리가 이런 내용들을 가벼이 생각하거나 쉽게 잊어서는 안 된다.
창세기 35장 7절에서, 야곱의 예배행위는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내용 안에서만 예배하여야 함을 강력히 제시하여 준다.
레위기 10장 1-3절에서는 아론의 아들들, 나답과 아비후가 하나님께서 지정하시는 방법대로 불을 사용하지 않았다가, 즉석에서 죽임을 당했다.
이사야 1장 12-13절을 읽어보라.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성경에 적극적으로 권고하는 내용들이 아니라면, 우리는 예배 시간에 그런 내용들을 포함하지 말아야 한다.
인터넷 교회에서의 예배는 실제적으로 지역 교회에 나가서 드리는 예배에 연결해야만 하고, 모든 우선순위를 지역교회 예배로 돌려야 한다.
특히 선지자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참된 예배, 순종하는 예배, 진지한 예배를 드리도록 촉구하신다. 그러나 위대하신 하나님께서는 형식적인 모임과 제사를 받지 않으셨다.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모여도 결국 헛된 예배가 되고 말았다.
“내가 너희 절기들을 미워하여 멸시하며 너희 성회들을 기뻐하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내게 번제나 소제를 드릴지라도 내가 받지 아니할 것이요 너희의 살진 희생의 화목제도 내가 돌아보지 아니하리라 네 노랫소리를 내 앞에서 그칠지어다 네 비파 소리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암 5:2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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