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함에 대하여
친구에게서 카톡이 왔다. 하나님에 관한 질문이다.
"사울을 왕으로 세운 것이 후회된다. 그가 나에게서 등을 돌리고, 나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다."
하나님이 후회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하나님이 후회하신다면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것이 아니지 않느냐는 것이다.
사실 친구만의 의문이 아니다. 오늘날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 대부분이 마음속에 품고 있지만 후환(?)이 두려워 던지지 않는 질문이다. 교인들이 학습이 되어 있는 것이다. 목사에게나 교회에서 질문을 하거나 대답을 하면 자신의 무지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것이 아니더라도 덥석 질문에 대답을 하면 여지없이 틀린다는 것이 경험으로 쌓여있기 때문이다. 친구가 내게 이 질문을 한 것도 그런 망신을 당하지 않고 비교적 안전하게 답을 들을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을 것이다.
사실 나도 목사이기 때문에 전적으로 안심할 수는 없다. 목사라는 직업은 이 시대 개신교 그리스도인들에게 깡패처럼 되었다. 힘과 권위로 지배하고 다스리는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개신교 그리스도교의 슬픈 자화상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것이다.
어쨌든 나는 친구의 질문이 바로 인간을 로봇이 아니라 사랑의 대상으로 창조하신 이유이며 인간에게 절대적 자유의지가 주어지게 된 배경이라는 대답을 했다. 거기에 덧붙여 절대적 자유의지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인식이 있을 때 책임 있는 사랑의 대상으로서 자발적이고도 열정적인 신앙의 삶이 가능해진다는 말도 적어 보냈다.
인간이 인간인 것을 여러 다른 각도에서 찾을 수 있다. 인간만의 고유한 특성들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목사인 나는 신앙적인 측면에서 ‘자유의지를 지닌 사랑의 대상’이라는 점을 늘 강조한다. 이에 대한 인식이 바르게 되어 있으면 세파에 흔들리지 않을 수 있다. 아무리 돈이 없어도, 아무리 병들었어도 하나님의 사랑의 파트너로서 그 사랑을 완수할 수 있는 기회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사랑은 혼자 하는 것이 아니다. 일방적인 사랑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온전한 사랑이 아니다. 사랑은 언제나 상대방의 자유의지에 의해 온전해진다. 그래서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이 인간과의 사랑 앞에서 유보된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이 하신 말씀이나 결정을 철회하시기도 하고 친구가 질문한 것처럼 후회하시기도 한다. 다만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은 어떤 경우에도 그 결과를 선으로 만드실 수 있다. 그게 그거 아니냐고 묻고 싶은 사람은 사랑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이며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으로서 절대 자유의지를 가진다는 것의 의미를 모르는 사람이다.
인간으로서 내가 가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며 그분이 나의 사랑을 목말라 하시며 내가 그분을 온전히 사랑할 수 있어야 하나님은 사랑의 대상으로서의 당신의 인간 창조를 비로소 완수하실 수 있다.
나는 늘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사실을 상기한다. 기쁠 때는 물론, 특히 슬프거나 힘들고 외롭거나 진퇴양난의 위기에 처했을 때는 더더욱 그렇다. 위기의 상황에서 내가 그리스도를 떠올리는 것은 그분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신뢰하기 때문이다. 어떤 결과가 닥치더라도 나는 내 사랑의 몫을 선택할 수 있고 완성할 수 있다.
"다 이루었다"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님이 마지막 남기신 말씀이다. 무엇을 다 이루었는가. 사람들은 자신이 느끼는 대로 이 말씀을 해석한다. 괜찮다. 보이는 만큼만 볼 수 있는 것이 인간이다.
나는 이 말씀을 인간으로 오신 하나님의 아버지와의 사랑의 완성으로 듣는다. 십자가는 예수님이 원하시는 방식의 죽음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 처절한 실패의 죽음 앞에서 그분은 아버지를 원망하지 않는다. 그리고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신뢰로 받아들인다. 이것이 사랑이다.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신뢰, 이것이 바로 인간의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표현이다.
그래서 인간과 하나님과의 사랑은 상상할 수 없는 비참하고 처절한 상황에서 종종 입증되고 확인된다. 모든 순교자들의 죽음에 대한 기사를 보라. 그들은 하나님을 원망하고 죽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에게 부어졌던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해서 자신에게 닥친 죽음조차 감사해하며 생을 마감한다. 그들이 아는 것은 하나님의 자신에 대한 절대적인 사랑이다. 하나님은 흔들리지 않으신다. 흔들리는 것은 인간이다. 흔들리는 인간이 위기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흔들리지 않는 사랑을 선택할 때 창조는 완성된다. 나는 인간만이 특별한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 사랑에 대한 절대적 자유의지를 지닌 창조물은 인간뿐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전지전능하심을 유보하신 하나님의 도박이다.
안타까운 것은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대부분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으로서의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알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여러 이유가 있다. 그중 으뜸은 돈이다. 돈이 절대적이 된 세상에서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라는 사실은 그다지 현실성이 없어 보인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이라는 사람들도 돈을 으뜸으로 여기게 된다.
물론 그것을 합리화할 수 있는 이론은 다양하다. 가장 인기 있는 이론이 바로 ‘돈은 가치중립의 교환의 수단’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이론이 가진 한계는 돈을 가치중립의 교환의 수단으로 여기고 사용할 수 있는 존재가 하나님 이외에는 없다는 사실이다. 결과적으로 돈이 가치중립의 교환수단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자신이 하나님의 자리에 앉게 된다는 사실이다. 그것이 사람들의 눈에는 근사하게 보인다. 그러나 근사한 하나님은 있어도 근사한 신앙은 없다!!
그 다음 이유는 오늘날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주체로서의 사고를 상실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라는 말과 절대적인 자유의지는 오직 주체로서의 인간에게만 가능한 선택이다. 그러나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대부분 주체로서의 자신의 정체성을 상실하고 좀비 내지는 존 듀이가 말했던 난장이(dwarf)가 되었다.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 아니라 목사나 사제와 같은 이의 허락을 득해야 하는 객체들이 된 것이다. 결국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자유가 무엇인지를 모르는 사람들이 된 것이다.
그들도 믿지 않는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시장의 자유를 자유의 전부로 인식하는 맘몬을 섬기는 사람들이 된 것이다. 차제에 한 번 솔직하게 자신의 속마음을 들여다보라, 자신에게 절대적인 것이 돈인가 하나님인가. 하나님이 주인이시라면 돈은 결코 자신에게 절대적인 것이 될 수 없다.
오래 전 공동체에서 나는 그곳 목사님의 사모님이 돈을 무서워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당시에는 그 모습이 이상하고 한심해보이기까지 했다. 그러나 이제 나는 그런 사모님의 모습이야말로 경성하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이라는 걸 안다. 돈의 유사전능성을 마다할 수 있는 인간은 드물다. 드문 정도가 아니라 찾아보기 어렵다. 돈을 무시할 수 있다고 자신하는 순간 그가 누구건 그 사람은 반드시 돈에 무너지게 될 것이다.
그것이 돈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는 것의 의미이기도 하다. 돈을 미워하는 선택을 이어나가려면 경성하는 수밖에 없다. 그것이 인간의 한계이다. 돈을 사랑하려는 인간의 마음은 너무도 크고 절대적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으로서의 그리스도인이 돈에도 경성해야 하는 이유이다.
왜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복음대로 살지 못하는가. 왜 이토록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있는데 세상이 변화되지 않는가. 그 대답이 바로 여기에 있다.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으로서 절대적 자유의지를 지닌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무지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하나님을 후회하도록 만들 수도 있고 당신의 말씀을 철회하도록 만들 수도 있는 거룩한 존재이다. 인간이 지닌 이 거룩함을 완성해나가는 것이 그리스도교 신앙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동일하게 말씀하신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게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