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이 가르치신 예정론 (1) / 박진호 목사
예정이라는 용어만 바울의 발명품이다.
기독교 신앙의 체계는 바울이 세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 신앙의 뿌리와 본질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과 일대일로 대면한 이후로 성령님이 간섭하여 그의 영혼이 거듭남으로써 형성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의 예정론도 실은 예수님께 전수 받은 것이라고 앞 장에서 말씀드렸습니다. 그럼 과연 예수님이 공사역 중에도 예정에 대해서 가르쳤는지 복음서 기록을 중심으로 확인해봐야 할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살펴보기 전에 반드시 집고 넘어가야 할 사항이 하나 있습니다. 예수님이 기독교의 어떤 교리라도 직접 작성하고 체계적으로 가르친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과 동고동락하며 직접 가르침 받았고 그 사역을 곁에서 지켜보았고 특별히 십자가 죽음과 부활과 승천사건에 직접 동참했습니다. 그 모든 것들에 담긴 주님의 영적 계시들을 성령의 영감을 통해 온전히 깨닫게 된 사도들이 복음서와 서신서에 정리 기록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전에 지혜의 영인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시리라 약속하셨습니다. 성령이 오면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해서 세상을 책망할 것인데 죄는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이요, 의는 주님이 구원사역을 마치고 아버지께로 승천하는 것이며, 심판은 그럼으로써 세상 임금 사탄이 심판을 받은 것이라고 설명해주었습니다.(요16:7-11)
그런 후에 주님은 아무 말씀도 없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제자들이 성령을 받자 그 사건이 갖는 의미가 바로 주님이 미리 설명해주셨던 대로 당신께서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해 세상을 책망한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십자가 대속 죽음을 스승이 살아 계실 때의 가르쳤던 내용과 구약성경의 예언들과 연결시켜보니 믿음으로만 하나님께 의롭다함을 얻을 수 있다는 칭의(稱義-justification)라는 구원진리가 도출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주님은 단 한 번도 칭의라는 용어를 전혀 사용하지 않았음에도 기독교의 첫째가는 칭의 교리도 예수님이 성령님을 통해 사도들에게 가르쳐 준 것입니다.
예정론 또한 바울이 자신이 기존에 갖고 있던 하나님과 그 믿는 도리에 관한 사상에서 자신의 이성과 지혜를 동원해서 스스로 각성 통찰해낸 것이 아닙니다. 이미 살펴본 대로 다메섹 도상에서의 부활하신 예수님과의 개인적 대면을 통해서 자신이 이방인의 사도로 주님께 미리 택정 받아서 그렇게 준비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피부로 절감한 것입니다.
다른 어떤 제자라도 바울과 같은 배경을 가지고 주님과 그런 대면을 거쳤다면 예정론 교리를 진술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칭의 교리가 주님의 십자가 죽음에 근거를 둔다면, 예정론은 부활하신 주님과의 다메섹 대면에 두는 것만 다를 뿐입니다. 두 교리 다 주님이 바울에게 가르친 진리임에 틀림없습니다.
요컨대 칭의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예정(豫定-Predestination)이라는 용어만 바울이 고안했지 그 내용은 예수님이 이미 그에게 다 가르친 것이라는 뜻입니다. 만약에 예수님이 예정론을 제자들에게 가르친 것이 아니라면 칭의 교리도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에 계시되지 않았다고 주장해야만 합니다.
사람을 낚는 어부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예정론이라는 교리를 당신께서 행하신 사역에서 드러나도록 하셨다면 당연히 그들을 불러냄에서부터 그랬을 것입니다.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그의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그들이 곧 그물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마4:18-20)
상기 구절은 이미 “신약 인물의 구원-사람 낚는 어부로 부름 받은 베드로” 항목에서 간단히 다뤘으나 다시 자세히 살필 필요가 있습니다. 요한복음 1:35-42에선 베드로의 부르심에 관해 마태와 마가와는 다르게 기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르는 두 사람 중의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라 그가 먼저 자기의 형제 시몬을 찾아 말하되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하고 (메시야는 번역하면 그리스도라) 데리고 예수께로 오니 예수께서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시니라 (게바는 번역하면 베드로라)”(요1:40-42)
세례 요한의 두 제자가 먼저 예수님을 따르기로 결단했는데 그 중에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가 베드로에게 메시아를 만났다고 말하자 베드로도 주님을 따랐다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 쪽의 일방적 선도적인 예정에 의한 택함이 아니라 베드로가 자유의지를 사용해서 주님을 믿기로 결단해서 구원 받은 것 아니냐는 반론을 제기합니다.
이처럼 성경책별로 동일한 사안을 두고 서로 모순 상충되는 것처럼 보이는 구절들에 대한 성경해석의 원리들이 몇 있습니다. 우선 더 자세한 기록이 더 정확한 기록이라고 간주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요한복음 기록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마태와 마가의 기록이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성경은 모든 과정을 빠짐없이 자세히 기록하는 과학논문이나 신문기사가 아닙니다. 구체적인 진술은 생략하고 저자가 꼭 전하고 싶은 것만 간단히 기록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마태와 마가로선 제자들이 사람 낚는 어부로 불림 받았다는 것과 그들이 자기들 소유를 버려두고 주님의 그 부르심에 순종했다는 것이 꼭 전해야 할 가장 중요한 내용이라고 여겼다는 뜻입니다.
또 성경의 기록들이 반드시 그 일어난 시간적 순서에 따라 기록된 것은 아니라는 점도 감안해야 합니다. 복음서의 기록들도 마찬가지인데 공관복음(마태, 마가, 누가)과 요한복음 간에는 더 그러합니다. 따라서 베드로가 안드레의 말을 듣고 주님께 나아간 것은 "요단강 건너편 베다니"(요1:28)였습니다. 그 후에 갈릴리로 돌아가서(요1:43) 다시 생업인 어부의 일을 하고 있었다고 봐야 합니다. 요컨대 마태와 마가가 기록한 주님의 부름은 요한복음이 기록한 때와 어느 정도 시차를 둔 이후의 일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해석상의 어려움을 해소하려고 성경의 모든 사건들을 그 발생한 시대 순서에 따라 정리해 놓은 “연대기 성경”이 있습니다. 그 성경에도 주님이 제자들을 부르는 마태와 마가의 기록을 요한복음의 그것보다 훨씬 뒤에 배열해 놓았습니다. 예수님이 최종적 공식적으로 그들을 제자로 확정해서 따르라고 명한 후에 그들이 맡을 소명을 말씀해준 내용이라는 신학자들의 해석에 따른 배열입니다.
요한복음에서 베드로가 처음 주님께 만나러 온 이유를 메시아를 보았다는 안드레의 말을 듣고 따라왔다고 했습니다.(요1:41) 그러나 그 때는 과연 어떤 사람이기에 메시아라고 부르는지 알고 싶다는 단순한 호기심에서 왔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왜냐하면 갈릴리 바다로 다시 돌아와서 고기를 잡는 베드로에게 예수님이 고기를 엄청나게 많이 잡게 해주자 그가 “나는 죄인이니 자기를 떠나달라”고 요구했기 때문입니다.(눅5:8) 만약 베드로가 처음부터 주님이 메시아라고 확신했고 그래서 자기가 믿기로 결단해서 구원을 얻었다면 이런 반응이 나올 리는 없습니다.
갈릴리 어부를 제자로 택한 이유
예수님이 제자를 불러내신 전후 과정을 살펴보면 그 가장 중요한 뜻은 주님이 갈릴리의 소외되고 천대 받던 어부들을 제자로 택했다는 사실입니다. 바울은 바로 이런 택함 가운데에도 성령의 영감으로 주님이 그렇게 하신 이유를 깨닫고 그 영적진리를 자신이 저작한 고린도 전서에서 아래처럼 밝혀 놓았습니다. 하나님이 분명한 목적을 갖고 특정한 부류의 사람들을 택하여 세상에서 교회 공동체로 따로 불러내었다고 선언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선택이 바로 예정에 의한 구원 교리의 실현이라고 설명하고 있는 셈입니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1:26-29)
구약성경은 또 "요단 저쪽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다"(사9:1)고 오실 메시아의 사역에 대해 예언하고 있습니다.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갈릴리 어부를 택하여 제자를 삼고 그들과 함께 그곳에서 주로 사역했으며 선교의 거점으로 활용했습니다. 삼위 하나님이 계획하고 예언한 그대로를 실현하셨습니다. 당연히 당신의 주권적 뜻에 따라 선도적으로 제자들을 택한 것입니다. 바꿔 말해 제자들이 자신들의 자유의지로 구원을 받겠다고 소망 의도 계획하기 전에, 나아가 그들이 예수님의 제자로 헌신하겠다고 결단하기 아주 오래 전부터 그들은 제자로 예정되어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이 "사람 낚는 어부"가 될 것이라고 곧바로 소명을 주신 것입니다. 주님이 사전에 그들에 대한 계획을 갖고 있어야만 하실 수 있는 말입니다. 네 복음서 모두가 증언하는 것은 갈릴리 해변을 걷다가 우연히 마주친 어부들 중에서 무작위로 혹은 그들의 태도 신분 믿음 등을 보고 심사해서 제자로 삼은 것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드러내었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사람 낚는 어부가 될 것이라는 소명을 받자마자 배와 그물을 버려두고 곧바로 주님을 따라나섰습니다. 이는 성령이 강력히 역사하시는 주님에게서 거역할 수 없는 신적 권위가 비쳐 나왔고 또 주님과 함께 있기만 해도 마음속에 평강과 기쁨이 가득 찼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그럼에도 갈릴리 어부들은 그 때까지도 주님이 아직 메시아임은 물론 구체적으로 어떤 인물인지도 정확히 알지 못하는 상태였습니다. 그렇다고 그들이 로마를 무찌를 결사대를 조직하겠다고 나선 것도 아닙니다. 한 이름 없는 랍비가 제자로 삼아주려고 베드로를 비롯한 열두 제자를 택하여 불러내었고 그들은 그 부름에 응한 것입니다. 예수라는 랍비를 따르겠다고 결단한 것입니다.
주님이 그들을 순교에까지 이르는 당신의 십자가 복음의 군사로 삼으려고 택했다는 사실을 제자들로선 아직은 전혀 알 수 없었습니다. 어쩌면 미리 알았다면 아무도 나서지 않았을 것입니다. 주님도 그래서 공사역 중에는 핍박과 환난을 당할 것이라고 간접적으로만 예고하셨다가 부활하신 후에도 베드로에게 넌지시 그런 언질만 주었습니다.(요21:18,19)
제자들이 더 나은 현실 삶을 바랐거나 로마에서 해방은 바랐을 것은 확실합니다. 그러나 죄에서 구원 받으려는 갈급한 심령이 절대 아니었습니다. 비록 변방 갈릴리이긴 해도 그들은 여호와께 선택받은 유대인이라는 확신을 가졌기에 구원은 심각한 고민거리가 전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공사역 중에도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를 믿어야만 구원 얻는다는 칭의 교리를 안 것이 아닙니다. 심지어 십자가에서 부활 승천한 후에도 주님을 온전히 믿지 못했습니다. 오순절 성령이 강림하여 그들의 영혼을 거듭나게 해주고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한 진리를 깨닫게 해줌으로써 비로소 구원을 받고 온전한 사도가 된 것입니다. 이 모든 과정을 설명하려면 예정에 의한 구원이라는 표현 말고는 불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