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초월해 계시는 주님! 당신은 사람들이 시간과 다투고 있는 것을 보시고 웃음이 나실 겁니다."
- Michel Quoist의 『시간이 없습니다』중에서 -
가. 들어가면서
본 연구는 지구의 나이에 대한 신학적 관심을 추적하는 데 있다. 복음주의 신학자들과 과학자들은 창조에 대해 다음의 몇 가지 사실에는 대체로 서로 간에 견해가 일치한다. 즉 성경의 창조주 하나님은 무에서 유를 창조(Creatio Ex nihilo) 하셨다는 것과 창조 세계는 본래 선한 창조였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우주는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고 그의 영광을 위해 창조되었으며 세상은 여전히 하나님에게 의존적이라는 것이 신학의 판단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성경과 피조 세계의 질서를 다루는 자연 과학(이하 과학) 사이에는 궁극적인 마찰이란 있을 수 없어야 한다. 하지만 왜 신앙과 과학 사이에는 여전히 보이지 않는 벽이 존재하고 때로 날카로운 대립 아닌 대립 관계가 형성되고 있는가? 신학은 그 이유로 인간의 타락으로 인한 인류 조상 아담과 하와의 에덴동산으로부터의 추방과 창세기 홍수, 바벨탑 언어 혼란 등을 겪으며 생겨난 하나님과 인간, 사람과 피조 세계 사이의 소통 부족에서 그 원인을 찾는다.
이 소통의 단절로 인해 날카로운 의견 대립 상태에 있는 대표적 주제 가운데 하나가 바로 지구와 우주의 연대 문제이다. 본 연구는 이 문제에 대한 바람직한 신학적 입장이 무엇인지를 추적 검토하는 데 그 목적을 두었다.
나. 날카로운 두 대립
1. 젊은 지구설의 논증
젊은 지구설을 논증하는 성경적 증거들은 다음과 같다.
1) 창세기 1장의 6일 창조는 문자적 6일을 말한다.
(1) 날(욤,yom)은 하루를 증거한다.
‘욤’은 구약 성경 39권 중 3권(에스라와 요나와 하박국서)을 제외하고는 모든 구약 성경에서 사용되고 있다. ‘야밈’(Yamim)이라는 ‘욤’의 복수형까지 포함한다면 요나서와 하박국서를 제외한 모든 구약 성경에 아주 빈번히 사용된 단어이다. 이 단어는 구약 성경에서 단수로 약 1,480회 나타나고 단수와 쌍수와 복수 모두를 포함하면 약 2,225번 등장한다. 이 단어는 여러 가지 뜻을 가진다. 우리 성경에는 약 50여 가지 단어로 ‘욤’이 번역되어 있다. 하지만 젊은 지구설의 논증에 따르면 이 단어의 일반적 쓰임새는 우리가 쓰는 24시간 하루를 나타낸다. 일반적으로 한 단어의 뜻을 고려할 때 문맥적인 고려 사항을 전제하지 않는다면 가장 자주 사용하는 뜻을 본 의미로 유지하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창세기 1장의 내러티브는 상징적인 것이 아니라 역사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그렇다면 ‘욤’은 분명 우리들이 오늘날 사용하는 하루를 증거 한다는 것이다.
(2)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1: 5, 8, 13, 19, 23, 31)의 반복 구절도 문자적 하루를 증거 한다.
성경 창세기 1장에 나타난 이 표현은 각 날의 경계를 표시한다. 이것은 문자 그대로의 날들을 의미한다. 그렇지 않다면 구약 성경에는 날에 대한 아무런 기준이 없는 셈이 된다. ‘저녁과 아침’이라는 구절은 창세기 밖에서 37번 사용되고 있는데(출 18:13; 27:21 등) 이들 구절들은 일반적인 하루를 묘사하고 있다.
(3) 서수와 연결된 욤은 하루를 증거한다
욤이 첫째, 둘째, 셋째와 같은 서수와 연결될 경우(출 12:5; 24:16; 레 12:3) 문자적인 하루 이외의 날들을 의미하지 않는다.
(4) 욤의 복수형 야밈(Yamim)이 통상적인 날들을 나타낸다.
구약 성경에 608번 등장하는 욤의 복수형을 나타내는 ‘야밈’은 항상 통상적인 날들을 나타낸다.
(5) 태양과 달의 넷째 날 창조 문제
태양과 달이 넷째 날 창조(창 1:16-18) 되었으나 하루는 태양이 중심이 아니라 지구 자전이 중심이 되어 계산되므로 태양과 달의 넷째 날 창조는 젊은 지구론적 관점에서 볼 때 시간을 계산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2) 지구와 우주 창조 연대도 짧다.
문자적 6일 창조설을 받아들일 때 당연히 지구와 우주 나이는 짧은 것이 성경적이다. 젊은 지구론자들은 제임스 어셔(1581-1656) 감독이 주장하는 B.C. 4004년의 우주 창조 연대가 반드시 맞다고 동조하지는 않으나 단순하고 문자적인 성경 연대기를 받아들이지 못할 하등의 이유는 없다고 본다.
2. 오랜 지구설의 논증
젊은 지구설에 반하는 오랜 지구설의 논증은 다음과 같다. 이 이론은 현대 과학의 성과와 주장을 성경과 조화시키려는 관점이다. 그러므로 젊은 지구설의 성서 문자적 해석에 의문을 제기한다.
1) 창세기 1장의 6일 창조는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안 된다.
(1) 날(욤, yom)은 단순한 하루만을 나타내지 않는다.
이 단어는 단순한 하루 개념(레 23:32) 뿐 아니라 낮 시간(창 1:5,16,18)이나 6일을 합한 날(창 2:4), 시간의 어떤 정점(미 2:12), 1년을 나타내는 경우(레 25:29; 삿 17:10), 기나긴 기간(요 8:56), 해(창 5:4), 종말적 날(사 13:9), 환난의 날(시 20:1), 진노의 날(욥 20:28), 형통의 날(전 7:14), 구원의 날(고후 6:2), 심판의 날, 주의 날, 재난의 날처럼 무한한 의미의 날 등 다양하게 사용된다.
(2)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1: 5, 8, 13, 19, 23, 31)의 반복 구절도 문자적 하루를 증거하는 것이 아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피조물인 인간에게 주신 언어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유비(analogy)와 은유(metaphor)와 적응(accommodation)의 방법으로 말씀하신다. 저녁과 아침의 표현도 24시간이나 긴 기간을 알려주시려는 의도가 아니라 모든 창조물을 만드셨고 안식하셨음을 알려주시려는 문학적 구성(Literary Frame work View)이다. 오랜 지구론자들이 볼 때 그것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려는 것은 성경의 의도를 오해한 것이다.
(3) 서수와 연결된 ‘욤’도 하루를 증거함이 아니라 성경적 언어의 특이성 차원에서 이해야 한다.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를 문학적 구성으로 보면 서수와 연결된 ‘욤’을 해석하는 데 있어서도 24시간을 나타내는 단어가 아닌 문학적 구성으로 보게 된다. 어떤 작가가 소설을 쓸 때에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를 과학적 24시간을 염두에 두고 말하지 않는 것과 같다. 성경은 과학적 관점이 아닌 모든 역사와 인종과 인류 문화와 남녀노소에게 적응된 책인 것이다.
(4) ‘욤’을 문자적 하루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욤’의 복수형 ‘야밈’(Yamim)도 당연히 24시간이 날들이 아닐 것이다.
(5) 태양과 달이 넷째 날 창조된 문제도 문학적 구성론을 받아들이는 오랜 지구론 입장에서는 ‘욤’을 24 시간이라고 볼 수 없는 증거 가운데 하나다.
다. 주요 신학적 견해
1. 어거스틴(Saint Augustin)
어거스틴(354-430)은 시간의 문제에 본격적 관심을 가진 최초의 신학자라 할 수 있다. 그는 세상이 단번에 만들어진 것이지 엿새 동안의 연속적 과정으로 보지 않았다. 어거스틴이 볼 때에 엿새는 자연적 날들이 아닌 천사들에게 있어 신비적 날들로 본다. 어거스틴은 고백록에서 창조의 첫 번째로부터 세 번째 날들과 넷째 날부터 후반부의 나머지 날들에 관한 개념은 서로 다르다고 본다. 포이티에의 주교 힐라리우스(Hillarius of poitiers)도 어거스틴의 견해와 동일하다.
시간은 일반 사람들이 생각하듯이 고정된 절대적 개념이 아니다. 이미 시간이 관측자의 속도나 중력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음은 100여 년 전 아인시타인이 이론적 토대를 마련하고 실험과 관측으로 증명된 사실이다. 만일 내가 빛의 속도로 시리우스 별을 여행하고 돌아올 수 있다면 지구는 그동안 18년이라는 시간이 흘러갔을 것이나 나는 여전히 지금 그대로의 나이를 유지하고 있을 것이다. 지구의 시간 흐름과 나 개인의 시간 흐름이 어긋나 버린 것이다. 보통 사람들은 이 사실이 이상하게 느껴지거나 믿기지 않을 테지만 일반 물리학도들은 모두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과학적 사실이다. 신앙적으로 보면 6천 년이든 200억 년이든 하나님 보시기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의미이다. 하나님은 천년을 하루같이 하루를 천년같이 여기시는 분이다. 하나님을 인간의 시간 안에 가두어 판단하려는 것은 오히려 하나님을 모독하는 일이 될 수 있음을 심각하게 고민해야 한다(벧후 3: 8, 16-17). 영원한 것은 지나가지 않는다. 모든 것이 현재일 뿐이다. 요컨대 하나님은 시간 속에서 사물을 보지도 않으시고 모든 것을 현재로 보고 계신다. 어거스틴은 이미 이 같은 놀라운 사실을 알고 있었다. 어떻게 시간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얻은 것일까? 근대과학이 발달하기 전에 어거스틴이 현대인 못지않은 과학적 사실들을 직시하였다는 것은 개인적으로 볼 때 성령의 인도하심이라고 밖에는 달리 말할 수 없다.
2. 루터(Martin Luther)
종교개혁자 루터(1483-1546)는 창세기 부분에 대해 모세의 표현은 비유나 은유가 아닌 단순한 표현이라고 그대로 받아들인다. 성경의 역사성을 인정한 것이다. 하지만 루터는 인간의 무지를 인정하고 성경 창세기 1장에 나타난 모든 가르침의 지도권을 성령에 양보한다. 루터는 탁월한 학자였다. 창조의 연대 문제에 관심이 없을 리 없다. 하지만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인간의 지혜보다 낫다는 루터의 십자가 신학의 관점에서 보면 이해가 충분히 간다. 이에 따라 후기(後期) 루터는 창조 자체의 진행 과정보다 창조주 하나님 그분에게 관심을 집중한다
3. 칼빈(John Calvin)
칼빈(1509-1564)은 물론 창조 세계는 출발점이 있다는 것을 믿었다. 그리고 창조 과정에 대한 성경 내용을 단순하게 수용한다. 하지만 단순하게 수용한다는 것이 반드시 진실이라는 의미는 아니다.칼빈은 궁창 위의 ‘물’을 ‘물’(Maim)이 아니라 ‘구름’(anan)으로 해석한다. 창세기의 저자로 알려진 모세는 물도 알고 구름이라는 단어도 잘 아는 사람이었다. 모세가 물이라고 썼다면 그것은 물이어야 한다.
칼빈이 그 사실을 모를 리 없었다. 칼빈은 우둔한 학자가 아니었다. 성경과 히브리어와 헬라어와 라틴어 그리고 당시 수사학에 모두 능통한 학자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빈이 궁창 위의 ‘물’은 ‘마임’(물)이 아닌 ‘아난’(구름)이라고 주석한 것은 무슨 이유 였을까? 칼빈은 궁창 위의 ‘물’이라는 단어를 ‘물’을 몰라서가 아니라 당시 보통 사람들의 이해 수준에 적응하여 ‘물’(Maim)이 아니라 ‘구름’(anan)으로 해석한 것이다. 칼빈이 볼 때에 성경은 과학 서적이 아니라 위대하신 창조주 하나님께서 글을 읽지 못하거나 지식이 부족한 지극히 작은 자 중에 작은 자에게도 적응하신 수사학적 책이었다. 칼빈의 해석 방법은 성경의 종교 메시지가 누구에게든지 이해할 수 있게 묘사되었다는 종교 개혁 이론에 기초한다. 성령은 모든 사람을 위한 공통된 학교를 개설한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의 주제를 선정하였을 것이다. 즉 모세는 교육받은 자의 교사만은 아니었다. 교육받지 못한 사람들의 교사였다. 그러므로 모세는 “성경을 기록함에 있어 평범한 언어를 채택했다. 그렇다면 성경은 보통사람들을 위한 책이므로 천문학 및 다른 어려운 학문을 배우려는 사람들은 다른 곳으로 가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칼빈에게 있어 하나님의 피조 세계를 이해하는 학문으로서의 모든 자연과학의 진지한 활동이나 진실된 결과를 수용하는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칼빈의 그런 신학적 인식과 방법론 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프린스턴 신학교의 개혁주의 신학자 벤자민 워필드(B. B. Warfield)는 한걸음 더 나아간다. 칼빈을 무로부터의 창조와 물질로부터의 창조인 진화론적 사고를 모두 수용한 인물로 본 것이다.
칼빈은 창조에 대해서는 관심이 많으나 창조의 시기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는 듯하다. 그의 창세기 주석을 살펴보면 창조의 연대 문제에 대한 별다른 관심이 나타나지 않는다. 그것은 그가 연대 문제가 궁금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감추어진 일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우리에게 전해 내려온 것 이상의 다른 것을 말하거나 생각하고 알고자 욕망하지 않으려는 “절도와 적정의 원리”(modestiae et sobritatis regulam)를 따르는 칼빈의 신학 방법론에 기인한다고 보여 진다. 이렇게 칼빈이 창세기 주석에서 묘사한 우주관이 근대 과학의 우주관과 여러 부분에서 조금씩 다른 것은 사실이나 수사학적 적응 개념의 의미를 알고 있던 칼빈에게 그 문제는 전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4. 찰스 핫지(Charles Hodge)
구 프린스턴을 대표하는 개혁주의 전통의 찰스 핫지(1797-1878)는 당연히 우주의 시작이나 무로부터의 창조를 믿는다. 핫지는 당시 이슈가 되던 진화론에도 관심이 많은 학자였다. 찰스 핫지는 ‘하나님은 자신의 의지나 선하신 기쁨에 따라 어떤 사물들의 질서나 체계를 창조하실 수 있으므로 창조는 필연적 결과는 아니다’라고 주장한다. 비록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피조물이기는 하나 창조주 하나님의 자유로우신 창조 사역 앞에 타락과 저주로 참 진실과 진리로부터 멀어진 우리 인간이 인류 타락 이전의 영광된 창조에 대해 얼마나 진실에 접근이 가능하겠는가. 아이는 자신의 탄생 진실에 대해 나이가 들면 유치한 지식으로부터 어느 정도 벗어날 수는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출산에 대한 아이와 어른 사이의 진실의 갭은 대단히 크다. 하지만 창조주 하나님과 타락한 피조물에 불과한 인간 사이의 벽은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과학이 아무리 발달한다 하더라도 영광된 창조를 타락된 피조물인 인간의 눈으로 어디까지 접근이 가능할까 회의가 든다. 그러므로 핫지는 6일 창조에 문제는 믿음의 문제인 동시에 미해결의 문제로 본다. 피조물인 인간에게 있어 아직은 이 문제가 충분히 확증된 주제가 아니다. 그러므로 핫지는 ‘신자(信者)는 그 결과를 조용히 기다려야 한다’고 보았다.
5. 벤자민 워필드(B. B. Warfield)
같은 프린스턴의 신학자 워필드(1851-1921)는 근대 과학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려 한 인물이다. 핫지가 진화론에 대해 부정적 입장이었던데 반해 워필드는 작업가설(作業假說, working hypothesis)로서의 진화론을 조심스럽게 수용한다. 워필드는 칼빈의 신조도 올바로 이해한다면 인간 영혼을 제외하고 모두 진화론적 창조라고 주장한다.
6. 아더 피어선(Arther Pierson)
아더 피어선(1837-1911)은 신학자요 목회자요 선교사인 동시에 한국 평택대의 전신인 피어선 신학교의 설립자이기도 하다. 피어선은 탁월한 학자였다. 그는 어릴 적 청교도 가정에서 자라 일찌감치 헬라어와 라틴어 수사학적 교육을 받고 성경 자증의 원리를 받아들인 보수적 근본주의적 신학자였다. 그의 주요 서적은 칠십 여권에 이르고 수많은 논문과 팜플렛들이 남아있다. 13,000여 편에 이르는 설교와 강의를 하였으며 당시 대설교자 찰스 스펄전 목사의 후계자인 동시에 당대 유명 복음주의자들인 D. L. 무디와 토리(R. Torrey), 딕슨(A. C. Dixon), 허드슨 테일러(H. Taylor), 고든(Gorden), 조지 윌리엄스(G. Williams), 조지 뮬러, 당시 기독 재벌 워너메이커가 모두 그와 밀접히 교제한 인물들이었다. 본 주제와는 조금 다른 문제이기는 하나 필자의 개인적 생각으로는 한국에 대한 피어선의 지극한 사랑으로 볼 때 한국 종로 YMCA 건물 설립 시 워너메이커가 기꺼이 건립비를 보내온 것도 친구인 피어선의 조언이 작용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안명준 박사는 이런 피어선의 성경관을 종교개혁주의자들의 신학에 굳게 선 루터와 칼빈의 전통을 굳게 따르는 학자였다고 논증한다.
사실 피어선은 과학에도 대단히 해박한 학자였다. 피어선이 활동하던 시기는 진화론과 자연 과학에 대한 관심과 연구가 폭발적으로 분출하며 세상을 변화시키던 시기였다. 그러므로 과학에 대한 관심은 당대 탁월한 신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으며 근본주의 운동의 중심인물 이었던 피어선의 관심 영역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피어선이 과학적 변증서를 남긴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피어선은 자신의 책에서 자연과 성경 사이에는 어떤 모순도 없다는 주장 뿐 아니라 오늘날 설계론자들이 주장하는 것과 유사한 주장을 편다. 피어선은 또한 창세기의 날(yom)이 문자적 하루가 아니었다고 논증한다. 피어선이 볼 때에 창세기 2장 4절에서 이 말은 창조의 전 시기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으며 시 95: 8절에 보면 “시험하는 때에”란 말씀에서 그 날(‘욤’)은 40년을 의미한다. 오리겐과 어거스틴을 인용하여 피어선은 이 “날”은 하나의 시기를 의미했을 것이며 히브리어가 정해지지 않은 것을 의미한다고 하였다.
피어선이 볼 때에 성서의 목적은 과학을 가르치려는 게 아니다. 도덕적이며 영적 진리를 가르치려는 것이다. 만일 성경의 언어가 과학적이었다면 그 언어는 관심을 끌었을지 모르나 오히려 약점과 방해를 받았을 것이라고 피어선은 역설한다.
7. 창조과학운동
주로 미국 ICR의 전통을 따르는 미국과 한국의 창조과학 운동은 창조 연대에 있어 6천 년(한국) 또는 젊은 연대(1만 년 내외)를 고수한다. 이 견해는 엇셔 주교로 시작하여 안식교의 프라이스(George McCready Price)와 그에게서 영향받은 헨리 모리스(H. M. Morris)의 견해와 대부분 일치한다.
8. 프란시스 쉐퍼(Francis A. Schaeffer)
복음주의 기독교 세계관 운동을 대표하는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인 쉐퍼도 지구와 우주의 기원문제에 대해 호기심이 지극히 많은 사람이었다. 창세기 연구는 쉐퍼의 관심 분야였다. 쉐퍼는 성경이 말하는 몇 가지 가능성에 대해 말한다. 그 일곱 가지는 다음과 같다. (1)성숙한 우주 창조(grown-up) (2)무질서한 창조계가 재창조된 것(쉐퍼는 이 해석에 대해서는 약점이 존재함을 인정한다) (3)창세기 1장 해석에 있어 긴 하루가 있을 수 있을 가능성 (4)창세기 대홍수가 지질학적 자료에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 (6)타락 이전 동물 죽음에 대한 가능성 (7)히브리어 ‘바라’(창조, bara)라는 말이 완전히 새로운 시작을 의미할 가능성 등이다.
쉐퍼는 성경 자체를 연구해 볼 때 창세기 1장의 날들에 대해 24시간으로 보아야 하는지 아니면 일정한 기간으로 보아야 하는지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쉐퍼가 볼 때 성경은 두 입장 모두에게 열려 있다. 또한 쉐퍼는 신앙을 떠나서라도 인간 진화론을 믿지 않는다는 것과 우주 창조론에 영역에 있어서는 자유롭게 논의할 수 있는 영역이 있다는 것을 겸손하게 인정한다. 쉐퍼는 생물진화론에 대해서는 부정적이었으며 우주 창조론은 진화론과 달리 우주 기원론 입장에서 차원이 조금은 다름을 열어놓고 있다.
9. 지적 설계(Intelligent Design)와 창조론 오픈 포럼(Open Forum for Creationists)의 입장
지적설계와 창조론 오픈 포럼은 신앙적 지향점이 다르나 연대 문제에 있어 열려 있다는 점에서는 유사하다. 지적설계 운동의 선구자 중의 한 사람인 뎀스키(W. Demski)는 지적 설계는 수 십억 년 동안 발달해 온 생물, 물리학적 우주와 양립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창조론 오픈 포럼은 칼빈이 말한 것처럼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곳에서 더 나아가지 않는다. 성경이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는 부분에 대해 인간이 랍비나 교사가 되기를 원치 않는다. 그것은 탁월한 결론이 도출될 때까지 미래를 위해 오픈한다. 지적 설계와 창조론 오픈 포럼은 연대 문제에 있어 각 개인의 신앙적 과학적 견해는 있을 수 있으나 아직 상대방을 설득할만한 탁월한 이론은 성경과 과학 어느 쪽에서도 나온 적이 없다고 본다. 그러므로 모든 설명 가능한 이론에 대해 수용한다.
라. 연대 문제 토론의 신학적 문제점은 무엇인가
1. 성경 원본 상실의 문제
히브리 성경 원전이 밝혀지지 않은 상황에서 우리는 섣불리 과학에서도 결론이 나 있지 않은 부분에 대해 성급한 결론이나 단정을 내려서는 안 된다. 루터가 어거스틴의 말을 인용하여 “성경의 앞부분은 성령의 것으로 돌려야 하며 그러므로 기록상 어떤 오류도 있을 수 없다”고 했어도 그것은 원본에 국한된다.
수많은 서로 다른 사본의 존재는 BC 4004년 경 창조라는 결론을 배격한다. 설령 문자적 해석을 하더라도 사본들 사이의 창조 연대는 1천 년 이상의 차이가 생긴다. 원본 상실의 문제는 필연적으로 연대 문제에 있어 갭이 발생하게 만든다. 사본들 사이의 차이는 엇셔 주교가 BC 4004년을 주장한 데 반해 유대인은 3760년, 70인 역(Septuagint)은 5270년, 요세푸스 5655년, 케플러 3993년, 루터 3961년, 라이트 푸트(Lightfoot) 3960년, 헤일즈(hales) 5042년, 플레이페어(Playpair) 4008년, 리프만(Lipman) 3916년 등 일치된 견해가 나오지 못하게 만들어 버렸다. 성경 원본이 소실되었다 해도 성경을 창조 타락 구속으로 이어지는 기독교 세계관으로 해석하기에는 아무런 무리가 없다. 그러나 연대 문제는 다르다. 연대는 기독론적, 구속론적 문제가 아니다. 성경 원본 상실은 이 문제가 구속론과는 달리 섣불리 결론을 내리기 힘든 결정적 부분이 존재함을 의미한다.
2. 성경 족보의 빠진 인물의 고리들 문제
성경 사본의 차이뿐 아니라 ‘성경은 성경으로 해석한다’는 성서 원리(scriptura sacra sui ipsius interpres)를 따르더라도 성경 족보의 빠진 인물의 고리에 대한 난제는 여전히 남는다. 마태복음 1장 8-9절에 보면 요담의 아버지는 웃시야이다. 하지만 역대상 3장 1-12절에 보면 요담과 웃시야 사이에는 요담의 조상 아사랴와 아마샤와 요아스 3세대가 추가 되어 있다. 족보 상의 공백이 보이는 것이다. 출애굽기 6장 20절은 아므람이 요게벳에게서 모세와 아론을 낳았다고 하나 아므람은 모세의 친아버지가 아니다. 아므람은 모세와 아론과는 300여 년 시간적 간격을 가진 조상이다. 모세 시대 아므람의 가족들은 아므람의 세 형제들(이스할, 헤브론, 웃시엘)의 후손들을 포함하여 남자만 8600명에 달하였다. 그 중 30-50세 사이의 숫자만 2630명이었다(민 4:35-36 참조). 창세기 5장과 11장 족보의 족장들 수명의 총합이나 마태복음 1장과 누가복음 3장에 기록된 예수님의 족보에서도 상이점이 발견된다. 누가복음 3장 36에 나오는 가이난은 창세기 11장 족보 명단에서 셀라와 아박삿(아르박삿) 사이에 위치해야 하는 인물이지만 빠져있다. 이것은 성경 족보가 완전한 연대적 족보가 아니라 저자의 의도가 담긴 선택적으로 편집된 족보임을 알려준다.
3. 천사 창조의 미스터리 문제
연대 문제를 다룰 때 결정적 난관은 천사 창조의 미스터리이다. 천사는 과연 언제 창조되었는가? 만일 6일 창조를 문자적으로 받아들일 때 천사 창조 문제는 심각한 딜레마에 빠져 버린다. 성경적으로 보면 천사도 분명한 피조물이다. 그러할 때 6일 창조에 천사 창조를 적응하면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 아니라 애시 당초 타락한 천사인 미숙한 사단과 귀신들을 인류와 거의 동시에 창조하여 아담과 하와를 타락시킨 장본인이 된다. 불완전한 천사를 창조 주간(6천 년 전)에 창조하였다면 하나님의 전지전능 교리에 아주 심각한 손상을 주게 된다. 또한 하나님을 마치 우주라는 그럴듯한 창조 연극의 대본을 만든 장본인을 만드는 격이다. 요컨대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다는 역사적 창조 교리가 어긋나게 되면 타락의 책임과 원인도 창조주 하나님에게 돌려버리는 누(累)를 범하게 된다. 천사 창조 시기는 신비로 남겨두어야 한다. 천사 교리에 있어 일치되는 안전한 개혁적 교리는 천사도 피조 된 존재라는 것과 그것들이 구체적으로 언제인지는 모르나 일곱째 날 이전에 창조되었다는 것뿐이다.
4. 창조시기에 대한 신학과 과학의 잠정성
앞에서 우리는 신학이 연대 문제에 대해 일치된 목소리를 내지 못함을 알았다. 과학도 마찬가지이다. 과학은 지구와 우주의 연대에 대해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늘 잠정적 결론만을 내려왔다. 신학과 과학은 결코 영원히 지구나 우주 연대에 대해 정밀한 결론을 내릴 수는 없다. 특별히 방사성 연대 측정 방법이 시작된 이래 지구 연대 측정값은 예상치가 급격히 변화(증가)하여 온 특징이 있다. 앞으로도 새로운 결론이 나오지 않는다는 보장은 전혀 없다. 이것은 앞으로도 과학적 결과들은 지구와 우주 연대에 대해 근사치만을 제공할 뿐임을 나타낸다.
마. 나가면서
본 연구자는 성경과 과학이 지구나 우주 연대 문제에 대해 항상 잠정적 결론만 내릴 뿐임을 살펴보았다. 성경은 연대 문제에 대해 분명 침묵한다. 신학자들 간의 명료한 해석적 일치성도 없었다. 양식 있는 믿음의 신학자들은 이 문제를 성경의 아디아포라(adiaphora)의 문제로 돌리고 있었다. 과학도 여전히 연대 문제에 관한 결정적 해답은 아직 없다. 그것은 성경이 미숙한 책이기 때문도 아니요 그와 반대로 과학이 발달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성경과 과학 측정값 모두 이 문제에 관한한 절대적이지 못하고 잠정적 결과만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과학철학자 칼 포퍼(K. Popper)는 기대와 추측이 이론 구성에 본질적 역할을 함을 간파하였다. 포퍼의 이론에 따른다면 과학은 진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개연적 진리만을 말할 뿐이다. 토마스 쿤(T. Kuhn)도 과학적 활동이 진리보다는 패러다임이라는 일종의 선택적 동기에 의해 수행됨을 간파하고 있다. 따라서 이제 필자는 이 문제에 대한 개인적인 과학적 성경적 추정을 유보한다.
성경과 과학은 분명 이 논쟁에 있어 아직은 누구의 손도 들어주지 않고 있다. 승자도 없고 결론 없는 팽팽한 양론이 있을 뿐이다. 이것이 이 문제가 과학과 신학 사이에 소통의 도구가 되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가 되고 있다. 하지만 역으로 보면 오히려 성경과 과학이 이 문제에 대해 결정적 단서를 제공하지 않고 침묵하므로 대화와 소통의 길은 열려 있다고 보아야 한다. 어느 쪽 입장을 택하든 전혀 성경의 진실성은 위협 받지 않는다. 인간의 해석이 확실하지 않음은 오히려 우리 인류를 겸손하게 머리 숙이게 만들 뿐이다. 연대 문제는 남에게 판단과 총을 겨누는 도구가 아니라 교만을 버리고 하나님과 자연 앞에 겸손한 자세를 갖게 만드는 도구임을 웅변적으로 알려준다. 분열은 어두운 세력만 기쁘게 할 뿐이다. 자녀들이 ‘내가 어떻게 태어났는가’하는 문제를 가지고 피 터지게 싸운다면 부모의 근심만 늘어날 뿐이다.
하나님은 구원의 하나님이실 뿐 아니라 창조의 하나님이시다. 구원의 샬롬은 자연에도 적용되어야 한다고 본다. 샬롬의 과학, 과학의 샬롬이 피조세계에서도 이루어져야 한다. 연대 문제로 인한 믿는 이들끼리의 충돌은 분명 샬롬이 아니다. 이제 분열과 내 주장만 옳다는 독단적 사고는 버려야 한다. 화평을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둠(약 3:17-18)이 곧 성령으로 난 지혜이다. 신앙의 극단적 근본주의와 현대 무신론 과학자들이 서로 충돌하는 사이에 복음 전파에 불필요한 애꿎은 생채기가 생겨서는 안 된다. 우리는 작가 김훈의 말처럼 사실과 견해를 구분해야 한다. 아직까지 연대 문제는 누구나 단지 잠정적 결론만을 말할 수 있는 견해에 불과하다. 따라서 견해에 불과한 것을 마치 사실이라고 선포하면서 다른 사람의 견해를 힘으로 누르려 하는 판단자나 심판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본다.
그렇다면 결론은 명확해진다. 전투와 샬롬을 구분해야 한다. 신앙이 어떤 면에서 전투이기는 하나 연대 문제는 전투 거리가 아니다. 연대 문제에 대해 조급함과 두려움을 버리고 자유함을 가질 필요가 있다. 오히려 그 자유함이 복음 전파와 신앙에 좋은 시야를 열어준다. 자유함을 가지고 추적하고 연구하고 도전해 볼 만한 주제이다. 그럴 때 복음주의는 좌우 양편의 많은 동역자를 얻게 되는 것이다.
필자 조덕영 박사(창조신학연구소)는 김천대, 평택대 신대원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