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3-02-01 11:30
데살로니가 전, 후서에 나타난 바울의 종말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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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살로니가 전, 후서에 나타난 바울의 종말론
I. 들어가며 바울서신들은 교리서신이라기 보다는 목회서신의 특징을 가진다. 그것들은 어떤 특정상황으로 인해 쓰여졌으며 해당교회의 문제점, 처하고 있는 상황에 대한 바울의 뜨거운 마음을 쏟아낸 편지들이다. 데살로니가 전·후서는 바울의 종말론을 드러낸다. 그러나 그렇다고해서 데살로니가전·후서의 기록목적이 종말론의 설파에 있는 것만은 아니다. 한 교회가 가지고 있는 문제점들을 지적하는 가운데 기독 종말론에 대해서 편지를 통해 말해주는 것이다. 그의 종말론은 데살로니가 교회와 바울의 관계에서 나타난 여러 질문들에 대한 답변 속에서 나타난다. II. 데살로니가 전서에 나타난 바울의 종말론 1. 데살로니가전서의 기록배경 사도 바울은 빌립보 전도(살전 2:2) 이후에 데살로니가에 들어간다. 사도 바울 일행의 데살로니가 입성은 화제가 될 정도로 대단한 것이었다.(살전 1:9) 그곳 전도는 주위에 큰 소문이 되었고 환난 가운데서 그들의 믿음은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된 사건이었다.(살전 1:6, 7) 그후에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를 떠나게 되었다(살전 2:17). 떠나있는 동안에도 바울의 마음은 데살로니가를 향해 있었고(살전 2:17) 바울은 데살로니가로 들어갈 시도를 하지만 사탄의 방해로 실패하고(살전 2:18) 바울은 아덴에 머물면서 동역자인 디모데를 대신 보내어 그들의 믿음을 굳게 하고 위로하게 한다(살전 3:1). 디모데는 데살로니가를 다녀와서 바울에게 사정을 자세하게 보고하였다(살전 3:6-10). 그 보고 후에 바울은 기쁨과 감사의 기도와 병행하여 편지를 썼는 데, 그것이 데살로니가 전서이다. 2. 데살로니가전서에 나타난 종말론 데살로니가전서는 여기저기에 종말론과 관련한 내용이 나타나고 있다. 먼저 재림주로 오시는 예수님을 다가올 심판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분으로 나타내고 있다(살전 1:10). 또한, 주의 강림과 죽은 자들에 대하여(살전 4:13-18) 말하고 재림의 시기(5:1-11)에 대하여 말한다. 1) 죽은 자들에 대하여(살전 4:13-18)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종말에 대한 것들을 충분히 배우지 못했다. 바울의 일행은 데살로니가에 이르러 늘 하던 대로 유대인의 회당을(행 17:1). 그 곳을 중심으로 약 한 달에 달하는 기간을 사역하고 '어떤 괴악한 사람들(행 17:5)'로 인하여 그곳을 떠나게 된다. 강단에 설 기회를 세 번밖에 가지지 못하였기에 그가 증거한 것은 너무나 간단한 것이었다. 그것은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야 한다는 것과 그 그리스도가 예수라는 것이었다(행 17:3). 짧은 기간이었기에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기초적인 것들만 알았지 자세한 것까지는 알지 못하였다. 그들의 질문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예수를 영접하고 예수의 재림을 기다리던 이들 중에 어떤 이들은 이미 사망하였는데, 그렇다면 그들은 주의 재림 때에 아직 살아 있는 사람들이 누리는 축복들에 참여 할 수 없는가?" 바울은 이것에 대해서 주의 강림의 순서를 말해준다(살전 4:16,17). 먼저 주의 강림의 나팔과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남은 자가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지고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된다. 이것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불복종하는 자들이 받는 영원한 멸망, 하나님의 영광에 함께 참여하지 못하는 것과 너무나 대조적이다. 2) 재림의 시기에 대하여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물음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데살로니가전서에는 "∼에 관하여는"이라는 표현을 통해 3차례 바울에게 질문을 던지는 데, 이것 중 2개가 재림에 대한 것이었다. 종말을 기대하는 인간의 심리는 지금 상황이 너무나 급박하고 어려운 것에서 기인하는 것이기에 그들에게 닥친 환난과 고난의 정도가 상당했음을 상상케 해준다. 재림의 시기에 관하여서는 주의 날이 밤에 도적 같이 이르게 된다고(살전 5:2) 말한다. 그러나 그날은 어둠에 있는 자들은 도적같이 느끼겠으나, 우리에게는 그날이 도적 같이 임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빛의 아들이기 때문이다. 또한, 바울은 믿는 이들이 재림을 기다리면서 오직 깨어 근신할 것을 말하는 데, 이는 종말론적인 기대감이 현실에 대한 도피 혹은 거부로 변질되어 데살로니가교회에 이미 있었음을 짐작케해준다. III. 데살로니가후서에 나타난 바울의 종말론 1. 데살로니가후서의 기록배경 데살로니가후서는 데살로니가전서 이후의 교회의 상황을 정리하면서 데살로니가 전서에서 언급하였던 몇 가지 주제를 더욱 넓고 깊게 전개하고 있다. 2. 데살로니가후서에 나타난 종말론 데살로니가전서가 그들에게 전해진 이후에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의 상황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데살로니가후서의 내용을 바탕으로 전서와 후서 사이에 있었음 직한 일을 생각해보면, 재림에 대한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궁금이 완전히 해결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의 질문은 하나님의 심판과 재림에 대한 것으로 이전보다 좀 더 깊은 것이었다. 1) 하나님의 심판에 대하여 바울은 심판 전에 우리에게 환난이 있음을 말한다(살후 1:4). 이 환난은 복음과 함께 나타나는 것(딤후 1:9)으로써 이것의 목적은 우리가 그 나라를 위하여 받는 것이다. 이 심판으로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지 아닌지 여부를 판가름 받게된다(살후 1:5). 그의 이러한 말은 빌립보의 그리스도인에게 한 말과 맥을 같이 하는 데, 그는 그리스도를 믿는 것뿐만 아니라 그를 위하여 고난을 당하는 것도 특별한 영예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위한 그들의 고난은 고난을 가하는 대적자들에 대한 심판의 징조와 마찬가지로 그들에 대한 궁극적인 구원의 확실한 징표임을 지적한다(빌 1:28, 29). 바울은 공의로운 심판의 때에는 "역전(Reversal)"이 일어나게 됨을 말한다(살후 1:6, 7). 이는 구약의 종말사상인 오바댜 1장 15절 "여호와의 만국을 벌할 날이 가까왔나니 너의 행한대로 너도 받을 것인즉 너의 행한 것이 네 머리로 돌아갈 것이라"와 그 맥을 같이 한다. 2) 불법의 사람에 대하여 데살로니가 교회에 미혹하는 자들이 등장했던 것 같다. 그 사람들은 영으로, 말로, 사도에게서 받았다는 편지로써 사람들에게 주님의 날이 곧 이르렀다고 미혹했으며,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그 말에 두려워하거나, 그 쪽으로 쉽게 마음이 움직였다(살후 2:1, 2). 아마도 이 세가지중 사도에게서 받았다는 편지가 가장 크게 그들에게 작용했을 것 같다. 브루스는 데살로니가전서에서 주의 날이 갑자기 임할 것이라고 말한 것에 다른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그것은 그 말에 주의 날의 도래가 '매우 임박하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는 것으로 이를 통하여 살전 2:2에서 말하는 사도에게서 받았다는 편지가 데살로니가전서일 가능성을 주장한다. 데살로니가 교회가 미혹된 이런 것에 대해 바울은 주님의 날이 이르기 전에 있을 한 징조를 말해주면서, 여러 말들에 미혹되지 말 것을 당부한다(살전 2:3). 그 징조는 먼저 '배도'하는 것이 일어나고, '불법의 사람'. 즉, 적그리스도가 나타나는 것이다. 이 일 후에야 주님의 날이 이른 다고 말한다.(살후 2:3) '배도'는 정치적 반란이나 종교적 변절을 의미하는 것으로 마지막 때에 있을 하나님의 권위에 맞서는 전세계적인 반역을 지칭하는 것으로 정치적 반란과 종교적 변절을 결합한 것이다. '불법의 사람' 즉, 멸망의 아들은 멸망할 운명을 지닌 사람이다. 그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① 그는 하나님을 대적한다(살후 2:4). ② 하나님의 자리에 자신을 올려놓는다(살후2:4). ③ 자기를 보여 하나님이라 한다(살후 2:4). ④ 불법한 자가 잠시 권세를 잡는다(살후 2:7) ⑤ 그의 권세는 예수님의 강림으로 인하여 폐하여 진다(살후 2:7). ⑥ 하나님께서 이 불법의 사람을 통한 유혹을 허락하시는 것은 알곡과 쭉정이를 가리는 절차이다(살후 2:11, 12). IV. 나가며 데살로니가전·후서를 통해서 드러나는 종말론은 다음과 같다. 예수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고 하늘로 올리우면서 그는 다시 오실 것을 약속하셨다. 성도들은 깨어있어 그날을 기다려야 하는 데, 그날은 도적같이 임한다. 그러나, 그날이 이르기 전에 이 땅에 '배도'와 '불법의 사람'이 권세를 잡는 시간이 존재한다. 주님의 날에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이 땅에 오시는 데 그때 먼저 주안에서 죽은 자가 먼저 일어나고 살아 남은 자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고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게 된다. 나는 바울을 통해서 복음의 능력을 보았다. 바울이 데살로니가에서 체류한 기간은 그리 길지 않다. 그렇기에 그곳에서 그가 증거한 복음은 정말로 간단한 것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복음에는 능력이 있다. 짧고 간단한 복음이었으나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성령을 받았으며(살전 1:5),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으며(살전 1:7), 그들의 믿음으로 인해서 고난이 그들에게 임했을 때, 그것을 인내하였다(살전 1:3). 복음이 복음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런 능력 때문이다. 또한 나는 바울이 자신의 양을 살피는 모습을 데살로니가 전서와 후서를 통해서 보았다. 그의 긴 전도여행중에서 그렇게 긴 부분을 차지하지 않았을 데살로니가. 그러나, 그의 사랑은 체류의 장단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영혼을 사랑하는 자였다. 늘 떠나온 곳을 기억하며 기도하는 자였다. 좋은 목자란 어떤 목자일까? 좋은 목자의 생각은 늘 양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차 있다. 바울은 그런 사역자였다. 떠나온 사역지의 양들을 기억하고 그들이 잘못된 길로 가지 않을 까 노심초사 걱정하며 기도했을 바울. 이 땅이 필요로 하는 사역자는 영혼을 사랑하는 자가 아닐까? 데살로니가 교회는 이후 안정을 찾았을까? 데살로니가후서의 다음편이 존재하지 않는 것을 보면 데살로니가 교회의 혼란은 이제 끝난 것으로 보인다. 바울은 이후로 이런 일이 또 발생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그들에게 말로나 사도의 편지로 가르침을 받은 유전을 지키라고 말했다(살후 3:15). 그리고, 또 다시 하나님께서 그들의 마음을 굳게 하시기를 기도했다(살후 3:17). 영혼을 사랑한 사역자 바울. 그의 위대함은 그가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이었고, 가말리엘의 제자였던 것,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난 것에 있지 않다. 그의 위대함은 예수님같이 울타리 밖의 양을 사랑한 것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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