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천주교와 마녀사냥
적그리스도에 의해 자행된 범죄
중세유럽이라고 하면 ‘카톨릭’, ‘십자군 원정’, ‘흑사병(페스트)’, ‘마녀사냥’ 등이 떠오를 겁니다. 이 네 가지는 중세 암흑시대를 상징하는 요소들로 각인되어 있는데요... 하지만 마녀사냥은 중세유럽의 암흑기를 대표한다고 하기에는 조금 문제가 있는 테마입니다. 왜냐면 마녀사냥은 13세기 초에 시작해 무려 18세기말까지 이어졌으며 그 최전성기는 중세시대가 아닌 16~17세기였습니다. 그럼 900만 명에 가까운 생명을 앗아간 광기가 600년이나 이어질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마녀사냥은 의학의 발달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갖습니다. 12세기부터 교황의 권력은 절정에 이르러서 유럽 전역의 국가들을 사실상 지배하는 형국이 됩니다. 이 시기에 4회에 걸쳐서 로마의 라테란 대성당에서 라테란 공의회(Lateran Council)가 열립니다(5회는 16세기에 열렸으니 논외로). 이 라테란 공의회를 자세히 살펴봅시다.
1차(1123년)
교황 칼릭스투스 2세 주재로 열린 서방 최초의 공의회. 성직서임권 논쟁에 종지부를 찍고 보름스협약을 인가하여 교회와 국가와의 관계를 명확히 하였다.
2차(1139년)
교황 인노켄티우스 2세가 소집. 대립교황(對立敎皇) 아나클레투스 2세의 잔당(殘黨)을 처리하고 브레시아의 아르노르드, 브류이의 피에르 등의 이단설(異端說)을 처벌했으며, 교회규율에 관한 30항의 카논(canon)을 의정했다. 이 회의에는 서유럽 전국가들이 참석, 프레나리아(완전한)공의회라 불렀다.
3차(1179년)
교황 알렉산데르 3세가 소집. 추기경 전체 투표수의 3분의 2 이상을 얻어야만 교황에 선출된다는 교황 선거 절차를 확정하였다. 또 이단들을 배제, 교회쇄신을 추진할 것 등이 결정되었다.
4차(1215년)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가 소집하였다. 알비파(派), 플로리스의 요아킴, 아말리크 드벤 등의 여러 이단을 처벌하고, 신자는 1년에 적어도 한번은 고백성사와 배령성체(拜領聖體)를 해야 한다고 규정함과 동시에, 성지회복을 위한 십자군 원정을 명령했다. 또 교회의 승인 없이는 치료행위를 할 수 없도록 규정했다.
마녀로 몰린 여성에게 고문을 가하는 종교재판소 광경
발가벗은 여체를 바라보는 사제의 시선에서
인간이란 존재가 쌓아 올린 이성의 허약함을 통감하게 된다. 탁자 위에 십자가가 놓여 있다.
여기서 가장 주목해야 할 것이 바로 1215년에 열린 제4차 라테란 공의회입니다. 4차 라테란 공의회는 십자군 원정을 명령한 것으로 유명해서 다른 부분들이 소홀하게 여겨지는데요. 여기서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는 교회의 승인 없이 치료행위를 하는 것을 금지합니다. 이것이 이후 벌어지는 마녀사냥의 불씨를 당기게 됩니다.
당시 유럽에는 오래 전부터 전해지던 민간의술이 존재했습니다. 주술적인 개념을 다분히 포함하고 있었지만 이러한 민간의술은 약초에 대한 지식과 인체에 대한 지식(주로 뼈 등), 그리고 출산에 대한 지식 등을 포함하고 있었습니다. 중의학이나 한의학과 상당히 비슷한 약초학의 일종입니다. 이러한 약초 지식을 지닌 사람을 빗커(Wicca)라고 불렀는데 이것은 고대영어로 ‘현명한 여자’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바로 마녀를 지칭하는 위치(Witch)의 어원입니다.
그런데 12세기에 이르면서 서양의학이 크게 발전을 이루면서 기존의 약초학과 대립하게 됩니다. 중세시대만 해도 학문의 중심이 교회와 수도원이었는데요. 이 때문에 서양의학을 배운 의사는 대부분이 성직자였습니다. 그리고 이런 성직자들에 의해서 치료 행위가 이루어지고, 이것이 곧 교회의 큰 수입원이 되었음은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약초학을 이용했고 아이를 낳을 때는 약초학에 정통한 산파를 불러서 아이를 낳았습니다. 이에 교황청은 의사들의 권익을 보호하고 교회의 의료 수입을 늘리고자 하는 목적으로 교회의 승인 없이 행해지는 치료행위를 금지하는 칙령을 발표한 것입니다.
당연한 것이지만 당시 신의 대리자인 교황이 발표한 칙령은 곧 신의 말씀이었습니다. 그것을 거역한다는 것은 곧 신의 말씀을 거역하는 것이고, 이것은 곧 이단행위가 됩니다. 바로 마녀의 탄생이었던 겁니다.
당시에는 남편을 잃고 과부가 된 여인들이 생계를 위해서 약초학을 배워서 치료사가 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 때문에 약초학의 지식을 지닌 치료사들은 대부분이 40세 이상의 노파였습니다(중세시대에는 평균수명이 낮고 노화가 빨랐기 때문에 40대 후반만 되어도 거의 노파였죠). 그리고 약초학에 정통한 노파들은 매일 중노동을 하는 농가의 여인들에 비해서 수명도 길었습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등 구부러지고 이빨은 다 빠진 마녀의 모습은 바로 이렇게 만들어집니다.
1233년 교황 그레고리우스 9세가 이단심문관을 제도화하고, 1318년 교황 요하네스 22세가 이단심문관에게 재판 없이 언제라도 죄를 판결해 단죄할 수 있는 권리를 내립니다. 이렇게 해서 이단심문관은 절대적인 권력을 지닌 존재로 부각됩니다.
13세기 초부터 시작된 마녀사냥은 그 표적이 주로 약초학 지식을 지닌 여성들에게 집중되었기 때문에 희생자 대부분이 노파나 남편을 일찍 여의고 혼자 사는 젊은 과부 등 주로 사회적 약자들이었습니다. 거의 100년 넘게 계속된 마녀사냥의 결과 로마 교회는 유럽의 전통 약초학의 씨를 말리는데 성공합니다. 이렇게 해서 교회는 유일한 의료시설이 됩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당초의 목적을 달성했기 때문에 이제 마녀사냥은 별 의미가 없어졌습니다. 그러나 마녀사냥을 통해 이익을 얻던 집단에게는 좀 달랐습니다. 100년 넘게 마녀사냥이 지속되면서 마녀사냥은 하나의 비즈니스로서 자리 잡습니다. 마녀 판정을 위한 각종 서적 산업, 각종 고문도구 산업, 화형식에 필요한 자재를 조달하거나 화형식을 집행하는 대리업자 산업 등 마녀사냥을 통해 이익을 창출하는 산업은 많았습니다. 그렇지만 당초 목표로 삼았던 대상들이 거의 사라져버린 상황에서 이 사업들은 유지되기가 힘들었죠. 그래서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리기 시작합니다.
12세기에 확립된 로마 교회법 중에는 이단 행위자에 대한 재산몰수 규정이 있었습니다. 이단으로 판정 받은 사람은 당연히 모든 재산이 몰수되었고, 심지어는 죽은 지 40년 이내에 살아 있던 시절에 행한 이단 행위가 발각될 경우 그 자손들에게 상속된 유산을 전부 몰수하는 규정까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재산은 당연히 교회에 귀속되는 것이었지만 그 재산을 몰수하는 당사자는 교회가 아닌 이단심문관이었습니다. 이런 끝내주는 사업모델을 구상해냈는데 안타깝게도 유럽에 엄청난 사건이 일어나면서 이런 수익모델은 제대로 구현되지 못하고 묻혀버립니다.
14세기가 되자 동서양의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아시아를 통해 흑사병이 전래된 것입니다. 1347년 콘스탄티노플에 상륙한 흑사병은 삽시간에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가 1350년까지 불과 3년 사이에 유럽 인구의 1/3이 흑사병으로 죽습니다. 중세유럽에 흑사병이 퍼지면서 사람들이 그것을 마녀의 소행이라고 여겨 힘없는 여성을 잡아 산채로 화형시키는 것이 우리가 갖고 있는 마녀사냥에 대한 일반적인 이미지인데요. 사실은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흑사병의 창궐로 마녀사냥은 한 동안 시들해집니다. 물론 흑사병이 갑자기 퍼진 것에 분노한 시민들이 집단 히스테리 증세를 일으켜 무고한 여성을 마녀로 지목해 화형하는 사례도 있었겠지만 그것은 16~17세기의 마녀사냥에는 비교도 안 되며 13세기에 성행했던 마녀사냥의 수준에도 미치지 못합니다. 흑사병이 유행하던 시기에는 전염병의 전파 속도가 너무 빨랐고, 교회의 기능이 사실상 정지되었기 때문에 마녀사냥은 오히려 주춤하게 됩니다.
흑사병은 농민뿐만 아니라 귀족이나 성직자, 왕족 등 닥치는 대로 목숨을 앗아갔습니다. 유럽 인구의 1/3이 죽었다는 것은 당시 유럽을 유지하던 인프라가 거의 다 소멸되었다는 이야기이며, 당연히 마녀사냥이라는 비즈니스를 통해 이익을 취하던 집단도 대부분 소멸했음을 의미합니다.
흑사병의 공포가 지나가고 15세기가 되면 대항해시대가 열립니다. 대항해시대를 통해 유럽은 전세계와 교역하게 되고, 이를 통해서 유럽은 눈부신 경제 성장을 이룩합니다. 그러나 교역은 경제의 발전과 함께 새로운 문화와 종교도 함께 가져왔습니다. 이슬람을 비롯한 타종교의 확산, 기독교 내부에서 계속되던 분리주의 운동 등에 두려움을 느낀 교회에서는 1484년 교황 인노켄티우스 8세가 ‘가장 바람직한 것에 관하여’라는 마녀박멸교서 등을 발표하며 이단에 대한 규정을 강화하는 등으로 맞섭니다. 이런 시기에 한 책이 출판됩니다.
끔찍한 고문
도미니크회의 이단심문관이었던 ‘앙리 엥스티토리스’와 ‘자크 스프렝거(야곱 슈프렝겐)’가 쓴 <마녀의 망치>라는 책이 1487년에 나온 것입니다. 이 책은 두 이단심문관의 경험을 바탕으로 쓰여진 마녀에 대한 연구서였습니다. 이 책에는 성교불능, 남근탈락, 유산, 불임은 물론이고 자연재해와 병충해까지 마녀의 소행으로 기록하고 있었습니다. 이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전 유럽에는 다시금 마녀의 공포가 형성되었고 두 이단심문관은 직접 유럽 전역을 돌아다니며 마녀사냥을 합니다. 이 책의 출판은 마녀사냥의 대상자가 여성에서 남성으로까지, 힘없는 자에게서 권력과 재산을 지닌 귀족이나 관리에게까지 확산되는 계기가 됩니다.
물론 <마녀의 망치>는 종교적 맹신에 의해서 쓰여진 책입니다. 그런데 이 책과 함께 불어닥친 마녀사냥의 열풍은 상당한 희생자를 내는데, 이단으로 판정된 사람의 재산을 몰수하는 규정은 이때도 유효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재산 몰수의 집행자는 당연히 이단심문관이었기 때문에 이단심문관은 그 과정에서 상당한 부를 축적할 수 있었습니다. 16세기가 되면서 마녀사냥은 또 다시 거대한 비즈니스로 발전합니다.
잔인한 고문
‘이단심문’(inquisitioher eticae pravitatis) 제도는 교황 그레고리우스 9세에 의해서 창설되었습니다. 이 임무를 맡는 적격자로 ‘도미니크 수도회’가 뽑혔습니다. 이단심문관(inquisitor)은 교황이 내린 칙서로 위신을 부여받아 이단추궁에 관한한 교황대리로서 교황권의 직접적인 엄호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의 지배는 주교와 관리보다 우월한 동시에 카톨릭 국가 어느 지역에서도 절대적 권력과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이단 심문 활동에는 각국의 세속권력이 관계되어 있었습니다. 질서를 어지럽히는 이단자를 처벌하는 것은 국가에게 있어서도 중요한 문제였지만 실질적인 이유는 이단자의 몰수재산을 목표로 교회와 국가가 이단적발을 서로 다투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11, 12세기 무렵부터는 이단자를 재판하는 교회 법정에 ‘마녀’의 모습이 어른거리기 시작합니다. 재판받는 이단자의 죄상 중에 마녀적인 행위가 드러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1239년 5월 29일에 샹파뉴에서 이단자 약 1백 80명이 불태워졌는데 그 죄상에는 “악마의 도움을 요청했다”라는 마녀 행위가 첨가되어 있었고, 1275년에는 툴루즈에서 60세의 노파가 화형을 선고받았는데, 마녀가 악령과 성관계를 맺어 귀신 아들을 낳아 가까운 묘지에서 파낸 젖먹이의 살로 그 아들을 키웠다는 하는 행위, 1303년에 루브르의 입버회의는 프랑스왕 필립과 다투던 교황 보니파티우스 8세를 이단자로 고발했는데, 교황이 ‘심부름하는 악마’를 이용해 여러 가지 정보를 수집하거나 점장이나 예언가 등과 관계를 가진 마녀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단 퇴치의 열의에 불타고 있던 이단심문관들은 그 활동범위를 마녀에게까지 확대시켜나 갔습니다. 교황 요하네스 22세의 교서(1318년 2월 27일자) “언제, 어디에서라도 마녀재판을 개시하고 계속하고 판결하는 충분하고 완전한 권능을 당신들 각자에게 부여하는 것이다”는 마녀사냥 강화령을 발표함으로써 본격적인 출발을 하였습니다.
마녀재판은 이단심문으로서 출발했고, 이러한 것을 정당화시켜주었던, 즉 마녀→이단자의 증명을 수월케 해준 것이 앞서 소개한『마녀의 망치』(1487년)라는 책이었습니다. 이것은 마녀재판의 확립을 위해 씌어졌는데, 마녀 재판관이 지녀야 할 이론과 실천 양면에 걸친, ‘마녀의 모든 것’이었습니다. 이 책은 18절지의 포켓판으로도 만들어져 마녀 재판관들에게 널리 애용되었습니다.
“마녀는 악마와 맹약을 맺어 악마를 신하처럼 따르고, 그 보상으로 악마의 마력이 주어져 초자연적인 요술을 행할 수 있다.” 이러한 마녀에는 고상한 사상가에서 아래로는 약초를 따는 노파에 이르기까지 빈부귀천, 나이의 많고 적음, 남녀 성별을 불문하였습니다. 마녀 사냥의 희생자 중에 약 80%는 여자였고 그 중 대부분은 45세 이상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