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1-12-20 16:39
[1]에베소서가 보여주는 그리스도인의 영적 싸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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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웹섬김이
조회 : 3,211  

 

에베소서가 보여주는 그리스도인의 영적 싸움

 

I. 들어가는 말

 

에베소서의 마지막 부분(주로 6:10-20)은 땅 위의 성도들이 직면한 영적 싸움의 현실을 자각시키는 방식으로 마무리되고 있다. 에베소서의 시작이 우주적이면서도 동시에 현실적 의미가 있는 영적 실재에 관한 내용을 다루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 결론부에서도 역시 우주적 성격과 현실적 측면을 동시에 가지는 영적 투쟁의 주제를 다루고 있다. 많은 면에서 이 부분은 앞부분과의 연장선 위에 놓여 있다. 영적 투쟁이라는 상황 설정은 새로운 것이지만, 거기에 사용된 주된 개념들은 앞에서 거의 다 소개된 것들이다. 따라서 이 부분은 새로운 개념의 도입이 아니라 새로운 상황의 제시를 목적으로 한다.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그리스도인의 다양한 자아상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특히 이 결론부에서는 그리스도인의 전투적 자아의 측면을 부각시키고 있다. 그리스도인의 새 창조적 자아와 그것이 가지는 지위, 존귀, 능력 등의 함의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새 현실로 경험되고 있다. 그러할지라도 그 새로운 지위는 유토피아적 환상의 세계 속에서 향유되는 것은 아니다. 도전과 공격이 그치지 아니하는 이 세상의 현실 속에서 새롭게 된 그리스도인은 그 새 사람의 지위를 믿음의 싸움을 통해 지켜가야 한다.

이것은 예상치 못하였던 전혀 새로운 측면인가? 바울은 에베소서의 앞부분에서 달콤한 이야기만 하다가 끝에 가서 갑자기 껄끄러운 이야기를 끄집어내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오히려 바울의 구원관은 지극히 현실적임을 보여준다.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 실제로 어떤 사람인가 하는 점은 실전 속에서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싸우는가를 볼 때 가장 잘 검증될 수 있다. 더군다나 이 싸움은 승리를 쟁취하고 결정짓기 위한 싸움이 아니다. 이미 그 승리는 결정되어 있다. 성도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얻은 것들을 다시 빼앗길지도 모르는 그런 싸움이 아니다. 오히려 그 얻은 것을 유지하기 위한 싸움이다. 그 얻은 것이 얼마나 탁월한 것인지를 검증해보는 싸움이다. 그런 점에서 성도의 영적 싸움은 ‘은혜의 실행’(grace in exercise)을 위한 싸움이다.

그런 면에서 바울은 은혜로 말미암아 지어진 새 사람의 자아상과 관련하여 에베소서의 앞부분에서 말하였던 내용을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영적 싸움의 주제를 통해 가장 적절하게 마무리하고 있다. 은혜는 우리를 수동성과 나태로 이끄는 것이 아니라 가장 적극적인 능동성과 팽팽한 긴장 속으로 이끈다. 은혜는 우리의 영적 무장해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영적 중무장을 의미한다. 우리가 취하여야 할 하나님의 전신갑주는 우리가 옷 입어야 할 그리스도의 또 다른 이름일 따름이다.

 

 

II. 영적 싸움의 현실과 대적의 실체

 

바울은 6:10에서 새로운 주제를 도입하기 이전까지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들이 부여받은 가장 놀라운 지위와 그 탁월한 삶의 방식을 이야기하였다. 만일 바울이 여기에서 그친다면 성도들은 큰 위험에 빠질 수도 있다. 자신들이 얻게 된 것에 안주하려 하면서 그들에게 닥쳐오는 도전들에 무방비가 될 뿐만 아니라, 그런 상황 자체를 이해할 수 없게 된다. 왜 예수를 믿게 되었는데 주변의 상황들이 더 좋아지기는커녕 더 어렵고 복잡하게 되어가고 있는가? 왜 나를 괴롭게 하는 사람들이 더 많아지고 전에 없던 유혹들이 나를 뒤흔드는가? 이런 상황을 예상하면서 바울은 성도들의 삶 속에 일어난 변화를 양면에 걸쳐서 말하지 않을 수 없다. 한 면에서 그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히어지는 영광스러운 일이지만, 또 다른 한 면에서는 하나님의 일을 미워하고 대적하는 사탄 진영의 맹렬한 공격 앞에 놓이게 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윌리엄 거널(William Gurnall)이 잘 표현하는 것처럼, 구원받는 한 영혼을 두고 하늘의 기쁨의 종이 울려 퍼지는 것과 동시에 지옥의 비상벨이 요란스럽게 울리는 것이다.

이런 상황은 성도들의 개인적 선택 사항이 아니다. 이는 바울이 바라보고 있는 것처럼 우주론적 차원의 영적 실재와 질서에 기인하는 일이다. 한 면에서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작정과 경륜과 일하심이 있다. 이에 반하여 또 다른 한 면에서는 하나님의 일을 대적하는 세력이 존재하고 또 활동한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일하심의 결과로 그에게 속하는 자가 되는 것을 의미하지만, 이와 더불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영적 세력의 적대행위 앞에 서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인이 된다고 하면서 자신이 누리기를 원하는 하나의 면만을 선택할 수는 없는 것이다.

바울은 그리스도인이 이런 상황 속에 임하게 됨을 알기에 그들이 빠질 수 있는 가장 위험한 사태가 무엇인지를 지적해주지 않을 수 없다. 6:11에서 바울은 “마귀의 궤계”를 언급한다. 이것이 현실적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이 이를 맞서 대적하기 위해서는 적절한 조치가 필요한 것이다. 사탄 세력의 교묘하고 집요한 전략적 공격이 이루어지고 있는데도 성도들은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스스로 무장해제하고 있다면 이것처럼 위태로운 일도 없을 것이다. 바울은 이런 면에서 놀라운 현실 감각과 균형 감각을 갖추고 있음을 본다.

마귀는 앞서 2:2에서는 ‘공중의 권세 잡은 자’(kata ton archonta tês exousias tou aeros, 엡2:2)라는 이름으로 지칭되기도 하였다. 여기서 ‘공중’은 오늘날 우리가 이해하는 대기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고대 유대인들의 인식 세계 속에서 마귀의 주거 및 활동의 영역으로 여겨졌던 천상과 지상의 중간 영역을 가리킨다. 마귀는 이 영역으로부터 ‘흑암의 권세’(exousia tou skotous, 골1:13)를 가지고 지상의 사람들 속에 악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이 영역의 통치자인 마귀는 이 밖에도 ‘귀신들의 왕’(마9:34, 12:24, 막3:22, 눅11:15), ‘이 세상 임금’(요12:31, 14:30, 16:11), ‘이 세상 신’(고후4:4) 등의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이 마귀의 ‘궤계’(methodeia)에 대해서는 바울이 다른 서신들 속에서도 다양하게 그 구체적 양상을 소개하고 있다. 마귀는 바울의 복음의 길을 방해하기도 하며(살전2:18), 성도들을 여러 가지 모습으로 시험하기도 한다(고전7:5, 고후2:1, 살전3:5). 자신을 빛의 천사로 가장하기도 하고(고후11:14), 사람들 앞에 여러 가지 올무들을 놓기도 한다(딤전3:7, 딤후2:26). 바울은 이런 마귀의 간교한 술책들을 통틀어 부정적 의미에서의 methodeia(보다 중립적 의미의 methodos와 구별해서)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이처럼 궤계로 무장한 마귀를 대적하는 일이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이런 궤계에 대한 인식과 대처가 필요하며, 또 이와 맞서 싸우기 위한 특별한 무장이 필요한데, 바울은 구체적으로 이것을 소개하려 하고 있다.

바울은 성도들이 직면하고 있는 싸움의 성격이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라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 대한 것임을 밝힌다. 만일 이 싸움이 혈과 육에 대한 것이라면 우리의 혈과 육을 보다 강하게 단련하거나 혈과 육을 멸할 수 있는 무기를 갖춤으로써 이 싸움에 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맞서야 할 상대는 그런 종류가 아니다.

바울은 6:12에서 전치사 pros를 사용해서 성도들이 맞서야 할 네 가지 마귀적 세력의 실체들을 따로따로 언급하고 있다(pros tas archas, pros tas exousias, pros tous kosmokratoras, pros ta pneumatika tês ponêrias). ‘정사들’(archai)과 ‘권세들’(exousiai)은 흔히 한 짝으로 많이 나타나는데, 이에 대해서는 엡1:21과 3:10, 골1:16, 2:10, 15 등에서 그 언급을 찾아볼 수 있다. 엡1:21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모든 정사(pasês archês)와 권세(exousias)와 능력(dynameôs)과 주관하는 자(kyriotêtos)와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pantos onomatos) 위에 뛰어나게” 되셨다(1:21). 그리고 3:10에서는 하나님의 감추었던 비밀의 경륜이 “정사와 권세들에게”(tais archais kai tais exousiais) 알려졌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정사와 권세 등에 대한 언급은 1세기의 유대인들의 일반적 인식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추상명사가 아니라 인격화된 형태를 취하고 있다. 이 존재들은 엡1:21이나 3:10의 경우에는 보다 일반적인 의미에서 영적 또는 천사적 존재들을 지칭하고 있지만, 6:12에서는 악한 영적 존재들에 해당하는 표현으로 그 의미가 제한되어 사용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단10:13, 20 등에서 보는 것처럼, 천사적 존재들에게 민족들에 대한 권세를 부여하심으로써 천상에서 이들에게 이루어지는 일들이 지상에서 민족들 속에 이루어지는 일에 구체적인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바울은 정사나 권세, 능력이나 주관자 등에 대해 명확한 정의를 주고 있지는 않지만, 당대의 통용되는 용례를 따라 세상의 일들 배후에서 작용하는 영적 존재들의 활동을 이런 표현들을 통해 나타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성도의 영적 싸움은 단지 눈에 보이는 현상들만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그 현상들 배후에서 작용하는 악한 영적 실체들인 정세들과 권세들에 대항하여 맞서는 싸움이다. 바울은 그리스도인이 맞서야 할 대상으로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pros tous kosmokratoras tou skotous toutou)”을 또한 언급하고 있다. 골 1:13에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흑암의 권세’(exousia tou skotous)로부터 건져내셨다고 말한다. 흑암의 영역인 이 세상 배후에서 그 권세를 행사하는 ‘세상 주관자’는 다름 아닌 마귀이다. 보통 ‘세상 주관자’(kosmokrator)는 단수로 많이 쓰이지만, 바울은 이곳에서 복수를 사용하고 있다. 곧 마귀에게 속한 악한 우주적 통치자들을 가리키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언급하고 있는 ‘악의 영들’(pros ta pneumatika tês ponêrias)이라는 표현은 보다 분명하게 이 영적 존재들이 악한 목적들을 수행하는 영적 행위자들임을 나타내고 있다. 바울은 이런 다양한 이름들을 통해서 사탄 진영에 속한 자들의 속성이나 활동 양상 등을 보여주고 있다. 어떤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이 표현들이 사탄 진영에 속한 자들의 위계질서를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중요한 것은 이런 악한 영적 세력들과의 싸움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이제 우리가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할 영역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구약 시대에서는, 예를 들어 다윗의 경우를 볼 때, 사울의 배후에서 역사하는 악령 자체에 대해서는 속수무책이었다. 악령의 시달림을 받는 사울 왕을 수금 연주를 통하여 현상적으로 치유할 뿐, 근원적 치유는 그에게 미치지 못하는 영역에 놓여 있었다. 그러나 신약 시대에 와서 이런 상황은 근본적으로 바뀌게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이 세력들과의 싸움에서 승리하셨고, 이제 이 세력들은 결박 아래 놓이게 되었다. 그 활약이 여전히 계속되고 있고, 또 우리가 그 파괴적 현실을 무시할 수 없다 할지라도 그 힘은 제한된 것일 뿐이고, 모든 것이 하나님의 허락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그리스도를 힘입어서 드러나는 현상들 배후에서 작용하는 악한 세력들과의 직접적 대결에 임하고 그들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물리칠 수 있게 된 것이다.

20세기 초반에 칼 바르트에게 매우 큰 실제적 영향을 주었던 블룸하르트 부자의 경우에서 우리는 하나의 실례를 발견한다. 요한 블룸하르트(Johann C. Blumhardt)가 뫼틀링엔의 목사로 있을 때 그 마을에 고트리빈 디투스라는 귀신 들린 여아가 있었다. 악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고통당하는 이 여아를 지켜보며 무기력 가운데 빠져 있던 블룸하르트는 드디어 1842년 정면으로 이 문제에 직면할 것을 선포하였다.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지금까지 우리는 마귀가 무슨 짓을 할 수 있는지 충분히 보았다. 이제는 주 예수의 능력을 볼 차례다.” 예수 그리스도를 힘입은 그들의 싸움은 2년간이나 이어졌고 마침내 이 여아의 입을 통해 “예수가 승리자다! 예수가 승리자다!”하는 외침이 터짐과 함께 마귀가 떠나갔다. 이 일을 통해 이루어진 회개와 부흥의 불길은 요한의 아들 크리스톱(Christoph Blumhardt)에게까지 이어지면서 메말랐던 독일 교회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은 바가 있다.

 

 

III. 그리스도인의 영적 싸움의 기본 원리

 

바울은 영적 싸움에 임하고 있는 성도들이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는”(6:10) 것이 마귀의 궤계를 대항하는 기본 요건임을 강조한다. 바울이 이 문장 속에서 사용하고 있는 수동태 명령형 동사는 ‘너희가 능력있게 되라’(endynamousthe)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그렇게 능력 있게 될 수 있는 조건은 첫째는 ‘주 안에서’(en kyriô)이고, 둘째는 ‘그 힘의 능력 안에서’(en tô kratei tês ischyos autou)이다.

 

첫 번째 조건과 관련해서는 우리는 엡 1:21을 상기하지 않을 수 없다. 비록 세상 가운데 “모든 정사(pasês archês)와 권세(exousias)와 능력(dynameôs)과 주관하는 자(kyriotêtos)”가 있으며 “모든 이름(pantos onomatos)”이 있을지라도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이 모든 것들 위에 “뛰어나게(hyperanô)” 되셨다. 논란이 있기는 하지만, 고대의 주술 문서들 속에서 영적 세력들의 거처가 천상과 지상의 중간영역인 ‘위’(above)라고 나타나는 점에 비추어 볼 때, 예수 그리스도는 ‘훨씬 위’(hyperanô = high above)에 위치하게 되신 것이라는 점이 일말의 개연성을 가지기도 한다. 정사들과 권세들, 능력과 주관자들의 활동이 계속되고 있지만, 그들은 모두가 이제는 그리스도의 권세 아래 복속되었다. 마침내는 그리스도의 온전한 통치가 이루어질 때까지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세력들에 대한 승리의 싸움에 부름받고 있다.

그렇다면 성도들의 영적 싸움에서의 승리의 원천은 분명해진다. 하나님의 오른편에 높이 들려 앉으사 세상 모든 권세자들과 이름들의 통치자와 주권자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만이 우리가 세상의 악한 권세들을 대적할 힘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능력있게 된다.

 

두 번째 조건으로 바울은 우리가 ‘그의 힘의 능력 안에서’ 능력있게 된다고 말한다. ‘그의 힘의 능력’이라는 표현은 바울이 앞서 엡 1:19에서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라고 하였을 때 사용했던 바가 있다. 우리는 이 구절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엡 1:19 속에는 능력과 관련된 네 개의 단어들이 연속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 네 단어는 Louw & Nida의 사전에서도 보여주는 것처럼 같은 의미 범주 안에 속하며, 그 각각은 매우 미묘한 의미의 차이를 가지고 있다.

가장 먼저 나타나는 dynamis는 능력과 관련하여 신약에서 가장 빈번히 사용되는 단어이며, Louw & Nida 사전은 이를 “어떤 기능을 수행하면서 효력을 발휘할 수 있는 잠재력”으로 정의하고 있다. 이것과 자주 짝을 이루는 말이 energeia이다. Hoehner가 소개하고 있는 것처럼, Aristotle은 dynamis를 ‘잠재적 능력’으로 energeia를 ‘현실적 능력’으로 구분하고 있다. 신약에서 전부 8번 나타나고 있는 energeia는 에베소서에서 세 번(1:19, 3:7, 4:16)을 포함하여 대부분 하나님과 관련하여 사용되며 단 한 번 ‘사단의 역사’(살후2:9)를 표현할 때 사용되고 있다. 하나님의 모든 잠재적 능력(dynamis)은 그의 현실적 역사(energeia)를 통해 표출되고 확인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능력과 관련된 또 다른 단어로 kratos가 사용되고 있다. LXX에서 전부 51회, 신약에서는 총 12번이 사용되는데, energeia처럼 대부분이 하나님과 관련하여 쓰이고 있고, 단 한번(히2:14) 마귀와 관련하여 사용되고 있다. 이 단어는 주로 물리적으로 나타나는 강한 힘, 또는 지배력, 통제력 등의 의미가 있다. 누가 지배하느냐에 따라 theocracy가 될 수도 있고 democracy가 될 수도 있다.

또 하나의 능력 관련 단어는 ischys인데, 이 단어는 LXX에서 dynamis 다음으로 빈번히 사용되고 있고, 여러 가지의 히브리어 단어들이 이 말로 번역이 되고 있다. 신적 존재에만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나 짐승의 경우에도 폭넓게 사용되며, 주로 그 타고난 힘 또는 소유하고 있는 힘을 나타낼 때 사용되는 단어이다. 신약에서는 10번 나타나고 있고, 에베소서에서는 1:9과 6:10에서 두 번 나타난다.

이 네 단어가 서로 어떻게 의미의 차이를 가지는지 설명하기 위해 Markus Barth는 각 힘이 작용하는 각각의 상황들을 설정한다. dynamis는 어떤 계획이나 약속, 또는 이미 시작된 것을 이루어내는 힘으로, energeia는 물리적 힘처럼 인정사정없이 밀어붙이는 힘으로, kratos는 저항하는 힘 또는 방해물이나 방해자를 극복하는 힘으로, ischys는 실제적 힘의 실행을 나타내는 말로 설명하고 있다.

아마도 Hoehner의 설명이 좀 더 실제로 다가올 것이다. 그는 불도저의 예를 들어 이 네 단어의 관계를 설명한다. 불도저는 그 자체로서 모든 총체적이며 잠재적 능력(dynamis)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불도저가 가진 타고 난 힘(ischys)을 그 엔진이 작동하여 앞으로 움직이는 것을 볼 때 그것이 가진 통제력(kratos)을 느낄 수 있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불도저가 돌이나 나무를 실제로 넘어뜨리는 것을 볼 때 그 실제적 능력(energeia)을 인식할 수 있게 된다.

사도 바울은 엡 1:19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기 위해 힘과 관련된 이런 다양한 뉘앙스의 단어들을 아낌없이 사용하고 있는 것을 본다. 그러면 이 단어들은 서로 어떻게 배열이 되어 있는가? 우선 성도들이 반드시 알아야 할 것으로 바울이 간구하고 있는 세 가지 내용 가운데서 세 번째가 19절에 나타나는 것처럼 “(그의) 능력(dynamis)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인지를 아는 것이다. 이 능력은 우리말 번역이 오도하기 쉬운 것처럼 “우리에게 베푸신 (우리의) 능력”이 아니다. 원문에는 하나님을 가리키는 ‘autou’가 붙어서 이것이 하나님의 능력임을 명확히 하고 있다. 이 능력의 특성은 표적에 못 미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표적을 넘어가는(hyperballon) 위대함(megethos)을 그 특성으로 가진다. 그 어떤 한계도 뛰어넘는 위대한 하나님의 능력을 우리가 알아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능력은 막연하고 추상적이며 무정향적인 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믿는 우리를 향한’(eis hêmas tous pisteuontas) 것이다. 곧 하나님의 능력이 향하는 대상이 누구인지를 보여주고 있다. 바울은 이 능력이 성도들에게 이양되었다거나 성도들의 소유물로 주어졌다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믿음으로 하나님을 향하여 나아가는 성도들에게 이 하나님의 능력이 가용한 것이 되었음을 말하고 있다. 소유적인 것이 아니라 관계적 능력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를 향하여 베푸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우리는 그분을 믿는 믿음 안에서 누리고 활용할 수 있게 된다.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라고 번역된 문구는 ‘믿는 우리’에 연결되기보다 ‘하나님의 능력’에 대해 앞서(헬라어 본문의 어순 상) 말하였던 것을 수식하는 문구로 보는 것이 더 낫다. 곧 우리가 그토록 위대한 하나님의 능력을 어떤 방식으로 알 수 있느냐에 대한 부가적 언급이라 볼 수 있다.

다소 어려운 문제는 이 문구 안에 사용되고 있는 소유격들을 어떤 방식으로 연결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먼저 우리는 “역사하심을 따라”(kata tên energeian) 하나님의 능력을 알 수 있게 된다. 곧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이 포함하는 모든 무한한 잠재적 능력은 그 능력의 현실적 표출인 ‘역사’(energeia) 속에서 우리의 인식의 대상이 된다. 우리는 그 역사하는 힘을 볼 때 하나님의 무한한 능력이 어떤 것인지를 알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이 energeia 뒤에는 두 개의 소유격이 따른다. tou kratous와 tês ischyos (autou)가 그것이다. 이 두 어구의 배열에 따라 우리는 두 가지 다른 결과를 가지게 될 것이다. tou kratous가 그 앞의 energeia를 수식하는 것으로 보면 ‘그의 힘의 강력한 역사를 따라’가 될 것이고, 이 경우 ‘그의 힘’(tês ischyos autou)이 독자적으로 부각이 된다. 이와 달리 tou kratous가 그 뒤의 ischys의 수식을 받아 다시 이 전체가 energeia를 수식하는 것으로 보면 ‘그의 힘의 강력의 역사를 따라’가 될 것이다. 이 경우 energeia에 집중적으로 강조점이 모으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둘 중 어느 것을 취하든 큰 차이는 없겠지만, 둘을 짝으로 언급하는 관습을 따른다면 kratos와 ischys를 연결하고 dynamis와 energeia를 연결할 수 있는 후자의 경우가 더 적절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무한한 잠재적 능력을 그의 힘이 실제로 작용하는 차원에서의 그 현실적 능력의 실현을 따라 알 수 있게 된다.

바울이 엡 1:19 속에서 능력과 관련된 언급을 하는 것은 좁은 문맥 속에서 보면 에베소 교인들을 위한 그의 기도문(1:16-23) 속에 이것이 포함된다. 바울이 기도하는 가장 중심적인 간구는 하나님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시기”를 구하는 것이다. ‘정신’으로 번역된 17절의 pneuma가 인간의 영을 가리키는 것인지 아니면 성령을 가리키는 것인지에 대해 많은 논란이 있다. 하나의 통일된 견해를 가지기는 어렵겠지만, 우리는 많은 학자가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이를 성령으로 보는 것이 가장 적절할 것으로 본다. 이는 17절 말미의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라는 문구와도 관련이 있다. 이 문구는 독립된 간구의 제목이 아니라 앞에 나타난 주된 간구문에 따르는 하나의 부가적인 전치사구(en epignôsei autou)로서, 지혜와 계시의 ‘성령’이 밝혀주시는 일들이 속한 영역, 또는 범위가 무엇인지를 나타내고 있다. 곧 하나님의 지식에 속하는 일들의 범주 안에서 그는 우리를 가르쳐주실 것이다.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깊은 것을 친히 통달하시기 때문에(고전2:10) 이것을 우리에게 능히 밝혀주실 수 있는 것이다.

우리에게 이런 지혜와 계시의 성령이 주어짐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과 그의 행하시는 일들에 대해 알아야만 할 것을 바르게 알 수 있게 된다. 여기에는 세 가지가 포함되는데, 이 세 가지는 각각 tis, tis, ti로 구분이 되어 서로 연결되고 있다.

 

첫 번째의 것은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고, 두 번째는 그의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며, 세 번째는 우리가 앞에서 보았던 것처럼 그의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인지를 아는 것이다.

이 세 번째의 내용은 20~23절에서 더 확장되어 설명되고 있다. 곧 하나님의 탁월한 능력의 증거가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려 하는 것이다. 그 능력은 일차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속에서 입증되었다. 하나님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일으키심으로 종말론적 새 전기를 역사 속에 도입하셨다. 그뿐만 아니라 그를 모든 정사와 권세와 피조물들 위에 높이심으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일을 하였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능력의 증시 속에 교회가 위치한다.

이 교회의 정체성과 존귀는 2장 속에서 더욱 상세히 진술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키고 그의 우편에 앉히신 하나님의 능력(엡1:20)이 동일하게 믿는 자들 가운데 역사함으로 그들을 그리스도와 ‘함께 일으키사’(synêgeiren) 하늘에 ‘함께 앉히셨다’(synekathisen)(엡2:6).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귀 속에서 입증되었던 하나님의 능력이 이제는 동일하게 교회의 존재와 그 존귀의 원천이 되고 있다. 하나님의 능력을 떠나서는 우리가 교회의 존재와 존귀를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이처럼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세상 속에 존재하고 그 사명을 감당하며 악한 세력들과의 영적 싸움을 감당해가는 모든 일의 배후에는 하나님의 능력이 놓여 있다. 이것이 없이는 교회의 존립 근거가 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높아지심도 있을 수 없었고, 교회 자체의 종말론적 존귀와 사명도 있을 수 없으며, 영적 싸움에서의 승리도 보장될 수 없다. 그러므로 바울은 성도들이 이 능력을 더 온전히 알고 힘입게 되기를 위해 간구하고 있다.

바울은 엡 3:14 이하에 나타나는 두 번째 기도문 속에서 하나님께서 성도들의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기를 기도하고 있다. 강건하여지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 바울은 kratos에서 파생된 동사 krataiôthênai를 사용하고 있다. 그들은 모든 것을 대항하여 맞설 수 있도록 강하여져야 한다. 그리고 그들이 강하여지기 위해서는 ‘능력으로’(dynamei) 그와 같이 되어야 한다. 여기에는 능력의 여격이 사용되고 있는데, 이 경우 수단의 여격으로 이를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그 능력의 원천이 하나님임을 밝히기 위해 바울은 이 구절 속에서는 능력과 성령을 연결하고 있다. ‘우리는 그의 성령으로’(dia tou pneumatos autou) 속사람이 강하여짐을 입게 되는 것이다.

이런 맥락 속에서 바울은 성도의 영적 싸움의 상황을 언급하면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힘의 강력 안에서’(en tô kratei tês ischyos autou) 능력있게 된다는 것을 언급하고 있다. 이 경우에는 dynamis와 energeia의 짝 대신에 kratos와 ischys의 짝이 사용된 예이다. 그리스도께서 자기 앞의 모든 난관을 물리치고 승리하신 것처럼, 그리스도인들이 그의 ‘힘의 강력’을 힘입을 때(오직 그런 조건 아래서만!) 우리 또한 우리 앞의 싸움을 감당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IV. 그리스도인의 무장: 하나님의 전신갑주

 

그러면 이제 마귀의 세력들을 대적하기 위해 성도들이 취하여야 할 영적 무장이 무엇인지를 살펴보자. 바울은 이를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panoplia)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panoplia는 어원상으로는 ‘전체’를 뜻하는 pan과 ‘무기들’을 뜻하는 hopla가 합쳐진 말이다. 로마 군인들의 경우에는 라틴어로 omnia arma에 해당하는 말이 될 것이다. 보통 로마 군인들이 완전 무장을 하는 데는 바울이 언급하고 있는 여섯 가지 무기나 장구 외에도 창, 정강이 보호대 등이 더 포함된다. 바울이 무기들 전부를 언급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과 또 군인들의 무장이 때로 그 위용을 과시하기 위한 목적임을 들어서 마르쿠스 바르트(Markus Barth)의 경우는 panoplia라는 말을 ‘위풍당당한 갑주’(the splendid armor)로 번역하기도 한다. 그러나 바울이 여기서 군인들의 무기 전부를 묘사하는 것 자체가 그의 목적이 아니라는 점과 또한 그가 무기들의 장식용 착용보다는 실제적 활용을 염두에 두고 있다는 점에서 바르트의 대안 제시가 그다지 매력적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1. 무장의 목적

 

먼저 우리는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여야 할 이유에 대해 바울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주목할 필요가 있다. 바울은 6:13에서 앞서 11절에서 사용했던 ‘입으라’(endysasthe)라는 명령형 동사 대신 ‘취하라’(analabete)라는 명령형 동사를 사용하고 있다. 전자가 일상적 상황 속에서 사용되는 동사라면, 후자는 그 포커스를 좀 더 구체화해서 전투적 상황을 반영하는 동사이다. 바르트는 이 말이 실전에 투입되는 군사들에게 최종 준비 상태를 점검토록 할 때 사용되는 전문적인 군사적 의미를 담고 있다고 지적한다.

이 전신갑주를 취해야 할 목적을 바울은 두 가지로 제시하고 있다. 첫째는 ‘대적하기’(anti-stenai) 위함이며, 둘째는 ‘서기’(stenai) 위함이다. 앞의 표현은 성도들 앞에 마주하고 있는 어떤 상대와 대치하고 있는 상황을 나타내며, 뒤의 표현은 우리가 결코 뒤로 물러날 수 없는 자리에 임하여 있음을 나타낸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우리가 선 자리를 끝까지 사수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천로역정>에서 존 번연은 우리가 물러날 수 없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이렇게 형상화하고 있다. 겸손의 계곡에 이른 기독도(Christian)는 그곳에서 대적 아볼리온(Apollyon)과 마주치게 된다. 그를 보고 두려움에 사로잡힌 기독도(Christian)는 도망을 갈 것인지 아니면 그 자리를 지킬 것인지 잠시 망설인다. 그러나 자신이 도망가기 위해 등을 돌리게 될 때 갑옷의 등 쪽이 비어있다는 것을 생각하게 된다. 따라서 아볼리온의 화살이 바로 그곳을 찌르게 되리라는 것에 생각이 미치자 그는 도망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 자리에 서서 자신의 자리를 지키지 않을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물론 로마 군인들 군장의 모습을 정확히 반영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로마 군인들의 갑옷은 등까지 감싸게 되어 있다. 다만 번연은 이 이야기를 통해 우리가 ‘마주 서고’ 또한 ‘서는’ 일의 상황이 무엇인지를 보다 쉽게 다가오는 좋은 이미지를 통해 우리를 설득시키려 하고 있다. 물러서는 것은 우리의 가장 큰 약점을 보이는 일이 된다. 그리스도인이 된 뒤에 예상치 못하였던 여러 가지 어려움이 생긴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물러서지 아니하고 굳게 설 수 있는 것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전신갑주가 있기 때문이다. 완벽한 무장을 갖추고 있는 이상 우리는 얼마든지 대적을 맞설 수 있고, 또한 우리의 자리를 굳건히 지킬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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