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3-10-10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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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좋은 시절이기를 바래보지만: 오늘의 한국교회 설교 진단
김 운 용 (장신대 교수, 예배/설교학)
영광의 시대인가? 석양이 내리고 있는가? 설교는 기독교의 생성과 발전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또한 그리스도인의 삶은 하나님 의 말씀의 선포인 설교에 의해서 형성되고, 풍성함을 누린다. 기독교의 역사를 살펴보면 생명력 있는 설교를 통해서 교회를 세우며, 주의 백성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힘있게 인도했던 '설교 영 광의 시대'가 있었는가 하면, 그렇지 못한 '설교 암흑의 시대'가 있었다. 설교 영광의 시대에는 설 교와 함께 교회는 말씀의 풍요를 누렸다. 그 시대에는 말씀은 힘이 있었으며, 교회는 영적 활기가 충천해 있던 시대였다. 그러한 시대의 모퉁이 모퉁이에는 하나님의 말씀의 부흥을 위해 몸부림쳤 던 위대한 설교자들이 있었다. 반면 설교 암흑기에는 무기력한 설교자들과 형식화되고, 습관적이 며 열정을 잃어버린 설교가 자리잡고 있었다. 허공을 치는 설교는 성도들의 삶에 특별한 의미가 되지 못하였으며, 설교가 가지는 예언적, 치유적, 교육적인 기능을 온전히 감당하지 못하면서 설교 는 그 영향력을 온전히 행사하지 못하게 된다. 그 시대에는 교회는 사회적인 영향력을 잃어갔으 며, 복음 아닌 것이 교회를 지배하였고, 혹 교회는 많은 재산과 함께 비대하고 부요 했을지 모르 지만 설교의 능력은 상실한 시대였다. 교회와 설교는 상호 보완의 관계, 상호 지배의 관계를 가져 왔던 것을 고려해 볼 때, 교회의 위기는 설교의 위기 현상과 긴밀한 관련이 있었다. 설교는 교회 쇠퇴의 원인이 되기도 했지만, 또한 교회의 쇠퇴가 설교의 쇠퇴 원인이 되기도 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지난 한국 교회의 한 세기는 설교가 교회의 활동과 사역의 그 중심을 차지했을 뿐만 아니라 원동력이 되었던 시기였다. 교회는 설교를 통하여 교회의 부흥을 이루었으 며, 국가적인 위기의 때에 민족 정신을 계도하고 교화했다. 사람들은 설교자에게 귀를 기울였으며,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부복하는 말씀의 종교로서 그 자리를 잡아갔다. 설교자들은 하나님의 종으 로 높이 예우되었으며, 설교의 소리(voice of preaching)는 능히 잠자던 "고요한 아침의 나라"를 깨우기에 넉넉했다. 어쩌면 지난 한 세기 동안에 한국 교회에서 설교는 설교자에게 거룩한 기름 부으심(the sacred anointing)이었으며, 청중들에게는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선포해주는 신적인 권능(the divine power)이 되었고, 그 어떤 형식의 것보다도 더 중요한 요소였다. 어찌 어두움이 없겠는가만 이런 점에서 볼 때 한국 교회는 지난 한 세기를 설교의 영광의 시대를 구가하였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오늘도 여전히 한국교회는 설교 영광의 시대를 사는가? 혹자는 요즘 우리는 설교의 홍 수 속에서 산다고 주장한다. 주일예배이든 교회의 모든 집회에, 심지어는 회의하기 전에도 설교는 약방의 감초처럼 빠지지 않는다. 방송 매체나 인터넷 매체에도 유명하다는 목사님의 설교는 몇 번 클릭 하면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고, 오디오 설교 테이프도 구하는데 어렵지 않다. 다양한 매체 를 통해 복음을 전하고 말씀을 듣도록 한다는 이점의 배후에는 설교의 가치를 하락시키고, 자기 입맛과 취향에 따라 설교를 취사 선택하는 선택자, 혹은 판정관으로 군림하는 결과를 야기한다. 홍수 속에서 마실만한 물이 귀하듯 범람하는 설교의 홍수 속에서 진정한 하나님의 말씀이 희귀해 가는 현상이 일어나고 있지 않는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떨림도 없고, 경외감도 없이 말씀 앞에 서게 하는 누를 범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최고의 호황(?)을 누리고 있는 요즘 한국 교회의 설교 사역은 여전히 영광의 시대인가? 아니면 석양의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있는 상황인가?
파괴자들 틈바구니에서 오늘날 우리는 교회의 중요한 사역들을 소멸해 버릴 수 있는 환경 속에 놓여 있다. 미국의 작가 이자 수필가인 에니 딜라드(Annie Dillard)는 오늘날 교회는 "화학 연구 기물들이 즐비하게 늘어 져 있고, TNT 더미로 가득한 곳에서 놀고 있는 어린아이"와 같다고 풍자적으로 말한다. 사람들로 부터 완전히 "주일 예배를 앗아가 버릴"(to kill a Sunday morning) 그런 치명적인 요소로 둘러 쌓여 있다는 것이다. 그녀의 지적은 오늘날 일어나고 있는 거대한 변화의 소용돌이 앞에서 교회 와 그 사역들이 치명적인 위기 앞에 서있음을 시사한다. 사실 오늘의 설교 사역은 갈수록 어렵게 만들고 무기력하게 만드는 시대적인 변화 앞에 서 있다. 문화적인 변화, 지적 구조의 변화, 가치관 과 추구하는 바의 변화, 인간의 의식 구조의 변화, 메시지 받는 방법의 변화 등, 변화의 소용돌이 의 한 중심에 서 있다. 이러한 상황은 교회로 하여금 과거와 같이 "영광의 시대"를 구가하는데 적 신호를 나타내고 있으며, 우리 사역에 있어서 "파괴자들"로 다가오고 있다. 이러한 상황의 변화는 교회의 중요한 사역들을 주춤거리게 하고, 무디어지게 만드는 요소들로 대두되고 있으며, 사람들 로 하여금 "생각하고, 말하고, 듣는 능력에 있어 심각한 결함"을 갖게 한다. 생명력을 앗아가 버릴 수 있는 위험들이 도사려 있는 현장 속에 있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위험 할 수밖에 없으나 그 현장을 인식할 수 없다는 것은 더욱 커다란 위험이 될 수밖에 없다. 이렇게 설교의 외적환경이 가져오는 위험도 있지만 내적인 상태는 어떠한 가도 중요하다. 아무리 외적환 경을 청결하게 하고 안전하게 바꾼다 하더라도 암세포가 왕성하게 뻗어 나가고 있다면 건강을 유 지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설교자는 설교의 외적 환경--문화 사회적인 상황과 관 련한--뿐만 아니라 내적인 상태도 상세하게 점검해야 한다. 오늘날 한국교회 설교 사역이 안고 있는 설교 신학적인 관점에서의 문제점이 무엇인지도 알아야 한다는 말이다. 우리는 지금 어디에 서있는가?
돌아보는 한국교회의 설교현장 오랜 기간 공석중인 목회자를 새롭게 모신 부산의 모 교회에 있었던 일이라고 한다. 목회자가 부임한지 채 1년도 되지 않았는데, 교인들과 서로 잘 맞지 않아서 많이 고전한 모양이다. 어느 날 교회 대표가 찾아와서 교회와 잘 맞지 않으니 사임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나름대로 열심히 했다 고 생각했는데 사임 요청을 받고 당황해서 떠날 때는 떠나더라도 그 이유를 알고 싶어서 물었다 고 한다. "내 어떤 면이 그렇게 잘 맞지 않았습니까? 저는 나름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충실히 전했 고 주님의 몸처럼 교회를 돌보았는데..." 그랬더니 교회 대표가 말하기를 목사님의 설교가 도무지 마음에 와 닿지 않고 은혜가 안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 목사는 생각하기를 설교라면 정말 잘못 됐을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 그렇게 반문했다. "설교가 문제라뇨? 내가 한경직 목사님 설교를 매주 듣고 그걸로 1년 내내 설교를 했는데 그럼 한경직 목사님의 설교가 잘못되었다는 말입니까?" 이것은 단순한 해프닝이 아니라 오늘의 현실과 설교자가 가지는 문제점을 잘 드러내 주는 이야 기이다. 한국교회의 목회 현장은 다른 것은 다 잘하더라도 설교가 아니면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되어버리는 철저하게 설교 중심의 현장이다. 설교가 중요하게 여겨진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생각 할 수 있겠으나 목회는 종합예술인데 어느 한편이 너무 부각된다는 것은 다른 문제를 야기하게 된다는 점에서 약점일 수밖에 없다. 가령 예배와 관련하여 생각해 볼 때 예배에 있어서 설교는 중 요한 것이지만 예배의 성패(?) 혹은 결과를 설교에 둔다는 것은 문제가 된다. 예배를 통해 하나님 의 말씀을 듣고 영적 자양분을 얻고 돌아간다는 것도 중요하지만 예배는 하나님께 나아가 나의 전존재를 드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며,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로 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이 다. 하나님 앞에 나아감과 찬양함과 자신을 드리는 것으로서의 봉헌과 같은 많은 순서가 있음에도 설교에 예배의 성패(?)를 건다는 것은 진정한 예배 정신을 왜곡하는 것이다. 자신에게 만족스런 설교일 경우에는 예배가 은혜스러웠다고 말하고, 그렇지 못했을 때는 예배 전부를 다 던져버리는 누를 범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회중들이나 설교자가 공통적으로 가지는 문제점이 나타나는데, 그들의 설교에 대한 신 학적 이해에 대한 것이다. 설교는 하늘과 땅이 잇대어지는 신비로운 만남을 통해 형성되는 사역이 며, 일상의 것과 초월의 것이 함께 어울려져서 이룩되는 사역이다. 인간의 언어로 준비되지만 그 것은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이기에 하늘의 사건이 된다. 하나님께서는 특별한 하나님의 은혜를 드 러내시고 계시하시기 위한 도구로서 일상적인 지상의 도구를 사용하시는데 그것이 바로 설교이다. 그러므로 설교는 인간의 언어와 경험을 통해 전달되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설교자가 바르게 성경 을 해석하고, 바르게 선포할 때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 이와 같이 설교는 인간적인 요소와 신적인 요소들이 함께 어울려져 이룩되는 사역이다. 설교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과 말씀을 계 시하시기 위해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도구이다. 이러한 점 때문에 설교사역이 바로 감당되어질 때, 이 땅에 존재하는 사람들에게 하늘의 세계가 펼쳐지게 되며, 도무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요와 부요"(the unsearchable riches of Christ)가 전달된다. 그러므로 설교자들은 거룩한 하늘의 비밀들과 보화들을 전하고 있다는 확신이 있어야 한다. 이러한 설교의 신학적 이해를 통해서 볼 때 앞서 언급한 교회 회중들은 설교에 있어서 인간적 인 측면만 보았지, 신적인 측면은 간과하고 있는 누를 범하고 있다. 설교자는 어떠한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를 원하는 설교자라면 하나님으로부터 말씀을 받으려고 해야하고, 기도를 통해 하나 님 앞에 나아가야 할 것이며, 오늘도 성경을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 성경으 로 나아가야 했다. 그 설교자는 "말씀 속으로 보냄 받은 자"라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회중들을 대표하여 말씀을 연구하여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그분의 말씀을 받아 그 말씀을 증언하도록 보냄 받은 자이다. 하나님은 그를 설교자로 세우시면서 그에게 지성과 감성, 그리고 영성을 주셨다. 그의 삶과 경험과 사고를 사용하여서 그의 공동체 속에 말씀을 주시기 원하셨다. 그러나 그는 그 모든 것을 외면해 버리고 오직 박수갈채를 받고 있는 유명 목사님에게 달려갔고, 그를 의존하고 있다. 여기에서 오늘날 큰 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설교 도용의 문제까지 야기되고 있다. 닮고 싶은 존경하는 설교자가 있을 수 있다. 그분의 좋은 점을 배우고 모방하면서 자신의 것을 다듬어 갈 수 있다. 그러나 그는 다른 설교자가 준비해 놓은 설교를 아무런 노력도 없이 그대로 들고 나간 "악 하고 게으른 종"임에 틀림이 없다. "내가 너를 이스라엘 족속의 파수꾼으로 세웠으니 너는 내 입 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을 깨우치라"(겔 3:17). 이 안타까운 설교자가 에스겔을 세우시면 서 들려주셨던 말씀을 들을 수 있었다면, 자신을 세운 분이 하나님임을 인지하고, 그가 강단에 설 때 하나님을 대신하여 선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그는 그렇게 설교 사역을 감당하지는 않았을 것이 다. 건축에 비교한다면 총체적인 부실건물이다. 물론 단적인 한가지 예일 뿐이지만 그럼에도 불구 하고 이것은 전반적으로 한국교회 설교 현장이 안고 있는 문제의 표출임을 부인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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