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3-10-10 19:31
[1]신약의 역사적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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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웹섬김이
조회 : 8,152  

新約의 역사적 배경

 

 

新約聖經을 연구하는데 있어 그 배경을 모르면 적합한 평가를 하기 어렵다. 따라서 福音과 사도행전에 전제되는 상황을 이해하려면 구약과 新約의 중간시대 즉 마카비 시대(Maccabean age)나, 나아가 바벨론 포로에서 복귀하는 시대로 되돌아 가야 할 것이다. 구약 聖經은 폐르샤 통치하의 이스라엘로 끝을 맺고, 新約聖經은 로마 지배하의 국가로 시작된다.

1.파사시대

바벨론 포로동안 파사인의 바벨론 정복으로 인해 유다는 여러 지도자들이 바뀌었다. 팔레스틴으로의 복귀는 고레스와 헙력함으로 가능했고, 세 사람의 지도자가 그 뜻을 불어 넣어 주었다. 세 지도자란 성전을 세운 에스라, 예루살렘의 성을 재건하고 민족의 경제적 및 영적인 생활을 일깨워 준 느혜미야이다.

단지 적은 수의 국민들만이 그들의 조상의 땅으로 돌아와 다시는 죄를 범치 않을 것을 결심했다. 그러나 그들은 예배와 십일조를 등한히 하게 되었다. 잡혼의 금지도, 안식일의 신성함도 무시하게 되었다(느13). 말라기 시대에 이르러 성직자들은 부패와 나태함을 인하여 심한 비난을 받았다. 이러한 쇠망의 또 다른 부분적 원인은 이스라엘이 혈통적으로 순수성을 잃은 사마리아인들의 성전재건 참여를 거절하므로 심한 적개심을 일으켰고, 요한福音 4장에 언급된 그리심 산에서 예배를 드리는 분열을 초래했다.

2.알렉산더 시대(332-301 B.C.)

이수스(Issus)와의 전쟁과 다리우스(Darius)를 동쪽으로 몰아낸 후에 알렉산더는 파사인을 다시 한번 전쟁터에서 맞아 싸우기 전에 수리아와 팔레스틴과 애굽을 정복하려고 했다. 지중해 동부지방 여러 나라들은 알렉산더와 그의 업적에 의해 영향받은 바 실로 크다.

전쟁을 좋아하는 아버지 필립의 뒤를 따라 철학자 아리스토틀과 협의하며,알렉산더는 그의 아버지보다 더 위대한 전쟁의 천재가 되었고, 그의 선생 아리스토틀 보다도 어떤 점에서 월등했다. 그의 당시의 전략 목적은 캘커스(Xerxes)의 지도아래 파사가 헬라를 침략한데 대한 보복이었으나 그의 원대한 목적은 동양을 헬라화 하려는 문화적인 것이었다. 전쟁에 철학자들과 과학자들이 그를 수행했다. 헬라 태생의 식민지 개척자들이 그의 군대의 뒤를 따랐다. 알렉산더는 동 서 헬라인과 야만인의 격차를 연결하기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정복한 파사인을 높은 지위에 올리고 그도 동양여자들과 결혼했다.

그림설명 / 알렉산더와 테바이 명가의 부인인 티모클레시아의 일화를 묘사한 그림 17세 기 이탈리아의 화가 이루도메니키노 작품.

알렉산더가 팔레스틴으로 옴으로 전략상 중요한 땅은 헬라화(Hellenization)의 물결에 쏠리게 되었고, 이로 인해 유대인의 독특성도 해체되고 후에 국가는 완전히 갈라지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팔레스틴 정복은 그가 다른곳에서 받은 개인적인 숭배를 요구하지 않았기에 종교적인 위기를 불러 일으키지는 않았다.

알렉산더의 정력적인 생명은 30대 초반인 323년에 끊어졌다. 이 때문에 제국 통치 문제로 인한 헬라의 장군들간의 오랜 싸움은 끝이 났다. 그중 넷은 비록 톨레미는 실제로는 참여하지 않았지만 입수스(Ipsus) 전쟁(B.C.301)에서 적을 섬멸하자고 결속했다. 이들 중에 동쪽 넓은 영토를 통치한 셀레쿠스(Seleucus)와 수리아 애굽을 통치한 톨레미(Ptolemy)만이 유대인들의 운명에 영향을 끼쳤다. 팔레스틴은 톨레미가 한 세기간 통치하게 되었다. 그러니 수리아는 그를 끊임 없이 괴롭혔으므로 파레스틴은 두 왕국의 전쟁터가 되고 말았다.

3.애굽시대(B.C. 301-198 )

이 당시 애굽의 통치자들은 헬라인들이었다는 사실을 유의해야 한다.톨레미는 지혜있게 그 자신의 몫으로 양식이 충분하고 침략도 별로 없는 부분을 선택했다. 요세지인 알렉산드리아는 알렉산더와 그의 건축가에 의해 세워졌고 곧 상업과 문화로 이름난 헬레니즘 문화의 중심지로 급속히 성장하였다. 처음에 톨레미는 이곳에 큰 도서관을 건립했는데 이것은 약1000년 간이나 있었다.

이때 유대인과 헬라인은 별로 접촉이 없었는데 그것은 부분적으로 유대인이 선원을 직업으로 하지 않았기 때문이고, 할례받지 않은 사람들과 가까이 하지 않기 때문이라 하겠다. 그러나 이제 많은 유대인들이 애굽으로 옮아가서 헬라어를 배우고 헬라문학을 접하게 되었다. 요세프스에 의하면 유대인들은 마게도니아인과 같은 시민권을 받았다고 한다.

모세 오경(pentateuch)이 헬라어로 번역된 것은 필라델프스 통치 기간 동안이었다. 그후 구약의 다른 책들이 잇따라 번역되었다. 이 시기에 팔레스틴은 조용히 헬레니즘화 과정을 맛보게 되었다. 헬라어의 언어, 예술,축제나 놀이 등의 헬라적 생활 양식의 매력에 접하게 된 것이다. 그런가 하면 사람들은 원형극장이나 공동 목욕탕에 드나들게 되었다. 유대 민족의 예배를 간섭하려고 하지 않는한 이 문화적인 영향은 격렬한 반대 없이 진행되었다. 그 다음 시기에 예배에 대한 간섭이 있었으며, 팔레스틴의 유대민족이 그 뿌리에서부터 흔들리는 결과가 초래되었다.

4.수리아 시대(B.C.198-167)

애굽의 통치를 해치려는 수리아인들의 노력이 끝내 성공을 보게 되었다. 판네아스(Paneas)전쟁(198)에서 안디오커스대제(Antiochus the Great)는 스코파스(Scopas)와 그의 군대를 격퇴시켰다. 얼마 후에 안디오커스는 로마인에 의해 패배를 맛보고 공물을 마치게 되었다. 그의 계승자는 집정중에 재정상 곤난을 회복키 위해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의 보물을 약탈하려고 했다. 수리아와 유대 관계의 위기는 안디오커스 4세(Epiphanes)의 통치 동안에 생겼다. 그는 유대 민족 의 종교적인 생활까지를 규제하여서 완전히 헬레니즘화하여 강력한 국가를 소유하기를 갈망했다. 그는 화폐에 "신(神)은 왕 안디오커스를 승리자로 명시한다".고 새겨서 그의 신성을 과시했다.

유대의 헤레니즘화에 대한 충돌은 유대인 중에 헬레니즘화 지지파와 반대파 사이에 있었다. 헬레니즘화 지지파들은 안디오커스를 지원함으로 오히려 공세를 취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헬라적 삶의 양식을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큰 압력이 미쳤다. 그러나 강제로 헬라화하려는 군주의 행동은 오히려 반항정신을 일깨웠고 폭동을 빚어냈다. 반대 그룹은 하시딤(Hasidim)(경건한 자들)이라고 알려졌다. 그들은 배교의 물결속에 있는 유대 관습과 종교를 보존하려는 자들이었다.

안디오커스가 애굽에 있을 때 그 상황은 절정에 이른다. 두 지방 사람들은 대제사장직을 놓고 싸웠고 그들 추종자들 사이에 싸움이 일어났다. 이러한 소동을 알고 왕은 유대가 그에 대해 반란을 일으키고 있다고 생각하고 돌아와 그의 군대들에게 공격하라고 했고 이로 인해 많은 목숨이 없어졌다. 이로 인해 기분이 상한 그는 왕의 법령에 의해 유대인을 완전히 헬라화하겠다고 마음먹고 유대주의 습관을 금지시켰다.

이에 반대하는 자들은 죽임을 당하거나 노예로 끌려갔다.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나 할례, 성전예배는 금지 되었고, 성서는 파괴되었다. 마침내 168년 12월에 안디오커스는 성기(聖器)와 성전의 보물을 몰수하고 이교도 희생의 제단인 구리제 단(brazen altar)을 세워 돼지를 제물로 바쳤으니 유대인에겐 말할 수 없는 치욕이었다. 이로 인해 반항하다 순교한 사람도 많았다. 유대교가 이제 살아지는가 싶더니 갑자기 격렬한 힘으로 타 올랐다.

예루살렘을 떠나 모딘(modin)이란 곳에 머물고 있던 마타티아스(Mattathias)란 제사장은 이곳에서도 이 문제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헬라의 관원이 와서 이교도 예배를 주도하는 제사장이 되라는 말을 거절하고 다른 유대인이 그의 직책을 맡았을 때 그 유대인을 죽이고 헬라 관원도 죽였다. 그리고 그의 아들들을 데리고 두메 산골로 도망을 했다. 이 사건으로 방방곡곡에 반란이 일게 되었다.

5.마카비 시대(B.C.167-63)

다른 사람들도 바란에 참여하고 당국에 대한 게릴라전에 협조하였다. 처음 충실한 유대인들은 적들이 전쟁하는 날을 안식일로 택해서 하므로 고전을 면치 못했다. 그러나 마타티아스와 그의 아들들은 그의 무리들을 힘에는 힘으로 싸우라고 격려했다. 지금 안식일을 몇번 범하고 나중에 지키는 것이 적에 손에 죽는 것보다 나은 것이라 하였다. 마타티아스는 곧 죽었으나 그의 아들 유다 함머르(Hammerer) 마카비가 지휘하게 되었는데 숙련된 훌륭한 지도자였다. 점차 유대 인들은 게릴라전에서 공식적인 전투를 하게 되었고, 수리아 수비대에 의해 지켜지고 있는 요새 한 곳을 제외한 전 예루살렘을 관할하게 되었다. 지성소는 말끔히 치워지고 하나님께 바쳐졌다.

요나단이 그의 형 유다의 뒤를 이어 독립운동의 지도자가 되었다. 그는 국내의 친 헤레니즘파를 억누름과 동시에 유대 밖에서 무력을 사용할 줄 알았다. 유대인들은 그의 뒤를 이은 형제(동생) 시몬의 지도 아래서 정치적인 독립을 달성했다. 이 때가 143년 경이었고, 이 새 시대는 로마인들이 나라를 통치할 때까지의 약 80년간 계속되었다. 당분간 로마는 유대인들의 독립을 인정했고 간섭하지 않았다. 한편 시몬은 국민의회(國民議會)에 의해 훌륭한 선지자가 나올 때까지의 대제사장 軍지도자 국민의 통치자로 결정 되었다.

이두메아(Idumea)나 특히 이전에 종교적인 박해의 고통을 경험한 민족이 유대 밖의 사람들에게 행한 유대교 강제 부과 정책에는 다소 모순이 있었다. 군사력은 용병을 기용함으로 유지 되었는데 가끔 유대인의 적으로도 사용되었다. 외부의 침략이 없어 자유를 향유하였음에도 불구하고이 시기는 황금시대는 아니었다.

6.로마시대(B.C.63 이후)

로마는 얼마동안 애굽과 소아시아에서, 후에는 수리아에서 활약했다. 로마가 유대인들의 문제에 개입한 것은 왕위를 놓고 다투던 아리스토부루스(Aristobulus),힐카누스(Hyrcanus)형제가 다메섹에서 폼페이(Pompey)에게 항복하고서 국민이 그들을 반대하고 제사장의 법도를 신설하는 대표자를 보낸데 반대해 당혹케 된 때이다. 폼페이는 적절한 때에 결정을 하겠다고 약속했다. 그가 예루살렘으로 오자 그 민족들은 의견이 여럿으로 갈렸고 문밖의 로마 군대를 보고 마음이 ㅍ치 않았다. 아리스토부르스(Aristobulus)파가 그가 성전 지역으로 들어가는데 방해하자 폼페이는 무력을 사용했다. 이 사건으로 수천명이 죽고 로마의 점령은 잔혹성을 나타내기 시작했 다. 유대인에게는 많은 공물이 부과되고 헤스모네안 규약에 의해 점령지의 많은 도시인들은 놓여나 수리아 영토의 관할하에 놓이게 되었다.

유대인들이 로마 권력에 대항해 싸울 투사로서 왕가 사람들을 믿고 있는 한 반란의 위험은 분명히 있었다. 아리스토부루스와 그의 두 아들이 살아있는 동안 독립의 염원은 꼭 폭발할 듯하였다. 로마 정치의 혼란은 유대인들이 자기들의 통치로 복귀할 수 있으리라 믿게 했다. 공화국은 원로원이 효과적인 지도력을 상실하고지도자의 무력과 민중의 지지를 수단으로 권력을 차지하려는 데서 큰 시련에 빠지게 되었다. 폼페이,시저,크라수스는 B.C.60년에 제1회 3두 정치를 결성했다. 의견이 엇갈리자 시저는 집정관으로 우세한 위치를 차지했다.

팔레스틴에 그는 몇몇 중요한 변화를 일으켰다. 대제사장인 힐카누스는 정치적인 지위를 다시 얻게 되었다. 힐카누스의 지도 아래 있는 사람들이 충성스런 행동과 평화적인 의도로 인해서 시저와 다른 로마 관리들은 유대인들에게 한걸음 양보해서 세금을 줄여주고 몇몇 지역을 복귀시켜 주고 안식일의 법을 이유로 군복무 의무를 면제해 주었다. 소아시아에 있는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의 성전을 받드는 등 그들의 종교관습을 지키는데 방해를 받지 않게 되었다. 이러한 것들은 정복 민족의 종교생활을 간섭하지 않는다는 로마인들의 정책과 일치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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