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는교회 보이지 않는 교회
보이는 교회와 보이지 않는 교회의 구별은 종교개혁 이후의 구별이다.
♤ 구별의 장점
① 제도적 교회 활동을 신성화시키는 것을 방지한다. 즉 제도적 교회 활동을 끊임없이 비판하고 검증한다.
② 제도적 교회의 부패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리스도를 따르는 일에 용기를 갖게 한다.
♤ 구별의 단점
20세기 : 이러한 구분은 정당하지 않다. 왜냐하면,
1. 보이는 교회와 보이지 않는 교회라는 구분은 플라톤적(이원론적)이다. 즉 헬라 철학적 구조의 영향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으로 성경적이지 않다.
2. 신약성서 속의 교회는 추상적인 이념이나 모임이 아니고 구체적인 역사적 실체였다. 사도들은 구체적 역사적 실체로서의 에베소, 빌립보, 고린도 교회를 교회라고 칭했다. 즉 보이지 않는 교회는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보이지 않는 교회 개념은 성서적으로 근거를 찾을 수 없다.
3. 보이지 않는 교회란 세상 속에 존재하지 않는다. 종교개혁자들의 개념은 제도권에 속하지 않는 교회를 말한 것이며 그 교회도 보이는 교회이다. 교회는 지상에 존재하는 잠정적 역사적 실체이다. 그리고 천상은 하나님의 나라이지 교회라는 개념으로 사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교회는 사건인가 제도인가?
1) 사건으로서 교회
교회의 본질은 제도나 건물이 아니다 그리하여 칼 바르트는 교회의 본질을 제도나 조직이 아닌 말씀의 사건이라고 하였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인간이 그 말씀을 듣는 곳에 참 교회가 존재한다는 말이다.
2) 사건으로서 교회와 공헌과 문제점
사건으로서의 교회는 많은 교회지도자에게 참교회가 무엇인지 일깨워 주는 공헌을 남겼다. 그러나 이 개념은 무교회주의가 신학적으로 정당성을 얻는 길을 터주게 되었다.
3) 사건과 제도로서의 교회
참교회의 본질은 말씀의 사건은 물론 성령의 사건이라고 하였다. 초대교회를 보면 성령이 사건으로 교회가 탄생했다. 그러나 성경의 사건으로 탄생한 초대교회는 이미 제도성을 지니고 있었다. 행20:28에 감독이라는 매우 중요한 제도가 성령에 의해 만들어지고 있었다. 즉 교회의 제도성은 성령의 사건을 구현화해 나가는 과정속에서 나타났다.
그러므로 교회는 서열의 사건이 동시에 제도성을 지니고 있어야 하며 이 둘은 항상 상호보완성의 성격을 가지게 된다.
교회의 과제와 목적
교회의 사명은 마22:34절에 나타난 예수의 말씀에 잘 나타나 있다. 이것은 첫째 수직적 차원인 하나님의 사랑이다. 이를 위해 교회의 과제는 예배, 전도, 감사, 교육, 하나님의 영광 등을 언급할 수 있다. 둘째 수평적 차원인 이웃사랑이다. 이것은 이웃에 대한 책임이다. 역사에 대한 책임과 직결되어 있다. 현대에서도 이 정신을 인간화, 정의, 평화로 표현하고 있다.
교회는 영혼에 대한 구원과 이웃사랑을 동시에 구현해 나가야 한다. 특히 현대교회가 가난한 이웃에 대한 교회의 책임을 중시하는 이유는 성서의 정신이 가난한 이웃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책임을 강조하기 때문이다.(암6:24, 약1:27)
그러면 전체적으로 교회의 목적은 무엇인가?
교회는 말씀을 선포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공동체이다. 이것이 교회의 목적의 핵심이다. 물론 말씀 선포도 하나님 나라의 확장에 넓게 넣어서 생각할 수 도 있으나 독립적으로 강조할 필요가 있다. 즉 하나님이 계심을 전해야 한다. 그리고 인간의 죄의 깊이가 어떠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지극함을 알리고 전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을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그 백성을 성숙한 백성으로 만들어야 한다.
교회의 디아코니아적 책임
오늘의 한국교회는 성자의 둔화와 교회가 교회로서의 기능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는 비판을 받는 위기에 봉착했다. 이는 교회가 특히 지역사회를 향해 열려진 교회가 되지 못하고 동시에 민족과 세계의 역사를 책임지지 못한 것에 대한 지적이다. 이런 관점에서 교회가 지역사회를 향해 열린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교회의 디아코니아적 활동이 필수적이다.
1) 교회의 영적활동과 디아코니아
한국교회내에 선교는 영적인 활동인 반면에 사회봉사는 인간적이고 세상의 선한 일에 불과하다는 이원론적인 사고가 깊이 퍼져있다.
그러나 야고보서 1;27절과 눅10:25-37절등 성경을 읽어보면 사회봉사는 선교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명하시는 매우 거룩한 영적인 일임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이 디아코니아도 교회의 영적활동의 핵심인 동시에 본질적 과제이다.
2) 교회의 우선적 행위로서의 디아코니아
성령속에 하나님은 가난한 자를 사랑하고 의지할 곳 없는자에게 우선적으로 긍휼를 베푸시며 긍휼과 자비의 하나님이시다. 이것은 교회가 하나님앞에서 어떠한 책임을 감당해야 하든지 직접적으로 잘 가르쳐 준다. 즉 교회가 결손 가정을 돌보는 일은 부차적인 과제가 아니라 고아와 과부의 보호자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받은 명령임을 유념해야 한다. 또한 우리는 예수님도 주린자, 병든자 등 지극히 작은 자와 하나님 자신을 일치시키며 교회의 삶이어야 함을 가르치셨다.
3) 제자의 길로서의 디아코니아
그리스도의 제자로의 핵심은 섬김이다.(막10:45) 이러한 섬김의 도는 자연스레 디아코니아로 이어진다. "가라 너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어라"(막10:21)는 예수님의 가르침처럼 제자로서 삶을 살아야 한다.
4) 교회의 디아코니아 활동이 결과
교회가 복음전도와 사회적 책임의 디아코니아의 본질적 과제로 충실히 잘 감당할 때 교회는 사람으로부터 사랑받고 성장한다. 카톡릭 교회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이웃과 세상에 대해 책임을 많이 강조하여 사람들로 보다 사랑과 신뢰를 받음을 물론 성장한 것처럼 개신교회 역시 사회적 책임의 디아코니아의 본질적 과제를 충실히 감당해야 한다.
5) 교회의 디아코니아 사명을 잘 감당하기 위해서 무엇보다도 이웃과 만나는 장소인 봉사관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이 봉사관은 지역사회를 위한 교회로 존재하기 위해서 반드시 있어야만 하는 교회의 기관이다.
이러한 봉사관을 통해 자본주의 경쟁사회에서 소외되고 버림받은 자들을 돌보는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잘 실천할 수 있으며 교회의 사회적 책임을 더욱 잘 감당할 수 있다.
교회성장과 디아코니아
디아코니아는 교회성장의 핵이다. 한국에서 카톨릭은 계속 성장해 왔다. 왜 그런가? 그 핵심은 국민들이 카톨릭에 대한 이미지가 좋다. 그들이 가난하고 이웃과 함께 하는 교회라는 이미지를 주고 있기 때문이다.
교회 성장에는 열심히 전도해서 성장하는 축과 세상에서 빛의 소명을 감당함으로 성장하는 축이 있다. 후자의 중심에는 디아코니아적 모습이 자리하고 있다. 20세기 후반에 들어서 전세계적으로 카톨릭의 성장이 두드러진 것은 이웃들과 함께하는 모습에 그 원인이 있다. 본래 지배자의 종교였던 카톨릭이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에 카톨릭은 가난한 이웃과 함께하는 교회로 바뀌어서 가난한 이웃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후 30여년 후에는 전세계적으로 성장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이 사실을 목회자는 기억해야 한다.
교회의 특성
주전 381년에 제정된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는 사도신조와 더불어 오늘날 가장 권위있는 교회의 신조이다. 이 신조는 교회론에 관계되는 중요한 교회의 특성이 있다. 하나의 교회, 거룩한 교회, 보편적인 교회, 사적적인 교회를 믿는다.
1. 교회의 하나됨
우리는 섬기는 하나님이 한분이시기에 교회는 하나이여야 한다.(엡4:3-6) 그러나 1054년 교회가 동서로 분열된 이후 오늘날 수없이 많은 교회들이 난립하게 되었다. 교회의 분열은 교회의 죄악 때문에 일어났고, 지식의 불완성 때문에 분열이 생겼다. 교회가 하나됨을 위한 신학적 해결로서 부분적이 신앙의 차이는 서로 관용하는 터전위에 하나됨을 노력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근본적인 신앙의 동일성은 존재해야 한다. 분열원인이 주로 교회죄악에 있으므로 하나님의 말씀앞에 회개와 순종이 필요하다.
2. 교회의 거룩성
교회는 교회의 역사를 볼 때 수많은 죄악으로 물들어 있고 오늘의 교회에도 부패한 모습이 많은데 왜 거룩한 교회라 하는가? 그 원인은 첫째로 교회의 거룩은 교회의 현실적인 도덕성에 거론하지 않고 하나님의 선택의 관점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다. 둘째로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죄악들이 용서받고 속량 받았으므로 교회는 거룩하다고 한다. 셋째로 교회는 성령에 이해 인도받으며 교회는 거룩하게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넷째로 교회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고 잇는 그龁스도의 몸이기 때문이다. 즉 교회가 머리되신 그리스도의 거룩성을 반사하는 몸이기 때문이다.
3. 교회의 보편성
교회는 만민의 교회로 계급, 인종, 지역의 차이가 없다. 왜 교회를 만민의 보편적 교회이어야 하는가? 그 원인은 첫째로 구원의 보편성에 근거하고 있다.(요3:16) 둘째로 만민을 향한 선교의 요청때문이다.(만16:15) 셋째로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그리스도안에서 한 형제 공동체이기 때문이다.(갈3:28)
4. 교회의 사도성
사도적 교회란 베드로의 후계자인 로마 교황에 의해 통치되는 교회가 아니라 사도들이 전한 복음의 정신이 통치하는 교회가 사도적 교회이다. 교회의 유일한 권위가 사도들이 남긴 말씀이어야 하며 복음전파를 위해 사도들이 받은 고난에 동참하는 교회가 참다운 사도적 교회이다.
철저적 종말론
알버트 슈바이쳐는 "재림의 지연"을 언급하면서, 마10:5-23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제자들에게 전도여행을 떠나기 전에 갔다가 오면 종말이 올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전도의 여행후에는 종말이 오지 않자 이를 예수님의 실수로 보았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죽음과 더불어 종말이 올 것을 믿었다. 그러나 이것도 실패했다. 그리하여 예수 그리스도는 철저하게 종말을 믿었으나 철저하게 어긋나고 착각속에 죽었다고 보았다. 이는 철저적 종말론은 예수가 유대인의 묵시문학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우리는 예수의 종말론을 배우기 보다는 "생명을 존중하고 사랑하는 정신"을 배워야 한다. 철저하게 비종말화 되어야 한다.
개인의 종말
☞ 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되느냐?에서 웨스트민스트 신앙고백 32항에는 "영혼은 천국으로 가고 육체는 땅으로 간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이 전통적인 개혁주의 입장이다. 그러나 이것은 플라톤의 이원론이 배경에 있다. 이것은 히브리적인 사고와 성경적인 정신으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사항이다.
☞ 성서의 정신은 죽은자의 부활이다.
헬라인들은 육체를 멸시하고 영혼을 고상하게 여기는 이원론적으로 생각하고 있는데 이는 잘못이다. 성경은 예수님의 부활이 몸과 함께 한 전인적 부활이였듯이 예수를 따르는 우리들도 전인적 부활을 가르친다.
☞ 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되는가? 그냥 사람이 죽는 것이다. (겔18:20)에서 "범죄한 영혼은 죽으리라"는 말씀은 히브리인에게는 "범죄한 육체는 죽으리라"와 같은 의미이다. 나라는 존재가 죽고(그러나 멸절은 아니다), 이 세상에서의 삶(지상적인 실존)이 끝나고 하나님 앞으로 가서 심판받고 나서 그의 삶이 연속되어지는 것이다. 부자와 나사로의 사건에서 지옥의 고통은 실제적인 육체적인 고통이었다.
☞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 이란 무엇인가? 하늘에서 입게 될 부활체을 말한다. 대비가 분명하다. "육체"(땅에) ↔ 부활체(하늘)라는 구도가 분명하다.
☞ 하늘에 있는 처소를 덧입는다. : 새로운 부활체를 입을 때 쓰는 용어이다. 바울의 전형 적인 표현이다.
☞ 고전 15장과 고후 5장이 죽은자들에 대해서 가장 세밀하게 묘사하고 있다. "하늘의 육체"가 고후 5장에서는 죽은 이후에 천국에서 "부활체"로 바뀐다. 고전15장에서는 주께서 재림하실 때 홀연히 하늘의 육체로 변한다. 이것은 시각적인 전이가 일어난 것이다.
☆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 :
헬라인들은 육체 없는 것을 주장하나, 바울은 육체를 중요시함.
육체라는 감옥에서 빠져나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부활체를 얻게 되는 것이다.
바울은 하늘의 영광스런 육체를 입고 사는 삶을 나타난다고 말한다.
♧ 장막집이 무너지면은 죽음을 나타나는 것이다.
바울은 고린도 전서에서 주님이 오실 때 부활체을 덧입는다고 말하고
고린도 후서에서는 자신이 죽을 때 부활체를 덧입는다고 말한다.
☞ 변화산 사건에서 모세와 엘리야의 상태도 영광스럽게 변모한 모습이었다.(요11:23∼)의 나사로의 부활 사건에서 예수님은 "네 오라비가 살리라 ∼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으리니 네가 이것을 믿느냐"고 했으나, 마리아는 "마지막 부활에는 다시 살줄을 내가 아나이다"고 했다. 마리아는 묵시 문학적인 영향으로 마지막의 부활을 알았으나, 예수님은 지금 당장의 부활을 말한 것이다.
☞ 만약에 개인의 부활이 일어난다면 역사의 종말은 의미가 없어지는 것이 아닌가? 그렇지 않다. 개인의 부활이 실존적인 완성을 이룰 수는 있느나, 개인은 개인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며, 역사의 완성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나"라는 개인은 새하늘과 새땅이 이루어지는 역사의 완성을 대망하고 있다. 그 날만이 모든 것이 완성되는 날이다.
☞ (골3:4, 살전4;14∼)에 의하면 역사의 부활은 개인의 부활의 출현이다. "데리고 오신다"는 표현과 "일어난다"는 표현은 같은 것이다. 그래서 추정해보건데 역사의 마지막이 되면 살아있는 자들은 영광스러운 부활체를 덧입고, 이미 죽은 자들은 지상적인 시각으로 부활하는 것이요, 천상적인 시각으로는 주께서 데려오시는 것이다.
☞ 결론 : 죽은 자들은 천국에 살다가 마지막날에 맞이한다. 예수안에서 죽은 자들은 천국에서 있다고 증언하고 있다. 그러면 천국에서 복락을 누린자들은 부활체만 있는가 아니면 영혼만 가졌는가? 성서에서 언급하고 있는 인간은 전인으로써 영혼, 육체의 이원적 사고를 거부한다. 그러므로 천국에서 존재하는 형태는 육신에서 빠져나온 영혼이 아니고 전인으로서 나로 존재로 부활한 모습이어야 한다.
이는 고후 5:1-4에서 죽은 이후 천국에서 부활체로 바뀐다고 언급하다. 또한 요한복음 11장에서 예수님은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고 대답하시므로 부활의 예수님과 연계되어 우리의 존재 양태는 언급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