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6-05-17 12:32
[1자살에 대한 목회 지침서
인쇄
 글쓴이 : 웹섬김이
조회 : 4,075  

자살에 대한 목회지침서

1. 들어가는 말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전지전능하시며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일 뿐만 아니라, 모든 생명의 아버지와 생명의 근원이 되시는 분으로 믿고 고백한다. 이 세상의 모든 인간은 생명의 하나님의 섭리와 뜻과 능력에 따라서 태어난다. 그렇기 때문에 생명은 어떠한 상황과조건에도 불구하고 소중하고 존엄하며 보호되어야 한다. 그러나 인간의 생명은 소중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연약한 존재이기 때문에 세상의 구조, 질병, 권력, 환경, 인간관계, 사상 등의 어떠한 부분에 따라서 위협과 해를 받기도 한다.


스스로 자신의 목숨을 끊는 자살은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않고 미워하는 자학의 극치 현상이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사랑하시고 구원하시려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주셨고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음으로 우리를 구원해주셨다. "너희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과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다. 스스로 자신의 생명을 해하고 죽이는 행위인 자살은 자기 자신을 해하는 결과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주변의 사람들 즉, 부모 형제와 같은 가족, 친지, 동료, 이웃들이 더 사랑해주지 못한 결과이기도 한 것이다.
사랑받지 못하고 인정받지 못해서 희망을 포기하고 미래를 기대하지 않게 됨으로써 자신의 존재가치를 무시하게 된 결과인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신앙생활을 하는 성도들도 예외가 아니며 실제로 적지 않은 성도들도 여러 가지 사유로 인하여 자살을 한다는 사실이
다. 자살한 그리스도인의 구원문제와 유가족들의 문제, 장례예식 등 실제적인 목회적 사역에 많은 어려움이 생기고 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양들로 생명을 얻고 더욱 풍성하게 누리게 하시려고 오심을 믿고 모든 인간의 생명의 풍성함을 위하여 섬기며 나누
는 디아코니아 사명이 교회의 본질적인 사명이며 책임인 것을 믿는다.


본 교단 총회는 지난 2002-2012년 10년 동안 생명살리기운동을 펼쳐왔고 이어서2012-2022년을 치유와 화해의 생명공동체 10년으로 선포하고 장기적 비전으로 삼고 있다. 지난 98회 총회에서는 사회적 문제 중의 하나인 자살문제에 대한 목회지침서의 제작 및 배포를 헌의하여 총회사회봉사부의 사회문제위원회에서 생명신학협의회와 협력하여 자살방지를 위한 목회지침서를 제작하게 되었다. 수고해주신 여러 위원들께 감사를 드리며 이 문서가 이 시대의 아픔을 치유하며 회복하며 목회에 새로운 활력소가 될 수 있는 귀한 목회지침서가 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한 생명이 천하보다 귀하다고 하는 말씀과 같이 그 어떠한 생명도 그들의 생명의 소중함이 지켜 보호되고 하나님의 은총 안에서 풍성한 삶을 누리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더욱 보람된 삶을 이루어 가는데 귀하게 쓰임받을 수 있게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2. 한국사회 자살의 현황


요즘 대한민국을 일컬어 자살공화국이라고 한다. 이미 우리가 알고 있듯이 현재 대한민국의 자살률은 OECD 국가들 중에서 단연1위이다. 2위 국가인 일본이나 헝가리에 비교해도 확연히 차이가 나는 1위이다. 우리나라의 자살률은 현재 28.1명이다. 인구 10만 명
당 자살로 인해 죽는 사람의 숫자이다. 그런데 2위인 일본의 경우는 24.4명, 그리고 3위인 헝가리의 경우는 21.5 명이다.
대한민국에서 자살로 죽는 사람은 2012년 기준 한 해 14,160명이다. 전년도 2011년 15,609명에 비하면 많이 줄어 든 것이다. 그러나 이는 하루 39명이 자살로 죽는 것을 의미한다.
매년 9월이면 통계청에서 사망원인통계를 발표한다. 지난 한 해 동안 사람들이 죽은 원인을 밝히는 것이다. 가장 최근 통계인 2012년 통계를 보면 자살은 전체 사망원인 중에 4위이다. 1위가 암이고, 2위가 뇌혈관질환, 3위가 심장질환이다. 그리고 자살이라는 얘기다. 그 다음으로 당뇨병과 폐렴 등이 나온다. 심지어 교통사고는 9위다.
자살은 사회적 질병이다. 대한민국에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자살로 죽어 가는데 그것을 개인적인 문제라고 이 사회가 방관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게 많은 생명이 스스로 죽어 가는데 그들을 이 사회가 돕지 않는다면 그것은 직무유기이다. 다른 사망원인에 대
해서는 이 사회가, 특히 정부가 나서서 그러한 질병에 걸리지 않도록 계몽․예방하고 있다.
특히 건강보험을 통해서 그들의 질병을 치료하려고 하고 있다. 하지만 자살에 대해서는 이 사회가 냉담하다. 도우려는 마음도 없고, 심지어 외면하려고 한다.

자살에는 경향성이라는 것이 있다. 자살에 있어서 어떤 흐름이 형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자살을 연령대별로 분석을 해 보면 놀라운 사실을 발견한다. 10대, 20대, 30대에서는 자살이 사망원인 1위이다. 이 나이 대 사람들이 죽는데 있어서 자살이 가장 큰 원인이라는 것이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30대에서는 자살이 2위였다. 그런데 약 3년 전부터 30대에서도 자살은 사망원인 1위가 되었다. 40대와 50대에서는 자살이 사망원인 2위이다. 이 나이 대부터는 암으로 죽는 이들이 가장 많다. 이제 60대부터는 그래도 자살에 의한 사망은 그 순위에서 좀 밀려난다. 그래도 60대에서는 4위, 70대에서는 6위, 80대 이상에는 9위이다. 상당히 기형적인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눈여겨 보아야할 부분이 있다. 먼저는 노년층의 자살이 심각하다는 것이다. 어르신들이 경제적으로 어렵고, 몸에 병이 더해지면서 자식들에게 짐이 되기도 싫고, 사는 것이 버거워서 자살하는 이들이 많다. 물론 이 가운데는 자녀들이 잘 돌보지 못해서 외로
움에 의해 돌아가시는 분들도 적지 않다.
또 하나 주목할 부분은 한창 사회적으로 왕성한 활동을 펼쳐야할 30, 40, 50대의 자살이다. 이들은 주로 취학연령, 대학생, 결혼정년기의 자녀들을 둔 부모세대이다. 그런데 이들이 자살로 가장 많이 죽는다. 이것은 이 사회의 커다란 손실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자녀들은 이 부모의 자살로 인해서 큰 짐을 안고 산다. 그 뿐만 아니라 부모의 자살로 인해서 이들 역시 자살의 큰 위험 가운데 사는 것이다. 자살을 유전이라고는 하지 않지만 그 부모는 자녀들에게 자살의 위험을 만들어 주게 되는 것이다.
한국사회의 자살경향 중 또 중요한 부분 중에 하나는 남자들의 자살률이 높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남자의 자살률은 여자보다 2배가 넘는다. 가장 최근의 통계인 2012년을 봐도 전체의 자살률은 28.1명이었고, 이 중 여자는 18.0명이었던데 반해 남자는 38.2명
으로 여자에 비해 2배 이상이 되는 것을 볼 수 있다.
특히 자살자의 수가 많은 40대부터 성별 차이가 두드러진다. 40부터는 평균인 2배를 훌쩍 넘어서고, 50대와 60대에서는 3배 이상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물론 70대와 80대 이상에서는 비율로는 3배까지 차이가 나지는 않지만 자살률 자체가 높은 것을 감안해야 한다. 즉 자살률에 있어서 70대는 73명 정도의 차이가, 80대 이상에서는 약 120명 정도의 차이가 나고 있다. 전체적으로 자살률이 28.1명인데 비해 이 비교수치는 정말 너무 큰 차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경향들을 분석해 보면 결국 가치관의 문제로 귀결된다. 생명의 가치관이 아니라 경제와 효율을 중심으로 했을 때 그 토대가 무너지면 살아야할 이유를 잃어버리는 것이다. 청소년은 학교에서 대학중심의 경쟁에 몰리고, 장년층은 부자가 되겠다는 생각에 매
여 있지만 때로 실패하고, 노인들은 자신이 살 수 있는 경제적 토대를 잃어버려서 살겠다는 소망을 잃고 있다. 이러한 생명경시의 세상, 아니 정확히 본다면 죽음의 문화가 지배하는 시대에 교회가 소망을 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3. 자살에 대한 성경적·신학적 이해


3.1 생명은 성삼위 하나님의 은총의 선물이다.


1) 성삼위 하나님은 생명의 창조주로서 생명의 원천이다.
생명은 철저하게 그 원천인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다. 이는 기독교 신앙의 생명에 관한 가장 근본적인 명제이다(창2:7; 시36:9). 성삼위 하나님께서 생명의 창조주이고 생명의 원천이라는 선언은 깊은 생명 존중의 사상의 선포요 표현이다. 이 선언은 불가침의 진리
로서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다는 증언에 깊이 새겨져 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창1:27).
이 선언에는 생명의 주권이 하나님께 있기에 그 누구도 다른 이의 생명이든지 자신의 생명이든지 파괴할 수 없다는 강한 의지가 반영되어 있다(신32:39; 삼상2:6; 욥1:21; 계1:18 참조). 생명 파괴를 금지하는 명령이 구약성서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 십계명에 여섯째 계명으로 명시되어 있다. “살인하지 말라”(출20:13; 신5:17; 롬13:9; 약2:11 참조).
율법의 살인 금지 계명은 생명 사랑과 보호를 위해 주어진 것이다. 예수님의 산상수훈의 말씀은 제6계명의 생명 존엄의 정신을 더 철저하게 실천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마5:21, 19:18 참조). “네 이웃을 네 자
신과 같이 사랑하라”(마22:39). 그러면 자신을 죽이는 행위도 제6계명과 예수님의 산상수훈의 가르침을 부정하는 것에 해당하는가? 아우구스티누스는 제6계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행위도 금지하고 성경은 어떤 경우에도 자살을 결코 정당화하지 않는다고 엄격하게
해석한다(『하나님의 도성』1권 20절). 하지만 아퀴나스나 칼뱅은 십계명의 살인금지 계명을 결코 자살과 관련시키지 않는다(Watt “칼뱅의 자살론” 참조).


2) 성경에 증언된 생명의 복음에 비추어 자살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자신의 생명을 파괴하는 행위는 생명에 대한 하나님의 고유한 권리를 부정하고 하나님의 형상을 파괴하는 죄악의 행위이다. 하나님의 형상은 사람이 죄를 짓고 타락한 이후에도 여전히 남아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생명을 파괴하는 것을 금지한다(창9:6; 약3:9 참조). 성삼위 하나님께서 은총으로 주신 생명에 대한 사랑, 곧 십계명과 예수님의 이웃 사랑과 자신의 “몸”에 대한 사랑(마22:39 참조)의 말씀을 고려할 때 사람에게는 자살할 권위가 없다(아우구스티누스, 『하나님의 도성』1권 20절 참조). 오직 하나님만이 사람의 삶과 죽음을 결정할 수 있기 때문에 자살은 하나님, 자신, 그리고 이웃을 향한 죄이다(아퀴나스, 『신학대전』2부의 2부 64문제 5절 참조). 자살은 생명의 권리에 대한 하나님의 의지를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죄악의 행위이다. 하나님께서는 매 순간 죽음에 대한 준비를 명하시지만 그 때를 결정할 권리는 인간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 있다(칼뱅, 삼상31:1-13 사울과 무기병에 관한 설교 참조).

 

자살은 “하나님의 권리를 침범한 결정이요, 불신의 행위요, 생명을 은혜의 선물로 보지 못하는 것”이다(칼 바르트,『교회교의학』3/4 “생명을 위한 자유” 참조). 누구도 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해 자살을 감행할 수 없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정당화하면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 행위는 분명하게 죄이다”(본회퍼, 『윤리학』“자살” 참조). 자살, 곧 자기 '살인'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는 편이 낫지만 모든 죽음과 동일하게 자신을 죽임도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생명을 적대시하는 행위임이 분명하다(몰트만, 『희망의 윤리』“사멸과 죽음 속에서의 생명력” 참조).


3) 생명은 사람의 자기결정권에 속하는가? 그래서 자살도 정당화할 수 있는가?
생명에 대한 자기결정권은 하나님이 생명의 창조주요 원천이라는 성경의 근본 명제에 부합하지 않는다. 예컨대 로마 사회의 견유학파나 스토아주의자들과 같이 생명에 대한 자기결정권을 주장하면서 모욕과 수치를 당하는 상황에서 명예롭게 자살을 선택하는 사람들을 강한 정신력을 지닌 것으로 인정하고 또 때로는 존경하기까지 하는 태도는 용납될 수 없다. 욥과 같이 죽고 싶을 정도의 곤경과 억압의 상황에 처해서도 결코 스스로 생명을 끊어서는 안 되고 믿음으로 이겨내야 한다(아우구스티누스, 『하나님의 도성』1권
22-24절 참조).

스스로 목숨을 끊는 행위는 생명을 보존하기를 자연적으로 열망하는 자연법에도 어긋나고 가족을 포함한 공동체에 지울 수 없는 커다란 상처를 남긴다. 이생의 현실적인 고통 – 그것이 아무리 크고 심하다 하더라도 – 을 피하기 위해 자살을 감행하는 것은 그릇된 것이다. “삶의 고통을 피하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은 보다 작은 악을 피하기 위해 더 큰 악을 선택하는 것이다”(아퀴나스, 『신학대전』2부의 2부 64문 제 5절 참조).

자살은 인간의 존귀한 자유의 표현으로 고귀한 죽음이 될 수 있다는 어떤 철학자들의 입장은 그릇된 것이다. 로마의 스토아 사상가들이 주장하는 명예로운 자살에 대한 예찬도 그릇되다(칼뱅, 『칼뱅전집』CO 46: 718 참조). 은총을 전제하지 않는 죽음에 대한 인간의 자기결정권은 용인될 수 없다. 인간이 부여받은 자유의 참된 의미는 오직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할 자유, 곧 사귐과 공동체를 위한 이타적인 자유이다. 바로 이러한 이타적 사랑을 위한 자유가 바로 예수님의 삶과 죽음에서 발견된다(바르트, “하나님의 인간성” 참조).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자유는 자신의 생명을 희생할 자유를 포함하지만 그 자유조차 보다 고차적인 선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그 자유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으로 사용되지 않으면 남용된다. 오직 이타적인 희생으로서의 자유만이 인정될 수 있다.

 

절망적인 상황에서 인간의 궁극적이고 극단적인 자기 정당화로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 행위는 받아들일 수 없다(본회퍼, 『윤리학』“자살” 참조). 자유 또는 자기 결정의 최고조의 행위로 정당화하는 자기 죽임은 이기적인 동기로 자신을 죽이는 행위다. 이러한 자기
죽임은 사회적 관계에 엄청난 파장의 슬픔을 야기한다. 우리가 자기 죽임을 실제적이고 사회적인 관계 속에서 이해할 때 자유로운 자기 결정의 행위로서의 자기 죽음은 용납될 수 없다(몰트만, 『희망의 윤리』“사멸과 죽음 속에서의 생명력” 참조).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의 기본 전제를 인정하지 않고 생명을 오직 자기 권리나 책임에 귀속시키는 자기결정권의 주장은 생명의 복음과 부합하지 않는다.


3.2 생명 상실을 하나님의 긍휼의 정의로부터 이해한다.


1) 생명 상실의 현실에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요청되는 최고의 덕목은 바로 긍휼의 정의이다.
성경이 증언하는 생명의 복음의 심장에 바로 성삼위 하나님의 긍휼의 정의가 자리하고 있다(출32:7-14; 사49:15; 53:4-6; 54:7-10; 55:7; 요3:16; 요일4:7-21 참조). 생명의 복음은 성삼위 하나님의 긍휼의 정의, 곧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을 심어 생명을 주시고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왜곡된 생명을 회복시키셨으며 성령께서 오늘도 이루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생명을 돌보심을 증언한다.

 

성경은 신구약 모두 생명 복음의 빛이 비치기를 대망하던 “흑암에 행하던 백성”과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사9:2), 즉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눅1:79)의 암울한 죄의 현실을 증언한다. 비록 성경에 명시적으로 증언되어 있지는 않지만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사회에서 생명의 복음을 듣고 하나님의 긍휼의 정의를 체험하지 못한 채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하거나 또는 실제로 끊은 사람들이 없었다고 단정하기 어렵다. 성경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선지자조차 스스로 목숨을 끊고자 했던 사실을 증언하고 있다(왕상19:4 참조).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신실한 신앙인도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아 “자기의 생

일을 저주”했다는 성경의 증언을 듣지 않는가?(욥3장 참조). 복음서에도 스스로 죽음을 시도한 경우들이 없었다고 단정하기 어렵다(마17:14-20; 막9:14-29; 눅9:37-43 참조).
예수께서 무수히 많은 약한 자들, 즉 병든 자들, 주린 자들, 귀신들린 자들에게 베푸신 긍휼의 정의를 복음서가 증거하고 있지 않은가? 만일 약한 자들이 예수님을 만나 생명의 복음을 듣고 회복을 체험하지 못했다면 어찌되었을 것인가? 생명의 복음은 모든 생명 상
실을 근본적인 차원에서 하나님의 긍휼의 정의로부터 이해한다.


2) 스스로 목숨을 끊는 행위를 용인할 수는 없지만 정죄보다는 생명에 대한 긍휼의 정의를 우선시해야 한다. 이는 예수께서 선포하시고 몸소 실천하신 생명복음의 근본정신에서 확인할 수 있다.
예수께서는 생명 파괴와 상실의 사변적인 원인을 따지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들에게 하나님의 긍휼의 정의에서 비롯되는 치유의 은총을 먼저 베푸셨다(막1:23-26; 눅4:31-37;막5:1-5; 마8:28-34; 눅8:26-39 참조). 생명의 복음은 성삼위 하나님의 긍휼의 정의를 탕자를 불쌍히 여기시는 아버지(눅10:25-37)로, 도저히 갚을 길 없는 빚을 진 자를 불쌍히 여겨 그 빚을 탕감해주는 주인(마18:21-35)으로, 그리고 강도만나 죽은 사람에게 자비를 베푸는 사마리아 사람(눅15:11-32)으로 비유한다. 예수님은 직접 인간의 연약함의 시험을 받으신 분이시다(히2:18). 예수님은 인간의 약함과 부조리, 곤경과 비극을 체휼하시는 분이시다. 심지어 예수께서는 죽어 마땅한 죄인조차도 회개하고 돌이켜 새 생명을 살 것을 권면하시지 결코 스스로 생명을 파괴하는 행위로 내몰지 않으시는 분이시다(요8:1-11).

 

예수님의 긍휼 사역에 비추어 볼 때 생명상실에 대한 윤리적인 규범적 진지함이나 상황의 절박함과 암울한 시대정신에 대한 분석도 중요하지만 하나님의 긍휼의 정의를 드러내고 전해야 할 책무는 그보다 더 절박한 것이다. 예수께서는 모세 율법의 살인금지 계명을 더욱 철저하게 생명 사랑과 존엄의 복음으로 승화시키셨다(마5:21). 예수님은 곧 생명이다(요11:25). 예수님은 생명을 주시고 더욱 풍성히 주시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다(요10:10).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생명)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겠는가?(마16:26).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은 생명을 주시고 더욱 풍성히 주시기 위한 성삼위 하나님의 긍휼의 정의가 계시된 위대한 생명살림의 사건인 것이다. 성경은 자살을 금지하면서도 절망에 처한 이들을 회개와 하나님의 긍휼로 부른다(본회퍼, 『윤리학』“자살” 참조).

 

3) 생명의 복음은 이성을 부인하지 않으면서도 신앙의 눈으로 무수한 생명 상실을 야기하는 암울한 시대정신의 배후에 도사린 사탄의 역사를 깊이 통찰한다.
생명을 파괴하는 것은 하나님나라 생명복음에 대적하는 사탄의 일이다(요8:44). 예수께서는 스스로 생명을 파괴하는 행위로 내모는 불의한 현실에서 생명의 하나님 나라를 방해하는 악한 영의 역사를 꿰뚫어보셨다(참조. 막1:23-26). 사도 바울도 죽음의 정신의 기저에 도사린 사탄의 인도를 받는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고전15:24)의 역사를 깊이 통찰했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행위는 예민한 양심이 믿음과 율법 사이에서 당하는 괴로움의 표시로서 사탄의 원인 제공과 개인이 느끼는 고통 사이에서 일어난다(루터,“1512년 탁상강화” 참조). 자살은 자기 보존의 본성에 어긋나기 때문에 악한 영이 격동시킨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하나님께서 본성에 부여해주신 지식이 지워졌다는 가정 아래에서만 자살이 일어날 수 있다(Watt “칼뱅의 자살론” 참조). 하지만 자살이 마귀에 사로잡혀 일어난다는 생각은 역사적으로 악용되는 경우도 있었다. 자살을 야기하는 암울한 사회경제적 조건을 등한시한 채 자살자들을 단순히 정신질환이나 악령에 사로잡혀 있는 것으로 정죄하는 입장은 성경이 증언하고 예수께서 선포하시고 실천하신 생명복음의 긍휼의 정의에 부합하는 것으로 보기 어렵다.


3.3 자살에 대한 판단과 정죄에 있어서 매우 신중하다.


1) 성경이 증언하는 생명의 복음과 신학의 생명존중 사상들에 비추어 볼 때 스스로 생명을 끊는 행위를 정죄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신중을 기해야 한다.
성경은 우리 인간의 지식과 지혜로 도저히 설명하고 이해할 길이 없는 문제에 대해서는 겸손하게 하나님의 신비에 맡긴다. 다소 해석의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성경에도 스스로 생명을 파괴하는 행위가 구약에 다섯 차례, 신약에 한 차례 모두 여섯 차례 나타난다. 삼
손의 죽음(삿16:23-31), 사울의 죽음(삼상31:1-13), 사울의 무기병의 죽음(삼상31:5),압살롬의 군대장관 아히도벨의 죽음(삼하17:23), 시므리의 죽음(왕상16:15-18), 그리고 가롯 유다의 죽음(마27:3-10; 참조. 행1:18)이다.

성경은 신구약 모두 스스로 생명을 파괴하는 행위 자체를 명시적으로 정죄하지 않는다고 해서 자살을 긍정하거나 용인하는 것으로 오해해서는 안된다. 그러나 성경은 인간의 지혜와 판단에 가려진 채 오직 하나님께만 알려지는 영역이 있음을 분명하게 증언한다. “사람의 일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외에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일도 하나님의 영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고전2:11). 이렇게 스스로 목숨을 끊은 행위의 동기를 도저히 알 수 없는 경우들도 있다(아우구스티누스,『하나님의 도성』1권 28절).


2) 자살자들에 대한 애도와 장례를 금지해야 하는가?
교회는 자살자들에 대한 애도와 장례에 대해 엄격한 입장을 취한 적이 있었다. 563년의 브라가 공의회는 자살자들을 위해 장례에서 성만찬을 시행하고 시편을 찬양하는 것을 금지했다. 그 이후 수세기 동안 중세 가톨릭교회는 참회 없이 자살을 범한 사람들이 용서받
을 수 없는 죄를 저지른 것으로 간주하면서 거룩하게 구별한 묘지에 묻히는 것을 금했다.

하지만 아우구스티누스와 아퀴나스 같은 신학자들은 생명의 권리는 오직 하나님께 귀속된다는 입장에서 자살을 강도 높게 비판했지만 자살자의 시신이나 유가족들에 대한 모욕적인 처사에 대해서는 일체 언급하지 않았다. 칼뱅도 자살자들을 모욕하기 위해 자살자들의 매장 예식을 금지하는 것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다(Watt “칼뱅의 자살론” 참조).
한 때 교회가 취한 자살자들의 시신과 유족들에 대한 엄격하고 가혹한 입장은 성삼위 하나님의 긍휼의 정의를 무시한 채 생명의 복음을 지나치게 경직되게 해석한 측면이 없지않다. 자살을 용인하거나 정당화하지 않으면서 사람의 생각과 판단으로는 헤아릴 수 없는
하나님의 긍휼의 정의에 기대어 생명 상실을 함께 애도하고 비탄에 빠진 이웃들을 회개와 용서를 통해 화해와 치유로 인도하는 공동체 회복의 예식은 생명복음의 근본정신에 어긋나지 않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들은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살아남은 자로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괴롭고 슬픈 일인지를 알고 있다(요11:32-33; 20:11 참
조).

 

 

4. 하나님나라 생명복음화를 위한 교회의 소명


4.1 한국교회는 생명살림을 위한 성삼위 하나님의 시대적 명령에 순종하여 생명공동체로서의 정체성과 소명을 갱신해야 한다.


1) 한국교회는 어둠과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21세기 한국사회가 겪고 있는 생명상실과 파괴의 아픔에 참여하면서 하나님나라 생명공동체로서의 교회의 사도적인 정체성과 소명 및 책임을 다시 일깨워야 한다.
교회는 성삼위 하나님의 생명의 형상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렘31:33; 겔37:27; 참조. 고후6:16; 히8:10)이요, 그리스도의 몸(고전12:12-31; 엡1:23; 참조. 5:26-27)이요, 성령의 전(고전3:16, 6:19; 참조. 엡2:21-22; 벧전2:9-10)이다. 생명은 그 원천이신 성삼위 하나님의 은총의 선물이다. 한국교회는 생명 상실과 파괴의 급증이 중차대한 사회문제로 떠오른 현실에서 생명의 창조주요 수여자요 보호자이신 성삼위 하나님의 생명살림과 생명공동체 회복을 향한 부르심을 경청해야 할 것이다. 이 시대 가장 긴급하게 위임된 생명살림과 자살예방을 위한 하나님의 명령에 회개하는 심정으로 순종해야 할 것이다.

생명의 복음은 죄와 죽음의 고통 속에서 신음하는 온 피조세계(롬8:22)를 새롭게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성령의 능력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계시된 하나님나라 생명복음을 타협 없이 담대하게 선포하고 가르치고 실천해야 할 것이다. 생명의 복음은 세상 속에서 생명의 인격, 생명의 가치, 생명의 문화, 생명의 경제, 그리고 생명공동체의 회복을 지향하는 방식으로 구현되어야 한다.


2) 한국교회는 예수님의 겸비를 본받아 하나님의 긍휼의 정의로 상처와 고통으로 신음하는 사회를 치유하고 화해시켜야 할 것이다.
이 시대의 생명의 탄식에 귀를 기울이고 생명의 위기를 깊이 공감하며, 생명의 고통에 참여하는 보다 성숙한 자세를 취해야 할 것이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행위를 자신의 자유라고 정당화하면서 생명을 경홀히 여기는 태도는 결코 용인될 수 없다. 그러한 태도는 성삼위 하나님의 생명존중과 생명살림의 뜻에 반할 뿐만 아니라 더욱 큰 고통과 절망으로 이르게 할 뿐이다. 그러나 스스로 목숨을 끊는 행위는 그 당사자에게만 해당하는 개인의 신앙과 책임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의 공동선의 문제이기도 하다. 개인에 대한 형식적인 규범적 판단과 정죄를 넘어 생명의 복음에 비추어 생명 상실을 예방하고 생명을 살리는 하나님나라의 치유와 화해 사역에 앞장서야 할 것이다.


3) 한국교회는 치유와 화해의 생명공동체로서 하나님 나라에 대한 공동의 비전을 가지고 예배, 교육, 친교, 선교, 봉사를 통합적으로 실천함으로써 사회 속에서 생명공동체를 회복하는 사역을 감당해야 할 것이다.
지역교회들이 치유와 화해의 생명공동체로서 지역사회 공동체들과 치유와 화해의 생명공동체 연대와 생명망을 구축해나가야 할 것이다. 한국교회는 생명 상실을 야기하는 정의롭지 못한 사회의 영적인 현실에 주목하고 그러한 정의롭지 못한 현실을 극복할 생명살림을 위한 치유와 화해의 선교를 적극적으로 전개해야 한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행위는 신학적으로는 죄의 문제이지만 정신적, 육체적, 사회적 병리의 문제이기도 하다.


4.2 한국교회는 성삼위 하나님의 긍휼의 정의에 비추어 회개하는 심정으로 생명상실의 현실을 온전히 성찰해야 할 것이다.


1) 한국교회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긍휼의 정의로 오늘날 지구촌과 한국사회의 어두운 심연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스스로 생명을 파괴하는 행위의 원인을 개인의 책임으로만 돌리는 자세에서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시고 실천하신 생명의 복음에 대한 깊은 신뢰를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스스로 생명을 끊는 행위는 구조적인 죄악의 발로요 생명공동체 파괴의 가장 불행한 표현이다. 하나님나라 생명 복음에 비추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들이 증가하는 실상을 통합적으로 성찰하는 것이 요청된다. 희망의 복음을 거슬러 생명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절망의 시대정신을 깊이 통찰해야 할 것이다.


2) 한국교회는 생명의 파수꾼으로 이 시대의 절망의 정신이 여러 복합적인 개인과 사회의 위기의 결과임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먼저 사회 공동체의 기초를 떠받치는 가치관과 규범의 해체에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 주지하다시피 IMF 금융위기 이후 한국사회는 도덕적 규범과 공동체의 해체와 생명존엄의 가치관의 상실로 인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 행위와 폭력적인 죽음이 급속히 증가하는 심
각한 지경에 이르렀다. 생명존중의 가치관의 상실과 도덕적 규범과 공동체의 해체는 우리 사회의 바탕에 깊이 주름 잡혀 있는 개인적·집단적 이기주의와 물질만능의 배금주의와 천박한 성장주의 및 경쟁주의에서 비롯됨을 냉철하게 인식해야 한다. 개인은 점점 파편화되어 가고, 가정과 지역사회는 점차 공동체성을 상실해가고 있다. 가정불화나 이혼, 가정에서의 학대, 가족 간의 의사소통의 부재, 가정 폭력, 사회관계 속에서 발생하는 실업, 정신이상, 장애 등의 복합적이고 중층적인 개인적∙집단적 병리는 실로 심각한 수준에 있다.
생명파괴의 현실을 개인의 도덕적 책임의 문제로만 접근하기보다는, 생명경시와 자살을 촉발하는 정의와 평화가 결핍된 사회경제적 환경도 주목해야 할 것이다. 우리 사회에 만연한 아노미적 상황, 즉 불공평한 사회경제적 상황에 대한 다수 구성원들의 좌절과 절망
과 분노, 상대적 빈곤과 소외에서 오는 고통과 우울증, 사회의 비인간화와 공동체의 붕괴등의 사회병리들이 비인간적인 무한경쟁의 사회경제 환경에서 야기되는 것임을 직시해야 할 것이다.


4.3 한국교회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 동기와 행위를 신중하게 판단하면서 자살을 예방하고 유가족들을 돌보는 치유와 화해의 생명살림의 선교를 더 적극적으로 전개해야 할 것이다.


1) 한국교회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 행위를 불신앙의 행위로 직시하면서도 영원히 저주 받을 범죄로 단정해서는 안 될 것이다.
생명 구원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자유와 은혜의 주권에 속해 있다. 따라서 여러 복합적인 계기에서 한 순간의 그릇된 판단과 결정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는 행위로 인해 지옥에 간다고 단정하지 말아야 한다. 성경의 증언과 신학자들의 해석에 비추어 볼 때 스스로 목숨
을 끊는 행위를 용서받을 길 없는 가장 치명적인 대죄로 간주할 근거는 부족하다. 하나님의 긍휼의 정의를 숙고하지 않은 채 스스로 목숨을 끊는 모든 행위를 가장 치명적인 대죄로 혹독하게 정죄하는 율법주의는 생명의 복음의 본질을 놓치는 것이다. 실제로 자살은
설명하고 해명하기 어려운 동기들에 의해 일어날 경우도 있다. 성경이 증언하는 생명복음에 깊이 뿌리를 내린 신앙의 지혜들은 인간의 지혜와 지식으로 다 이해할 수 없는 문제들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자유와 긍휼에 맡기는 것이 최선임을 보여준다. 한국교회는 하나
님의 신비에 속한 문제들에 대해 지나치게 인간의 제한적인 지식에 기대어 판단하고 정죄하려고 하면서 공동체의 일치를 깨트리는 분쟁과 분란을 조성하는 어리석음을 범해서는 안 될 것이다.


2) 한국교회는 성삼위 하나님의 생명 사랑의 마음을 깊이 헤아려 회개하는 심정으로 생명의 복음에 드러난 하나님의 긍휼의 정의를 더욱 힘써 전하고 실천해야 한다.
불안과 절망의 시대에 스스로 생명을 끊는 사람들 가운데는 생명의 복음을 기다리는 가난한 자, 억눌린 자, 갇힌 자가 있을 수 있음을 숙고해야 한다(눅4:18-19 참조). 생명의 복음은 죽음조차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음을 말씀한다(롬8:38-39 참조).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생명은 마땅히 받아들여지고 긍정되고 사랑받아야 한다. 어떤 생명이 받아들여지고 긍정되고 사랑을 받지 못한 채 스러졌다면 교회는 마땅히 하나님의 긍휼의 정의의 심정으로 생명 상실을 함께 아파하고 애도할 수 있을 것이다.


3) 한국교회는 초기 교회 공동체와 같이 생명상실의 아픔을 함께 공동체적으로 기억하면서 생명 상실을 예방하고 살아남은 이들의 아픔에 동참하고 그들의 아픔을 치유하는 생명살림의 선교에 더욱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요11:17-44 참조).
오늘 우리 사회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생명상실의 아픔으로 실로 공황상태라 하지 않을수 없는 참담한 국면을 지나고 있다. 매년 15,000의 생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고 있다. 화해와 치유를 기다리는 무수한 생명의 아픈 외침을 경청하지 않을 수 없다. 바로 우리 곁에 사랑하는 가족의 가슴 아픈 상실로 인해 깊은 슬픔에 빠져 어둠의 심연을 헤매는 많은 이웃들이 존재한다. 한국교회는 생명복음의 근본정신을 회복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살아남은 자로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괴롭고 슬픈 일인지를 깊이 헤아려 우리의 생각과 판단으로는 헤아릴 수 없는 하나님의 긍휼의 정의를 기억하면서 상실된 생명을 함께 애도하고 비탄에 빠진 이웃들을 회개와 용서를 통해 치유와 화해로 인도하는 생명공동체 회복의 예식도 마련할 수 있는 어머니로서의 교회의 성격을 회복해야 할 것이다(칼뱅, 『기독교강요』4.1.4 참조).


 
 

일반형 뉴스형 사진형 Total 3,456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1808 [2]자살자 장례를 위한 예배문 웹섬김이 05-17 4597
1807 [1]자살자 장례를 위한 예배문 웹섬김이 05-17 4902
1806 [2]자살에 대한 목회 지침서 웹섬김이 05-17 4050
1805 [1자살에 대한 목회 지침서 웹섬김이 05-17 4076
1804 신약서신 개론 웹섬김이 05-17 3863
1803 복음서 개론 웹섬김이 05-17 4526
1802 신약에 사용된 구약 웹섬김이 05-17 3925
1801 신약개론 웹섬김이 05-17 3745
1800 구약개론 웹섬김이 05-17 4159
1799 모세요경 개론 웹섬김이 05-17 3927
1798 예언서 개론 웹섬김이 05-17 4621
1797 [3]진정한 거듭남이란 무엇인가 웹섬김이 05-12 3819
1796 [2]진정한 거듭남이란 무엇인가 웹섬김이 05-12 4372
1795 [1]진정한 거듭남이란 무엇인가 웹섬김이 05-12 5749
1794 [2]요한복음과 공관복음과의 관계 웹섬김이 05-12 3505
1793 [1]요한복음과 공관복음과의 관계 웹섬김이 05-12 9059
   101  102  103  104  105  106  107  108  109  1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