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2-09-12 10:12
[1]전직 승려가 밝힌 불교의 정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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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웹섬김이
조회 : 3,431  

전직 승려가 밝힌 불교의 정체 

“어떤 길은 사람의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잠 14:12)

음력으로 4월 초 8일 석가탄신일입니다. 석가탄신일은 말 그대로 불교의 교조인 석가모니가 태어난 날입니다. 본명이 고타마 싯다르타인 석가는 기원전 6세기 경 인도 네팔 지방의 작은 나라인 카필라 성의 왕자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최고의 지위와 풍요를 누리지만, 29세에 인간의 생로병사에 대해 깊은 회의를 느끼고 번민하다가 처자를 버리고 출가합니다.

그는 6년 동안 고행을 중심으로 하는 종교적인 수행에 전념하며 해결 방안을 모색합니다. 하지만 고행의 무의미함을 깨닫고 결국 극단적인 고행이나 쾌락에 치우치지 않는 중도의 길을 걷기로 결심합니다. 그 후 석가는 자신이 깨달은 진리를 기초로 가르침을 전파하게 되는데 그 결과 불교라는 종교가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그럼 불교란 무엇일까요?

불교(佛敎)는 글자 그대로 '부처의 가르침의 종교'입니다. 불교는 석가모니 부처가 스스로 깨달은 사상을 배우고 따르는 종교입니다. 불교는 또한 '부처가 되기 위한 종교'입니다. 그런데 불교가 다 같은 것이 아닙니다. 석가가 설법한 당시의 불교를 불교에서는 '원시불교'라고 합니다. 이 원시불교에서 소승불교(小乘佛敎)가 나왔고 소승불교에서 대승불교(大乘佛敎)가 나왔습니다.

소승불교는 스리랑카, 태국, 버마, 인도차아나 등에 두루 퍼져 있고, 대승불교는 중국, 일본, 그리고 우리나라에 두루 퍼져 있습니다. 그러면 소승불교는 무엇이고 대승불교는 무엇일까요? 소승불교는 대승불교가 성립되기 이전부터 있었던 불교로 출가주의(出家主義) 불교입니다. 출가는 가정생활, 성 생활, 경제 행위 등으로부터 떠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불교의 초기 경정인 '스타니파타'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이를 원해서도 안 되며 친구를 원해서도 안 된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교제를 하면 애정이 생기고 애정이 생기면 고통이 생긴다. 애정에서 재앙이 나온다는 이 점을 명심하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결국 이 말은 가정생활을 영위하면 애정과 집착하는 마음이 생겨 열반에 이를 수 없으므로 출가하라. 그래야만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소승불교는 '출가한 사람만이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소승불교 뿐 아니라 석가가 설법한 원시 불교도 출가주의 불교입니다.

 그런데 석가가 입멸한 후 수백 년이 지난 기원(紀元) 무렵이 되자 소승불교의 출가주의에 불만을 품은 이들이 출가하지 않고 구원 얻을 방법을 모색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새로운 불교를 전개해 경전을 만들고 대승불교를 일으켰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재가(在家) 신자도 부처가 될 가능성이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므로 소승불교가 가정생활을 버리지 않으면 부처가 될 수 없다는 가르침인데 반해, 대승불교는 "가정생활을 하는 것에 관계없이 부처가 될 수 있다."고 하는 가르침입니다.

 그러니 소승불교 측에서 가만히 있겠습니까? 본래 소승불교의 명칭은 대승불교에서 붙인 것입니다. 소승불교의 출가주의는 오로지 자기 혼자만 구원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출가주의를 후세에 생긴 대승불교를 따르는 사람들은 독선이라고 비난했고, 가르침이 작다는 뜻으로 '소승'이라고 불렀습니다. 때문에 소승불교에서는 자신들의 불교를 '소승'이라고 부르지 않고 상좌부(上座部) 불교라 부릅니다.

상좌부 불교도들은 대승불교를 날카롭게 비판합니다. 그들은 대승불교가 비불설(非佛說)이라고 공격합니다. 즉 대승불교는 석가가 입적한 후 몇 백 년이 지난 후에 나온 신흥종교로서 석가의 가르침이 아니라는 비판입니다. 이들의 이런 비판은 억지가 아닙니다. 실제로 대승불교의 가르침에는 석가의 직접적인 가르침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들이 많이 섞여 있습니다.

예를 들어 석가의 사상은 원래 무신론으로 신 또는 신적 존재자에 관한 사상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대승불교에서는 대일여래나 아미타불 등과 같은 신적 존재자가 나옵니다. 또, 대승불교에서는 정토(淨土) 혹은 불국토(佛國土)라는 사상이 있습니다. 정토(불국토)는 기독교로 말하면 천국입니다. 그런데 정토사상은 원래 석가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즉 원시 불교에는 없습니다.

또한, 소승불교는 시종일관 이 세상의 모든 사물은 공(空), 즉 무아(無我)이고 무상(無常)이라고 보는 세계관입니다. 이에 반해 대승불교는 끝없이 변화하는 무상의 세계 속에서 상주(常住)하는 것, 즉 변함없이 존재하는 것을 잡으려고 합니다. 쉽게 말해서 대승 불교는 영원한 것을 찾으려 합니다. 그리고 대승불교의 일파인 정토종에 이르면 원래의 원시 불교에는 없었던 ‘죄’의 개념이 거론됩니다. 일본의 승려 신란은 인간의 죄 문제를 강하게 인식했으며, 사찰 중에도 ‘참회멸죄사’라는 것이 생기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대승불교에는 말법(末法) 사상이라고 하는 역사관 및 미륵이라는 미래의 구세주에 대한 신앙이 있습니다. 이 사상에 따르면 석가가 입멸(사망)한 지 오랜 세월이 지난 현대는 말법시대로, 석가의 가르침이 실행되고 있지 않은 무척 혼란한 시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결국 미륵이라는 부처가 이 세상에 출현해 석가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을 구원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말하자면 ‘미래의 어느 날 이 세상에 구세주가 나타나 사람들을 구원한다’고 하는 신앙입니다.

이러한 사상은 원래 원시 불교에서는 없었던 것인데 그렇다면 과연 어디서 나온 것일까요? 앞에서 소개한 대로 대승불교에는 대일여래나 아미타불과 같은 신적 존재자가 존재한다는 사상, 정토사상, 상주(常主)사상, 죄 사상, 미륵보살 사상 등 원래 원시 불교에는 없었던 사상이 혼합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상은 기독교에 대한 지식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듯이 기독교의 사상과 유사합니다.

 실제로 불교사의 권위자인 A. E. 골든은 미륵의 어원을 조사한 결과, “인도어로 미륵은 ‘마이트레야’이고, 중국에서는 ‘미르어’, 우리나라에서는 ‘미륵’으로서 이것은 히브리어로 ‘메시아’ 헬라어로는 ‘그리스도’이다.” 라고 단정 지었습니다. 히브리어의 메시아가 인도에서는 마이트레야, 중국에서는 미르어, 한국에서는 미륵이 된 것입니다.

또한 아미타불에 대해서도 불교사의 권위자인 알티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아미타불의 교리는 인도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중국 불교는 카슈밀이나 네팔에서 전례된 것으로, 아미타불 사상은 당시 그 지방에 영향을 주었던 페르시아의 조로아스터교와 기독교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성경은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다“(고후 4장 18절)고 밝힘으로서 끝없이 변하는 세계 속에서 영원한 것을 바라보라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대승불교가 상주(常主)를 강조하게 된 것도 이와 같은 성경의 사상의 영향을 받은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또, 대승불교 여덟 종파의 조상이라 불리는 용수(주후 150년~250년경)는 금강보살로부터 대일경(大日經)이라는 경전을 받을 때 금강보살로부터 관정(灌頂)을 받았다고 했는데, 그것은 머리에 물을 뿌리는 의식으로 그 이전의 불교에서는 없었던 것입니다. 용수는 분명히 기독교의 세례를 모방해 그러한 의식을 받아들인 것으로 추정됩니다.

또한, 원래 불교에는 없었던 멸죄 사상을 칭송하는 ‘참회멸죄사’가 생겨나는데 이 또한 기독교의 영향입니다. 그리고 12세기에 이르러 대승불교에서는 남무아미타불을 외우면 누구든지 정토에서 태어날 뿐 아니라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남무(南無)는 ‘귀의한다’ 또는 ‘믿는다’는 뜻으로 남무아미타불 이란 ‘아미타불을 믿는다.’ 또는 ‘아미타불에 귀의 한다.’는 의미입니다. 이렇듯 불교에서 신적 존재자인 아미타불의 이름을 부르고, 그 신적 존재자에게 자신의 믿음을 나타내 보이면 누구든지 구원을 얻는다는 형태를 취하게 된 것은 사도행전 2장 21절의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는 기독교 신앙이 여러 경로를 통해 불교 사상에 영향을 끼친 결과들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대승불교는 순수불교가 아니라 혼합종교입니다. 이 때문에 대승불교에 대해 “대승불교는 석가의 가르침이 아니다.”라는 ‘대승비불론’(大乘非佛論)이 학자들 사이에 폭넓게 논의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우리나라의 불교는 대승불교입니다. 그러므로 불교를 꼭 믿으실 분은 이것을 알고나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럼 서론은 이쯤하고 이제 본론을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지금 이 땅에는 5만개의 불교 사찰과 15만여 명의 승려들, 50여만 명의 무당들, 그리고 2,000여만 명의 불교 신자들이 있습니다. 최근 한국 불교는 일신 해탈의 득도 위주에서 탈피하여 불교 대중화 포교 방법으로 인적이 드문 깊은 산속을 벗어나 도심에 절을 지어서 적극적인 도심 포교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밤에 옥상에 올라 가보면 교회 십자가 네온사인뿐 아니라 불교의 ‘卍’자 표시도 간간이 눈에 뜨입니다.

 몇 년 전만 해도 한국 불교는 솔직히 할머니들의 기복 불교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학문의 불교로 전환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직설적이고 비판적인 전도 방법보다는 논리적인 교리 비교 전도 방법이 효과적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전도하려면 불교에 대해서 알아야합니다. 따라서 오늘은 불교의 허와 실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1. 부처

 부처란 말의 원래 의미는 “(진리에) 눈을 뜬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처음에 부처는 석가를 말하는 것이었고, 사람들로부터 존경받는 한 사람의 인간을 나타내는 단어였습니다. 석가모니는 결코 초인간이나 신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어디까지나 인간이었으며, 또한 그는 스스로 자신이 인간임을 자처했습니다. 일예로 ‘박카리’라는 제자가 죽어가면서 마지막 소원으로 석사모니 스승에게 예배드리고 싶다고 말했을 때 석가모니는 “박카리야, 이 썩을 몸을 보아서 무엇 하겠다는 것이냐?”라고 말하면서 예배를 거부했습니다. 또, 언젠가 석가모니는 주위 사람들로부터 다음과 같은 질문을 받았습니다.

“당신은 대체 어떤 분입니까?” 석가모니는 대답을 하지 않고 침묵을 지켰습니다. 그는 다시 질문을 받았습니다. “당신은 신입니까?” 석가모니는 고개를 옆으로 저었습니다. 그는 다시 질문을 받았습니다. “당신은 천사입니까?” 석가모니는 여전히 고개를 옆으로 저었습니다. “그럼 당신은 대체 어떤 사람입니까?”라는 체념 어린 질문을 받았을 때 석가모니는 조용히 “나는 깨달은 자” 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이와 같이 석가모니는 자기가 신이 아니라고 분명하게 밝혔습니다. 석가모니는 신이 아닙니다.

신은 전지전능합니다. 그런데 석가모니는 신이 아니었기 때문에 전능하지도 전지하지도 않았습니다. 석가모니는 결코 전능하지 않았습니다. 한 예로 옛날 인도의 구시라성의 시다림에서 한 과부가 슬피 울고 있었습니다. 그때 석가가 그 곳을 지나다가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과부는 병중에 있는 외아들을 살려달라고 애원하였습니다. 이에 석가는 한 번도 죽은 일이 없는 집의 쌀을 한줌씩 얻어다가 죽을 끊여 먹이면 살아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오후에 돌아온 과부는 “부처님이시여, 하루 종일 다녀도 그런 집이 없어 빈손으로 왔습니다.”하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때 석가는 이렇게 말합니다.

“자매여 생자필멸(生者必滅)이라, 사람이 나면 반드시 죽는 것, 인연 따라 일어나 인연 따라 없어지는 것이니 너무 슬퍼할 것이 없느니라.”

이와 같이 석가는 죽음 앞에 무력했고 과부의 외아들을 살리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릅니다. 예수님은 나인성 과부의 죽은 외아들을 살려 주셨습니다(누가복음 7장 11절~17절). 또한, 석가모니는 결코 전지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가룟유다가 자신을 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류의 죄를 대신 속하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나 석가의 경우는 이와 다릅니다. 석가는 전지하지 못한 까닭에 비참한 죽음을 맞았습니다. 그는 쿠시나가라로 가는 중에 ‘춘다’라는 신도가 대접하는 돼지고기 요리를 먹고 죽었습니다. 춘다가 돼지 요리에 독버섯을 넣었던 것입니다. 석가는 이 요리를 먹고 설사병에 걸려서 죽어갔습니다.

석가가 힘없이 설사병에 걸려 죽어갈 때 아난다라는 제자가 슬퍼하면서 “우리는 누구를 의지하며 살아야 합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때 석가는 냉정하게 대답했습니다. “아난다여, 스스로를 주(洲)로 하며 스스로 의소(依所)로 하여 다른 이를 의소로 하지 말며 머물라.” 이 말은 쉽게 말해서 “나를 의지할 생각일랑 말고 스스로를 의지하라”는 말입니다. 하긴 독버섯을 먹고 설사를 줄줄 하면서 죽어가는 신세에 어떻게 자기를 의지하라고 말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와 같이 석가는 전능하지도 전지하지도 않았으며 나약한 한 인간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대승불교에서는 어이없게도 이렇게 죽은 석가모니를 신격화해서 그를 섬기고 있습니다. 대승불교에서는 불교의 개조인 석가를 ‘구원 실현의 부처’라 하여 영원 전부터 부처였다고 주장합니다. 그들의 주장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사람들은 석가가 29세에 출가하여 35세에 깨달음을 얻었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 석가는 영원 전에 이미 부처가 되었다. 그럼 왜 세상에 태어나서 수행했는가? 그것은 사람들을 인도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이것이 바로 법화경의 내용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어디서 많이 들어본 것 같지 않습니까? 이것은 기독교의 영원한 그리스도 사상의 불교 판입니다. 실제로 인도의 유명한 종교학자 아만드 샤 박사는 “그리스도의 사도인 도마의 복음에 대항해 석가를 성인에서 구세주로 승격시킨 것이 대승불교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석가가 영원부터 부처였다고 주장하여 석가를 신격화하는 것은 석가 자신의 주장과 배치되는 것이며 기독교에 밀리지 않기 위하여 기독교를 모방한 것에 불과합니다. 한편, 부처에 관해서는 이 외에도 할 말이 많지만 시간관계상 다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성철스님의 초팔 법어에 나타난 부처의 모습을 살펴보는 것으로 만족하려 합니다. 그 대신 결론에 가서 아주 중요한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저는 성철 큰 스님의 법어에서 참 희한한 글을 읽었습니다. 그는 1986년 음력 4월 8일 법어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교도소에서 살아가는 거룩한 부처들, 오늘은 당신의 생신이니 축하합니다. 술집에서 웃음을 파는 엄숙한 부처님 오늘은 당신의 생신이니 축하합니다……. 천지도 한 뿌리요 만물은 한 몸이라. 일체가 부처님이요 부처님이 일체시니 모두가 평등하며 낱낱이 장엄합니다.” 여기서 성철은 재소자들과, 호스티스들이 부처님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 이듬해인 1987년 음력 4월 8일 법어에서 그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탄이여! 어서 오십시오. 나는 당신을 존경하며 예배합니다. 당신은 본래 거룩한 부처님입니다. 사탄과 부처란 허망한 거짓 이름일 뿐 본 보습은 추호도 다름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당신을 미워하고 싫어하지만은 그것은 당신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당신을 부처인 줄 알 때에 착한 생각, 악한 생각, 미운 마음, 고운 마음, 모두 사라지고 거룩한 부처의 모습만 뚜렷이 보게 됩니다. 그리하여 악마와 성인을 다 같이 부처와 스승으로 부모로 섬기게 됩니다. …….”

이와 같이 성철은 심지어 사탄이 곧 부처요 부처와 사탄은 하나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정신병자가 아닌 이상 이런 것이 부처라면 무엇 때문에 불교를 믿겠습니까? 그리고 이왕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제가 신학교 4학년 때 울산에 있는 모기도원에 부흥집회를 인도할 때의 일입니다. 하루는 장로교 목회자 한 분이 강사실로 저를 찾아왔습니다. 그러더니 하는 말이 자신은 기도 중 입신을 하여 지옥엘 여섯 번 갔다가 왔는데 그때 그 곳에서 부처를 보았다 고합니다. 부처가 그 곳에서 형벌을 받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만일 이 이야기를 한다면 불교신자들이 얼마나 펄펄 뛰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자제하고 가급적이면 이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성철스님의 초팔 법어를 읽고는 그럴 필요가 없었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1989년 음력 4월 8일 법어에서 그는 급기야 이렇게 말했기 때문입니다.

 “천상천하에 독존 무비한 부처님의 처소는 험악하고도 무서운 저 지옥, 지옥에서 온갖 고통을 받고 신음하는 모든 중생들의 그 고통을 대신 받고, 그들을 안락한 곳으로 모시며 그들을 돕기 위하여 부처님은 항상 지옥에 계십니다. 중생계가 한이 없으니 부처님의 지옥생활도 끝이 없습니다. 오늘도 내일도 중생계가 다 할 때까지…….”

이와 같이 그는 부처가 지옥에 있으며 부처의 지옥생활은 끝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다가 결국 1993년 11월, 그는 다음과 같은 열반 송을 남기고 죽었습니다.

“한 평생 무수한 사람들을 속였으니 그 죄업이 하늘에 가득 차 수미산보다 더하니 산채로 무간지옥에 떨어져 그 한이 만 갈래나 되는 지라…….”

여러분, 대한민국 불교 신자 중에 성철보다 불심이 강하다고 자부할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는 부처가 사탄이라고 했으며, 부처는 지옥에 있다고 했으며, 자신도 지옥에 떨어진다고 말하고 죽었습니다. 그의 말대로 불교란 지옥에 가 있는 부처를 믿다가 결국 지옥에 떨어지게 만드는 허탄한 종교입니다.

2. 사리

사리(舍利)란 원래 범어인 ‘사리라(sarira)’의 음역으로서, 우리말로는 사골(舍骨), 영골(靈骨), 유신(遺身)으로 번역됩니다. 그러므로 사리는 사람이 죽은 뒤 화장하고 남은 뼈를 말합니다. 사리는 아무리 고열을 가해도 타지 않는 특색이 있고, 작게는 좁쌀, 팥알만 한 크기에서부터 크게는 콩알 크기만 한 것들도 있다고 하는데, 검은색, 흰색, 붉은색 등이 뒤섞여 오색찬란한 빛을 발한다고 합니다.

불전에 의하면 석가모니는 화장 후 8말 8되나 되는 사리가 나왔다고 합니다. 사리는 과학적으로 정확한 분석이 없습니다. 그 이유는 사리가 불가해한 것이기 때문이 아니라 불교에서 사리를 신성시하여 내주지 않기 때문에 그 누구도 사리성분을 분석할 기회를 얻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사리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의학자들은 사리가 몸속의 결석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즉 뼈를 제외하고 인간의 몸에 생길 수 있는 무기물로는 콩팥의 결석과 간이나 쓸개의 담석이 대표적이기 때문입니다. 이 담석은 모두 칼슘을 포함하며, 나이가 많아질수록 잘 생긴다고 합니다. 특히 정좌한 채로 몇 년씩 움직이지 않고 수양하는 스님들에게는 담즙이나 소변의 배출이 원활치 않아 이들이 생길 수 있는 소지가 더욱 높다고 합니다.

즉 사람이나 짐승이나 불에 태우면, 생전의 칼슘 양에 따라 배출되지 못한 칼슘성분이 사람의 뼈에 맺혀 있다가 녹아서 구슬 같은 조직체가 적게 혹은 많게 생길 수 있다는 설명입니다. 이 외에도 스님들이 금욕생활을 하기 때문에 정액 축적에 의하여 생성된다는 설도 있습니다. 그런데 사리는 알고 보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것을 여러분께 입증해 드리겠습니다.

1993년 11월 4일 조계종 종정 성철스님이 입적(사망)했습니다. 당시 성철스님의 죽음은 불교계는 물론 일반 국민들 사이에도 그간의 행적 때문에 상당한 관심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사람들의 관심은 성철스님에게서 과연 사리가 나올 것이냐? 나온다면 과연 몇 과나 나올 것인가? 에 모아졌습니다. 결국 성철스님에게서 2백여 과의 사리가 나왔을 때 불교계는 축제 분위기였고, 세인들의 입에서도 ‘사리’가 자주 입에 오르내렸습니다.

 그런데 불과 몇 달 후인 1994년 1월 8일 참으로 기막힌 일이 발생했습니다. 그것은 그날 경남 고성에서 교통사고로 돌아가신 할머니의 몸에서 성철스님보다 훨씬 많은 4백여 과의 사리가 쏟아져 나온 것입니다. 그 동안 사리는 불가에서 수행이 높은 스님들의 몸에서만 나온다고 가르쳐왔고 사리의 많고 적음으로 수행의 깊이를 가늠할 수 있다고 말해왔습니다.

 그런데 성철스님의 사리가 2백여 과인 것에 비해 조기순 할머니의 몸에서는 그 배가 되는 4백여 과의 사리가 발견된 것입니다. 그러면 불교계의 최고의 참선 가이며 고승인 성철스님보다 많은 사리가 나온 조기순 할머니는 어떤 사람일까요? 조기순 할머니는 어려서부터 정신적으로 정상상태가 아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동네에서 바보라고 따돌림을 받으면서 자랐습니다. 그렇게 자라서 시집을 갔는데 시댁에는 들어가 보지도 못하고 친정집에서 한 두 차례 신랑을 맞은 후 바로 소박을 당했습니다. 그렇게 불행하게 살다가 교통사고로 숨져서 일반 화장터로 그 시신이 운구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할머니의 몸에서 사리가 나온 것입니다.

사리는 할머니의 가슴과 좌골 무릎 부분에 사마귀처럼 붙어 있었으며 왼쪽 정강이 부분에 특히 많았다고 합니다. 그녀의 사리는 크기가 6cm 1과에서부터 5cm 1과 3~2cm 15과, 콩알만한 것 15과 등을 합쳐 4백 13과가 나왔으며 좁쌀만 한 크기까지 모두 수습했다면 몇 백과가 더 나왔을 것이라고 그 할머니의 생질은 증언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녀가 비구니도 아니었고 더더구나 불교신자도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조기순 할머니는 무종교인이었습니다. 이로써 사리가 도를 통한 스님의 몸에서만 나오는 신비의 물체인양 세상을 기만했던 불교계의 주장이 완전히 거짓임이 백일하에 드러난 것입니다. 오늘날 어떤 사람들은 사리를 불교가 참 종교임을 입증해주는 하나의 증거인양 생각합니다. 그러나 지금 소개해 드린 대로 사리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사리를 신성시하는 불교 역시 엉터리에 불과합니다.

3. 열반

열반이라는 말은 불교에서 구원의 의미로 사용하는 말입니다. 열반은 해탈의 상태를 말합니다. 그럼 해탈은 또 무엇일까요? 해탈이란 두 번 다시 생명을 부여받지 않고 두 번 다시 생존하지 않으며, 윤회의 ‘윤’(輪)으로부터 탈출하는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집착과 욕망과 번뇌의 끈을 자르면 생사윤회로부터 해탈해 열반에 들어간다고 말합니다.

법화경에는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집착하는 마음만 없으면 자기의 존재는 문제가 되지 않으며, 자기의 존재를 부정하면 윤회의 세계로 다시 태어나지 않게 된다. 태어나지 않으면 늙음, 죽음, 슬픔, 고통, 번뇌도 모두 사라지게 된다.”

여기서 “집착하는 마음”은 모든 욕구와 욕망을 가리킵니다. 불교에서는 모든 욕구와 욕망을 버리면 고뇌가 사라진다고 가르칩니다. 그런데 만약 불교에서 버리라는 욕구와 욕망이 단지 사욕(邪慾)만 제거하는 것을 의미한다면 우리도 여기에 동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선악을 가리지 말고 모든 욕구를 버리라고 가르칩니다. 이것은 누가 보아도 크게 잘못된 가르침입니다. 이것은 선에 관심을 가지지 말고 선을 행하지 말라는 말과도 같기 때문입니다.

한 번은 인도의 성자 썬다 싱이 불교지도자 한 사람을 만나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그들은 우리가 지금 다루고 있는 바로 이 주제에 대해 서로 말했는데, 먼저 불교 지도자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좋은 욕구라 하여도 그것은 이기적인 기초에서 나온 것이다. 예를 들면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선한 일을 하려 할 때도 (알던 모르던) 좋은 갚음을 받으려는 목적의식이 있다. 사람이 어떤 신을 섬기든지 그 자신의 이익을 바라는 것이다. 인생의 경험으로 보면 우리의 욕구는 거기에 따르는 갈망과 불만이 함께 더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좋은 욕구도 사악과 한 가지로 제재해야 한다. 이 욕구가 사라지는 것이 곧 열반이다.”

불교 지도자의 이런 말은 듣고 썬 다싱은 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는 자가 지각없이 살 수 없는 것 같이 욕구 없이 살 수 없다. 욕구 없이 존재한 자가 있다면 아마 그것은 생명이 없는 것일 것이다. 감각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그와 함께 욕구가 일어나는 것이다. 영, 육의 욕구를 적당히 충족시키는 것이야 말로 생존의 법칙이다. 만약 완전히 욕구를 죽여 버린다면 그것은 욕구를 가진 생명까지도 죽여 버리는 일이 된다. 이러한 견지에서 욕구를 제거하는 것은 파괴요 구원이 아니다.”

 그런 후에 그는 아주 중요한 지적을 했습니다.

“만약 완전한 구원이 욕구를 버리는 것이라면 버리고자 하는 마음도 벌써 욕구인 것이다. 그것은 마치 불을 가지고 불을 끄려하고 물을 말리려고 물을 붓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불교에서 말하는 열반은 사실은 구원이 아닙니다. 그것은 멸망의 다른 이름일 뿐입니다. 한편, 열반에 대한 불교계의 해석은 한 가지가 아닙니다. 둘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먼저, 열반은 기쁨도 슬픔도 없는 절대적 정적, 즉 절대적 무(無)의 상태라는 해석이 있습니다. 이것이 근본에 가까운 해석입니다. 실제로 “열반”이라 번역된 산스크리트어 ‘니르바나’는 “꺼져버린 상태”라는 뜻입니다. 마치 거센 바람에 꺼져 버린 불꽃처럼 열반은 거센 바람에 의해 생명의 불꽃이 사라져 없어지는 것과 같습니다.

어느 날 석가는 “열반에 들어간 사람은 존재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영원히 살아날 수 없는 것입니까?”라는 질문을 받고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대에게 그러한 것을 측량할 만한 기준이 존재하지 않는다. 즉 이렇다 저렇다 논할만한 실마리가 그에게는 없다. 모든 것이 완전히 끊어지고 모든 논의의 길은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스타니파타)

결국 석가는 열반은 윤회라는 생존의 틀 밖으로 나간 것이기에 통상적으로 말하는 유무의 차원에서 “열반에 들어간 자가 존재하는가 존재하지 않는가”라고 물을 수는 없다고 말한 것입니다. 이와 같이 열반이란 윤회와 분리된 상태로 생명에 관한 모든 것들이 끊어진 상태입니다. 이것이 본래 석가가 가르친 열반입니다. 그러니 이 얼마나 허무하고 재미없는 것입니까? 제정신을 가진 자라면 누가 이 따위 것을 얻기 위해 일생을 수행을 하겠습니까? 그래서 불교계 안에서도 일부 후세 사람들이 열반의 상태가 너무 무의미하다는 결론에 도달하여 열반에 들면 기쁨을 누린다고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열반에 대한 제2의 해석입니다.

이러한 해석을 시대의 흐름에 따라 점차로 변화해 열반이 마치 기독교에서 말하는 천국과 같은 이미지를 주게 됩니다. 열반이 ‘정토’나 ‘불국토’라는 말과 결부되어 그곳에는 환희와 행복과 영생이 있다고까지 말하게 된 것입니다(대승불교).

그러나 이러한 가르침은 불교 본래 사상이라기보다는 후세에 와서 부가 또는 변질된 것입니다. 초기의 불전을 보면, 열반은 생명에 관한 모든 것이 단절된 절대적인 무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원시불교의 열반 교리는 너무도 허무하고, 대승불교의 열반 교리는 좋기는 하나 믿을 만한 것이 못됩니다.

4. 재(공양)

한국불교에는 예불 외에도 재(공양)가 있습니다. 재는 원래 공양을 올리면서 행하는 불교 의례 중의 하나입니다. 본래 재는 스님들에게 공양을 올려 선근공덕을 쌓는 목적이 있으나, 지금은 스님들에게 공양을 올리는 일보다 각종 목적을 지닌 여러 형태의 재 의식으로 변했습니다.

재를 목적에 따라 분류하면 죽은 사람의 명복을 빌기 위한 49재, 유주무주(有主無主)의 여러 고혼을 천도함에 의하여 자신이 복락을 누릴 수 있다는 목적에서 행하는 수륙재, 살아생전에 미리 고애덕을 쌓아서 죽어서 극락왕생하기 위하여 행하는 예수재 등 여러 가지의 재공양이 있습니다. 이 중 49재와 예수재에 대해서만 간단하게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① 49재

불교에서는 사람이 죽은 후 49일이 되는 날 절에 가서 49재를 지냅니다. 49재란, 죽은 이의 명복과 극락왕생을 기원하기 위해 울리는 재입니다. 사전에 보면 49재를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습니다.

“49재란 불교에서 사람이 죽으면 그의 명복을 빌어주는 의식으로써 돌아간 날로부터 49일이 되는 날에 부처님께 공양하고 돌아가신 이에게 경전을 읽어 줌으로써 망령이 지혜의 눈이 열려 좋은 곳으로 환생하도록 돕기 위한 것이다.”

이와 같이 49재는 죽은 사람을 천도하기 위해 지내는 재입니다. 불교신자들은 부모나 친척이 죽으면 최하 100만원에서 최고 몇 백만 원까지 들여가면서 49재를 합니다. 그런데 이때 스님들이 하는 염불 내용은 어이없게도 죽은 사람 극락가라는 내용이 아니라 참선하는 중들이 주고받는 대화 내용이 대부분입니다. 구체적으로 예를 들면, 옛날 중국의 참선하는 중 조주는 제자나 신도들에게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차 마시게”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차 마시게’가 바로 49제 염불의 한 토막입니다.

또한 참선하는 중 운문은 그 자신이 떡을 좋아해서 제자들과 신도들에게 “떡 자시게” 하면서 떡을 권했습니다. 이것도 49제 염불의 한 토막입니다. 이뿐 아니라 중국의 선승 황매와 임재 문하에서 그 제자들과 주고받던 이야기가 전부 염불로 되어있습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차 마셔라” “떡 먹어라” “엿 먹어라”

이런 염불 때문에 과연 죽은 자가 극락왕생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49재는 사기입니다. 우리나라에 전문적으로 각종 불교재를 올릴 때 염불만 해주고 돈을 받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전국적으로 염불 잘 한다고 소문이 나서 큰 재만 있으면 뽑혀 다닙니다. 박월정이라는 스님입니다. 그런데 그가 한번은 이렇게 실토했다고 합니다.

“한참 염불하다보면 할 염불도 없을 때가 있다. 그때는 꽝과리를 크게 치면서 마구 욕설을 섞어하다가 간혹 나무아미타불하면 내용 모르는 신도는 돈만 잘 놓고 자기 친척 영혼 극락 가는 줄 알고 신나게 절을 꾸벅꾸벅한다. 욕하는 줄도 모르고서 참 재미있다.”

또 이들과 한 패인 한일정이라는 스님은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습니다. “본서방 죽으라고 백일 산신 기도 드렸더니 본서방은 죽지 않고 샛서방만 죽었네. 머리를 풀라하니 시가 식구 알까봐 겁이 나고 흰 댕기를 하자니 동네 여편네들 알까봐 겁이 나고 아무도 모르는 삼베 꼬장주나 해 입을까?”

심지어는 이렇게 부도덕하고 음탕한 내용까지도 염불이랍시고 외우는 중들도 있습니다. 그러니 이런 염불로 무슨 극락왕생이 가능하겠습니까? 꼭 이런 극단적인 예가 아니더라도 49재는 본래가 사기입니다. 왜냐하면 불교는 근본적으로 무신론이고 석가 자신이 영혼 문제를 부정하였기 때문입니다.

영혼이 없는데 내세가 있을 수 없습니다. 참선하는 승려들은 대부분 영혼이 없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일반신도들에게 영혼이 있다고 가르칩니다. 이렇게 해야만 신도들이 시주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49재는 죽은 자의 영혼을 천도하려는 목적으로 생긴 것이 아니라 실제로는 돈을 뜯어내기 위해서 불교에서 꾸며낸 것입니다.

그 증거로, 그들은 49재 염불중에 죽은 영혼이 목욕을 해야만 깨끗한 몸으로 극락에 간다고 하며 목탁과 징을 쳐가면서 목욕 비를 가족들로부터 받는데 그 비용이 산 사람 사우나 비용보다 비쌉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종이로 인형 옷을 접어놓고서 옷 갈아입으니 부처 앞에 돈 놓아라. 또 죽은 영혼 머리를 단장하여야 하니 “빚 가지고 오라. 양말 수건 비누 치약을 가지고 오라.”

저승 가는데 마차를 타고 가야하니 “말 먹는 풀을 베어 오라. 그렇지 않으면 돈을 가져오라”라고 합니다. 어떻게 불교에는 교통수단이 현대화 되지 않아서 항상 말만 타고 저승에 가는지? 한 마디로 웃기는 이야기입니다. 이것도 부족해서 그들은 옛날 만화 같은 ‘전생록’이라는 책을 만들어 놓고는 음력으로 생년, 월, 일, 시를 넣으면 “당신은 전생에 남에게 빚진 돈이 100만 냥이요 금강경 1000부, 이것을 갚지 않으면 지옥도 여러 곳이 있는데 당신이 갈 곳은 독사 지옥이다.” 하는 등 해괴망측한 말로써 시주를 내도록 합니다. 무엇보다도 49재는 석가의 가르침에도 없습니다. 따라서 49재는 뒤늦게 승려들이 영혼을 속이고 돈을 갈취하기 위해 만들어낸 사기극에 불과합니다.

② 예수재(預修齋)

49재나 영산재 등은 모두 죽은 이들을 위하 재 의식인데 반해, 예수재는 특이하게도 살아 있는 사람을 위한 재입니다. 죽은 후 극락에 태어나기를 기원하며 살아있을 때 미리 지내는 재가 예수재입니다. 예수재를 지내는 이유는 자신이 죽은 후에 자식들이 자신을 위해 49제를 지낼 것인지 아닌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예수재에는 돈이면 다 된다는 황금만능주의 사상이 짙게 깔려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돈으로 구원을 사는 것이 예수재입니다. 예수재 때 스님들에게 진짜 돈을 주면 스님은 가까 종이돈 두 장을 그에게 주어 한 장은 그날 예수재를 지냈다는 증표로, 또 한 장은 머리에 이고 탑돌이를 하고 시왕전에 올림으로써 극락왕생을 기원합니다.

즉 예수재를 지냈으므로 극락세계로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속된 말로 염라대왕도 돈 앞에는 약하다는 말이 됩니다. 염라대왕이 돈을 받고 지옥 갈 사람을 극락으로 보내준다니 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말입니까?

“유전 무죄요 무전 유죄” 라는 말이 있는데 사회에서는 법정의 불의함을 꼬집는데 사용되는 이 말이 불교에서는 진리요 염라대왕 앞에서는 재판의 기준이 되는 셈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누가 보아도 말도 안 되는 사기극입니다.

여러분, 불교의 근본 교리는 무구소욕(無救小欲), 즉 구하는 것이 없고 욕심이 적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 와서 이런 불교가 국가적으로는 호국불교로, 개인적으로는 복을 준다는 기복 불교로 변해 버렸습니다. 쉽게 말해서 욕심을 버리라는 불타의 가르침이 욕심대로 복을 구하는 기괴한 불교로 변한 것입니다.

그 증거가 바로 49재와 예수재 외에도 절에서 행해지는 각종 재수불공, 병 낫는 불공, 생남불공입니다. 또 부적을 파는 것 또한 그 증거 중 하나입니다. 만해선사는 ‘불교 유신론’에서 불교에서 행해지는 재 공양 의식을 “매우 번잡하여 질서가 없고 비열 잡박한 연극”이라고 까지 힐난했습니다.

왜냐하면 순수 불교에는 불공 의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순수 불교는 바른 깨달음으로 자아 완성의 길로 나아가는 것을 지양합니다. 그러므로 위의 것들은 신도들을 속여서 재물을 갈취하려는 무당들과 야합된 해괴망측한 유희일 뿐입니다.

5. 부적

시내의 식당이나 가게에 가보면 출입구에 붉은 색 부적이 붙어있는 것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재수있는 일들이 많이 생기고 사업이 번창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꽤 비싼 돈을 주고 구해다 붙인 것입니다. 부적은 무속 종교의 대표적인 행위입니다. 교주, 교전도 없으면서 거의 모든 우상종교에 다 있고, 마치 그것은 카페인과 같아서 사람들의 영혼을 휘어잡는 묘한 마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부적의 상당수는 절에서 생산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부적을 구입한 출처를 조사해 보았더니 점쟁이나 무당이 30%인데 비해 암자가 45%였다고 합니다. 또한 부적 연구가가 불교신자 30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부적을 지닌 사람이 1852명으로 전체의 2/3에 가까운 숫자였다고 합니다.

현재 불교에서는, 왕생정토부, 금강부, 존제부, 관음부, 염불부, 당득견불부, 구도부 등 수많은 종류의 부적을 판매하고 있습니다. 이 중 존제부는 불교의 존제진언을 부적화 한 것으로, 복과 수명이 산과 바다와 같아진다고 합니다. 부적 하나 지닌다고 복과 수명이 산과 바다 같아 진다니! 이게 사실이라면 부자 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으며, 장수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한 마디로 황당한 주장입니다.

 그런데 이보다 더 황당한 것이 왕생정토부와 당득견불부입니다. 왕생정토부는 죽음에 임박한 사람이 가지는 적인데 설혹 죄가 있다고 해도 이 부적을 지니면 극락세계에 탄생한다고 합니다. 그러면 도적이 도적질해서 그 돈으로 왕생정토부라는 부적을 하나 사면 그는 극락에 가게 될 것입니다. 부적하나 지닌다고 지옥 갈 사람이 극락에 간다니 그게 말이 됩니까? 그리고 당득견불부라는 부적은 그 부적을 지닌 사람은 부처님을 볼 수 있다고 하는데, 그 부적을 가지고 부처님을 본 사람이 과연 있기나 한지 참 궁금합니다.

이렇듯 부적들은 터무니없는 것들을 약속하는 허무한 것입니다. 이러한 부적들이 효험이 있을 리 만무합니다. 부적이 아무런 효험도 발휘하지 못한다는 것은 우리나라의 역사에도 잘 나타납니다. 그 한 예로 사도세자는 이조 제21대 영조대왕의 아들입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건강이 좋지 않은데다가 말이 없고 우울하고 행동이 날쌔지 못하여, 아버지로부터 꾸지람을 받고 살았습니다.

그의 병은 날로 깊어갔고 그로 인해 그는 영부사 이천보와 박시민 등의 권유를 받아 천존부적을 가지고 무당 푸닥거리하는 옥추경을 읽었는데 그 후로 옷을 입지 못하는 병이 겹쳐 완전히 미치광이가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하는 수 없이 영조대왕은 1762년 5월 13일 그를 폐세자하고 뒤주 속에 넣어 죽였습니다.

그 결과 그 후로 세자빈 혜경궁 홍씨는 영부사들을 원망하고 부적과 푸닥거리하는 옥추경을 마귀보다도 더 무섭게 대하였다고 ‘한중록’은 전합니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비극의 왕비들 역시 부적이 효험 없음을 잘 드러내줍니다.

이조 500년의 역사 중 가장 비극의 왕비는 장희빈과 민비일 것입니다. 장희빈은 사약을 받았고, 민비는 칼로 시해를 당해 비극적인 종말을 고했습니다. 그런데 이들의 공통점은 무당 푸닥거리를 심하게 하고 부적을 몸의 구석구석에 지녔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도 왜 그토록 비참하게 죽었을까요? 그것은 부적이 그들의 생명을 지켜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과거에 효력이 없던 부적이 지금이라고 효력을 발휘할리 만무합니다.

몇 해 전 어느 은행의 지점장이 소양호에서 투신자살을 했습니다. 그런데 시체를 건져보니 그 지갑 속에 여러 장의 부적이 들어 있었습니다. 재수부적, 관재부적 등 ‘나쁜 액’을 피하게 하는 부적들이 지갑에 가득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최악의 상황을 맞이하였고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또 몇 해 전 대구 서문시상에서 큰 화재가 발생했습니다. 그런데 피해 상인들의 상당수가 불교신자로서 팔공산 갓바위에 1개월에 한번 씩은 꼭 정성을 드렸고 부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마산 부림 시장의 화재 때와 부산의 자갈치시장의 화재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 중 많은 상인들이 불교신자였고 부적을 소유하고 있었으나 그것은 아무런 효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부적의 효험 여부를 떠나 사실은 절에서 부적을 취급하는 것 자체가 문제입니다.

불교의 절이라는 곳은 부처의 가르침을 받들고 본인이 부처가 되기 위해 수양하는데 전념하는 곳이며, 불자에게 석가모니 부처의 가르침을 가르치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부처의 가르침이 아닌 다른 것을 해서는 안 되는 곳입니다. 물론 불교의 교리에 부적을 그려 팔라는 내용이 있다면 그렇게 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그러나 결코 불교의 교리에는 그런 내용이 없습니다. 이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지금 우리나라 불교의 승려들은 부적을 그려서 팔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한국불교가 무속신앙과 하나가 되어 무당화되었기 때문입니다.

6. 윤회

불교의 ‘밀린다 왕문경’에 보면 “이 세상에 태어난 자는 이 세상에서 죽고, 이 세상에서 죽은 자는 다시 저 세상에서 태어나며, 저 세상에서 태어난 자는 저 세상에서 죽고, 저 세상에서 죽은 자는 다시 딴 세상에서 태어난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곧 윤회입니다. 윤회설에 따르면 생명은 다음 여섯 세상 사이를 영원한 옛날로부터 영원한 미래에 걸쳐 계속해서 윤회전생(輪?轉生)한다고 합니다.

* 첫째 : 지옥 - 중생이 자기 지은 죄업으로 가게 된다는 지하의 세계로 모두 136종류가 있습니다.

* 둘째 : 아귀 - 파율의 악업을 저질러 아귀도에 바진 이들의 세계로 늘 굶주린다고 합니다.

* 셋째 : 축생 - 짐승의 세계

* 넷째 : 수라 - 악귀와 괴물의 세계

* 다섯째 : 인간 - 인간 세계 

* 여섯째 : 천상 - 하늘에 사는 자들의 세계, 신들의 세계

윤회설에 따르면 생명은 태어나고 죽는 것을 반복하면서 이 여섯 개의 세계를 항상 돌아야 한다고 합니다. 불교를 믿는 사람들은 살다가 힘들고 어려운 일을 만나면 “아이고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그렇게 많이 지어서 이 고생을 하는지 모르겠다”고 원망하며 탄식합니다. 이 말 자체에 나타나듯이 설사 전생에 죄를 지었다고 해도 그 죄를 알지 못하면 현재 당하는 고생으로 죄를 개선하기는커녕 탄식과 원망만 나옵니다. 이 때문에 인도의 성자 썬다 싱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지금 문둥병자나 소경을 예로 들면 만약 그가 현재 전생에 지은 죄 때문에 고생한다면 그는 그 죄의 통고를 받고 알아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징벌의 목적은 이루지 못하는 것이다. 징벌의 목적은 그 죄를 알게 하여 회개하고 더 좋은 생애를 보내게 하려는데 있다. 그러나 그가 그 받은 징벌의 이유를 모르면 경계를 받고 생활을 개선하기는커녕, 스스로를 무죄라고 생각하여 불평하고 신을 비판하게 된다. 세상 재판관도 죄를 선언하지 않고 판결을 내리지 않는다. 그렇다면 하물며 심판자의 심판자가 어떻게 죄를 고하지도 않고 죄인을 벌할 수 있는가?” 그러므로 전생을 기억하지 못하는 한 윤회설은 그 목적을 상실하고 맙니다. 그런데 전생을 기억하는 자가 누가 있습니까? 그러므로 윤회설은 엉터리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윤회설의 주장대로 하면 전 세계 인구는 고정 불변이라야 옳습니다. 왜냐하면 육체에 깃든 한 영혼이 거듭 돌아와서는, 임신할 때 정자와 난자 외에 제3의 씨앗으로 끼어서 태어나 다시 한 육체를 입는 것이라면, 도무지 인구가 늘어날 까닭이 없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어떤 영혼들은 성공적으로 나르바나(열반)에 들어갔을 것이니 인구는 도리어 점차 줄어야 옳습니다.

그런데 현실은 어떻습니까? 인류의 인구는 그동안 계속 늘어왔고 현재는 인류 역사 이래 최대의 인구가 지구에 있습니다.(현재 인구는 약 70억 명) 이것 하나를 보더라도 윤회설의 거짓임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불경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옛날 어떤 나그네가 인도의 옛 도시인 “라자그리하”에서 걸식을 하다가 성문에서 새끼를 낳은 암소한테 떠받쳐 목숨을 잃었습니다. 소 임자는 겁이나 그 날로 소를 팔아버렸습니다. 그런데 소를 산 사람이 물을 먹이기 위해 물가로 소를 끌고 가다가 뒤에서 소가 떠받는 바람에 그만 죽고 말았습니다. 소를 샀다가 재난을 당한 그 집 아들은 화가 나서 그 소를 잡았습니다. 그는 자기 아버지를 죽인 소의 고기를 입에 댈 수 없어 시장에 내다 팔았습니다.

어떤 시골 사람이 그 소머리를 사서 메고 가다가 자기 집에서 십리쯤 떨어진 한 나무 밑에 앉아 쉬게 되었습니다. 그는 새끼에 매단 소머리를 나뭇가지에 걸어 놓았는데 그만 새끼가 끊어지는 바람에 소머리가 떨어지면서 그 소의 뿔에 찔려 죽었습니다. 그 소는 한꺼번에 세 사람을 죽였습니다. 라자그리하의 빔비사라왕은 그 말은 듣고 너무 괴상해서 신하들을 데리고 석가를 만나러 왔습니다.

“석가 선생이시여, 실로 괴상한 일이 있습니다. 한 마리 암소가 세 사람을 죽였습니다. 무슨 변고인지 그 까닭을 듣고 싶습니다.”

이에 석가가 이렇게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죄의 깊음에는 반드시 그 원인이 있으니 그것은 지금 시작된 일이 아닙니다. 그 옛날 세 사람의 상인이 이웃 나라로 장사하러 가서 한 외로운 노파 집에서 머물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넉넉하게 값을 치르겠다고 한 당초의 말과는 달리 며칠 동안 편히 숙식을 한 뒤에 떠나 올 때는 노파를 만만하게 보고 값도 치르지 않은 채 빠져 나왔습니다. 노파가 밖에서 돌아와 장사치들이 보이지 않자 이웃 사람들에게 물으니 그들은 벌써 떠나갔다고 했습니다. 노파는 그럴 수 있는가 싶어 수 십리 길을 걸어 그들의 뒤를 쫓아갔습니다. 그들을 겨우 만나 숙박료를 요구하니 장사치들은 도리어 화를 내면서 오늘 아침 벌써 치렀는데 또 달라느냐고 하면서 잡아떼는 것이었습니다. 노파는 분이 치밀어 올라 그들을 저주했습니다. ‘내가 지금은 곤궁해서 너희들은 어떻게 할 수가 없지만 이 다음 생애는 너희들을 만나 이 원한을 풀 것이다. 축생(짐승)이 되어서라도 너희들을 한꺼번에 죽이고 말 것이다.’ 이렇게 말한 그 노파는 이를 갈면서 저주했습니다.”

여기까지 말한 후에 석가는 다시 설법을 시작했습니다. “그때 그 노파가 바로 오늘의 저 암소요. 소한테 떠받쳐 죽은 세 사람은 숙식비를 떼먹고 달아난 그때의 장사치들이지요.” 

여러분 이 얼마나 황당무계한 논리입니까? 이것은 어처구니없는 공갈일 뿐만이 아니라 석가 자신의 가르침과도 상반됩니다. 본래 윤회설에 의하면 나쁜 일을 해야 축생으로 태어나고 착한 일을 해야 사람으로 태어납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피해자인 노파는 소로 태어나고 가해자인 세 사람의 장사치들은 모두 사람으로 태어났습니다. 이 어찌된 일입니까? 그러므로 윤회설은 믿을 만한 것이 못됩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지어낸 허망한 이야기입니다.

7. 불경

어느 종교에든지 자기들이 믿는 경전이 있습니다. 불교에는 불경이 있습니다. 불교의 경전은 부처가 죽은 후, 그가 45년간 설법한 것을 제자들이 구술해 온 것을 4차에 걸쳐서 결집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까지 남아있는 이 경전들을 1885년 일본에서 출판했습니다. 그때 경장(교법)이 대장경 8천 5백 37권, 소장경 7백 78권, ‘율장’(계율)은 대장경 2천 2백 90권 ‘논장’이 5백 45권, 잡부들이 4천 9백 23권을 출판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불교를 오랫동안 전공한 학자라 할지라도 불교 경전을 전부 읽은 사람은 없다고 합니다.

그러면 이 불경이 정말 믿고 따를 수 있는 진리냐?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불경이 진리가 아니라는 것은 불경 자체가 증명합니다. 왜냐하면 같은 불경끼리 서로 모순되는 주장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① 불경에 나오는 열반의 상태가 서로 다릅니다.

초기의 불전을 보면 열반은 생명에 관한 모든 것이 단절된 절대적인 무(?)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후기의 불경 즉 대승불교에는 열반이 ‘정토’나 ‘불국토’라는 말과 결부되어, 그곳에는 환희와 행복과 영생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② 불경에 나오는 성불하기까지 걸리는 시간이 서로 다릅니다.

어떤 불전에는 사람이 부처가 되리라고 결심하고 나서 성불까지 걸리는 시간이 ‘삼아승기백대겁’ 이라고 기록되어 있고, 다른 불전에는 단지 ‘3겁’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1겁은 43억 2천만년)

③ 불경에 나오는 극락에 대한 가르침이 서로 다릅니다.

극락은 석가모니 이전에 중앙아시아 민족으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설화를 석가모니가 무량수경, 관무량수경, 아미타경에서 이상향을 그리며 설법한 것입니다. 무량수경에 의하면 극락은 아홉 가지로 되어 있는데 즉 즉 구품연화대라고 합니다. 관무량수경에는 극락은 상지상품, 상지중품, 상지하품, 중지상품, 중지중품, 중지하품, 하지상품, 하지중품, 하지하품 등 9가지 종류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이중 극락의 최하위인 하지하품에는 아무리 악한 죄를 지었더라도 죽을 때 나무아미타불을 열 번만 부르면 들어갈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열 번 나무아미타불을 염불한 공덕이 다하면 육도, 즉 천상, 인간, 아귀, 아수라, 축생, 지옥을 윤회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후에는 그 곳에서 다시 공덕을 쌓아야 극락에 갈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원각경에 보면 이와는 달리 “색신이 종귀지수화풍, 공적영지, 역겁상존, 금역불망자, 본자구족, 부동도장, 시명극락,” 즉 “이 몸은 마지막에 흙과 물과 불과 바람으로 돌아가고 고요한 가운데 영적 알음알이(영적 지혜)는 여러 겁을 두어도 없어지지 않으며 지금까지 없어지지 않고 근본적으로 갖추어지고 움직이지 않는 수도장이 바로 극락이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몸은 다 없어져도 영혼만은 움직이지 않고 한 곳에 편안하게 있는 것이 극락”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처음에 말하는 윤회사상인 극락과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좀 더 자세히 설명하면 무량수경, 관무량수경, 아미타경에서 말하는 극락과 원각경에서 말하는 극락과는 서로 다릅니다. 같은 불교경전인데도 서로 틀리고 모순됩니다. 그러므로 불경은 진리가 아닙니다. 그것은 자기모순으로 가득 차 있는 책이며 인간들이 꾸며낸 어설픈 책입니다. 불경이 진리가 아니라 인간이 지어낸 책이라는 것은 불경에 짙게 깔려있는 성차별의식을 보아서도 분명합니다.

불경의 교리에 따르면 부처는 모두 남성입니다. 아미타불, 약사불, 대비로자나불, 그밖에 갠지스 강의 모래알 수보다 더 많다고 하는 부처는 모두 남성입니다. 또한 보살도 남성입니다. 보살은 아직 부처는 되지 않았지만 부처가 되기 바로 직전의 사람입니다. 즉 부처 후보생입니다. 그런데 보살도 모두 남성입니다. 예를 들어 관음보살의 경우를 살펴보면 관음상이 여성적인 모습으로 만들어져 있어, 여성이라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실은 남성입니다.

불교교리를 보면 보살은 모두 남성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불전에 보면 여성은 여성인 채로 부처가 될 수 없다고 적혀 있습니다. 또, 석가는 제자인 아난다에게 “여자는 어리석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법화경에는 “불국토에는 부녀자(여성)가 없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부처의 나라인 정토에는 여성이 없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불교 해설가로 널리 알려진 히토사찌야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불교의 여성관은 적잖이 여성 멸시 사상을 내포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불교에서 여성을 멸시한다고 보는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우선 불교에서는 여성이 여성인 채로 부처나 보살이 될 수 없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부처나 보살이 되기 위해서는 여성은 남자로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것을 일컬어 ‘변성남자’라고 합니다. 이것은 변명할 수 없는 성차별입니다.”

불교에서는 초창기부터 여성은 수행을 쌓아도 부처가 될 수 없다고 가르쳐 왔습니다. 실제로 불전의 곳곳에서 여성을 무시하는 말들을 많이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 가운데 노골적인 표현으로 “여성은 똥오줌으로 가득 찬 더러운 그릇이다”라는 글귀도 있습니다 (스타니바타).

더러운 그릇인 점에서는 남성도 마찬가지이지만 무슨 속셈인지 불전에는 남성에 대해서는 절대로 이러한 표현을 쓰지 않고 있습니다. 법화경에서 우리는 여성이 여성인 채로 부처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명확히 확인할 수 있습니다. “깨달음에 도달하고자 굳게 결심하고 그 결심을 굽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의지를 갖고 있다 하더라도 여성은 완전한 깨달음의 경지에 들어갈 수 없다. 설사 여성이 굳은 결심으로 몇 백겁(1겁은 43억 2천만년) 몇 천겁 동안 덕을 쌓는 수행을 거듭해 육파나밀(수행의 여섯 가지 조항)을 실현했다 하더라도 오늘날까지 부처가 된 여성은 한 명도 없다.”

법화경에 이러한 내용은 대승불교의 입장에서 볼 때 큰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대승불교는 출가한 사람뿐만 아니라 재가 신자도 성불 할 수 있으며, 남성뿐 아니라 모든 사람이 성불할 수 있다고 주장해왔습니다. 따라서 여성이 부처가 될 수 없다는 가르침은 그들에게 큰 걸림돌이었습니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바로 변성남자 즉 여성이 남성으로 된다는 사고방식입니다. 이는 만약 여성이 부처가 될 수 없다고 한다면 다시 남자로 태어나면 된다는 뜻입니다. 이로 인해 부처가 되기를 진심으로 소원하던 한 여성의 생식기가 어느 날 석가와 다른 사람들의 보는 앞에서 갑자기 남성의 생식기로 변했다는 해괴한 이야기까지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겪으면서 불교는 후대에 이르러 여성도 수행을 하면 부처가 될 수 있다고 가르치게 되었습니다. 또한 승만경과 같이 여성 신자가 불법을 말한다는 내용의 불전도 창작되었습니다. 그러나 승만경에 조차 여성이 부처가 되기 위해서는 수차례 다시 태어나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즉 윤회전생을 함으로써 장래에 남자로 태어나서 성불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불교는 인도의 오래된 계급 제도인 카스트 제도에 대해서는 반기를 들지만 성차별에 대한 생각은 버릴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다릅니다.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갈 3:26-28)

이와 같이 기독교는 남존여비 사상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과거 봉건제 시대에서는 여자를 남자보다 훨씬 지위가 낮은 것으로 취급했습니다. 하지만 기독교에서는 남자와 여자의 지위가 동등합니다. 여자는 남자의 소유물이 아니며 더욱이 종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기독교가 지나치게 여성해방을 강조하는 것도 아닙니다. 기독교는 남녀 간의 모든 차별을 철폐한다고 하여 여성스러움마저 없애려하는 극단적인 여성해방운동을 반대합니다. 기독교는 양극단을 배제하고, 부부는 인간으로서는 대등하지만 서로의 역할은 다르다고 믿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불교와 기독교간의 이 차이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불교나 기독교 모두 경전이 기록될 당시 남존여비사상의 문화와 정신적인 풍토 속에서 기록되었습니다. 그런데 불경에는 남존여비사상이 그대로 침투되어 있는 반면 성경에는 그 사상이 완전히 배제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 뿐입니다. 그것은 불경은 단지 사람의 머리로 고안해낸 사람의 말이요 성경은 하나님의 계시와 감동에 의해 기록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교는 당시의 삐뚤어진 문화를 뛰어넘지 못한 반면 기독교는 당시의 잘못된 문화를 훌쩍 뛰어넘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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