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초기 수도원 운동 제국에 침입한 야만족들의 개종과 더불어 중세 기독교사회의형성에 공헌한 또 하나의 역사적 사건은 중세 여명기에 형성된 수도원 운동의 부흥과 초기 선교였다. 기독교는 처음에 박해 중에 연단을 받고 자라왔다. 그런데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로 변한 뒤에는 교회는 정부의 보호 아래 속화의 길을 걸었다. 이러한 속화의 경향 에 대한 반동으로 수도원 운동이 일어났다. 박해시의교회가 순교를 미덕으로 삼던 그 자리에 평화시의 교회는 이를 금욕으로 대치시킨 것이다. 독신 생활과 금욕 및 금식을 예찬하는 데서 수도원 운동은 하나의 영적 유토피아 운동으로 부각되었고, 헬라 철학에 영향을 받은 일부 교회지도자들은 영과 육의 대립관계를 금욕으로 해결하였다. 이러한 영적 풍토 속에 기독교 수도원을 최초로 창설한 자는 애굽의 코마에서 250년 경에 태어난 아토니였다. 그는 아디나시우스와 콘스탄틴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에게 영적 감화를 끼쳤다. 조금 시간이 지난 뒤에 안토니의 은둔 수도원을 개혁한 사람이 파코미우스였다. 그는 수도원의 사회성과 기여성을 더욱 강조하였다. 그외에도 기둥성자 시므온, 제롬 그리고 널시아의 베네딕트가 초대 교회의 수도원 운동에 효시를 놓았다. 특히 중세 수도원 운동은 베네딕트에 의해 조직적인 수도원 운동으로 확산되었다. 베네딕트 수도원은 수도원 운동의 전반적인 흐름이었던 이집트 중심의 극단적인 금욕생활과는 달리 자신들의 구원문제에만 그치지 않고 사회봉사, 교육활동, 선교사업 등에도 주력하였다. 베네딕트는 당시 대부분의 수도원에서 볼 수 있는 지나친 금욕주의나 초인간적인 훈련 방법을 배제하고, 지나친 신비주의를 추구하지도 않았다. 그는 기도하며 일하라는 명제를 내걸고 노동과 명상을 강조하였다. 결국 이러한 중용의 입장은 취한 베네딕트 규율이 콜롬바누스에 의해 알려진 켈트 수도원의엄격한 규율과 동방 수도원들의 극단주의를 능가하였고, 로바르트족이 몬테가시노를 점령함으로 전 유럽에 퍼져 결국 중세 수도원의 맥을 이루어 수도원이 부흥하였다.
2. 수도원 갱신운동 중세기는 교황좌를 중심으로 한 정치싸움과 성직매매 등 교권이 극도로 타락하였다. 의식있는 사람들은 이런 와중에 수도원의 삶을 택했으며 이로 인해 교황청의 세력에 맞서 싸움수 있는 적절한 세력은 수도원밖에는 없었다. 결국 8세기의 카로링커 왕조시에는 수도원 운동이 절정을 이루었으며, 이시기에 수도원은 엘리트 단체로 유럽 사회에 주도적인 세력으로 등장하였다. 수도원은 중세 문화의 종교의 중심지가 되었으며, 유명한 교황들과 교수들이 극소에서 배출되었다. 수도원은 지상 최고의 이상으로 예찬되었다. 교황청과 주교들이 귀족과 탐욕에 찬 성직자들에 의해 개인적인 출세의 도구가 되었고, 수도원도 마찬가지 현상을 빚었다. 그러므로 경건한 신앙을 추구하던 자들은 자연히 마음속으로부터 변화의 조짐을 희구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수도원과 교회의 본연의 모습을 찾고자하는 개혁운동이 수도원내에서 일어났다. 그중 대표적인 개혁운동이 클루니와 시터 수도원 개혁이다. 교황권의 타락에 대한 반작용으로 일어난 클루니 수도원의 개혁운동은 수도원 내부에서 발생한 최초의 커다란 개혁운동이었다. 910년에 아퀴탱의 윌리암 공작에 의해 설립된 클루니 수도원은 교황의 명을 제외하고는 수도원 내부의 방침을 따르는 등 수도원의 자치권을 크게 확장시켰다. 이 수도원은 엄격한 베네덱트 규율에 따라 수도생활이 규제되었고, 당대의 스캔들이었던 성직 매매, 성직자들의 결혼도 철저히 금지시켰다. 당시의 성직자의 독신의 강제가 아닌 권장사항이었다. 그러나 수도원의 개혁에 성공한 수도사들은 성직자들도 수도사들처럼 독신을 지켜야 개혁이 된다고 보았다. 또 하나의 개혁원칙은 복종의 원리였다. 수도원에서 모든 수도사들이 수도원장에게 절대 복종함으로 개혁이 가능했듯이 기독교권은 교황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원리였다. 그러나 이러한 수도원 중심의 초기 개혁운동은 수도원과 교회 양쪽에서 다 실패하고 말았다.
3. 탁발 수도회 13세기에 들어 유럽사회의 급격한 변화는 교회와 수도원 운동에도 새로운 흐름을 요구하였다. 즉 봉건제와 기존의 교회 체제 그리고 수도원 체제의 틀이 서서히 깨지기 시작했고, 아울러 크레르보 수도원이 세워진 지 100년만에 탁발수도회라는 도미니크와 프란시스의 수도단이 창설되었다. 이 박탈 수도단들은 거리로 자리를 옮겨 그리스도의 사랑을 구체화 시켰다. 그들은 수도원 개혁자들이었다기보다는 그 시대의 시회개혁자들이었다. 도미니크(1170 - 1221)는 스펜인의 카라로가에서 태어난 발렌시아 대학을 졸업하고 주교가 되었다. 스페인인답게 굳건한 의지와 불굴의 정신에 불타서 도미니크 수도회를 조직하여 이교도와 이단의 개종에 힘썼다. 청빈과 봉사를 통한 이웃 사랑을 수도단의 양대 원칙으로 삼았다. 프란시스(1182 - 1226)는 도미니크보다 12년 늦게 태어났지만, 도미니크보다 앞서 수도단을 교황으로부터 허락을 받아 출발시켰다. 프란시스는 현대에 보여줄 나사렛 예수의 생생한 화신에 해당된다. 그는 가난의 길을 살며 선을 베푼 빚의 성자이다. 많은 추종자들이 생기자 그는 1209년에 간단한 수도회칙을 작성하였다. 그는 1212 년에 교황 이노센트 3세로부터 수도회를 승인받게 되었다. 프란시스는 1223년에 모든 공직을 사임하고 1223년에 몬테 아베르노의 암자에 들어가 그곳에서 여생을 기도로 보내면서 생을 마쳤다. 그는 빈곤, 독신, 순종의 삼대 서약을 강조하며 봉사와 전도에 힘써다. 그는 사도적인 단순성과 가식없는 온유한 인격 때문에 인류 역사에 존경받는 인물로서 추앙 받았다. 일생을 통한 그의 뜨거운 사랑에 날아 다니는 새까지도 그의 온기를 느끼고 날아들었다고 한다. 수도원과 수도단이 진실하게 사도들과 같은 삶을 영위하기 위한 노력을 지속적으로 추구하였지만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점차적으로 탁발수도회는 하나의 배타적인 성격을 띤 세력과 조직으로 변모되어 13세기 이후에 급변하는 유럽사회에 교회가 뒤떨어지게 되는 한 요소가 되기도 하였다. 특히 교회갱신과 신앙적 노력에도 불구하고 십자군 운동과 관련한 동방 문화의 유입과 유럽사회의 변혁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했고 특히 르네상스의 기틀이 된 고대 그리스문명과 학문에 대해 폐쇄성을 보임으로 마녀사냥, 종교재판, 유대인 박해라는 일종의 종교적 광기를 드러내기도 하였다.
A. 초기 수도원의 금욕생활 1. 수도원의 금욕생활 켈스의 올림피우스(Abba Olympios of the Cells) 가 간음에 유혹되었다. 그의 생각에 그에게 다가와서 가서 아내를 취하라고 명했다. 그러자 그는 즉시 일어나서 진흙을 발견하고서 그것을 가지고 여자를 만들었다. 그리고는 자신에게 말하였다. 여기에 네 아내가 있다. 이제 너는 그녀를 먹여 살리기 위해 열심히 일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서 그는 스스로 고통을 주면서 열심히 일을 했다.
B. 베네딕트와 수도원제도 2. 베네딕트 규칙 선언 : 내 아들아 스승의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네 마음의 귀를 기울이라. 네 사랑하는 아버지의 훈계를 단 마음으로 받아 신실히 행하라. 순종하여 노력한다면 불순종과 태만으로 인해 멀어졌던 하나님께 다시 돌아갈 것이다. 7장 : 겸손의 첫 단계는 모든 태만을 쫓아내며 항상 자신의 면전에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을 품고 사는 것이다. 우리는 항상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것을 기억해야 한다. 또한 그를 경외하는 자들에게는 영생이 예비되어 있으나 그를 경홀히 여기는 자는 그 죄로 인해 지옥불에 던지워진다는 것을 명심해야한다. 두 번째 단계 : 자신의 뜻을 사랑하지 않고, 자신의 욕망을 이루는 것을 기뻐하지 않는 것이다. 세 번째 단계 : 하나님께 대한 사랑 때문에 상급자에게 순종하는 것이다. 네 번째 단계 : 순종하는 중에 어려움이 있거나 모순되는 것 또는 손해를 당할지도 그것을 인내로 포옹하고 낙망하거나 포기하지 말라. 다섯 번째 단계 : 마음에서 일어나는 악한 생각이나 은밀히 행한 죄 등을 원장에게 감추지 말고 겸손히 고백해야 한다. 여섯 번째 단계 : 범사에 수도사로서 누추하고 가장 나쁜 물건에도 항상 만족하라는 것이고, 또한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일에 자신을 오로지 가장 학하고 가치없는 일꾼으로 간주하라는 것이다. 일곱 번째 단계 : 입으로만 자신을 모든 사람보다 천하고 가치없는 자라고 말하지 말고 그것을 마음으로 믿으라는 것이다. 여덟 번째 : 수도사로서 수도원의 공통된 규칙이나 선임자들이 인정하지 않은 것을 행하지 않는 것이다 아홉 번째 : 수도사는 그 혀를 자제하고 질문을 받을 때 까지 침묵하라는 것이다. 열 번째 : 수도사는 웃기지 않고 항상 점잖게 그리고 겸손하고 신중하게 말하라는 것이다. 말수는 적지만 합리적이어야 하고, 목소리를 높여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열 한번 째 : 모든 만나는 사람에게 마음으로, 외적인 행동으로도 항상 자신의 겸손을 보여야 한다. 48장 : 게으름은 영혼의 적이다. 그러므로 정해진 시간에 근로에 종사하고 그 외에 시간에는 거룩한 독서를 해야 한다. 53장 : 모든 형제들은 규칙을 따라야 한다. 어떤 사람도 타당한 이유없이 규칙을 지키지 않으면 안된다. 수도원의 그 누구도 자신의 생각에 따라 행동하거나 수도우너장과 뻔뻔한 논쟁을 해서는 안된다. 수도원장은 주를 경외하고 규칙에 복종하면서 모든 일을 해야 한다. 수도원장은 자신의 결정한 것에 대하여 하나님께 보고해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73장 : 우리가 이 규칙을 작성한 것은 이것을 수도원 내에서 지킴으로써 약간의 덕목을 쌓고 거룩한 생활을 시작하려 함이다. 완전한 생활에 속히 이르고자 하는 자는 거룩한 선진들의 교양을 읽어야 한다.
C. 베네딕트 수도원의 관습 3. 주님의 살과 피를 잘못 다룬데 대한 벌 주님의 살과 피와 관련되어 부 주의 하였을 때, 즉 그것을 땅에 떨어뜨리는 실수를 저질렀을 때, 가능한 한 발리 그 문제를 수도원장이나 또는 부 수도원장에게 알리고 그 사건이 발생한 곳으로 서둘러 사람을 데리고 갈 것이다. 주님의 파가 나무, 돌, 장판 등에 떨어지면 그것을 자르거나 표면을 걷어내어야 한다. 그리고 부주의한 것에 대한 책임이 있는 자들은 다음 번에 소집되는 참사회에서 정중히 사과하고 그 벌로서 맨발로 고통을 당하거나 금식 또는 체벌 또는 기도 등 여러 종류의 벌이 그들에게 부과될 것이다. 주님의 피가 어떤 깨끗한 옷 위에 덜어졌다면 그리고 그 떨어진 지점이 확실하다면, 그 옷을 물로 씻고, 첫 번째로 씻은 물은 형제들이 받을 것이고, 두 번째로 씻은 물은 버릴 것이다. 그리고 다음 번 참사회에서 용서를 빌 때에 그 사건에 책임있는 사람들은 위에서 제시한 벌을 받아야 할 것이다.
4. 아픈 형제가 죽어가고 있을 때에 공동체가 취하여야 할 행동 두 명의 형제가 밤낮으로 환우를 떠나지 말 것, 환우가 의식이 있으면 주님의 수난 기사나 복음서의 기사를 읽어줄 것, 환우가 의식이 없으면 형제들은 그가 살아있는 동안 계속해서 시편을 읍송할 것이라. 환우가 지키는 형제가 환우의 임종의 순간을 감지했을 때 그는 손에 널판지를 취하여 문쪽으로 달려가 모든 수도사들이 들었다는 것을 확신할 때까지 예리하고 신속하게 널빤지를 때릴 것이라. 크레도를 읍송 하면서 갈 것이라.
D. 시터 수도원의 기원과 발전 5. 스테판 하딩의 추신 배경 교황우르반 2세의 시대에 시터 수도원이 시작되었다. 수도원은 이제 천국으로 가느 확실한 길이 된다고 믿어졌다. 그는 하딩 이라는 이름을 가졌으며, 영국에서 별 대수롭지 않은 부모들 밑에서 태어났다. 그는 세보른에 수도사가 되었으나 세속적인 욕구가 그의 젊은 시절을 사로잡았기 때문에 그는 수도사들의 복장을 입는 것을 몹시 실어하며 자랐다.
6. 스테판 하딩의 사랑의 헌장(Carta Caritatis 1117) 서문 시터계 수도원은 서로 세계의 다양한 부분에 흩어져 있을 지라도 상호간에 영적으로는 하나가 되려 하였다. 게다가 가들은 종종 이 포고문을 사랑의 헌장 이라고 불렀다. 왜냐 하면 강조의 짐을 벗어던지고 오직 사랑을 추구하며, 인간적인 일이나 거룩한 일에 있어서 영혼의 복리를 찾았기 때문이다.
E. 수도원장 삼손 7. 묵상과 행동의 조화 그는 47살에 수도원장에 선출되었으며, 수도사가 된지 17년째되는 해였다. 그는 절제있는 사람이었고, 결코 게으르지 않았으며, 지극히 강했고, 나이가 그의 열심을 잠식할 때까지는 말을 타든지 아니면 걸어서 가든지 언제고 어디로든 갈 준비가 되어 있었다, 십자군에 의해 예루살렘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모직옷을 입고 육식을 삼갔다. 그러나 그는 덕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그 앞에 일단 접시가 놓이면 절대로 그 접시를 바꾸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프랑스어나 라틴어에 능통했다. 그는 언어의 장식보다는 그가 말하고자 하는 의미에 더욱 관심을 가졌다. 그는 영어를 완벽하게 읽을 수 있었으며, 사람들에게 영어로 설교를 하곤 하였다. 삼손 수도원장은 묵상보다는 활동적인 삶을 더 사랑했다.
F.프란시스칸과 빈곤의 삶 8. 프란시스와 1223년의 공식적인 규칙 1. 거룩한 복음을 지켜야 한다. 2. 이러한 삶의 방법을 따르기로 약속하고, 우리 형제들 가운데 입회하기를 원한다면 그는 그 지역의 대교구장에게 가야 한다. 3. 형제들은 거룩한 로마 교회의 의식에 따라 직무를 수행해야 한다. 4. 형제들은 직접 혹은 중개자를 통해 물건이나 돈을 취해서는 안된다. 5. 주님이 일할 수 있는 능력을 준 형제들은 열심히 일하라. 6. 형제들은 아무것도 소유해서는 안된다. 7. 어느 형제가 악에 유혹되어 죄를 범했다면 마치 다른 형제들이 그러한 죄 때문에 그 지역의 책임자에게 의뢰를 결정한 것처럼 그는 그 지역의 책임자를 찾아가야 한다. 8. 모든 형제들은 그를 멤버 중의 한 사람을 책임자로 그리고 전 형제들의 종으로 세우고 모든 형제들은 그를 순종해야 한다. 9. 주교가 그의 교구에서 형제들이 설교하는 것을 금하며 그들은 주교에게 순종할 것이다. 10. 성직자들은 형제들을 방문하여 훈계하고 겸손으로 사랑으로 그들을 바로 잡으라.
9. 1226년의 프란시스의 마지막 유언 내가 문둥병을 떠나왔을 때 내가 그토록 싫어했던 것이 영혼과 육체의 향기로 변했다. 약간의 시간이 지난 두에 나는 이 세상을 떠났다. 즉 종교적인 삶의 세계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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