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구약 성경 안에서 자살을 택한 경우를 살펴보면
* 한 여인의 맷돌 한 짝에 두개골이 깨진 아비멜렉이 자신의 병기 드는 청년을 불러
여인에 의해 죽는 것을 수치스럽게 여긴 나머지 그 청년의 칼에 의해 죽는 것을 택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삿9:53-54).
*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화살에 맞은 채 죽어가면서 할례 받지 못한 자들에 의해 죽는 것을 수치스럽게 생각하여
자기 칼에 엎드려 죽었던 사울 왕과(삼상31:1-6),
* 다윗을 대적하여 일어났던 압살롬의 고문으로 자신의 계략을 인정하지 않자 자기 집으로 돌아가
스스로 목매어 죽었던 아히도벨(삼하17:23),
* 그리고 자신의 군대가 자신보다 군대장관 오므리의 말을 따르고 도시가 함락되자 궁궐에 불을 놓고 죽었던
시므리 왕(왕상16:15-20)을 들 수 있습니다.
* 삼손의 이야기는 자살의 모습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었던 경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들릴라의 유혹에 넘어간 이후
블레셋 사람들에 의해 눈이 뽑히고, 놋 족쇄로 결박당하고 감옥에서 맷돌을 돌리는 신세가 되고, 머리털이 밀리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런 그가 머리털이 자라고 블레셋 사람들이 모여 있는 신전의 두 기둥을 붙잡고 무너뜨리자
삼손과 그곳에 있는 블레셋 사람들이 모두 죽게 되는 일이 일어나게 됩니다(삿16:15-31).
삼손은 자살하면서 결국 블레셋 사람을 죽이는 일을 했던 것입니다.
그가 구원을 받았을까요? 예! 그는 성경이 믿음의 사람으로 규정해 주고 있습니다(히11:32).
또한 필자는 강재구 소령과 같은 살신성인으로 자신을 희생하여 남을 구하는 ,나라를 구하는 정신으로 보고 있읍니다.
* 실제로 자살은 하지 않았지만 처지를 비관하여 자살을 하기 원했던 욥의 경우도 구약에서 찾아 볼 수 있는
자살의 유형으로 들 수 있을 것입니다(욥7:15-16). 사람이 극단의 상황에 처하면 우울증에 걸리고 자살에 대한 충동을 느끼는 것은
욥과 같이 완전하고 곧바르며,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악을 멀리하는 자(욥1:1)의 경우에도 예외일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신약 성경 안에서도 자살을 하는 한 사람을 만날 수 있습니다.
* 그는 바로 가룟 유다입니다. 우리는 그가 예수님을 배반하여 넘겨줄 자이며(마26:16,46막14:10),
마귀가 그의 마음을 움직여 이 일 을 시행하도록 했다는 점(요13:2)을 들어 그의 자살조차도 마귀에 의해
조정되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성경 안에서 그가 자살하는 장면을 보면 결코 이 일이 마귀에 의해 이루어진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결박당하여 총독 본디오 빌라도에게 결박당하는 순간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며 은 서른 개를 수(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가져다 주며 자신의 입으로 "내가 무죄한 피를 배반하여 넘기고
범죄하였다"고 고백하고는 은들을 성전에 내던지고 떠나가서 스스로 목을 매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마27:1-5).
그는 심한 양심의 가책을 느낀 결과로 자살을 선택했던 것입니다.
* 신약 성경 안에서 자살의 또 다른 유형을 찾아 본다면 빌립보 감옥에서의 일입니다. 바울과 실라가 기도와 찬양을 할 때 감옥의 기초가 흔들리며 즉시 문이 다 열리고 사람의 결박이 풀리는 일이 발생하게 됩니다. 그 때 잠에서 깬 간수가 옥문들이 열린 것을 보고 죄수가 도망한 줄로 생각하여 칼을 빼어 자살하려고 했을 때 바울이 큰 소리로 "네 몸을 해하지 말라"고 말합니다(행16:25-28). 그는 죄수들이 탈옥을 하게 되면 그에 대한 책임을 묻게 될 것을 두려워하여 자살을 택한 것입니다. 그의 자살은 바울에 의해 저지되었지만 오늘날 이러한 자살의 형태는 종종 찾아볼 수 있습니다.
2)왜 자살을 해서는 안 되는가?
우리는 구약의 율법 가운데 "살인하지 말라"(출20:13)는 명령을 듣습니다.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러한 행위가 타인에 대하여 살인을 행하는 것만을 의미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자신에 대하여도 마찬가지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신에 대한 살인도 결국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십계명을 통하여 엄격히 제한된 것입니다. 신약 성경 안에서는 자살을 할 수 없는 분명한 이유들이 있습니다. 물론 성경 안에서 살인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수없이 경고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형제를 미워하는 것조차도 살인으로 규정하기도 합니다(요일3:15). 그러나 이러한 규정을 가지고 단순히 자살을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대부분의 사람들도 도덕적인 관점에서 얼마든지 알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성경 안에서 자살을 할 수 없도록 강력하게 권고하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자신의 신분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에게 그들의 신분을 이해시키기 위하여 "주께서 값을 치르고 너희를 사셨다"(고전6:20,7:23)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의 설교를 통하여 교회에 대하여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자신의 피로 사신교회"(행20:28)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성경의 내용이 자살과 무슨 관련이 있느냐고 묻는 이들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이것은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몸의 소유에 대한 입장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이 문제에 대하여 더욱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그의 서신을 통하여 "너희는 택함받은 세대요 왕가의 제사장이요 거룩한 민족이요 특별한 백성(개역. 소유된 백성 a peculiar people)이니"(벧전2:9)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특히 "a peculiar people"의 의미는 재산적 가치로서 특별한 소유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은 사람들, 특히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에 대하여 특별히 소유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이상에서 말하고 싶은 내용은 우리의 몸이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고전6:19). 그런데 만일 우리의 몸을 스스로 해치고 심지어 살인을 하게 된다면 이는 명백한 하나님의 소유를 훼손시키고, 결국 그분의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이해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베드로와 가룟유다의 경우를 통하여 좋은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인하고 심지어 저주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닭 우는 소리와 함께 밖에 나가 몹시 슬프게 울면서 회개하고(마26:69-75), 결국에는 주님을 위한 그의 사명을 다했습니다. 반면에 가룟 유다는 비록 자신의 잘못을 알고 깨달아 돌이키고자 했지만 결국 자살을 택하고 말았습니다(마27:1-5).
우리는 인생에서 힘겨운 순간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대응 자세에 따라 인생은 달라질 수 있습니다.
부디 매 순간마다 지혜로운 결단이 있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3)자살의 종류
가) 자기처벌성 자살: 유다(마 27장, 행 1장)
예수님의 제자 중 스스로 자원하여 나섰던 유다는 신약성경에서 유일한 자살자다. 그의 자살은 신약의 대표적인 자살이기도 하다. 유다는 무죄한 예수님을 배반하여 판 죄를 뉘우치고 은 30개를 반환한 뒤 성전에서 나가 ‘스스로 목매어 죽었다(마 27:5)’. 부정한 수입은 양심의 가책을 해소하지 못했고, 반역의 돈을 반환했으나 여전히 죄책감에 사로잡혀 황급히 성전에서 뛰쳐나갔을 것이다. 그래서 힌놈의 골짜기 절벽 위에서 목을 맸을 것이다(행 1: 18).실로 유다는 끝내 자살로 생을 마감한 비운의 제자였다. 그의 자살 원인은 여러 가지로 추정할 수 있지만, 일단은 그의 탐욕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이런 탐욕은 마리아가 비싼 향유를 예수께 바르는 것을 본 유다가 마리아의 행동에 대해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어찌하여 주지 않느냐’고 비난한 데서 드러난다. 요한은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저는 도적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감이러라’고 유다에 대해 고발했다. 유다의 말에 예수께서는 마리아를 두둔하여 ‘저를 가만 두어 나의 장사할 날을 위하여 이를 두게 하라(요 12:7)’고 말씀하셨다.
이런 점에서 유다의 자살은 지나친 욕심이 자살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을 시사하는 것이다. 이런 유다의 탐욕은 급기야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도록 내주고 말았던 것이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딤전 6:10)’라고 가르치는 성경의 교훈을 생각나게 하는 대목이다. 탐욕에 물든 그는 돈을 사랑하는 것에 대한 주님의 경고를 여러 번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귀에 들리지 않았을 것이다. 실로 유다의 자살은 지나친 욕심이나 탐욕이 자살로 이어질 수 있음을 보여주는 예이다. 물론 유다의 자살을 두고 다르게 해석할 수 있는 여지도 있다. 자신이 원하는 정치적 야망이 수포로 돌아가자, 일종의 보복성으로 저들의 음흉한 계획에 야합하였다는 해석도 가능할 수 있다. 그러니까 유다가 돈 몇푼 때문에 예수님을 판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다 해도 이 또한 자신의 욕심이 지나쳤던 결과라는 범위를 넘지 않고 있다는 점을 간과할 수는 없을 것이다.
나) 도피성 자살: 사울(삼상 31장)
사울은 도피성 자살의 대표적인 유형이다. 도피란 현실의 상황을 견디지 못하여 회피하려는 행위로, 대개 자존심이 강하게 작용한 결과로 볼 수 있다. 이스라엘 초대 왕 사울은 블레셋 전쟁에서 중상을 입었다. 적군의 승리가 확실한 상황에서 할례 없는 이방인의 손에 잡혀 모욕적인 죽음을 당할 바엔 차라리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이 낫겠다는 판단으로 ‘스스로 자기 칼을 취하고 그 위에 엎드러져’ 자결했다(삼상 31:4).사울은 이스라엘 열두 지파 중 가장 미약한 지파인 베냐민 지파 출신이다. 하나님은 이런 미약한 지파에서 왕을 선출하시어 겸손하게 하나님의 일을 하도록 한 것이다. 사울은 처음 왕으로 기름부음 받을 때 자신의 미약함을 알고 행구 사이에 숨는 겸손함을 보였으나, 왕이 된 후 교만해지기 시작해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하고 거역했다. 이런 행동은 하나님께서 그를 왕 삼으신 것을 후회하신다는 정도가 되기에 이른다. 사울의 자살에서 우리는 지나친 교만의 말로를 보게 된다. 지나친 교만은 자신을 깨닫지 못해 마침내 자신을 개선할 기회를 놓치고 만다는 교훈이 생긴다. 그의 교만은 자기 외에 다른 사람을 인정하지 못하게 됐고, 급기야는 하나님도 잊어버리는 실수를 저지르게 된 것이다. 그 결과로 하나님의 신이 그를 떠나 악신이 들어가서 늘 번뇌하게 됐다. 이제 그에게는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왕을 삼으실 것을 알고 다윗을 죽이려 들기에 이른다. 실로 사울의 자살은 자신을 낮추지 못하는 지나친 교만이 자살로 이어지게 됐음을 본다. 교만은 자신이 중심이 돼 다른 모든 가치를 부정하고, 다른 사람의 조언이나 교훈도 무시하게 만든다. 그래서 잠언 16장 18절에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고 말씀했을 것이다. 자신을 끝내 낮추지 못하는 교만이야말로 누구의 조언도 받아들이지 않거나 무시해 스스로 자살로 삶을 끝내고야 만다는 교훈을 주는 것이다.
다) 보복성 자살: 시므리(왕상 16장)
시므리의 자살은 쿠데타 실패로 인한 자살이다. 북이스라엘의 엘라왕이 폭정을 행하자 시므리 장군이 쿠데타를 일으켰다. 엘라왕이 술에 취해 대신들과 흥청거릴 때 시므리 장군이 그를 쳐 죽였다. 그러나 집권한지 7일만에 백성들이 시므리의 정통성을 인정할 수 없다며 오므리를 등극시키고 시므리가 머물던 왕도를 포위했다. 다급해진 시므리는 왕궁에 불지르고 그 속에서 죽었다(왕상 16:18). 억지로 오른 왕위가 그다지 순탄하지 않을 뿐 아니라, 백성이 자신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는데 몹시 분개했을 것이다. 그러던 중 성이 함락됨을 보자 자신의 왕궁을 불사르고 스스로 몸을 던져 자결하고 말았다(왕상 16:15-20). 시므리의 치세 기간은 이스라엘 역대 왕중 장 짧은 7일에 불과했고, 더 나아가 훗날 ‘시므리’라는 이름은 구데타를 일으킨 악명 높은 왕의 대명사가 됐다. 시므리의 자살은 지나친 권력욕으로 인해 쿠데타를 일으켜 실패하자 스스로 목숨을 끊은 유형이다. 권력욕이란 지배력의 다른 모습으로, 열등감이 그 근원임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열등감이 많은 사람이 더 많이 지배하려 든다는 점에서 지배력과 열등감은 동전의 양면인 것이다. 더욱이 그의 자살은 혼자만 죽은 것이 아니라 성을 불지르고 여러 사람을 죽이고 자신도 죽은 사실에 근거하면 보복성 자살에 해당한다. 지나친 권력욕을 자살로 해결하려는 비참한 보복적 자살이 아닐 수 없다.
라) 운명론적 자살: 아히도벨(삼하 17장)
아히도벨은 다윗왕이 신임했던 부하들 중 하나다. 압살롬이 다윗을 배반하고 왕위를 차지하려 했을 때 압살롬에게 모략을 제공한 자가 아히도벨이다. 나중에 다윗의 충신인 후새의 전략에 몰려 자신의 모략이 수포로 돌아가자 아히도벨은 나귀타고 귀향해 스스로 목매 죽었다(삼하 17:23) 다윗의 아들 압살롬이 일으킨 모반에서 아히도벨은 주도적인 역할을 했는데, 그의 반역은 다윗왕에게 뼈아픈 일격이었을 것이다. 압살롬은 다윗에 대항하려는 자신의 계획에 대해 아히도벨과 협의한 후, 다윗왕의 또다른 부하인 후새를 찾아가 자문을 구했다. 왕에게 은밀히 충성하고 있던 후새는 아히도벨의 계획에 반대하고, 대신 실제로 다윗에게 유리한 자신의 계획을 제안함으로써 압살롬의 거사에 등을 돌렸다. 압살롬이 후새의 계획을 받아들이자 아히도벨은 후새가 자신을 속였음을 깨닫고는 압살롬의 부대가 비참히 패할 것을 예상하고 자살했다(삼하 15:31-37, 16:20-17:23).아히도벨의 전략은 다윗왕만 잡으면 다윗을 따르는 무리들도 다 잡을 수 있다는 제안이었다. 실제로 다윗왕만 잡으면 모든 것이 무너질 판이었다. 그의 기막힌 전략은 압살롬도 마음에 흡족해 했으나, 아히도벨은 자신의 전략이 실패하게 됐음을 알게 된다. 그는 더 이상 상황을 바꿀 수 없음을 알게 된 것이다. 이제 그에게 남은 것은 좌절이요 절망 뿐이다. 그런 절망이 끝내 그에게 자살을 선택하게 만든 것이다. 그의 절망이 상황을 도저히 바꿀 수 없는 좌절에 이르고 극도로 절망해 스스로 목숨을 끊어 상황을 해결하려는 과히 운명론적 자살을 선택하게 만들었다. 오늘날에도 이러한 운명론적 자살이 증가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자신의 삶을 균형있게 살아가지 못하고 무리하게 확장하거나 펼쳐가다 상황을 역전시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면 극심한 좌절에 이르러 자살로 삶을 끝내는 경우이기 때문이다.
마) 희생적 살신: 삼손(삿 16장)---이타성 자살
삼손의 자살은 거의 영웅적인 자살이다. 그런 이유로 삼손의 자살을 간과하는 측면이 있다. 그러나 분명히 삼손도 자살한 사람이다. 물론 그의 자살은 하나님의 백성을 귀찮게 하는 블레셋을 마지막 온 힘을 다해 죽이고 자신도 죽는 죽음이라는 사실이 다르다면 다를 뿐이다.이스라엘의 민족 영웅으로 묘사된 인물인 삼손은 특별히 구별된 나실인이라는 점이 특이하다. 전설적인 전사로서 그가 거둔 엄청난 전공은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정착한 초기 지파동맹시대(BC 1200-1000) 상당한 기간 동안 블레셋인들에게 얼마나 큰 핍박을 받았는가를 암시한다. 삼손은 ‘20년’ 동안 판관으로 활동한 사람이다. 그의 부모는 단 지파 출신으로 예루살렘 근처 소라 지방에서 농사를 짓던 중 신의 현현(顯現)을 통해 그들이 장차 아들을 낳을 것이며 그 아이를 하나님을 위해 구별된 나실인으로 바쳐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나실인은 독한 술을 마시지 않고, 머리털을 밀거나 깎지 않으며, 사체(死體)를 만지지 않기로 서약한 이른바 ‘구별된’ 사람이다.물론 삼손의 죽음을 두고 의견이 분분한 것은 사실이다. 성서학자들의 일반적인 해석에 따르면 그가 신전에서 죽은 것은 자살이 아니라 잠시 포기했던 원래의 사명(‘판관’과 나지르인으로서)을 되찾은 행위라고 한다. 대부분의 자유주의 비평가들과 심지어 탈무드 시대(1세기부터 시작) 일부 유대인 해석가들까지도 삼손의 이야기를 전설 또는 서사시로 간주한다. 그들보다 좀 더 보수적인 주석가들은 그 사건들의 비현실성과 본문의 민담 양식을 인정하면서도 사담에 담긴 역사적 진리의 핵심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물론 대중의 상상력으로 인해 윤색되고 랍비 문학의 영향으로 살이 붙은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삼손의 죽음은 그 현상적으로 볼 때 자살이 틀림없다. 다만 그의 자살은 단순히 운명을 비관하여 죽음을 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깨달은 뒤에 마지막 온 힘을 쏟아 적을 무찌르는 형태의 죽음이기에 이타성 자살로 분류돼야 할 것이다. 물론 삼손의 죽음은 생각해 볼 여지를 여전히 남기고 있다. 쉽게 자살로 규정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는 것이다.
그의 죽음이 비록 절대적인 선은 아니라 해도 자신의 생명을 하나님을 위해 바치는 헌신이요 택한 백성의 생명이나 안전을 위해
스스로 희생한 경우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4)성경에 나타난 반듯이 현대의학으로 고칠수 있는 우울증이야기
시편 69편과 88편, 그리고 102편은 시인이 겪는 우울증적인 현상을 절망의 노래로 언급하며,
그런 좌절속에서 삶의 희망을 가질것을 호소하고 있다.
시편43편에서 다윗은 삶의 우울과 기쁨등 양쪽의 인생경험을 이야기하고 있다.
내영혼아 왜 너는 의기소침하여 있으며, 내안에서 혼란스러워 하는가?
그리고 불안해 하는 가? 하나님에게 너의 희망을 두어라
왜냐하면 내가 나의 구원자이며 나의 하나님이신 그분을 찬양하기 때문이다.
성경의 여러곳에서 우울증의 증상을 겪은 사람들의 경우를 보여준다.
욥이나 모세,와 요나와 베드로, 그리고 이스라엘민족전체가 우울증을 겪기도 하였다.
예레미야예언자는 이스라엘민족의 절망이나
우울한 현상을 애가(비탄, 통곡)라는 책 전체에 기록하고 있다.
엘리야는 가멜산에서 우상선지자 850명을 대결하여
승리한 하나님의 강력한 능력을 경험하였지만,
살인자이며 우상숭배자인 이세벨왕후의 추격에 위협을 느낀 나머지
광야로 도망을 가, 거기에서 극단적인 절망감이나 자기낙담한 상태에 빠졌다.
그는 죽기를 원했으며(자살충동) 하나님에 의해 보내진 천사에 의해
그 상태를 치료받을수 있었다.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고 게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는 예수님은
극단적인 슬픔과 고통으로 인하여, 극단적인 우울증상태에 빠져있었다.
예수님은 자신의 영혼이 매우 슬프며,
그 슬픔속에서 깊은 고통을 통해 죽을 상태에 이르게 되었다(Amplified Bible에서 표현된 ).
이런 예들은 성경이 사람들이 사는 인생의 현실이
수많은 슬픔의 고통을 동반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인생에게 꼭 필요한 희망과는 대비되는 인생의 절망적인 현실성을 알려준다.
믿는 이들은 궁극적으로 그런 인생의 우울한 현실들을
돌파하는 새롭고 지속되는 삶의 기쁨을 신앙안에서 발견해야 하며 또한 현대의학으로도 고칠수 있는 방법이 다양하게 많다는것이다.
요즘에 자신의 생명을 스스로 포기한(성경에 이것은 엄격히 금하고 있으며,
이것은 인생들에게 소중한 생명을 주신 하나님의 주권에 도전하며
자신의 유일한 생명을 포기하는 이중적으로 짓는 심각한 죄이다)
두 연예인들이 기독교인이라는 데 충격적이며
새삼 그들의 삶에서 오는 우울한 현상들과 삶의 도전들을
이기지 못하는 신앙의 무력감을 금할수 없다는 것과 자살로 이여짐을 안타깝게 생각한다.
성경은 강조하기를 이세상에서가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굳건한 신앙과 그로 인한 하나님나라에서 오는 풍성한 인생의 확신은
인생이 겪는 모든 인생좌절들을 극복하게 할 것이다라고 한다.
바울은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성령(하나님의 영)의 능력에 의한
희망이 넘치는 것을 통해 하나님을 신뢰하는 인생의 모든 기쁨과
평안함을 누리며 살것을 기도하고 있다.
(게리 콜린즈의 Christian counseling 에서)
5. 결론
사람들은 문제 해결의 방법으로 자살을 선택한다. 그러나 자살은 결코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다. 도리어 혹을 떼려다 더 큰 혹을 붙이는 어리석은 행위이며 자신을 확실한 파멸로 이끄는 지름길이다. 자살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거역행위이며, 살인죄이며, 회개의 기회가 없으며, 사탄의 미혹에 빠지는 것이다. 그래서 자살자는 기독교의 전통적인 가르침과 같이 구원받지 못할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자살자가 가는 지옥은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는 고통스런 곳이다. 자살을 선택하는 것은 결국 지옥 백성이 되어 사탄의 영원한 노예로 살겠다는 선택에 다름 아니다. 자살은 스스로를 더 큰 파멸과 더 큰 비극으로 몰아넣는 행위이다. 자살은 이처럼 무서운 결과를 초래할 수 있기에 우리는 아무리 사는 것이 힘들고 고통스러워도 자살을 해서는 안된다. 성경에는 자살을 하려던 사람이 바울의 말을 듣고 자살 대신 구원의 길을 선택한 사람이 있다. 그는 바로 빌립보 감옥의 간수이다.
전도 성구로도 유명한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행 16:31) 하는 말씀은 죄수들이 탈출한 줄 알고 자살을 하려던 간수에게 선포된 말씀이다. 이 말씀은 자살과 구원에 대해서도 많은 것을 시사한다. 그 간수가 그때 자살을 했다면 구원받지 못하고 지옥에 떨어졌을 것이다. "주 예수를 믿으라"는 말은 그 간수에게 있어서는 "자살하지 말고 생명을 얻으라"는 말과 같은 의미였다.
이것은 자살과 구원은 양립할 수 없는 것임을 시사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처럼 기독교는 "자살하지 말라!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으라!"고 선포하고 있다. 삶이 힘들고 죽고 싶은 충동이 일어나면 하나님을 더욱 믿고 바라고 의지해야 한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1:3 이하에서 "하나님은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분"이라고 증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