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제자매와의 관계 치유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시 133:1).
천재적인 음악가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의 생애를 주제로 한 연극「아마데우스」는 많은 비평가들이 격찬했다. 이 연극을 토대로 만든 영화는 아카데미상까지 받았다.
「아마데우스」는 신실한 하나님의 종이 시기심 때문에 멸망하는 모습을 잘 그리고 있다. 당시 비엔나 왕궁 전속 음악가인 안토니오 살리에리는 천재 음악가 소년인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를 만났다. 젊은 모차르트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천재적인 음악 재능을 타고 태어났다. 그렇지만 모차르트는 미성숙하고, 세련되지 못하고, 저속하고, 호색 적이었다. 한편, 살리에리는 하나님께 헌신된 사람이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음악을 작곡하며 사는 것이 평생의 소원이었다. 젊은 시절부터 그는 모든 사람의 마음을 하나님께 고양시키는 음악을 작곡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살리에리에게 그런 재능을 허락하시지 않았다. 살리에리의 재능으로 괜찮은 음악을 작곡할 수는 있었지만 대작은 작곡하지 못했다. 비록 유명한 음악가였지만 살리에리는 자신은 평범한 재능밖에 가지지 못했으며 그의 작품도 곧 잊혀 질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살리에리는 자기가 가지지 못한 재능을 모차르트가 가진 사실을 알고 난 후 부러움이 지나쳐서 마침내 시기심에 불타서 연극의 마지막 절정인 독백에서, 살리에리는 모차르트에게는 그런 뛰어난 재능을 주고 자신에게는 주지 않은 하나님을 저주했다.
우리는 여기에서 하나님의 신실한 사람도 동료에 대한 경쟁심이 지나쳐서 시기에 이르면 하나님을 원망하고 결국에는 자신마저 파멸시키는 무서운 예를 본다.
이러한 예는 일찍이 성경에도 기록되어 있다. 두 형제 가인과 아벨을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다. 그러나 하나님은 동생인 아벨의 제사는 열납 하시고 형인 가인의 제사를 열납하지 않으셨다(창 4:3-8).
아벨은 최고의 것을 믿음으로 하나님께 드렸지만 가인은 대충 하나님께 드렸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 하심이라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 하느니라."(히 11:4).
하나님의 차별 대우에 격분한 가인은 자신의 죄를 회개하시는커녕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동생 가인을 질투하여 결국 죽이고 말았다.
- 부러움과 시기.
형제간의 갈등은 대부분이 시기와 질투에서 생긴다. 표면적으로는 이런 저런 이유를 대지만 속으로는 나보다 낫고 나보다 많은 것을 가지고 나보다 잘난 형제자매를 시기하고 질투하는 것이 죄인 된 인간의 속성이다.
어느 신앙이 좋은 자매가 불신자 친구를 전도하기 위해 이런 저런 집회에 데리고 다녔다. 어느 날 이 두 자매는 성령 집회에 참석했다. 바로 그 날 처음 집회에서 불신자 친구는 성령 체험도 하고 여러 가지 은사도 받았다.
그러자 불신자 친구를 전도한 자매는 속으로 하나님을 원망하기 시작했다. "하나님, 저는 하나님을 섬기면서 그런 은사를 오랫동안 사모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체험과 은사를 주시지 않으시면서 어떻게 죄악 된 삶을 산 제 친구에게는 그렇게 순식간에 주십니까? 하나님 너무나 불공평합니다."
이후 두 자매간의 사이는 원수지간이 되었다. 친구를 전도한 자매는 자기보다 많은 은사를 받은 친구를 시기 질투하면서 "그게 과연 성령의 은사일까 마귀가 준 것이 아닐까?" "은사 받았으면 다냐? 그래도 내가 성경 지식은 너보다 많고 신앙 인격도 너보다 낫다"라면서 친구가 받은 은사를 깎아내리고 의심했다. 한편 은사를 받은 친구는 "자기가 은사를 못 받으니까 괜히 시기하고 질투 한다"면서 서로 크게 싸운 후 서로 교제를 끊었다.
이와 비슷한 예가 성경에도 있다. 야곱의 열 두 아들 중에 말째인 요셉은 일찍이 어릴 때부터 영안이 열려서 꿈을 통해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다. 그러나 그는 신앙 인격적으로는 여전히 철부지였다. 그는 자기가 본 꿈 자랑을 하여 형들의 시기와 질투를 유발했다.
더욱 형들을 분개하게 만든 것은 형들이 언젠가 자기에게 절을 하는 신세가 된다는 것이다. "그 형들은 시기하되"(창 37:11). 마침내 형들은 적당한 기회가 오자 서로 모의하여 동생 요셉을 이방인의 노예로 팔아버렸다. "여러 조상이 요셉을 시기하여 애굽에 팔았더니"(행 7:9).
얼굴도 미모이고 학력도 좋은 자매 한 분이 치유 기도를 부탁했다. 밝고 명랑한 표정의 이 자매는 딸만 일곱인 집안의 셋째 딸인데 자매간의 시기 질투로 인해 마음이 너무 상해 있었다.
마음속에는 원망과 좌절과 분노가 가득 차 있었고 그로 인해 복수의 영, 미움의 영, 죽음의 영이 역사하여 결혼 생활에 지장을 줄 정도였다.
시기하고 질투한 형제를 용서하고 또한 그들을 미워한 죄를 회개하게 하고 악한 영들을 쫓아낸 후 상태가 급진전되었다. 오래 만에 처음으로 편한 잠을 잤다고 한다.
- 부모의 편애.
요셉의 형들의 시기와 질투를 유발한 또 한 가지 이유는 아버지 야곱의 편애이다. 야곱은 자기가 사랑하는 라헬의 아들 요셉을 유난히 편애했다. 야곱은 형들과는 달리 요셉에게는 값비싼 채색 옷을 입혔고 요셉은 형들의 잘못을 아버지에게 고자질하여 아버지의 점수를 땄다(창 37:2-3)
당연히 형들은 요셉을 미워했다. "그 형들이 아비가 형제들보다 그를 사랑함을 보고 그를 미워하여 그에게 언사가 불평하였더라."(창 37:4).
형제간의 갈등을 초래하는 것은 형제간의 경쟁 심리 때문이기도 하지만 많은 경우 부모의 편애에 의해 야기되는 경우가 많다. 야곱 집안의 편애는 아버지 이삭ㄸ부터 시작되었다. 아버지 이삭은 들짐승을 잡아서 맛있는 요리를 해주는 에서를 좋아했고 어머니 리브가는 조용히 천막에 거하는 야곱을 좋아했다(창 25:27-28).
부모의 이러한 편애는 나중에, 리브가가 야곱과 공모하여 형 에서의 장자 권을 빼앗는 장면에서 절정을 이룬다. 자기의 축복이 야곱에게 넘어간 사실을 안 에서는 동생 야곱을 죽일 기회를 호시탐탐 노렸다. 불안을 느낀 리브가는 야곱을 오빠인 라반에게로 피신시킨 후 죽을 때까지 야곱의 얼굴을 다시 보지 못했다.
이러한 가계의 잘못된 전통을 야곱도 이어받았다. 야곱은 두 아내 레아와 라헬 중 라헬을 더 사랑하였고 당연히 레아의 소생들보다는 라헬의 소생인 요셉과 베냐민을 더 사랑했다.
비록 야곱의 열 두 아들이 하나님의 섭리로 인해 이스라엘 족속의 조상이 되었지만, 요셉의 꿈 자랑과 아버지의 편애로 인한 형제들의 시기심으로 인한 형제간의 갈등과 고통은, 이후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될 때까지 십여 년 동안 지속되었다.
부모가 어느 특정 자녀를 지나치게 편애하면 형제간에도 "왕따" 현상이 벌어져서, 요셉을 노예로 판 형들과 같은 일이 벌어진다. 또한 형제자매들 중에서 지나치게 뒤떨어지는 자녀들을 구박하거나 핍박하면 그 사람은 거부감과 낮은 자화상으로 인해 고통을 겪는다.
K양은 부유한 집안의 막내딸이다. 위로 형과 누나가 있는데 둘 다 얼굴도 잘 생기고 체격도 늘씬하고 공부도 잘하여서 어릴 때부터 부모의 사랑을 받으면서 자라서 좋은 대학을 거쳐 좋은 배필을 만나 행복한 가정생활을 하고 있다.
그러나 K양은 날 때부터 조금 부족하게 태어났다. 생긴 것도 그렇고 지능도 평균 이하였다. 부모들은 K양을 볼 때마다 속이 상했다. "어디서 저런 것이 태어나서 집안 망신시키느냐?"자연히 부모들은 K양을 학대하고 업신여기고 심지어는 말이나 행동으로 심하게 구박했다.
다른 두 형제자매에 비해 자신이 부모의 사랑과 인정을 받지 못함을 안 K양은 심한 정서불안, 거부감, 낮은 자화상―열등감―, 그로인한 분노와 적개심으로 고통을 받고 있었다.
치유 기도를 통해, 자기를 구박한 부모와 형제를 용서하고 그들을 미워한 죄를 회개하게 했지만 완전히 회복되기까지는 본인의 결심에 찬 노력이 필요하다.
얼마 전 뉴스에서는, 동료들로부터 집단 왕따를 당한 어느 장년이 칼부림으로 보복한 사건이 발생하여 가정은 물론 사회에서의 왕따는 심각한 지경에 이르고 있다. 특히, 이러한 현상이 학연, 지연, 혈연 중심으로 발전할 때 망국병이라도 할 수 있는 집단이기주의로까지 발전한다. 형제자매나 동료 사이에 건전한 경쟁심은 바랄만한 일이지만 이것이 지나쳐서 시샘, 시기, 질투에 까지 이르면 개인은 물론 가정이나 사회에 파괴하는 요소가 된다.
사람의 조상인 아담이 타락한 것도, 자신의 처지를 망각하여,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부러움과 시샘에서 생겼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늘의 성가대장인 그룹 천사장이 하나님의 자리를 넘보다가 쫓겨나서 마귀로 저주를 받은 것도, 하나님의 자리를 부러워하고 탐내었기 때문이다(사 14:12-16; 겔 28:12-15).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사람을 유혹하여 하나님의 자리를 넘나보게 했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 지라"(창 3:5-6).
성경은 시기와 질투가 얼마나 큰 해악인가를 말한다. "마음의 화평은 육신의 생명이나 시기는 뼈의 썩음이니라"(잠 14:30). "분은 잔인하고 노는 창수 같거니와 투기 앞에야 누가 서리요"(잠 27:4). 중세 교회에서 지정한 7대 죄악 나머지 6 개는 나태, 정욕, 분노, 교만, 과식, 탐욕이다. 그 중에 "시기"가 포함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가정생활, 교회 생활 및 사회생활에서 시기와 질투를 처리하는 법을 배운 적이 거의 없다. 가정에서는 형제자매 사이에, 직장이나 사회에서는 동료 직원 사이에, 교회에서는 동료 형제자매 사이에, 심지어 교역자들 사이에서도 가장 큰 문제를 야기 시키는 것 중의 하나가 시기와 질투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이 문제를 드러내 놓고 해결하려는 노력은 전혀 하지 않고 있다.
또한 사회가 경쟁심을 부채질하고 있다. 이 사회는 성공과 업적 중심의 사회이다. 특히 매스컴이 더욱 부채질하고 있다. 업체들은 물건을 팔아먹기 위해 사람들의 경쟁 심리를 자극한다. 마치 이 물건을 가지지 않은 사람은 실패자라는 자각을 가지게 만든다.
또한 매스컴은 우상이 없는 사회에 우상을 만들어서 TV의 시청률을 올리고 신문의 판매부수를 늘린다. TV의 껄렁한 퀴즈 쇼에 잠시 출연한 사람이 백만장자가 되는가 하면, 특히 한국의 매스컴은 대학 입학 시즌이면 각 대학 수석합격자와 수석 졸업자를 발표한다. 정부나 유명 단체의 인사 시즌이 되면, "누가 몇 ---기의 선수 주자다"라는 식으로 영웅을 만든다. 그 결과 그렇지 못한 사람은 마치 실패자나 낙오자인 것처럼 부추겨서 동료 사이에 헛된 경쟁심과 시기심을 부추긴다.
또한 한국 사람은 시기와 질투가 유난히 심한 것 같다.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속담에도 있듯이 특히 이조 오백 년사 역사는 시기와 모함과 반목으로 인한 당파 싸움으로 점철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기파가 헤게모니를 잡기 위해 반대파를 모함하고 시기하는 것이 다반사였다. 이로 인해 집단 이기주의가 조성되었고, 자기파에 유력한 고지를 점령하기 위해서 자연히 학연, 혈연, 지연을 동원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한국의 국회의원 선거 시가가 되면 해묵은 지역감정과 학연이 거론되는 것은, 한국 민족 전체에 흐르는 저주라고 할 수 있다. 시기와 질투는 한국 민족의 부리 깊은 저주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은 아마 삼국 시대부터 시작하여 이조 오백년 기간 동안 극에 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한국에 거주한 어느 외국인은 한국인의 이런 심정을 날카롭게 꼬집으면서 말하기를, 한국 사람은 객관적인 기준으로 법을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파냐 반대파냐 에 따라 법적용이 엿가락처럼 늘어났다 줄어들었다 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를 비판한 외국인도 죄인이란 점에서는 예외가 아니다. 최근 미국에서는, 경찰의 심문에 이상한 태도를 취한 흑인 가게 주인에게 경찰 3명이 무려 40여발의 총을 발사하여 즉사시킨 사건에 대해, 3명의 경찰 모두 무죄 평결을 받자, 흑인은 인종차별적인 판결이라고 다시 한 번 시위를 했고, 뉴욕 주 상원의원에 출마한 대통령 영부인 힐러리 여사는, 즉각 인종차별적인 재판은 잘못된 것이라고비판했다.)
이러한 민족성을 타고 나서 그런지 시기와 질투는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하는 사람들 중에서 더욱 심함을 볼 수 있다. 이는 특히 기득권을 가진 종교지도자들에게 심하게 나타나는 현상이다.
유대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이 자신들의 기득권을 저해하기 때문에 잡아서 십자가에 못 박았다. 예수님이 하나님 행세를 하고 유대의 법을 어긴다는 것이 표면적인 이유였다. 그러나 로마 총독인 본디오 빌라도는 시기 질투 때문임을 알았다. "이는 저가 그들의 시기로 예수를 넘겨준 줄 앎이러라"(마 27:18).
예수님의 제자들이 열심히 복음을 전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종교지도자들은 자기들과는 전혀 다른 파인 예수님의 무식한 제자들이 기사와 이적을 행하고 담대하게 복음을 전파하여 많은 무리가 그들을 따르니 시기와 질투가 가득하여 그들을 잡아서 때리고 옥에 가두어버렸다. "대제사장과 그와 함께 있는 사람 즉 사두개인의 당파가 다 마음에 시기가 가득하여 일어 사도들을 잡아다가 옥에 가두었더니"(행 5:17-18).
특히 오늘날, 성령의 새로운 기름 부음을 받은 새로운 지도자가 나타나서, 자기들과 다르게 보이는 교리를 주장하고 기존 교회를 비판하면, 표면적으로는 교리가 어쩠느니 실천상의 문제가 있느니 하지만 그 저변에는 시기와 기득권 보호라는 집단이기주의 이중 잣대 때문임을 알 수 있다.
얼마 전, 한국에서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은 Q라는 지도자가 집회 도중에 안수하여 쓰려지는 현상이 일어났을 때, 자기 교단 내에서 Q를 지지하는 경쟁 세력을 축출하기 위해, 애꿎은 Q를 속죄양으로 삼아 이단 시비를 제기했다. 주도자인 Z 목사는 나중에 본인 자신이 어느 집회에 참석하여 평신도의 안수를 받고 쓰러진 후 성령 체험을 하여 Q가 주도하는 집회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고 공식적인 사과를 했다.
언젠가 형제들끼리 기도 모임을 가지면서 서로 손을 얹고 기도해 준 적이 있다. 그때는 내가 막 예언의 은사를 받았을 즈음이다. 어느 한 형제에게 손은 얹었더니 갑자기 그 형제의 마음속에 시기와 의심이 있다는 사실이 마음으로 전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