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에는 뽕나무가 없습니다.
그래서 개혁개정엔 제대로 돌무화과나무라고 번역되어있습니다.(눅19장)
여리고는 현재 P.L.O 자치구역이라 성지순례 때 잘 들어갈 수 없어 보신 분들이 많지 않더군요.
그래서 사진 올립니다.
물론 이 나무가 그 때 그 나무는 설마 아니겠지요.
그냥 같은 나무 중에서 가장 큰 나무라고 하더군요.
그때 장면을 모자이크로 그려 놓았네요.
돌무화과나무 "
돌무화과나무 열매 맛은 무화과만은 못해 가축 사료로 많이
사용했지만 단맛이 있어서 가난한 사람들의 식량으로 사용했다.
신약성경에서 세관이었던 삭개오는 키가 작아 돌무화과나무
위로 올라가 예수님을 보게된다. 최영심 작, `예수님과 삭개오`,
1991년, 유리화, 서울 대치2동성당.
돌무화과나무는 팔레스티나와 시리아와 동부 아프리카에 자생하는
나무이다. 돌무화과나무는 잎과 껍질이 뽕나무를 닮았지만 열매는
오히려 무화과를 닮았다. 그러나 그 열매는 더 작고, 숫자는 훨씬 많다.
또 나무의 여러 곳에서 열리는 것이 특징이다.
열매는 어린 가지나 묵은 가지 할 것 없이, 심지어 굵은 줄기에서도
달리기도 하고 1년에 여러 번 열매를 맺는다. 열매 맛은 무화과만은 못해
가축 사료로 많이 사용했지만 단맛이 있어서 가난한 사람들의 식량으로도
사용했다. 따라서 돌무화과나무는 특별하게 관리했던 나무다(역대 27,28).
돌무화과나무는 더위나 건조한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잘 자라지만,
산악지대의 추운 기후에는 견디지 못한다. 돌무화과는 잎이나 나무에
상처를 내면 흰 즙이 나온다. 이것은 무화과나무와 공통된 성질이지만,
잎과 열매로 쉽게 구별할 수 있다. 돌무화과 줄기는 우리나라
오동나무처럼 연하고 가벼워 가공하기도 쉽다.
또 수분과 부패에 견디는 힘이 좋아서 고대 이집트인들은 관을
만드는 데 사용했다. 이집트 고분에서 B.C. 3000년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돌무화과나무 미이라 관이 발견됐다. 이밖에도 가구, 문짝,
상자 등을 만드는 데 널리 쓰였으며 가벼워서 천장재로도 이용했다.
돌무화과나무는 수명이 긴 나무이기도 하다. 사막에서는 그늘이 생명을
지켜주는 데 대단히 중요하다. 유목민은 그늘을 위해, 또는 식량을 얻으려
돌무화과나무를 즐겨 심었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생명 나무로 숭배하기도 했다. 그래서 고대
이집트 사람들은 다산과 풍요를 바라며 돌무화과나무 밑에 과일,
곡식, 채소, 꽃, 물 등을 바치고 제사를 지냈다. 돌무화과나무는
가나안이나 예리코 등에 아주 흔한 나무였다(열왕 10,27).
구약성경에서 돌무화과나무 하면 아모스 예언자가 떠오른다.
아모스는 정의의 예언자로서 예언, 집필 문학 시대를 연 이스라엘
최초의 예언자였다.
아모스 예언자는 남부 유다 왕국의 수도 예루살렘으로부터 남동쪽으로
약 18km 떨어진 작은 촌락 드고아에서 태어났다. 드고아는 사방이
언덕으로 둘러싸인 유다 광야의 가장자리에 있어서 염소나 양떼 목축업이
가능했던 지역이다. 아모스는 자신을 소개할 때 "나는 그저 가축을 키우고
돌무화과나무를 가꾸는 사람"이라고 소개했다(암 7,14).
옛날 유다인들은 무화과나 돌무화과의 열매가 덜 익었을 때 열매 중앙부의
일부에 구멍을 내서 벌레가 알을 낳기 전에 이 구멍을 통해 밖으로 도망가게 했다.
신약성경에서 돌무화과나무는 단연 자캐오를 상상할 수 있다.
세관이었던 자캐오가 키가 작아 돌무화과나무 위로 올라가 예수님을
보게되는 장면은 무척 인상적이다. 돌무화과나무는 높이와 둘레가
커서 흔히 길가에 심어 좋은 그늘을 만들어 주는 녹음수였고
쉽게 올라 갈 수 있었다(눅 19,4).
또한 돌무화과나무는 크고 뿌리가 깊은 나무였다.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돌무화과나무더러
'뽑혀서 바다에 심겨라' 하더라도, 그것이 너희에게 복종할 것이다"(눅 17,6).
초대교회 전설에 의하면 카이로 근처 마타리아에는 오래된
돌무화과나무 한 그루가 있다. 이 나무는 요셉과 마리아가 아기 예수를
안고 헤롯왕의 박해를 피해 이집트로 피신할 때 이 나무 그늘에서
휴식을 취하고 기운을 회복했다고 해 성스러운 나무로 전해진다. (출처: 평화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