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
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도 동성애란 벽을 넘지 못하는 것일까. 좀처럼 식을 줄 모르는 동성애란 뜨거운 감자로 미국 교회가 논란에
휩싸인 지 이미 오래다. 각 교단마다 동성애자 안수 문제로 몸살을 앓다 갈라질 지경이다. 동성애 문제를 놓고 신학자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하다. 감정싸움을 벌이기 전에 진지한 신학적 논의가 우선이다. <미주뉴스앤조이>는 동성애 이슈에 대한
신학자들의 다양한 견해를 살펴보고, 목회 현장에 있는 목회자들의 목소리와 크리스천 동성애자들의 목소리를 차례로 들어보며 논의의
폭을 넓혀갈 예정이다. 독자들의 기고도 환영한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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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성애는 현재 미국 문화에 있어서 가장 논쟁이 되는 주제다. 논쟁은 앞으로도 한참 계속될 것처럼
보인다. 한때는 "함부로 입에 올리지 않는 사랑"이라고 불렸던 동성애가 미국 사회 전역에 걸쳐서 공개적으로 논의되는 것이 작금의
현실이다.
이 논쟁의 뒤에는 동성애적 행동과 관계와 생활을 합법화하고 정당화하려는 활동가들의 노력이 숨어
있다. 지금 이런 노력은 동성 결혼 합법화에 집중 되어 있다. 동성애를 억압하는 모든 구조와 법을 해체하려는 시도를 하는 중이다.
이들은 동성애, 양성애, 성전환 등 "성애 소수자들(erotic minorities)"이 특별한 법적 보호를 받을 가치가 있다고
주장한다.
동성애와 성경, 진실 말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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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버트 말러 총장의 "동성애와 성경" 표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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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3년 동성애 옹호 진영이 연방 대법원에서 벌어졌던 "로렌스 대 텍사스" 건(동성애를 처벌할 수 있도록 돼 있는 텍사스
주법이 위헌이라는 판정 : 역자 주)을 승리로 이끌면서 동성애를 정상적인 것의 범주로 밀어 올리는 데 결정적인 승기를 쥐었다.
이 재판이 텍사스의 동성애 금지법을 위헌이라고 판결내림으로써 정의가 무너져 내렸다. 이 판결은
개개인이 자신의 존재와 성생활에 대한 정의를 정부의 간섭 없이 마음대로 할 수 있게 해줬다. 안토닌 스칼리아 법관이 말한 것처럼 이
판결은 결국 모든 도덕적 법에 대한 영향력의 종결을 의미하게 됐다.
이제 우리 문화권은 동성애가 정상적인 생활 관습인 것 같은 이미지와 메시지로 융단 폭격을 당하고
있다. 대중 방송에 만연한 동성애 경향의 성애 프로그램들이 넘쳐나도 이젠 많은 사람들은 놀랄 기운조차 잃었다. 방송과 영화와
소설에 게이가 넘쳐난다. 성적 관용과 성적 다양성이 이제 아이들 프로그램에까지 등장하게 됐다. 한 케이블 방송의 "이성애자를 위한
동성애자의 관점(Queer Eye for the Straight Guy)"이라는 프로그램은 주류 사회에 불고 있는 동성애 문화
부상의 한 표징이 됐다.
이 시대에 동성애를 완전한 생활의 형태로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편견에 가득 찬 소인배 취급을
당하거나 "동성애혐오자(Homophobic)"이라고 불린다. 누군가 남녀 간의 결혼만이 정상이고 합법적이라고 주장하면
구시대적이고, 억압적이고, 현대 문화에서 완전 벗어난 사람이라고 맹렬히 공격당한다. 동성 결혼 반대 편에 서면 참을성 없고
도덕주의자고 근본주의자라고 폄하되기 일쑤다. 결혼 제도를 지키려는 사람들은 방어적이 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동성애 옹호자들은
그것을 잘 알고 있다.
교회라고 이 논쟁에 비켜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동성애 합법화의 이슈가 대중적 인기를 얻고 승기를 잡아가자 일부 교회들과 교단들은 이 운동에 동참했다. 심지어 동성애를 옹호하는 이들도 있었다. 소수만이 꿋꿋하게 자리를 지켰다.
일부 교회들과 교단들은 동성애가 죄라고 분명하게 말하지 못하거나 말하지 않으려고 하면서 중간에
머무르고 있었다. 동성 결혼과 동성애자에 대한 안수 문제는 주기적으로 몇몇 교단의 총회에서 논의되고 있다. 많은 경우 점차 이
문제가 교단을 갈라서게 만드는 요인이 될 것이다.
이 토론 자체가 매우 혁명적 발전이다. 미국 문화와 미국 교회를 배경으로 가진 공정한 관찰자라면
이 이슈가 얼마나 빠른 속도로 주류 문화를 주도해가고 있는지 알아야 한다. 신앙 공동체인 교회는 이제 이 질문에 대답할 수
있어야 한다. "이 도덕적 혼란의 시대에 우리는 차별화된 메시지를 가지고 있는가?"
우리의 대답은 "예"여야 한다. 교회는 동성애에 대한 분명한 메시지를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성경이 분명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성경에 대한 신실함이 교회가 성경의 증인이 되라고 요구하고 있다. 그렇지 못하다면 이 길은
신학적 망각의 길이 될 것이다.
성경적 권위에 대한 확인이야말로 교회가 이 이슈를 다루는 데 중심이 돼야 한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성령의 영감을 받아써진 책이며 무오하다.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것으로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딤후 3:16)하다. 이 지점이 매우 중요한 분수령이다.
성서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교회들은 결국 문화적 압력에 무릎을 꿇을 것이고 시대의 영에 따라
동성애에 대한 이해를 맞춰갈 것이다. 성경의 절대적 권위를 인정하는 교회라면 다른 선택의 여지는 없다. 우리는 동정적 진실을
말해야만 한다. 동정적 진실이란 이렇다. 동성애적 모든 행동들은 하나님이 말씀을 통해서 분명하게 무조건적으로 반대하신 일이다.
동성애적 행동들은 하나님 자신의 선언에 의해 하나님 보시기에 혐오스러운 것이다. 이런 표현은 강해 보이지만, 이것은 성경의
말씀이다.
고 엘리자베스 앗테마이어 교수(리치몬드 유니언신학대학)는 이 문제에 대해 "성경의 분명한
가르침에 따르면 하나님께서 성관계의 대상을 결혼 관계에 있는 한 남자와 한 여자 사이로 한정하셨다"고 분명하게 답했다. 가장
명확한 성경의 가르침이 무엇인가? 모든 결론은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성경의 내용에 대한 평가는 지난
19세기 동안 교회를 통해 확증된 것이다. 최근에 들어서야 몇몇 성서학자들이 동성애에 대해 다른 메시지(혹은 매우 다른)를
전달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동성애라는 의제 자체가 동성애를 하나의 성적 활동으로 인정받게 하려는 활동가들의 헌신에 의해서
자꾸 부각되는 것이다. 이것을 통해 그들은 동성 결혼의 합법화와 동성애자 간의 가족 꾸리기를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
어긋나는 모든 의제들은 제거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들에게는 성경이 어마어마한 장애물인 것이다.
사정이 이러니 성서학자들 사이에서도 동성애 옹호자가 나타나는 것에 놀라서는 안 된다. 성서학계
자체가 매우 다양한 사람들의 모임이다. 어떤 학자들은 성서의 권위를 보호하지만 다른 학자들은 성경을 해체하여 곡해하려고 시도하기도
한다. 이 이슈의 전선은 누가 봐도 명백하다. 성경이 동성애를 승인한다고 토론하려 드는 사람들은 성경의 권위와 영감과 진실함을
거부하는 사람들이다. 성경이 말하고 있는 동성애 금지 구절들이 혼란스럽다거나, 잘 못 번역됐다거나, 관계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가장 뛰어난 서커스 곡예사들 수준의 진기한 성경 해석 묘기 기술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수십 년 전 고 그레샴 마첸 교수가 말하길 "모든 과학적, 역사적 방법론과 상식을 버리고 보면 성경은 그것이
말하고자 하는 정반대의 이야기를 적고 있다. 어떤 영지주의자도 중세 수도사도 지금 뉴욕의 교단에서 행해지는 설교보다 더
우스꽝스러운 설교를 만들어 내긴 힘들 것이다"고 했다. 마첸 교수는 당시 유행하던 교회에 이교도적 영성 활동을 섞으려는 시도에
대해 비판하며 이런 말을 했었다. 만약 마첸 교수가 동성애를 성경적으로 승인하려는 이들의 시도를 봤다면 훨씬 더 우스꽝스럽다고
했을 것이다.
성경적 기독교야말로 동성애 의제에 저항하는 최후의 보루가 될 것이다. 최후의 순간에는 그 저항이
성경 자체에까지 미칠 것이다. 동성애를 정상적인 가치로 만들려고 밤낮으로 수고를 아끼지 않는 사람들은 성경이 동성애에 대해 아주
명확하게 반대의 입장을 취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런 성경의 입장을 무효화 시키지 않고는 완벽한 성공을 거둘 수 없음을
그들도 잘 알고 있다. 이러한 결말을 노리는 그들의 입장 때문에 우리는 이 문제에 최대의 관심을 보여야 하는 것이다.
동성애와 성경, 진실 왜곡하기
성경은 동성애의 일반화(normalization)에 가장 큰 걸림돌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성경은 단호하게 모든 종류의 동성애적 행동을 비난한다. 동성애 옹호자들이 자신의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서는 성경의 권위를 중립화
시키거나 구석으로 밀어내야만 한다.
이런 결과를 내오기 위해서 여러 가지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다. 게 중 어떤 이들은 성경을
전면적으로 부정한다. 미국침례교단의 동성애 연구 위원회의 위원으로 활동했었던 윌리엄 캔트 씨는 "구약과 신약 중 동성애를 비난하는
내용은 하나님으로부터 영감을 받은 것도 아니고 기독교의 가치를 담고 있지도 않다. 성경적으로, 신학적으로, 과학적으로,
사회학적으로 동성애에 대한 성경의 비난은 시대와 상황에 따른 문화적 편견을 반영한다고 보는 편이 옳다"고 선언했다.
이러한 접근은 수정론자들 사이에서 볼 수 있는 가장 솔직한 접근이다. 이 사람들은 성경이 동성애를 금지한다는 자체에 대해서는 부정하지 않는다. 그들은 단도직입적으로 현대의 지식과 감성에 맞춰서 성경을 내던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접근을 따르는 사람들의 다음 단계는 성경 자체를 반대하는 것이다. 그들이 성경의 권위를
거부하는 정도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하게 되기 때문이다. 웨슬리안대학의 게리 데이비드 콤스톡 교목은 "바울이 동성애를 신의 부재와
동일시하는 것을 인지하고, 비평하고, 비난하지 않는 것은 위험하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제 각각의 기독교 전통의 틀 안에 남으려고
하면서 우리를 비하하고 망가트리는 구절들에 대해서 문제 제기하지 않는 것 자체가 우리를 옭아매는 사슬이 되어 돌아온다"고 했다.
그는 한 발 나아가 "기독교인들이 성경에서 동성애를 반대하는 구절들을 삭제하자고 요구하지 않으면 그 구절들은 계속 우리를
반대하는 구절로 끊임없이 사용될 것이다. 아니면 최소한 동성애를 막는 그들의 권위를 깎아 내리려고 노력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두 번째로 수정주의자들이 접근하는 방식은 그 시대의 성경 저자들의 과학적 지식 습득의 한계를
문제 삼는 것이다. 수정주의자들은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것들을 그때 그들이 알고 있었더라면" 성경 저자들이 이렇게 마음이
닫혀있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빅터 폴 퍼니시는 "바울의 시대에는 동성애라는 말 뿐만 아니라 콘셉트 자체가 알려지지 않았던
시기다"라고 말한다. 그는 "이성애자라던가 양성애자 같은 단어들은 현대 심리학과 사회학적 분석의 바탕 하에서만 가정할 수 있는
단어들이다. 고대의 저자들은 우리가 지금 "성적 지향"이라고 부르는 이 개념 자체에 대한 아주 애매모호한 이해조차도 없이 글을
썼다"는 논지를 폈다.
그들 말대로 바울이나 다른 사도들이 현대 사회가 이해하고 있는 "성적 지향"이나 "성정체성"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는 것은 사실인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 사실은 근본적으로 이 주제와 전혀 상관없는 것이다. 현대의 성적
지향에 대한 개념은 성경에서 해답을 찾아야 한다. 성경적 해답을 현대 개념에 갖다 맞춰서는 안 된다. 성경을 현대적 개념에 맞추어
해석하려고 시도해서는 안 된다.
사도 바울은 프로이드나 미국정신과협회에 사과하지 않을 것이다. 신실한 교회라면 이러한 동성애
옹호자들의 접근법에 대해 분명한 태도를 취해야 한다. 동성애 옹호자들은 뻔뻔하게도 성경의 권위를 뒤집으려 하고 있고, 성경의
권위를 현대 속세의 이데올로기라는 거짓된 권위로 대체하려고 하고 있다.
세 번째 접근 방식은 동성애에 대해 언급한 성경 본문 자체를 거부해버리는 것이다. 아니면 그
본문이 특정한 경우에 한정하는 것이라고 치부한다. 예를 들자면, 바울이 말한 동성애라는 것이 사실은 소아성애자(소년만 성추행 하는
정신 질환자: 역자 주), 동성 강간, "실제로 관계하지 않은" 동성적 관계를 뜻하는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이 수정주의자들은
창세기 19장, 레위기 18:22, 레위기 20:13 등도 같은 방법으로 논쟁하려고 한다. 이런 주장이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
수정주의자들은 눈에 뻔히 보이는 것을 부정한다.
마찬가지로, 소돔의 죄라는 것도 동성애가 아니라 외지인에 대한 불친절이었다고 주장한다. 존
멕닐은 교회가 소돔의 죄를 불친절에서 동성애로 전환시켰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성경에 적혀 있는 글자는 그대로이다. 성경의
맥락에서 보면 소돔의 죄는 명백하게 동성애였다. 이 뜻을 빼면 그 구절 자체가 무의미해진다.
성경에 쓰인 글자와 문맥으로 보면 이는 분명한 사실이다. 유다서 7절 말씀에 소돔의 죄는 음란과
부도덕임을 명확히 말하고 있다. “그리고 소돔과 고모라와 그 주위의 성들도 그들과 마찬가지로 음란함에 빠져서 딴 육체를 좇았기
때문에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아 사람들에게 본보기가 되었습니다." (유다서 7절)
이 구절은 동성애에 대한 성경의 비판의 엄격함을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레위기
18:22절의 말씀도 남성 간의 동성애를 "가증한 일(abomination)"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 표현은 성경에서 하나님이
인간을 판단할 때 쓰는 가장 강한 단어다.
가장 큰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성경 구절은 구약이 아니라 신약의 로마서 1:22-27 말씀이다. 이 구절은 바울이 로마서 초반에 길게 적은 도입 부분이다.
“사람들은 스스로 지혜가 있다고 주장하지만, 실상은 어리석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썩지
않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 없어질 사람이나 새나 네 발 짐승이나 기어 다니는 동물의 형상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마음의 욕정대로 하도록 더러움에 그대로 내버려 두시니, 서로의 몸을 욕되게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으로 바꾸고, 창조주 대신에 피조물을 숭배하고 섬겼습니다. 하나님은 영원히 찬송을 받으실 분이십니다. 아멘. 이런
까닭에,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부끄러운 정욕에 내버려 두셨습니다. 여자들은 남자와의 바른 관계를 바르지 못한 관계로 바꾸고, 또한
남자들도 이와 같이, 여자와의 바른 관계를 버리고 서로 욕정에 불탔으며,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부끄러운 짓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 잘못에 마땅한 대가를 스스로 받았습니다."(로마서 1:22-27)
로마서 1장은 동성애가 근본적으로 믿음이 없는 행동임을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바울이 말하듯
신의 분노는 모든 "불의한 행동으로 진리를 가로막는 사람"을 겨냥하고 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누구인지에 대한 지혜를 모든
사람에게 심어두셨다. 단 한 사람도 빼놓지 않으셨다. 이것이 바울이 동성애에 대해 분명하게 말한 맥락이다.
바울은 동성애 행위와 동성애에 대한 욕망 자체를 하나님의 지배 의도에 맞서는 반란으로 봤다.
동성애는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질서의 선하심과 완벽한 계획에 반하는 역겨운 도착인 것이다. 바울이 지적한 그 반역자들은
창조주를 섬기는 사람들이 아니라 창조물을 섬기는 자들이다. 그리하여, 남자와 여자는 이성 간의 결혼을 의도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박탈당한 것이며, 그들과 같은 성을 가진 사람들에게 끌림으로써 불의한 욕망을 불태웠다. 이 모든 것이 자기 비하이며 수치스러운
짓인 것이다.
바울이 전하는 메시지는 매우 명확하며 강하다. 로마서 1장에서 보이는 논리적 흐름은 거부할 수
없는 것이다. 바울은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반란을 묘사하며 남녀 모두의 동성애를 가장 먼저이며 가장 확실한 창조주의 심판의
대상으로 지적했다. 결국 동성애가 창조의 온전성과 하나님이 인간을 남자와 여자라는 전혀 다른 두 성으로 창조한 의도를 공격하는
현실에 대한 이해가 신학적 관점을 잡는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된다. 이 성경 본문은 성경의 메시지를 거부하는 사람들에 의해 묵살되고
무시될 수는 있어도, 이 자체를 무효화 시킬 수는 없다.
동성애와 성경, 진실 믿기
동성 결혼 합법화와 동성애에 대한 정상화 운동이 힘을 얻고 있다. 일부 교회들은 이들을 옹호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인들의 책임은 분명하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드러낸 성적 취향과 성별과 결혼에 대해 진실을 말해야
한다. 아무도 이걸 쉽다고 말하지 않았다.
교회에 대한 믿음과 고백의 매 순간은 세속의 문화의 파도와 맞서기 마련이다. 성별의 이슈를
내세우는 것조차도 성별의 구분을 없애려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을 기분 상하게 한다. 그들은 우리가 "사회적으로 규정된 현실"에 대한
이해 없이 석기 시대의 자취를 들추어내는 사람 취급을 한다.
성경은 창조의 구조를 거부하려는 시도를 허락하지 않는다. 로마서 1장은 창세기 1장과 2장에
비추어 읽어야 한다. 창세기 1장 27절 말씀을 보면 분명하게 나온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할 때 남과 여 두 개의 성을
만들었다. "하나님이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다." (창세기 1:27) 남자와 여자 모두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 됐다. 남과
여는 구별이 분명하게 된다. 동시에 하나님의 설계로 떨어질 수 없이 연결돼 있다. 남과 여는 완전히 다르다. 이것은 육체적
차이를 넘어서는 문제다. 남자와 여자가 완전히 다르긴 하지만 남자는 여자를 "뼈도 나의 뼈, 살도 나의 살"로 인정하고 있다.
남자와 여자의 사이의 잇는 것은 결혼이다. 결혼은 역사적 사건도 사회화의 결과물도 문화적 진화의
산물도 아니다. 반대로, 결혼과 이성간의 언약에 의한 관계는 하나님 의도의 중요한 요소다. 창조 후에도 타락 후에도 마찬가지다.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신 후의 묘사를 보면 성경의 교훈이 붙는다.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한 몸을 이루는 것이다. 남자와 그 아내가 둘 다 벌거벗고 있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창세기 2:24-25)
복음주의 기독교인들도 성경의 진실을 있는 그대로 나타내는 데 머뭇거릴 때가 많다. 사실 많은 우리 교회들과 성도들은 이데올로기나, 정치적으로나, 문화적으로 현대 사회와 갈등이 있는 곳에서 무장해제 된 채 서 있다.
동성애에 대응하는 복음주의자들의 기본 원칙은 바로 이것이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홀로 통치한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하나님의 의도와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 창조했다.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 그 분의 창조 의도를 드러냈다. 의도는
명확하다. 하나님은 세상에 남자와 여자, 두 개의 다른 성을 창조했다. 창세기는 남과 여로 창조하신 하나님의 의도를 정확히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어떤 우연이 아니다. 하나님은 "남자가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으니, 그를 돕는 사람, 곧 그에게 알맞은
짝을 만들어 주겠다"(창세기 2:18)고 말했다. 그리고 하나님은 여자를 창조했다.
하나님의 창조 의도는 남자를 쪼개 여자(그의 부인)를 만든 데서 더욱 깊게 드러난다. 그들은
"한 몸"을 이루는 새로운 존재가 됐다. 이러한 성경의 확언은 어떠한 왜곡된 해석으로도 피해갈 수 없다. 성경은 정확하게 결혼과 성
관계를 하나님의 창조 의지와 계획 안에서 규정하고 있다.
남자와 여자의 성적 결합이 결혼의 언약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은 그저 허가 받은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이다. 성적 표현은 이성 간의 결혼 언약 안에서만 가능하도록 한정되어 있다. 성경은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만나
오랫동안 살라고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다.
그러므로 남녀 간의 결혼 관계를 벗어난 성적 관계는 모두 불법이고 부도덕하고 하나님의 명령과
법에 어긋나는 행동이다. 이 근본적 진실은 단지 이성애자들의 아젠다에 대적하는 것이 아니라 이 시대에 만연한 성적 부도덕에 맞서는
것이다. 사실 성경에서 동성애에 대한 이야기보다는 이성 간의 옳지 못한 성적 행위에 대해 더 많은 부분을 할애에 언급하고 있다.
간통, 강간, 수간, 포르노, 간음 같은 것들은 분명하게 금지 되어 있다.
마이클 존스가 ‘모든 현대 이데올로기는 인간의 성적 행위들을 합리화하려는 노력이다’라고 주장한 바
있다. 사실 그는 현대성은 "합리화된 욕정(rationalized lust)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하나님의 진실과 전쟁 중인
속세라는 곳이라면 욕정을 합리화하려는 갈망으로 가득 차 있다고 해도 이상할 것이 없다. 속세는 그들의 성적 범죄를 사회적으로
합리화 시키고 면죄부를 발행하려 애쓰고 있다. 교회 안에서 조차 속세의 시도를 그들의 목적대로 이루어 가려는 시도에는 정말 놀랄
수밖에 없다. 그런 행동은 공개적으로 하나님의 진실과 대적하겠다는 것으로 봐야 한다.
바울이 로마서 1장에 언급한 전통적 성명서가 우리 정면에 놓여 있다. 동성애는 바로 우상 숭배와
이어져 있다. 그들의 우상은 하나님이 그들이 그들의 욕정대로 하게 그들을 포기했다는 생각이 포함되어 있다. 그들의 마음은
부정하며 그들은 자신의 불법적인 욕정으로 그들의 몸을 더럽히고 있다.
거짓을 위해 하나님의 진실과 바꾸고 창조주 대신 창조물을 섬기는 그들의 우상 숭배는 하나님으로
하여금 그들을 타락한 욕망으로 가도록 만들고 있다. 이들은 그들의 타락한 욕망을 위해 하나님께서 자연스럽지 않다고(말 그대로
자연에 반하는) 말하는 성교를 하고 있다. 바울은 남성 간의 동성애 뿐 아니라 여성 간의 동성애에 대해서도 분명히 다루고 있다.
고대 문헌에서 여성 간의 동성애를 언급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바울의 메시지는 분명하다. 모든 종류의 동성애적 성애와 성 행위는
하나님의 영광에 미치지 못하며 하나님이 드러낸 법에 반하는 짓이며 선천적으로 부자연스러운 것이다.
레즈비언이 된 여성은 혼자가 아니다. 남자 역시 다른 여성과의 자연스러운 성교를 포기한 채 그
욕망을 다른 남자를 위해 사용했다. 그들은 그 행동을 수치심조차 가지지 않고 행했다. 그들은 그들의 잘못으로 인해 그들의 육체에
처벌을 받았다.
하나님은 그들의 타락한 마음 때문에 그들을 버렸다. 그리고 그들은 계속 동성애를 한다. 메시지는
더 이상 명료할 수 없다. 그러나 이 명확한 사실을 부인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있다. 어떤 이들은 바울이 이 대목에서 이성애자 중
동성애를 행한 사람에 대해서만 이야기 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런 식의 상상력 풍부한 어리석은 접근은 성경에 의해 거부된다.
성경은 인간이 이성애자로 태어났다는 것 이외의 어떠한 이해도 허락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적이며 아주 정치적으로 이해되는
동성애 "경향"이 인간의 타고난 본성이라는 주장은 성경과 대적할 수 없다. 성경에서 말하는 경향은 인간이 가진 "죄를 향한 경향"
밖에 없다.
바울은 다른 서신에서 다른 계속되는 죄들과 더불어 동성애가 하나님 왕국에서는 근절될 것이라고
말했다. 바울이 고린도전서 6:9-10과 디모데전서 1:10에 쓴 남색(arsenokoites)이라는 단어는 어원이 확실하다.
현대 수정주의자들이 이 단어가 오로지 남성 사이의 강간이나 어린 소년에 대한 성애를 뜻한다고 몰아가려고 시도했다. 이런 시도는
학문적으로 전혀 고려의 가치가 없다. 이 단어는 그 당시 그리스 문학 어디에도 등장하지 않는다. 데이비드 라이트 교수(신약학)는
바울이 이 단어를 레위기 18:22와 20:13에서 바로 인용해왔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그 뜻은 동성애 그 자체이다.
성경의 증언은 명확하다. 동성애는 신에게 반대하는 통탄할만한 죄다. 동성애는 하나님의 의도와
창조의 질서를 정면으로 거스르는 행위다. 모든 죄에는 영원한 결과가 있다. 우리의 유일한 희망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구원 밖에
없다. 예수는 우리의 죗값을 치르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혔고 우리를 구원했다.
우리가 동성애에 휘말린 사람을 대할 때는 반드시 진정한 공감대를 가져야 한다. 그 진정한
공감대의 핵심은 진실을 말해 주는 것이다. 성경은 우리가 반드시 전해야 하는 진실을 드러내고 있다. 성경의 메시지를 왜곡하고
전복시키려는 사람들은 동성애자들을 동정심을 가지고 대하는 자들이 아니다. 거짓말을 해 주는 것은 절대 공감을 살 수 없다. 그들의
거짓말은 사망에 이르는 삯이 된다.
종국에 가서 교회는 하나님 말씀의 진실을 선포하거나 사실로부터 달아나는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된다. 결국 믿음의 문제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성경이 우리의 성(sexuality)에 대한 하나님의 바람과 명령을 진실 되게
말하고 있다고 믿고 있는가?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의 입장을 정확히 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무엇이라 말해야 할지 알아야
한다. 만약 못 믿겠다면, 세상에게 우리가 아는 게 하나도 없다고 솔직히 고백하자.
글·알버트 말러(남침례교신학대학) 총장 / 번역·김성회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