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2-06-28 20:58
[5]하나님의 임재의 능력(애드리언 로저스)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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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웹섬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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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 된 확 신

구원받는다는 것, 곧 죄 사함 받은 기쁨을 소유한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모른다. 그러나 그보다 훨씬 더 놀라운 일이 있다. 그것은 바로 당신이 구원받았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구원의 확신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주시는 가장 큰 선물 중 하나이다. 그러나 수십명을 대상으로 사역하는 그리스도인 지도자들과 사역자들이 한결같이 하는 이야기는 사람들이 제일 먼저 던지는 질문이 “우리가 구원받았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라는 물음이라는 것이다. 확신의 결여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갖고 있는 커다란 문제이다. 확신 없이 살아가는 것은 주차 브레이크를 걸어 놓고 운전하는 것과 같다.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쓴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요일5:13) 사도 요한은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희망할 수 있게 하려 함이라”고 말한 것이 아니다. 또한 우리에게 영생이 있다고 단지 생각할 수 있다거나, 추측할 수 있다거나, 희구할 수 있다고 말한 것도 아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나 다름없다. “내가 성경의 모든 책을 쓴 것은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 수’ 있게 하려 함이니라.”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하셨을까? 그것은 바로 우리에게 있어서 구원의 확신 문제가 대단히 중요하기 때문이다.

선결해야 할 영원의 문제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만일 당신이 구원받은 사실을 모른다거나 당신의 미래와 영원한 운명을 모르고 있다면, 그것을 선결해 놓는 편이 좋다는 것이다. 이것은 너무나도 중요한 문제이다. 당신이 영원이라는 시간을 어디서 보낼 것인가 하는 문제는 너무나도 중요하기 때문에 나는 당신이 당신의 운명에 관해서 조금이라도 의심을 품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사람이 구원받고서 의심할 수 있을까? 물론이다. 그렇다면 의심이 좋은 것인가? 아니다. 통증이 육체에 고통을 주듯이 의심은 영혼에 해악을 끼친다. 통증은 하나의 경고요, 어딘가가 탈이 났다는 신호이다. 당신에게 의심이 있다면 설사 당신이 하나님의 거듭난 자녀라 할지라도, 그러한 의심들은 어딘가 문제가 있다는 표시이다. 그리스도인들은 누구나 때때로 의심을 품을 수 있다. 한 번은 한 여자가 무디에게 와서 자기는 이십오 년 전 구원을 받은 이래 한 번도 의심해 본 적이 없다고 했다. 그때 무디가 이렇게 대답했다. “당신이 구원받았다는 사실이 의심스럽군요.” 무디가 한 말의 의미는 무엇일까? 그것은 마치 당신이 내게 와서 이렇게 말하는 것과 같다. “애드리언 목사님, 제가 결혼한 지 이십오 년이 되었는데 배우자와 한 번도 말다툼을 한 적이 없습니다.” 그때 나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당신이 정말로 결혼했는지 의심스럽군요.” 내 말이 배우자와 말다툼하는 것이 좋다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당신이 확신에 찬 그리스도인이라면 일부러 의심에 찬 그리스도인이 될 필요는 없다. 나는 다만 당신이 의심을 제거하고 구원의 확실성과 확신을 갖게 되기를 원한다.

구원받은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나 애드리언 로저스가 구원받은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는지를 말해 보고자 한다. 그것은 내 속에 있는 어떤 확신 때문이 아니다. 하지만 나는 내가 구원받은 것을 정말로 안다. 그리고 내가 구원받은 것을 안다는 사실로 인해 하나님을 찬양한다.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현재의 믿음

만일 우리가 구원의 확신을 갖고 싶다면, 예수님께 대한 현재의, 바로 ‘지금 당장’의 믿음이 있어야 한다. 여기에 핵심이 되는 구절은 바로 이것이다. 요한일서 5:10,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는 자기 안에 증거가 있고”, 요한일서 5:13,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쓴 것은” 성경에서 ‘믿는다(believe)’ 는 말과 ‘의탁한다(commit)’는 말이 같은 말이다. 이것을 요한복음 2:23-24에서 볼 수 있다. 거기 보면 성경이 예수님께 대하여 이렇게 말씀한다. “많은 사람이 그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 이름을 믿었으나 예수는 그 몸을 저희에게 의탁지 아니하셨으니.”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였으나 예수님은 그들을 믿지 않으셨다는 말이다. 예수님은 그들이 참된 신자가 아니라 단지 기적을 쫓아다니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고 계셨다. 당신도 알다시피 진정한 성경적인 믿음은 단순한 지적인 활동이 아니다. 당신이 믿는 것은 예수님에 관해서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자신을 믿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당신 자신을 예수님께 의탁하는 것이다.

나의 믿음의 근거

구원의 확신을 갖기 위해 두 번째로 필요한 것은 바로 나의 믿음에 확고한 근거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만일 내가 지금 틀림없이 그리스도를 믿고 있다면 나의 믿음의 대상이 신뢰할 만하고 확실하다는 것을 내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사도 요한은 우리의 믿음의 훌륭한 기초와 근거로 세 가지를 제시해 주고 있다.

그리스도의 역사

우리는 이 위대한 확신을 요한일서 5:6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자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물로만 아니요 물과 피로 임하셨고,” 성경을 보면,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한 군병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고 말씀하고 있다(요19:33-34). 우리는 피로 구원을 받고 물로 거룩해진다. 성막은 우리가 이미 살펴본 대로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데, 구약 시대에 그 곳에 들어가서 사람이 첫 번째로 대하는 것은 놋제단이었다. 그리고 바로 그 놋제단 위에서 피의 제사가 이루어졌다. 그 다음에는 제사장이 손을 씻었던 대야가 있었다. 따라서 먼저 피가 있었고 그 다음에 물이 있었다. 그것은 한결같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을 그림으로 보여 주고 있다.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구원의 피와 성결의 물로 임하셨다고 말씀한다. 그의 피는 우리를 사하시고 성결의 물은 우리를 깨끗하게 하신다. 당신이 구원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구원을 위해 죽으셨다는 것이다. 그것은 역사적 사실이며, 그것은 그리스도의 구원의 역사이다. 모든 확신이 바로 이 사실에 놓여 있어야만 한다.

성령의 증거

요한일서 5:6-8에서 요한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증거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 증거하는 이가 셋이니 성령과 물과 피라 또한 이 셋이 합하여 하나이니라” 바꾸어 말하면, 성령이 그 물과 그 피를 취하여 우리 마음에 적용하신다는 것이다. 이제 9절의 논증을 주목해 보자. “만일 우리가 사람들의 증거를 받을진대 하나님의 증거는 더욱 크도다 하나님의 증거는 이것이니 그 아들에 관하여 증거하신 것이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사실, 즉 그가 물과 피로 임하셨다는 사실은 역사 속에서 성취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역사를 주셨다. 그리고 그 다음에 그리스도의 역사를 우리에게 드러내시기 위해 성령을 주셨다. 요한일서 5:9의 ‘만일(if)’이라는 말은 ‘…이므로’라는 말로 번역할 수도 있어서 “우리가 사람들의 증거를 받으므로”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사실 우리 모두는 사람들의 증거를 받아들인다. 나는 비행기를 탈 때마다 내가 지금까지 한 번도 만나 본 적이 없는 조종사에 대한 항공사의 증거를 믿는다. 나는 조종사의 자격증을 보자고 요청하지 않는다. 그 항공사가 그 조종사에 대한 자격 심사를 이미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그저 비행기에 올라탈 뿐이고 두 번 다시 거기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는다. 당신도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요한의 논증은 우리에게 이미 그리스도의 역사가 있고 성령의 증거가 있다는 것이다. 이 두가지는 사람들의 증거보다 훨씬 더 위대하고 훨씬 더 신뢰할 만하다. 내게 믿지 못하겠다고 말하지 말라. 당신이 믿지 못하겠다는 것을 나는 믿지 못한다. 무엇 때문인 줄 아는가? 그것은 당신이 믿고자 하기만 하면 성령께서 도와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진리를 선포할 수는 있다. 그러나 진리를 전해 주시는 분은 성령 한 분뿐이시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나는 설교하기 전에 반드시 모든 설교를 기도로 적신다. 사도들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요 하나님이 자기를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니라”(행5:32). 무엇보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증거해 주신다. 요한일서 5:10에 의하면, 성령께서는 우리 안에서 증거하신다. 내가 구원받기 전에 성령께서는 나에게 증거하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이 진리라는 사실을 내게 말씀해 주셨다. 그런데 이제는 그분이 내 안에서 증거하신다. 나는 내 안에 그 증거를 가지고 있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대목이 있다. 성령의 증거는 어떤 감정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심장 주변이 뜨거워진다거나 속눈썹 주변이 축축해지는 어떤 느낌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감정보다도 더 깊은 것이다. 우리의 감정은 우리의 본성 중에서도 가장 얕은 부분이다. 구원은 하나님의 가장 깊은 역사이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가장 깊은 역사를 우리의 가장 천박한 부분에서 행하지 않으신다. 그러므로 성령의 증거는 감정이 아니다. 오히려 성령 하나님께서 자신의 방법으로 내가 예수님께 속해 있다는 사실을 내게 속삭이시는 것이다.

아버지의 말씀

아버지의 말씀이 내 믿음의 세 번째 근거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 아들에 관하여 증거하신 증거”이다(요일5:10). 그 증거는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요, 성경이며,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생을 가지고 있다고 증거하는 말씀이다. 12절 말씀을 보면 더욱 명확해진다.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다. 이 말씀은 우리를 다시 13절 말씀으로 데려간다. 13절 말씀은 우리의 영적 출생 증명서이다. 여기에 바로 우리 믿음의 근거가 있고, 우리가 확신하는 이유가 있다. 우리는 한낱 속기 쉬운 바보가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셨다. 그는 물과 피로 오셨다. 그리고 하나님의 성령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그렇다. 이것이 사실이다.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의 말씀이 입증하고 있다.” 당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한다면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것이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거나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거나 둘 중 하나이다. 우리의 믿음의 근거는 이것이다. 곧 그리스도의 역사, 성령의 증거 그리고 아버지의 말씀이다.

행동으로 나타나는 믿음

내게 구원의 확신이 있다면 첫째,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현재의 믿음이 있어야 하고, 둘째, 나의 믿음의 근거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셋째로는 내가 믿고 있는 것이 행동으로 나타나야 한다. 그러므로 “구원으로 인해 내가 달라진 것이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던져 보는 것이 합당하다. 영어 단어의 ‘believe’ 는 ‘by’와 ‘live’라는 두 단어에서 나왔다. 우리가 진정으로 믿는 것은 우리가 그것에 의해서 살아가는 것이다.

계명의 검증

이것은 당신의 집주인이 누구인가 하는 문제이다. 당신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당신의 집, 곧 당신의 전은 새로운 관리하에 놓여 있을 것이다.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저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저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케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저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 저 안에 거한다 하는 자는 그의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요일2:3-6).”

요한은 당신의 행동이 당신의 말과 일치해야 할 것을 말하고 있다. 그렇지 않으며 구원받았다는 것이 거짓말이 된다는 것이다. 지금 당신은 구원받기 위해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다. 이것은 한 가지 문제를 일으킨다. 왜냐하면 우리 중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모든 계명을 언제나 지키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은 이것이 바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방법이라고 말한다. 요한의 의도는 우리로 하여금 완전을 찾아 무익한 여행을 떠나도록 하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구원의 확신을 주고자 함이라는 사실이다. 그 모든 비밀은 ‘지킨다(keep)’는 말속에 감추어져 있다. 우리의 삶의 소원과 목표와 지침은 하나님의 말씀, 곧 하나님의 계명이 되어야만 한다. 당신의 소원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면 당신은 구원받았다고 말할 수가 없다.

우리는 믿음과 행위에 의해서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 행함이 있는 믿음에 의해서 구원받은 것이다(약2:22-26). 문제는 우리가 죄를 짓느냐 짓지 않느냐에 있지 않다. 차이는 바로 여기에 있다. 내가 구원받기 전에는 죄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으나 이제는 죄로부터 달아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내 마음의 소원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것이다. 만일 이것이 당신의 마음의 소원이 아니라면, 당신은 처음으로 돌아가서 당신의 구원을 다시 점검해 보는 편이 나을 것이다.

형제 사랑의 시험

우리의 행동의 열매를 판단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시금석은 형제 사랑이다.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써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요일3:14). 내가 구원받으면 내 형제에게 잘해 주고 싶고 내 형제와 함께 있고 싶어진다. 누군가가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예, 저는 구원을 받았습니다만 교회에 나가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람들에게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 땅에 있는 성도들과 함께 있고 싶은 생각이 없다면, 천국에서도 그들과 함께 있을 가능성이 거의 없다. 요한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한다. 만일 당신이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 당신 집의 주인이실 뿐만 아니라 당신 집의 사랑이시라면 당신은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것을 사랑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교회를 사랑하신다. 계명들을 지키고 형제들을 사랑하는 것이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들이 우리가 지닌 믿음의 증거라는 사실을 기억하라. 그것들은 필요 조건이 아니라 증거들이며, 정상적인 그리스도인 생활의 일부분이다. 만일 그것들이 없다면 당신은 잃은 자이거나 심각하게 타락한 자이고, 확신을 가질 이유가 없는 사람이다. 당신이 과연 구원받았는지에 대해 진정한 의심이 있다면 하나님께서 지금 당신의 마음속에 들어오셔서 구원해 주시기를 기도하라. 하나님을 신뢰하라. 그러면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실 것이다. 그래도 확신이 생기지 않는다면, 당신의 문제는 다른 곳에 있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깨어진 관계일 수도 있고, 복구되지 않으면 안되는 깨어진 계명일 수도 있다. 믿음으로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마음속에 내주하실 때,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복된 확신을 주시길 기도한다.

  13

하나님의 집은 호텔이 아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아주 놀라운 진리를 밝혀 주셨다. 그 진리는 바로 하나님께서 일단 우리의 마음속에 오시면 아예 거주하시려고 오신다는 사실이다. 예수님께서는 성령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요14:16). 여기서 ‘함께 있는다’ 는 말은 ‘계속하다’ ‘거주하다’ ‘견디다’ ‘남아 있다’ ‘서 있다’ 등으로 번역할 수 있다. 한마디로 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정착하셨다는 뜻이다. 신학자들은 하나님의 내주 하심을 가리켜 믿는 자들의 영원한 보장이라고 일컫는다. 이것은 당신의 마음속에 힘과 기쁨을 주는 진리이며, 그리스도의 내주하심에 대한 연구를 결론짓는 데 있어 이보다 더 나은 근거는 없다. 하나님의 내주하심, 즉 그리스도 안에서 믿는 자들이 누리는 영원한 보장에 대해서 말할 때, 나는 한 가지 사실을 분명히 하고 싶다. 그것은 내가 단순히 구원받은 것을 공언하는 사람들의 안전 보장에 대해서 말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실제 구원을 소유하고 있지도 않으면서 구원을 공언하는 자들이 많다. 겉으로는 그리스도인들처럼 보이고, 행동하고, 말하지만 결코 구원받은 일이 없는 사람들이다. 예수님께서는 이처럼 거듭나지도 않았으면서 겉으로만 공언하는 사람들을 향해서 힘주어 경고하셨다.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7:22-23). 구원받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갖고 있는데 그 약속은 하나님께서 결코 그들을 떠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지금부터 일단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한 자가 왜 결단코 잃어버린 영혼이 될 수 없는가 하는 놀라운 이유를 일곱 가지로 나누어 살펴보기로 하자.

성령의 인내

사도 바울은 이 놀라운 진리를 이렇게 표현했다.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빌1:6). 우리 속에 이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누구신가? 그리고 그것을 끝까지 이루시는 이가 누구인가? 그분은 물론 성령이시다. 이 구절은 성령께서 시작하신 일을 성령께서 마치실 것을 말씀하고 있다.

일을 시작했다가 끝마치지 못하는 것은 전능자의 특징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셨을 때 우리의 이름은 하늘에 기록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시작하신 일을 끝마치지 못하시는 분이 아니기 때문에 절대로 그 명단에서 우리 이름을 지워 버리지 않으실 것이다. 성령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하시는 일을 생각해 보라. 먼저 성령님은 우리의 죄를 깨닫게 해주시는 분으로 우리의 죄를 보여 주시고 죄책을 깨닫게 해주신다. 성령님은 또한 우리로 회개케 하시는 분이시다. 우리의 마음속에서 놀라운 은혜의 역사를 일으키셔서 우리로 “성령으로 거듭나게 하신다”(요3:8). 그리고 성령임은 죄를 깨닫게 해주시는 분이면서 또 회개케 하시는 분이기 때문에 결국에는 구원을 이루시는 분이다.

제사의 완성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을 때 온전한 제사를 드리심으로 우리를 영원히 온전케 하셨다.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히10:14). 구약 시대에는 속죄의 제사가 드려질 때 그 제사는 결코 온전하거나 완전한 것이 아니었다. 그 제사들은 앞으로 올 온전한 제사의 그림자요, 예표에 불과했다. 그 모든 제사가 한 일은 사람들의 죄가 일 년 동안 더 굴러가게 하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그의 부요하시고 귀하신 피를 흘리셨을 때 모든 죄의 값이 남김없이 완전히 지불되었다. 그리고 그 희생 때문에 우리가 영원히 온전케 되었다.

구원받은 자들의 위치

우리가 구원받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오셔서 거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도 그리스도 안에 거하게 된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7). 이 구절은 우리의 위치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밝혀 준다. 이 말은 다른 무엇보다도 우리가 실제로 그리스도의 신비한 몸의 한 부분임을 의미한다. 베드로는 노아가 방주 안에 있었던 것을 예를 들어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을 설명하고 있다(벧전3:18-22). 방주가 완성되었을 때 하나님의 진로로부터 피할 수 있는 완전한 길이 마련되었다. 그것은 방주가 “안팎으로 역청이 칠해졌기”(창6:14) 때문이었다. 역청을 뜻하는 히브리어는 다른 곳에서 ‘구속’이라고 번역된 것과 같은 단어이다.

하나님의 진노의 물이 하나님의 구원받은 백성들에게 미치지 못하도록 하는 그 구속의 은총을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라. 하나님께서는 밖에 있는 물을 막으셨을 뿐 아니라 그와 동시에 자기와 함께 안에 있던 노아의 출입도 막으셨다. 방주가 안전한 만큼 노아도 안전했다. 그것은 그가 방주 안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그분이 가라앉지 않으면 우리도 가라앉지 않는다.

성도의 예정

성경에 의하면, 하나님의 자녀는 창세 전부터 하나님의 마음에 미리 아신 바 되었다. 내가 믿는 것은 하나님께서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의 삶 속에서 그분의 위대하고 영원하신 목적을 이루시고야 만다는 것이다. 내가 이 도시에서 저 도시로 비행기를 타고 가는 동안 비행기 위에서의 나의 행동은 다소간에 내가 직접 선택한 것이다. 그러나 비행기는 예정된 목적지를 향해 날아가고 있다. 인간적으로 말하면 그 비행기는 어떤 도시에 도착하기로 예정된 것이다. 그런데 비행기들이 언제나 예정된 목적지로 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예정하신 것을 반드시 성취하신다. 나는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을 본받도록’ 예정되었다. 그러므로 어떤 지옥의 권세도 그것을 막을 수 없다.

구원의 현재 시제

영생은 영원히 끝나지 않는 생명을 의미한다.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다. 다시 말하면 끝이 없는 생명이 있다. 영생은 그리스도인이 죽을 때 시작되는 것이 아니다. 영생은 그가 믿을 때 시작된다. 만일 어떤 사람이 10년 동안 그리스도인이었다가 버려지게 된다면, 그가 가진 것은 고작 ‘10년의 생명’에 불과한 것이다. 당신이 무엇을 가졌든지 그것을 일단 잃어버리면 그것은 영원한 것이 아니다. 믿는 자는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고’, 그가 지금 갖고 있는 생명은 ‘영원한’ 것임을 하나님께 감사하라.

주님의 기도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안전을 누리는 또 하나의 이유는 바로 귀하신 우리 주님의 중보 기도 때문이다. 예수님의 완성된 사역은 십자가에서의 그분의 구속이었다. 그분이 고통 속에서 피를 쏟으며 돌아가실 때에 그분의 상처난 입술에서는 “다 이루었다”는 말이 터져 나왔다(요19:30). 바로 그 점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하라. 그것이 바로 우리가 이미 말했던 온전한 제사이다. 그러나 주님의 완성된 사역이 있을 뿐만 아니라 아직 완성되지 않은 사역도 있다. 그리스도는 살아계셔서 항상 간구하신다(히7:25). 그분이 어떻게 중보하시고 자기 자신의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셨는가 하는 것은 요한복음 17장에 나오는 위대한 대제사장적인 기도에 잘 나타나 있다. 분명한 것은 그분이 자기 자신의 사람들 곧 성도들, 거듭난 그분의 백성들을 위해 기도하고 계시다는 사실이다. 예수님께서는 응답되지 않는 기도는 결코 드리시지 않는다. 이 말은 곧 그가 위하여 기도한 그들이 안전하게 보전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제 여기에 우리에게 흥미로운 부분이 있다. 예수님께서는 당시의 제자들을 위해서만 기도하신 것이 아니다. 예수님께서는 믿음으로 시간의 터널을 꿰뚫어 보시고 당신과 나를 위해서도 기도하셨다.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저희 말을 인하여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요17:20). 우리는 비록 약하지만 우리에게는 우리 같은 사람들을 위해 중보해 주시는 주님이 계신다. 이 얼마나 놀라운 보장인가?

하나님의 주권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받는다. 이 얼마나 위로가 되는 말씀인가? 자신에게 그럴 만한 힘이 있는데도 사랑하는 자녀를 죽음이나 재난으로부터 보호하지 않은 부모가 이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부모로서 우리는 단지 우리에게 그만한 힘이 없다는 이유 때문에 종종 마음에 있는 소원을 이루지 못할 때가 있다. 그러나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그런 일이 절대로 있을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자녀들을 보호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계신다.

어떠한 잘못도 우리를 더럽힐 수 없다

내가 약하다는 것을 알지만 하나님께 감사한다. 나의 약함과 죄에도 불구하고 나를 정죄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고소인의 면전에 완벽한 답변을 제시할 수 있다. 그것은 바로 나의 중보자 되신 예수님의 달리시고 찔리신 손이다.

어떠한 원수도 우리를 파멸시킬 수 없다

로마서 8장은 ‘정죄함이 없다’로 시작해서 ‘끊을 수 없다’로 끝이 난다. 나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얼마나 놀라운 구원을 가지고 있는지 깨닫기를 간절히 바란다. 하나님께서는 아예 우리 마음속에 이주해 오셔서 내주하신다. 하나님께서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히13:5)고 약속하셨다는 것을 안다면 그것 또한 큰 위로가 될 것이다. 당신이 정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라면 죽을힘을 다해서 예수님을 붙잡지 않아도 된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붙잡아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당신에게 주신 놀라운 약속을 들어 보라. 괄호 안에 있는 말 대신에 당신의 이름을 넣어 보라.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요10:28-29). 사랑하는 독자여, 이것이 바로 지금과 영원히 당신에게 있어야 할 구원의 보장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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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희년 (Year of Jubilee) 웹섬김이 07-02 2998
15 이스라엘에는 뽕나무가 없습니다. 웹섬김이 07-02 3168
14 동성애에 대한 성경적 이해의 오해와 편견 웹섬김이 06-30 2301
13 성경은 하나, 동성애 보는 시선은 갖가지 웹섬김이 06-30 3842
12 '동성애가 죄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웹섬김이 06-30 2326
11 동성애, 죄인가 아닌가?(2) 웹섬김이 06-30 3249
10 동성애, 죄인가 아닌가?(1) 웹섬김이 06-30 3036
9 한국교회가 앓고 있는 치명적인 병 웹섬김이 06-29 2280
8 헌금, 하나님의 것을 돌려드리는 일 웹섬김이 06-29 2805
7 [5]하나님의 임재의 능력(애드리언 로저스)요… 웹섬김이 06-28 2456
6 [4]하나님의 임재의 능력(애드리언 로저스)요… 웹섬김이 06-28 2923
5 [3]하나님의 임재의 능력(애드리언 로저스)요… 웹섬김이 06-28 2890
4 [2]하나님의 임재의 능력(애드리언 로저스)요… 웹섬김이 06-28 2784
3 [1]하나님의 임재의 능력(애드리언 로저스)요… 웹섬김이 06-28 3143
2 하나님의 임재에 들어가는 방법 웹섬김이 06-28 3144
1 하나님의 임재 안에 거하기를 힘쓰라 웹섬김이 06-28 25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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