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장
당신의 문을 단속하라
당신의 마음은 소중한 트로피와 같아서 그것을 쟁탈하기 위해
격렬한 싸움이 계속해서 벌어지고 있다. 바울은 인간의 마음을 전쟁의 전략적 요충지가 되는 성채나 요새에 비유했다.
“우리가 육체에 있어 행하나 육체대로 싸우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싸우는 병기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이라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고후10:3-5).
인간의 마음은 영적인 문제에 있어서 전쟁터와 같다. 강력한
군대가 당신의 마음의 요새를 빼앗기 위해 당신의 성전을 끊임없이 공격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원하시기 때문에 또한 당신의 마음도
원하신다. 그것은 당신이 하나님의 전이기 때문이다. 당신은 값으로 산 바 되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생각을 주장하지 못하신다면 당신의 전(殿)도
주장하지 못하신다는 것은 자명하다. 그래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신 명령이 바로 이것이다. “네 마음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마22:37).
사탄의 욕망
“뱀이 그 간계로 이와를 미혹케 한 것같이 너희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할까 두려워하노라”(고후11:3). 사탄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의 사고 생활뿐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들의 사고 생활까지도 붙잡고 제어하고 부패시키기를 원하다. 게다가 사탄은 인간을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는 통제소인 마음을 제일 먼저
빼앗는다면 신실한 그리스도인의 간증을 부끄럽게 하고 마음의 고통과 파멸을 가져올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사탄의 도구
“우리가 그 궤계를 알지 못하는 바가 아니로다”(고후2:11).
바울은 사탄에게서 어둠의 베일을 벗겨 버리고 그 수단들을 밝혀 냈다. 그 수단들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사탄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의 마음을 어둡게 한다. 사탄이 하는 일은 다음과 같다.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고후4:4). 영적으로
어두워진 마음은 영적인 진리를 볼 수도 없고 깨닫지도 못한다. 이런 상태에 있는 사람은 그리스도를 향하여 그 눈이 열려야 한다. 그런 까닭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3:3).
둘째, 사탄은 구원받은
사람들의 마음을 부패시킨다. 구원을 받았다고 해서 당신의 마음의 요새에 대한 사탄의 공격이
자동적으로 면제된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그리스도인에게도 부패한 마음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이 세상에는 걱정과 두려움으로 가득 찬 성도들이
도처에 있다. 마음속의 차가운 의심으로 인해 소망의 별을 볼 수 없게 되었다. 순결하지 못한 불순한 그림들이 마음의 벽과 복도에 걸려 있다.
마치 모래가 기계를 부식시켜 못쓰게 만들 듯이 근심과 걱정으로 건강이 쇠약해져 간다. 속임수와 거짓 교리들로 인해 성도들의 믿음과 증거가
무력화된다. 이것이 바로 부패한 마음이 초래하는 비극인 것이다.
안전 장치가 없는
문
사탄은 안전 장치가 없는 문을 통해 들어온다. 중국의 만리
장성도 적을 막아내지 못했다. 문지기를 매수하기만 하면 적군이 얼마든지 들어올 수 있었다. 나는 사탄이 드나드는 안전 장치가 없는 문 세
가지를 말하고 싶다.
첫째는 뒤틀어진
마음이다. 우리의 삶 속에서 고백하지 않은 죄와 마음속에 숨겨진 죄는
사탄이 드나드는 통로가 된다. 사탄의 출입구는 고백하지 않은 죄이며, 이 경우에 있어서 그것은 분노이다. 이것이 결국에는 더러운 둥지가 되어서
여기에서 사탄은 흉악한 생각을 품으며, 이 요새에서 의심의 불화살을 쏘아댄다. 고백하지 않은 죄는 사탄의 법적인 터전이 되며 사탄이 그
곳에서 꼼짝도 하지
않게 한다. 고백하지 않은 죄를 마음속에 감추어 둠으로써 그리스도인은 사탄에게 자기 집에 들어와 누울 수 있는 장소를 마련해 주는 셈이
된다.
둘째는 소극적인
마음이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사탄에게 열어 놓고 있는 또 하나의 문은
적극적으로 통제하거나 지키지 않고 방치하는 마음이다. 우리의 마음은 적극적으로 지켜져야 하며 결코 그대로 내버려두거나 소극적으로 홀대해서는
안된다. 솔로몬이 이 점에 대해 지혜롭게 경고했다.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4:23). 나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소극적인 태도로 말미암아 그들의 마음 문을 사탄에게 기꺼이 열어 놓는 것에 대해 우려를 금치
못한다. 이것이 바로 뉴에이지 운동의 기법이다. 뉴에이지 운동가들은 이렇게 말한다. “만일 당신이 당신 안이나 밖에 있는 영적인 힘과
접촉하기를 원한다면 먼저 이러한 힘에 당신의 마음을 굴복시키고 그들을 영접하라.” 물론 그들의 말대로 그렇게 하면 영적인 힘과 접촉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어둠의 세력과의 접촉이 될 것이다. 그리스도인 형제여, 당신의 의식적인 마음을 주님이 아닌 다른 사람이나 다른 것에게
넘겨주지 말라. 열심을 다해 그것을 지키라. 강신술, 최면술, 요가, 채널링 및 다른 뉴에이지 형태의 거짓 영성들은 단지 잠그지 않은 문이요,
열려진 창문에 불과하다. 그것들에게 당신의 마음을 열어 놓는 어리석음을 범치 말라. 오락도 때로는 소극적인 태도를 유발시킬 수 있다. ‘즐겁게
하다(amuse)’ 라는 말이 실제로 어떤 뜻을 가지고 있는지를 알아보면 재미있다. ‘Muse’라는 말은 생각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부정 접두어
‘a’를 붙이면 생각하지 않는다는 뜻이 된다. 우리가 재미있게 즐기고 있을 때 사실 우리는 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때 우리 마음은 어느
편에 속한 것도 아니고 다만 방치되고 있을 뿐이다. 오늘날 인기 있는 텔레비전 프로그램들의 대부분은 상황극들로, 죄를 과장해서 재미있게 묘사하고
있다. 이것이 아무런 해가 없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마귀는 일단 당신이 죄를 우습게 여기면 더 이상 당신이 죄를 심각하게 여기는 것이 어렵게
된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명상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의 명상은 그리스도에게 집중되어야 한다. 우리는
마음의 태세를 단단히 갖추어야 한다.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에 평강으로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의뢰함이니이다”(사26:3).
셋째는 오염된
마음이다. 마약이나 약물을 복용하는 것이 안전 장치가 없는 세 번째
문이다. 사탄은 그 문을 통해서 살그머니 들어와 우리의 사고 생활을 부패시킨다. 성경은 마술에 대해서 분명히 경고하고 있다. 그 말 자체는
헬라어인 ‘파르마케이아(pharmakeia)’를 번역한 것으로 이 말에서 ‘약학(pharmacy)’라는 말이 나왔다. 그 말은 약물로 마술을
거는 사람이란 뜻이다. 약물 남용은 일종의 일시적인 정신 이상 증세로 마귀가 우리의 마음을 통제하도록 문을 열어 놓는 행위이다.
사탄의 패배
만일 당신이 당신의 마음을 잘못 사용했을지라도 소망을 줄 수
있는 좋은 소식이 내게 있다. 그것은 바로 고린도후서 10:3-5에 나온다. 나는 이미 사탄의 공격을 당해 본 성도들에게 그 마음을 지켜 주고
보호해 주는 세 가지 강력한 무기를 말해 주고 싶다.
첫째, 뒤틀린 마음에는 회개가
있어야 한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만 회개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지 말라.
교회를 향한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은 마태복음 28장 끝에 나오는 지상 명령이 아니라, “회개하라”는 것이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요한계시록
2-3장에서 말씀하신 것을 보면,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 중에서 다섯 교회가 회개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회개라는 말의 헬라어는
‘메타노이아(metanoia)’라는 말이다. 이 말의 문자적인 의미는 ‘마음의 변화’라는 뜻이다. 뒤틀린 마음을 처리하는 데는 그것을 바꾸는 것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다. 회개는 언제나 자백으로 이끌고, 자백은 청결로 이끌며, 청결은 사탄이 차지한 자리를 없애 버리게 된다(엡4:27).
둘째, 소극적인 마음에는
대항이 있어야 한다.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순복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약4:7). 왜 대항해야 할까? 그것은 사탄이 어떤 것이든지 어떤 사람이든지 싸움이 없이는 포기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면 어떻게 대항할 수 있을까? 먼저 옳은 것을 행하라. 그리고
죄에 대해서는 안된다고 말하라. 모든 죄를 고백했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라. 그리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당신이 빼앗겼던 모든 요새를 다시 탈환했음을
확신하라. 그리고 나서 하나님께 사탄을 꾸짖어 주시도록 기도하라(유1:9). 사탄에게는 이제 아무런 법적 권리가 없음을 명심하라. 틀림없이
사탄은 도망칠 것이다.
셋째, 오염된 마음에는 갱신이
있어야 한다. 손상되고 왜곡된 마음은 변화될 수 있다. 새로운 사고 방식이
세워질 수 있고 또 마땅히 세워져야 한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12:2). 당신이 회개하고 대적한 후에 하나님께서 당신의 마음을 새롭게 하실 것이다. 또한 이 일은
당신이 마음의 초점을 바꿀 때 일어날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대로 된다는 사실을 명심하라.
매일 아침 일어나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당신의 영혼을 씻으라.
그리고 가장 먼저 기도로 주님과 대화하라. 그리고 나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당신의 마음을 흠뻑 적시라.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마음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골3:16). 당신의 날을
하나님께 위탁하라. 그러면 이내 하나님께서 당신의 마음을 새롭게 하신다는 증거가 드러날 것이다.
10 장
강도의 굴혈이 아닌 기도의 집
우리는 성령의 전으로서 기도의 집이 되어야만 한다. 예수님의
마음에 기도의 중요성이 가장 크게 대두되었던 때는 예루살렘에서 성전을 깨끗하게 하실 때였다. 그때 주님께서는 어느 누구도 성전을 더럽히지
못하도록 철저히 경계하셨다. 그리고 이런 메시지를 주셨다. “이에 가르쳐 이르시되 기록된바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도다”(막11:17). 만일 우리가 우리의 전을 깨끗하게 잘 유지하고 싶으면, 승리하는 기도의
비결과 훈련을 결사적으로 배워야 한다. 기도는 너무나 놀라운 것이다. 왜냐하면 기적적인 방법으로 전능하신 하나님과 우리를 맺어주기 때문이다.
기도하지 못하는 것은 비극이다. 아니 비극 그 이상이다. 그것은
죄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무엘상 12:33에서 이렇게 선포한다. “나는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여호와 앞에 결단코 범치 아니하고
선하고 의로운 도로 너희를 가르칠 것인즉.”
우리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기도할 때가 많다. 이제 우리가 주님의
놀라운 기도의 모본을 살펴볼 때에 우리의 위대한 선생이신 주 예수께서 우리에게 그 방법을 가르쳐 주시기를 원한다.
기도는
인격이다
“우리
아버지” 주기도문이 어떻게 시작하는지
주목해 보라. 생명력 있는 기도는 공허한 말의 반복이 아니라 어린아이가 자기 아버지에게 이야기 하는 것과 같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런 사실로
인하여 우리는 여러 가지 다른 진리를 동시에 깨닫게 된다.
첫째, 효과 있는 기도를 드리기 위해서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야 한다. 모든 사람이 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오직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난
사람들에게만 그런 권리가 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는 사실을 성경에 분명히 밝히셨다. 예수님께서는 회개하지 않은
바리새인들에게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다”(요8:44)고 말씀하셨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오직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우리의 주님과 구주로 영접하여 하나님의 가족으로 다시 태어날 때에만 가능하다.
기도에는 목적이
있다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이다” 이 구절은 우리에게 곧바로
기도에는 한 가지 주요한 목적이 있음을 가르쳐 준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뜻을 찾아 지키는 일이다. 기도는 하나님의 뜻대로 드려질 때에만
응답을 받는다.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 바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요일5:14). 기도로 하나님의 뜻을
아는 비결은 성경을 알아서 그 진리로 우리 안에 거하게 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성령의 인도하심에 민감해지는 것이다. 당신은 하나님의 전이요,
기도의 집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성령이 당신 안에 거하셔서 당신이 기도하는 것을 도와주실 것이다(롬8:26-27). 성경은 이것을 “성령으로
기도하는 것” 이라고 부른다.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을 가르쳐 주시며 우리가 마땅히
기도해야 할 것을 기도하도록 도와주신다. 성령께서는 우리의 보혜사로서 우리의 마음을 통해 생각하시고, 우리의 가슴을 통해 느끼시며, 우리의
입술을 통해 말씀하시고, 우리의 눈을 통해 우시며, 우리의 영을 통해 자신을 표현하고 싶어하신다.
기도는
양식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 분명히 우리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구할 수 있다. 비록 이기적인 기도를 드릴 수는 없지만 분명히 개인적인 필요를 위해서 기도할 수는 있다. 우리의 아버지는
우리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에 관심을 갖고 계신다. 나는 예수님께서 단지 우리의 양식만을 구하라고 말씀하시지는 않았다고 생각한다. 예수님의 본래
의도는 하나님 아버지께 나와서 우리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들을 구체적으로 그분께 구하라는 것이다.
기도는
용서이다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능력 있는 기도는 깨끗한
마음에서 나와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일용할 양식을 위해 기도하는 것처럼 매일의 용서를 위해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셨다. 우리의 기도 중
많은 기도가 응답되지 않는 이유는 우리의 기도에 간구만 있을 뿐 고백과 회개가 없기 때문이다. 더러운 마음에서 나오는 기도는 응답되지 않는다.
기도는
보호이다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이 구절은 이렇게 해석할 수도
있다. “우리를 악한 자에게서 구하옵소서.” 사탄은 너무나도 실제적이다. 그는 이미 당신의 생애를 파괴하고 당신의 사랑하는 자들을 파멸시킬
만반의 준비를 갖추어 놓았다. 그는 오늘 당신의 발을 빠뜨릴 구덩이를 이미 파 놓았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신다. 그러므로 사탄은 지옥의
모든 무기를 다 동원하여 당신을 겨냥하고 있다. 그래서 당신에게는 보호가 필요하다. 당신의 보호는 기도를 통해 공급된다. 악과 유혹에서 구원해
달라고 하는 기도는 예방약의 구실을 하지만 우리는 너무나도 쉽게 그것을 망각한다.
기도는
찬양이다
“영광이 아버지께
있사옵나이다”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가 찬양의 어조로 시작하고 끝나는 것을 주목하라. 그 얼마나 적절한 것인가? 기도는 믿음으로 해야 하며, 내가 알고 있는 바로는 믿음의
최상의 표현은 바로 찬양이다.
찬양은 바로 우리 내면의 믿음이 밖으로 표현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무언가를 요구하는 것은 간구이다. 그러나 찬양이 없는 간구는 불신앙이다. 또 간구가 없는 찬양도 외람된 것이다. 우리가 간구와
찬양을 함께 묶을 때 그것이 바로 능력이다. 내가 하나님께 간구하고 또 찬양할 때 비로소 내가 하나님을 믿고 있는 것이다. 간구는 “제발”이라고
말하고, 찬양은 “감사합니다”라고 말한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의 찬양 속에 거하신다고 말씀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할 때 하나님은
너무나 가까이 계신다. 당신의 전을 기도의 집과 찬양의 집으로 만들 때 당신은 승리를 얻을 것이다.
11 장
믿음의 황금 열쇠
이 장에서 나는 당신과 함께 소위 ‘믿음의 황금 열쇠’라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보고 싶다. 그 열쇠는 마음의 문을 예수님께로 열어 줄 뿐만 아니라 믿는 자에게 천국 창고의 문을 열어 준다. 믿음은 우리 집의
열쇠인 동시에 하나님의 창고 열쇠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모든 복이 믿음을 통해서 우리에게 온다. 예수님께서는 “너희 믿음대로
되라”(마9:29)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복의 척도는 우리의 감정이나 친구들이나 명성이나 재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믿음에 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성취의 척도는 언제나 믿음이다.
믿음이란
무엇인가?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증거를 얻었느니라”(히11:1-2). 아마 이 말씀은 성경에 나오는 믿음에 대한 묘사 가운데 가장 유명한 구절일 것이다. 믿음이란
적극적인 사고도 아니며, 육감을 따르는 것이나 낙관적인 감정도 아니다. 또한 최선의 것을 희망하는 것도 아니다. 이 모든 것들도 다 나름대로
중요한 가치가 있지만 그것들이 성경적인 믿음은 아니다 그렇다면 믿음이란 과연 무엇인가?
믿음은
실상이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실상(substance)’이란 말은 ‘견고한 터전’을 의미한다. 영어의 ‘substance’라는 말은 우리가 디디고 설 수 있는 발 밑에 있는
어떤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믿음으로 살아갈 때 우리는 계란 껍질이나 젤리 위를 걷고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단단한 바위 위에 서 있는 것이다.
믿음은
증거이다. “믿음은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다.” 이 말은, 믿음이란
하나님께서는 약속하신 것을 반드시 지키신다는 것에 대한 설득력 있는 증거라는 뜻이다. 증거란 보이지 않는 실재에 대한 입증이다. 믿는다는 것은
적극적인 사고가 아니다. 만일 믿음에 아무런 대상이 없다면 “믿음만을 가지라”는 말은 어리석은 충고가 될 것이다. 믿음은 없는 것을 있게 하는
것이 아니다. 믿음이란 하나님의 마음과 뜻 속에 이미 있는 것들에 대한 증거이다.
믿음의 역동성
믿음이란 이 세상에서 가장 역동적인 힘이다. 그 이유는 믿음으로
인해 전능자의 손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히브리서 11:6은 우리에게 믿음의 강력한 힘에 대한 통찰력을 준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이 구절에는 우리가 고찰해 보아야 할 세 가지 주요한
사상이 있다.
믿음의 결여는 하나님을
불쾌하게 한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나니” 믿음이 없는
것, 즉 불신앙은 하나님을 불쾌하게 한다. 불신앙은 악하고 사악한 죄이다. 실제로 이보다 더 큰 죄는 없다. 그것은 죄의 근원이다. 불신앙은
다른 모든 죄가 싹트는 죄의 모체이며, 우리로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유일한 죄이다. 불신앙의 죄는 하나님의 인격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너무나 무서운 죄이다. 당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는다면 하나님에 관해서 아무리 좋은 말을 많이 해도 아무 소용이 없다. 우리가
하나님 믿기를 거부하면서 하나님의 위대하심이나 하나님의 사랑을 아무리 말한들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나니”(요일5:10). 이 얼마나 옳은 말씀인가!
믿음으로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을 믿어야
할지니라.” 불신앙이 하나님을 불쾌하게 한다면 믿음은 틀림없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 우리는 삶 속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보다 더 큰
목적을 가져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 다른 누구를 불쾌하게
한다 해도 그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역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불쾌하게 하면 우리가 다른 누구를 기쁘게 한다 해도 그것은 전혀
의미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고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 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믿음을 기뻐하실까? 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자동적으로 하나님을 믿도록 창조하지 않으셨을까? 왜 우리에게 자신을 증거하는 일을 하지 않으실까? 거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만일 하나님께서 원하시기만 하면 자신을 증거 하시는 데에 전혀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하늘을 둘둘 말아서 자신의 위엄과
능력과 영광을 드러냄과 동시에 자신을 알리실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이 땅 위에 단 한 명의 불신자도 남아있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렇게 자신을 드러내시면 우리의 믿음이 불필요해질 것이다.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자신을 그런 식으로 드러내실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함이 아니라 사람들을 심판하시기 위함일 것이다. 그때가 되면 모든 무릎이 꿇을 것이며, 모든 혀가 자백할 것이다. 그러나 무섭고
두려운 날이 될 것이다.
믿음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상을 주신다
끝으로, 히브리서 11:6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한다”고 말씀한다. 우리의 하나님은 그분을 믿는 사람들을 위하여 자신의 능하심을
보여 주고 싶어하신다. 믿음은 우리의 필요가 무엇이든지 간에 그것들을 충족시키는 열쇠이다.
믿음으로 얻을 수 있는 것
첫째는, 구원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롬5:1).
둘째는, 성령 충만함이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박게 하려 함이니라”(갈3:14).
셋째는, 세상을 이기는 것이다.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요일5:4).
넷째는, 사탄을 이기는 것이다.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화전을 소멸하고”(엡6“16).
다섯째는, 기도 응답이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막11:24). 천국의 어떤 장면을 상상해 본 이야기가
있다. 천사들이 하나님의 보좌로 나아가 이렇게 아뢰었다. “아버지여, 땅 위에 복을 구하는 어떤 사람이 있나이다. 아버지의 기쁘신 뜻은
어떠하니이까?” 아버지께서 이렇게 물으셨다. “그가 그의 믿음을
어디에 담아 올려 보냈느냐?” 천사들이 대답했다. “그가 손가락에 끼는 골무에 담아 올려 보냈습니다.” 아버지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좋다.
그렇다면 그 골무에 복을 가득 채워 그에게 돌려보내라. 믿음대로 될 것이다.”
다시 천사들이 와서 아뢰었다. “아버지여, 다른 사람이 아버지께
또 복을 구하고 있나이다.” 다시 아버지께서 물으셨다. “그 사람은 어디에 그의 믿음을 담아 올려 보냈느냐?” 천사들이 대답했다. “그가 커다란
통에 담아서 올려 보냈습니다.” 그러자 아버지께서 미소를 띠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 통에 복을 가득 담아 그에게 돌려보내라. 역시 믿음대로
될 것이다.”
믿음으로 우리는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고, 믿음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보물을 주신다.
믿음의 성장
그렇다면 이러한 믿음을 우리가 어떻게 성장시킬 수 있을까?
히브리서 기자는 다른 사람들이 믿음으로 이룩한 일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12:1-2).
이 말씀은 우리가 원형 경기장에서 영적인 운동 선수로서 믿음의
경주를 하고 있는 동안 믿음의 영웅들이 지금 하늘의 특별 관람석에서 지켜보고 있다는 말씀이다. 위의 구절 속에는 역동적인 믿음을 성장시킬 수
있는 방법에 대해 말해 주는 몇 가지 규칙이 들어 있다.
첫째, 당신의 감성과 지성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흠뻑 적시라.
1절에 나오는 “이러므로”라는 말을 주목하라. 이 말은 이미
앞에서 말한 것을 지칭한다. 이 경우에는
히브리서 11장 전체를 지칭하고 있는데, 이 히브리서 11장은 전체가 믿음이라는 주제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구약의 거의
대부분을 총망라하고 있다. 그 요점은 성경이 곧 당신의 믿음을 성장시켜 주는 책이라는 것이다.
둘째, 모든 죄를
회개하라. 1절은 계속해서 이렇게 말씀한다.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라.” 운동 선수가 무거운 짐이나 넘어지기 쉬운 것을 들고 달리려고 한다면 어리석은 일일 것이다. ‘얽매이기 쉬운’ 이라는
말은 어떤 대상을 교묘하게 둘러싸는 것을 의미한다. 죄가 바로 우리를 교묘하게 둘러싸서 우리로 하여금 믿음의 경주에서 넘어지게 만든다. 불신앙은
악한 마음에서 온다는 사실을 명심하라. 만일 당신이 하나님을 믿기가 어렵다면, 그것은 아마 고백하지 않은 죄가 당신을 걸려 넘어지게 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맛보고 나서야 비로소 하나님의 평강을 알 수가 있다. 하나님께서는 회개와 믿음을 같은 순서로 말씀하신다. 따라서
당신이 믿음을 갖기가 어렵다면 먼저 회개를 해야 한다. 회개가 언제나 먼저 온다. 믿음과 죄는 상호 배타적이기 때문이다.
셋째, 이미 가지고 있는
믿음을 사용하라.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라”고 말씀하신다. 나는
경주한다는 말을 좋아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믿음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기 때문이다. 믿음은 정적인 것이 아니라 동적인 것이다. 그것은 단순한
신앙 이상의 것이다. 믿음이란 다리가 달린 신앙이다. 예수님께서 믿음이 겨자씨와 같다고 말씀하셨는데 겨자씨에 있어서 참으로 놀라운 것은 그것이
비록 작지만 그 속에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이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소중히 보관하도록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심기도록 되어 있다. 그래야
더욱더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사과 속에 들어 있는 씨의 숫자는 하나님 외에는 알 사람이 없다는 말은 참으로 지당하다. 지금
당신에게 있는 믿음을 가지고 행동에 옮겨 보라. 당신이 활용하는 만큼 성장할 것이다. 곧 심는 대로 거둘 것이다.
넷째, 예수님을 바라
보라.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라고
히브리서 12:2은 말씀한다. 우리가 예수님을 바라볼 때 거기에 뒤따르는 결과가 바로 믿음이다. ‘바라본다’는 말의 헬라어 원문을
‘아포라오(aphorao)’이다. 이 말의 본래 뜻은 “일정한 목표를 보기 위해 다른 것에서 시선을 돌린다”는 뜻이다. 자기 자신과 사탄과
그리고 환경으로부터 시선을 돌려 예수님만을 바라 보라.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의지할 만한 분이시다. 그분만이 우리의 믿음의 주요, 우리의 믿음을
온전케 하신다. 지금 당장 그분의 영광과 아름다움을 당신의 마음에 가득 채우라. 그리고 필요할 때마다 그분을 바라 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