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2-06-28 20:52
[2]하나님의 임재의 능력(애드리언 로저스)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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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웹섬김이
조회 : 2,7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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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광이 집을 가득 채울 때

우리가 진정한 의미에서의 그리스도인이라면 성령 충만한 삶을 경험하고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이기 때문이다. 성령 충만함은 피로 값주고 사신 하나님의 모든 자녀를 위해 예비된 것이다

성령 충만한 삶의 이유

나는 그리스도인이 성령 충만한 삶을 살아야 하는 데는 적어도 세 가지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순종

그리스도인이 성령 충만해야 하는 첫 번째 이유는 그 자체가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오직 성령 충만을 받으라”(엡5:8)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제안이나 요구가 아니라 명령이다. 하나님께 대한 그의 불순종은 연약함이 아니라 사악함인 것이다.

의무

바울이 성령 충만을 받으라고 말한 두 번째 이유는 그것이 우리의 의무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수행해야 할 책임은 엄청나게 많다.

예배의 삶에 대한 의무들을 보라.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엡5:19). 우리의 예배 생활을 기쁨과 그리스도의 실재로 이어져야 한다.

결혼 생활의 의무를 보라.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하라”(엡5:22). 오늘날과 같은 철저한 남녀 동권 주의 시대에는 복종적인 아내의 역할이 배나 어려워졌다. 그러나 문제의 본질은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성령의 능력이 아니고서는 복종이 이루어진 적이 없다는 것이다. 복종이 열등한 것을 의미한다고 하는 것은 사탄의 거짓말이다. 여성이 하나님의 영에 의해 진정으로 자유로워질 때 원하는 바를 자유롭게 할 수도 있고 또 해야만 할 일을 마음껏 할 수도 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아내가 남편에게 순종할 때에 자유를 찾게 된다고 말씀하신다. 아내에게 요구되는 것보다 남편에게 요구되는 것이 훨씬 더 많다는 것을 주목하라. 아내의 모형은 교회요, 남편의 모형은 그리스도 자신이다. 어떻게 썩을 육신을 가진 인간이 예수님께서 행하신 대로 행할 수가 있겠는가? 성령 충만한 삶이 아니고서는 다른 방법이 없다.

직장 생활의 의무를 살펴보자. “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하여 눈가림만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여”(엡6:5-6).

이제 우리의 전쟁 생활의 의무를 살펴보자.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6:12).

그리스도인은 전쟁 상태에 있다. 우리의 싸움은 최후까지 사악한 원수와 싸우는 싸움이며 아무런 제약이 없는 무한정한 싸움이다.

기회

성령 충만해야 할 세 번째 이유는 그것이 곧 우리의 기회이기 때문이다.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엡5:16-17). 우리는 성령 충만해야 한다. 그 이유는 “멸망하는 자들을 구원하기 위함이고, 죽어 가는 자들을 보살피기 위함이며, 그들에게 능력의 구원자 예수님을 전하기 위함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기회는 성령 충만해야 하는 충분한 이유가 된다.

성령 충만한 삶의 필요 조건

성령께서는 분명히 힘과 능력을 갖고 계신다. 그러나 그분은 하나의 인격이시다. 따라서 성령으로 충만해진다는 개념은 그릇에 어떤 물질이 가득 채워진다든가, 어떤 기계에 힘이 과도하게 가해진다는 개념이 아니다. 그것은 한 인간의 영혼을 하나님의 인격이 완전히 차지하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의 존재는 하나님과 섞일 수 없다. 우리는 여전히 인간이고, 하나님은 영원히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에 의해서 힘을 공급받고 하나님에 의해 쓰임 받는다. 이런 개념을 염두에 두고 이제 성령 충만한 삶을 위한 세 가지 필요조건을 살펴보자.

첫째, 성령님께 대한 완전한 헌신이 있어야만 한다. 성령께서는 당신의 사업 생활과 사회 생활, 사고의 영역 등 모든 분야에 대한 열쇠를 갖고 계셔야만 한다. 성령께서는 그리스도께서 피로 값 주고 사신 성전의 모든 영역을 마땅히 소유하셔야 하고 또 접근하기를 원하신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고전6:19).

둘째, 성령에 의한 지속적인 다스림이다. 에베소서 5:18은 이렇게 번역할 수도 있다. “성령으로 계속해서 충만함을 입으라” 이 성령 충만한 삶의 문제는 일회적인 일이 아니다. 분명히 우리가 성령님께 우리의 모든 것을 굴복시킬 때 중대한 하나의 고비가 되는 경험이 있다. 그러나 그 고비가 되는 사건 뒤에는 진보가 뒤따른다. 성령님의 다스림은 우리가 성령님께 굴복할 때 날마다 인식하지 않으면 안된다.

끊임없는 성령의 다스리심을 받기 위해서는, 성령 충만함 속에서 사랑하는 성령님을 끊임없이 자기 것으로 삼으려는 노력이 있어야만 한다. 또한 그분은 술과 같은 물질이 아니라 하나의 인격이심을 명심해야 한다.

그러나 술 취한 사람이 술에 완전히 굴복하여 술에 전적으로 좌우되듯이, 우리가 성령님께 완전히 굴복할 때 비로소 성령님께서 우리의 전인격을 좌우하시게 된다.

셋째, 의식적으로 성령님을 요구하는 것이다. 성령께서 당신에게 거하시기 위해 오실 때 그분은 신적인 인격으로서 오신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바울은 성령에 의해서 성령으로 충만해져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우리는 성령이 우리 밖에서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을 우리에게 넣어 주시기 위해 기다리고 계신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성령께서 우리의 삶에 임재하시면 우리는 우리가 필요로 하는 모든 사랑과 인내와 그 밖의 모든 것을 갖게 된다. 즉 우리는 성령 안에서 완전하게 되는 것이다.

성령 충만한 삶의 결과

예배의 태도 : 하나님과 관련해서는 찬양의 영이 있게 될 것이다. 영으로 주님께 예배하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거룩한 의무이자 복된 특권이다. 우리의 찬양의 수단으로 바울은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을 말하고 있다. 구약의 ‘시’는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초대 교회의 노래집이었다. ‘찬미’와 찬송은 하나님께 직접적으로 찬양을 드리는 것이다. ‘신령한 노래들’은 마음속에서 흘러 넘치는 즐겁고 자발적인 음악을 의미하는 것이다. 즉 회중의 예배든 개인의 예배든 간에 성령 충만한 예배는 마음속에서 기쁨으로 우러나와야 한다는 것이며 주님께 드려져야 한다는 것이다.

감사의 태도 : 주변 환경과 관련하여 성령 충만한 삶의 결과는 감사의 마음일 것이다.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엡5:20). 육신적인 그리스도인은 종종 투덜거리며 미워하길 잘한다. 그러나 성령 충만한 그리스도인은 겸손하게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다. 감사하라는 이 명령에 대해서 만일 주님이 ‘항상’ 그리고 ‘범사에’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더라면 그것은 그렇게 어려운 것은 아닐 것이다. 개인적인 상처나 질병이나 재정적인 파탄이나 마음이 끊어질 것 같은 실망이 찾아올 때 감사한다는 것은 부자연스러운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감사한다고 해서 우리가 감사드리는 모든 내용들을 반드시 수용한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런 우리의 태도는 하나님이 더욱 위대하시다는 우리의 확신을 선포하는 것이다.

화해의 태도 :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성령 충만한 삶의 결과는 화해의 정신이다.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엡5:21). 세상의 관계 속에서 복종이란, 한 대등한 사람이 예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하여 다른 대등한 사람에게 자기 자신을 기꺼이 사랑으로 낮추는 것을 말한다.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복종하는 것은 그 사람 자신 때문이 아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 때문이다. 그러므로 복종이란 아내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것이다. 성령 충만한 삶은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있는 우리 모두를 위한 것이다. 성령님으로 당신에게 충만하도록 설득하는 것이 당신의 일이 아니라, 성령님께 당신의 집에 있는 모든 방의 열쇠를 내어 드림으로 성령님 자신이 충만하시도록 허락하는 것이 당신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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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자연적인가, 피상적인가?

고린도전서 2장과 3장에서 사도 바울은 사람을 자연적인 사람과 육신적인 사람과 영적인 사람으로 나누어 놓았다. 우리의 의도상 그들을 세 부류의 집 또는 거처로 생각해 볼 수 있겠다. 바울이 세 가지로 분류해 놓은 것 중에 우리 자신은 어느 부류에 속하는지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통찰력으로 무장이 되어야 우리 마음속에 그리스도를 위한 집을 지을 때 알맞은 영적 기초를 놓을 수 있기 때문이다.

자연적으로 일어나는 일을 행함

고린도전서 2장과 3장에서 우리는 첫째로 자연적인 사람을 만나 볼 수 있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고전2:14). 그는 자연 세계 속에 태어났다. 그는 육체적으로 건강하게 태어나 자연 출생을 통해 많은 훌륭한 성향들을 타고났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자연적인 사람은 중생의 경험이 없기 때문에 영적인 세계에 대해서는 죽은 사람이다.

그러면 우리가 자연적인 사람이 영적으로 죽었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그것은 앞서 살펴보았듯이 성경이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었다”(고전15:22)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어떻게 우리에게 적용되는가? 모든 사람은 태어난 바로 그 순간부터 아담의 본성을 물려받았다. 우리는 영혼 속에 하나님 없이 태어났다. 그리고 우리의 조상인 아담과 같이 죽었고 부패했고 어두워졌다. 자연적인 사람은 영적인 세계를 보지 못한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고전2:14). 여기에 ‘받는다’는 말은 집에 손님을 맞이하듯이 맞아들인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자연적인 사람은 그리스도나 하나님의 일들에 대해서 환영하는 것이 없다. 그의 영혼은 하나님의 메시지를 진심으로 환영하지는 않는다. 그는 그리스도께 굴복하지도 않는다. 사탄도 이 사실을 알고 있다. 바울은 영적인 일들에 대한 자연적인 사람의 인식 부족을 확대하여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 자연적인 사람은 또한 물질 세계에 묶여 있는 존재들이다. 영적인 세계에 대한 인식이 없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동물이 추구하는 것들과 똑같은 것들을 추구하며 살아간다. 위로부터 태어나는 중생의 기적도 없이 자기 만족과 물질주의적인 생활 수준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초자연적으로 일어나는 일을 행함

바울이 묘사하고 있는 두 번째 범주의 인간은 영적인 사람이다. 영적인 사람, 곧 초자연적인 삶을 살아가는 사람의 특징은 무엇인가?

첫째, 영적인 사람은 성령에 의해 살아가는 사람이다.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2:12). 영적인 사람은 하나님의 영을 받은 사람을 말한다. 그리스도인은 단지 성격이 좋은 사람이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피조물이다. 우리가 또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은 구원이란 하나님의 성령을 통해 그리스도를 우리 마음속에 영접하는 문제라는 것이다. 그것은 단순히 우리의 죄를 사함 받는 것이 아니다. 죄 사함이 필요하기는 하지만 구원이란 우리의 죽은 영혼 속에 주님의 생명과 빛을 다시 받아들임으로써 시작된다.

둘째, 영적인 사람은 성령으로부터 배운다. 그는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시는 것들에 대한 초자연적인 통찰력을 부여받는다.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고전2:13).

셋째, 영적인 사람은 성령을 통해 자유를 얻는다.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고전2:15-16).

영적인 사람이 어떻게 자유를 얻는가? 영적인 사람은 더 이상 이 세상의 제도라는 감옥에 갇혀 있지 않다. 그는 바로 성령을 통해서 보고 모든 것을 판단하고 분별한다.

부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일을 행함

바울이 말한 세 번째 부류의 사람이 남아 있다. 이 사람은 한때 영적이었으나 지금은 육신적, 혹은 육체적이라고 알려져 있다.

육신적인 그리스도인은 불구가 된 사람이다.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고전3:1).

육신적인 사람은 불구일 뿐만 아니라 의존적이다.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치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고전3:2). 바울은 말하기를 육신적인 그리스도인은 어린아이와 같이 젖을 먹어야 한다고 했다. 영적인 사람이 온갖 재료가 곁들여진 맛있는 영적 스테이크를 앉아서 먹고 있는 동안 육신적인 그리스도인은 젖과 유아용 음식물과 사탕무 이상의 것은 결코 먹지 못한다. 그리고 심지어 그것들을 먹여 줄 사람까지도 필요로 한다.

육신적인 그리스도인은 또한 서로 분열한다. “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고전3:3). 고린도 교회는 사람의 됨됨이에 대해서 사소한 말다툼에 휘말리곤 했었다. 그들에게는 ‘좋아하는 설교자’ 증후군이 있었다. 일부는 바울의 진영에 서서 “바울은 정말 위대한 신학자입니다”라고 말했고, 또 일부는 베드로 진영에 서서 “베드로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꾸밈없이 얘기한답니다”라고 말했다. 또 다른 사람들은 아볼로 편에 서서 “그런 웅변을 들어본 적이 있소?”라고 묻곤 했다. 이런 다 큰 아이들에게 바울이 해주는 말이 있다. “그런즉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 만물이 다 너희 것임이라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세계나 생명이나 사망이나 지금 것이나 장래 것이나 다 너희의 것이요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고전3:21-23).

지금까지 우리는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세 가지로 분류해 놓으신 종류의 사람들을 살펴보았다. 이런 진리들은 우리를 좌절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를 더욱 격려하기 위한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위치를 알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인하여 마땅히 나아가야 할 곳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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