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2-06-28 20:47
[1]하나님의 임재의 능력(애드리언 로저스)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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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웹섬김이
조회 : 3,142  

<저자 소개>

애드리언 로저스는 테네시 주 멤피스의 벨레뷰 침례 교회(교인 24,000명)담임 목사이다. 그리고 세계에서 제일 큰 개신교 교단인 남침례 총회의 의장으로 세 번 선출되었다. 그는 전세계를 여행하면서 전도 집회들에서 설교하였고 북미 지역에서 개최된 여러 집회에서 주 연사로 참석하여 50여만 명에 이르는 군중 앞에서 연설했다. 또한 러브 워스 파인딩 미니스트리(Love Worth Finding Ministries)라는 전국적인 배급망을 갖춘 텔레비전, 라디오 사역 단체의 설립자이자 총재이다. 저서로는 Gods Way to Health, Wealth and Wisdom(건강, 부, 지혜에 이르는 하나님의 방법)과 Mastering Your Emotions(당신의 감정을 다스리는 법)가 있다.
1 장 하나님께서 사시는 곳은 어디인가?

그리스도의 내주 하심으로 얻을 수 있는 모든 유익을 이해하고 적용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들 가운데 거하시겠다는 진리를 처음으로 드러내신 곳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겠다. 그 출발점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신 곳이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나타나 말씀하시기를 이스라엘 자손들로 하여금 성소를 짓기 위하여 헌물을 가져오게 하라고 하셨다. 그 성소는 하나님께서 “그들 중에 거하시기 위함”이었다(출25:8). 이 성소는 나중에 성전 안에 영구적인 것으로 마련되어 이 땅 위에서 하나님이 그분의 백성들과 만나 가르치시고, 예배를 받으시고, 죄를 속해 주시는 유일한 장소가 되었다. 성막이나 성전의 건축은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들의 관계에 있어서 새로운 이정표가 세워지는 것을 의미했다. 이 건물은 하나님의 임재를 눈으로 확인하고 날마다 상기시켜 주는 구실을 했다. 그리고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람들의 삶 속에 당연히 하나님께서 거하신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는 일이었다. 성경 신학자이자 교수인 고(故) 메릴 엉거(Merrill Unger)박사는 이렇게 말했다. “성막과 거기에 속한 모든 것들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과 함께 거하신다는 상징이었다.”

하나님을 위한 집

하나님께서는 구약의 성전을 설계하실 때 성막에 있었던 것과 똑같이 세 개의 주요 부분으로 설계하셨다. 우리는 성전의 삼중 구조를 통해 하나님의 본질과 이 시대에 있어서 그의 성전된 우리 자신에 대해서 매우 중요한 것을 배울 수 있다. 만일 우리가 솔로몬의 대성전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면 성전의 첫 번째 부분인 바깥뜰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당시 그것은 모든 사람이 볼 수 있었고 또 방문할 수 있었다. 외적인 예배가 행해졌던 곳이 바로 이 곳 바깥뜰이었다. 다음으로는 그 곳에서 더 들어가서 성소가 있다. 이곳은 제한된 구역으로 단지 제사장들만이 하나님께 예배하고 섬기기 위해 들어갈 수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지성소가 있다. 이곳은 가장 안쪽에 있던 부분으로 대제사장을 제외한 모든 사람의 출입이 엄히 금지되어 있었다. 그 대제사장은 예수님의 모형이었으며, 대제사장은 일 년에 한 차례씩 백성들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지성소에 들어갔다. 하나님께서 언약궤의 속죄소(혹은 시은좌)를 덮었던 그룹들 사이에서 그분의 거룩한 영광 중에 거하셨던 곳이 바로 이곳이다.

세 개의 방으로 된 집

세 개의 방으로 된 이 집은 정확한 모본을 따라 지어졌다.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성막을 위한 애초의 설계를 매우 정확히 지키도록 명령하셨다. 이처럼 성전 건축에 정확성을 기하는 이유는 성막과 성전이 중요한 실물 교육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그것들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본질과 인간의 본질을 다소나마 가르쳐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성전을 이처럼 세 지역으로 나누는 한 가지 이유는 우리가 알고 예배하는 하나님은 삼위일체이신 존재로 한 하나님이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라고 하는 서로 구별되는 삼위로 계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 한 분뿐이신 이 참 하나님은 유일하시고 독특한 분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진실로 그 어느 것에 비할 수 없고, 또 예증할 수도 없다. 우리는 단지 계시에 의해서만 삼위일체의 진리를 알 수 있을 뿐이다. “거룩하신 자가 가라사대 그런즉 너희가 나를 누구에게 비기며 나로 그와 동등이 되게 하겠느냐 하시느니라”(사40:25).

왕의 처소인 인간

성삼위의 진리는 분명히 믿음의 신비 가운데 하나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본질을 가장 잘 보여 줄 수 있는 존재는 바로 하나님의 창조의 최고 표현이라고 할 수 있는 우리 인간들이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삼위일체적인 본질을 상기해 보는 것은 중요하다. 인간의 본질을 뜻하는 삼중적인 표현은 데살로니가전서 5:23에 나와 있다. 거기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spirit)혼(soul)몸(body)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하나님의 집인 성전의 형상을 빌어 바로 우리가 세 개의 방으로 이루어진 집이라고 말할 수 있다. 성경은 영과 혼과 몸을 분명히 말하고 있다. 영과 혼은 결코 분리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둘은 상호 독립해서 작용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들은 엄연히 구별될 수 있는 것들이다. 인간이 그 몸을 가지고 물질적인 세계와 바르게 관련을 맺으면 건강하게 된다. 또 그의 혼을 가지고 정신적인 세계와 바른 관계를 가지면 행복해진다. 그리고 그의 영을 가지고 영적인 세계와 바르게 관련을 맺으면 거룩해진다. 하나님의 목적은 궁극적으로 우리가 이 세 가지 실재, 즉 건강과 행복과 거룩함을 모두 경험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겉사람과 물질적인 세계

몸은 성경이 ‘겉사람’이라고 부르는 것이다(고후4:16). 인간의 몸은 구약의 성전으로 말하면 바깥 부분에 해당한다. 성전의 바깥 뜰은 제사를 드리는 곳이었다. 흥미롭게도 우리의 몸도 제사를 드리는 곳이다. 바울은 우리에게 우리 몸을 ‘산 제사’로 드리라고 명령했다(롬12:1). 몸도 하나님의 지으신 바요, 거룩한 성전으로 하나님께 드려져야 한다. 우리 대부분은 이 사실을 깨달아야만 하며 성전을 유지하기 위해 더욱 힘써야 할 필요가 있다.

속사람과 정신적인 세계

혼은 보이지 않는 존재로 혼을 가리키는 헬라어는 ‘프쉬케(psyche)’ 이다. 성경에서는 우리의 혼이 본질적으로 지(mind), 정(emotion), 의(will)의 활동을 아주 조심스럽게 예증하거나 열거하고 있다. 혼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것으로 그것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사랑하며, 하나님을 섬기게 된다. 혼은 또한 우리의 본질 중에서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관련지어 주는 부분이다. 나의 혼은 ‘땅 위의 장막 집’에 거하는 진정한 나다. 당신이 나를 볼 때, 당신의 눈에 진정으로 보이는 것은 내가 살고 있는 ‘집’, 곧 몸이다.

가장 깊은 내면의 사람과 영적인 세계

우리는 하나님의 좌우에 날선 검의 계시를 통하지 않고서는 인간에게 영이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 인간의 독특함은 영이 있다는 사실에서 찾아볼 수 있다. 동물에게도 분명히 몸이 있다. 그리고 동물에게도 혼이 깃든 생명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영이 없다. 여기서 더 나아가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실 때에는 그에게 ‘생기’를 불어넣으셨다(창2:7). 이 ‘생기’가 인간의 영이 되었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숨(breath)’과 ‘영(spirit)’은 서로 바꾸어 사용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영적인 본질을 갖고 태어났다. 그래서 하나님을 알고 경배할 줄 아는 영광스러운 능력을 부여받았다. 동물들은 결코 기도하지 않으며, 하나님을 찾지도, 하나님께 예배하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영이 없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우물가의 여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요4:23).

성령의 기름 부음과 함께 역사하는 방법

“사람의 영혼(spirit)은 여호와의 등불(candle)이라 사람의 깊은 속을 살피느니라”(잠20:27). 인간의 영의 등불에 공급되는 기름은 바로 성령이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 인간의 영혼 속에서 역사 하시는 성령의 능력을 통하여 조명을 받게 된다. 성전 안의 가장 깊숙한 방인 지성소에서 하나님의 임재가 가장 직접적으로 나타났던 것처럼, 우리 인간의 성전에서 가장 깊숙한 방인 영이 바로 하나님의 임재가 그의 모든 충만함으로 내주 하시는 장소가 된다. 우리가 그리스도께 굴복하면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뜻과 능력이 우리의 몸을 통해 드러나게 되고, 우리는 마음(혼)에 평안을 얻으며, 우리의 영에 내주 하시는 충만한 하나님의 임재를 알게 된다. 그러면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께서 그분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 그것은 구속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당신 안에 계시는 것, 그것은 성화이다. 당신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 당신을 천국에 적합한 사람으로 만들어 준다면, 그리스도께서 당신 안에 계시는 것은 당신을 이 땅에 적합한 사람으로 만들어 준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 당신의 목적지를 바꾸어 준다면, 그리스도께서 당신 안에 계시는 것은 당신의 영원한 운명을 바꾸어 준다. 전자는 천국을 당신의 집으로 만들어 주고, 후자는 이 세상을 하나님의 작업장으로 만들어 준다. - 얀 토마스(Ian Thoma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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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자연적인 자연성과 자연적인 초자연성

성과 속

사람들이 주일날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교회 문만 나서면 곧 일상적인 태도로 돌변하는 ‘작은 습관’은 어디에서 생긴 것일까? 그것은 우리의 생활이 성스러운 생활과 속된 생활로 나뉘어 있다는 생각을 우리가 어디에선가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우리는 예배를 드리는 동안에는 가면을 쓰고 있는 것처럼 행동하다가 그 시간이 끝나면 곧 그것을 벗어 놓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식당 줄로 달려간다. 성령의 전인 우리는 사실 하나님께서 임재해 계신 하나님의 집에서 살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집이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한 시간 60분을, 하루 24시간을, 일 년 365일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을 경배하고 섬기며 사는 것이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내주해 계시기 때문에 우리의 삶에 있어서 성과 속의 구별은 있을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영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이 우리에게는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 되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의 성전’이기 때문에 우리는 모든 일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해야 한다. 사도 바울이 골로새서 3:16-17에 말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졼’이르며 마음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졼’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면하 특히 17절 말씀을 주목해 보라. ‘무엇을 하든지’라는 헐으로모든 것을 의미한다. 고 또 모든 것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해야 한다. 거기에는 모든 생활이 다 포함된다. 또한 이 권면의 적용 범위을 하든가 생각하는 세속적인 모든 영역까지도 포함한다. 소위 세속적인 삶의 영역들까지도 성화 되어야 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승인

만일 우리가 모든 일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려 한다면 우리는 예수님이 승인하실 수 있는 일들만을 해야 한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든 것을 한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사인하시고 인정하시는 것만을 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은 예수님의 성품과 일치해야만 한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을 써 넣을 수 없는 일은 해서도 안되고 말해서도 안된다.

율법은 아이들을 위한 것

율법은 아이들을 위한 것이다. 미숙한 아이들일수록 부모가 다음과 같은 더 많은 규제를 하지 않으면 안된다. “성냥 가지고 놀지 말아라” “수업이 끝나면 곧바로 집에 오너라.” 그러나 성숙한 아이에게는 이런 규제가 필요 없다. 수년 간 자기 일에 대한 책임을 져 온 아이들은 이미 아버지의 뜻을 알기 때문에 “하라, 하지 말라”가 길게 나열되어 있는 목록표를 받을 필요가 없다 성숙하면 성숙할수록 규제는 덜 필요한 것이다. 한 번은 아버지로서 내게 무척 기쁜 일이 있었다. 아들 녀석과 나는 그 전에 한 번도 특별히 얘기해 본 적이 없는 어떤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거기에는 아무런 규제도 없었다.

그러나 아들은 그 상황에 성공적으로 대처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아빠, 저는 아빠가 원하시는 일이 무엇일까 하고 생각하다가 그대로 했을 뿐이에요, 저는 아빠가 인정해 주실 줄 알았어요” 그는 내 성품과 일치한다고 생각하는 일을 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보다 높은 차원의 생활이다.

예수님의 권위

체중이 70킬로그램인 경찰관이 바퀴가 18개나 달린 트럭 앞에 서서 손을 들고 법률에 의거하여 그 트럭을 멈추게 할 수 있다. 그때 경찰관은 자기보다 더 높은 권위에 의지하고 있는 것이다. 반면 트럭은 그 이름이나 권위 때문에 멈추어 선다. 그 경찰은 분명 육체적인 힘으로 트럭을 멈추게 한 것이 아니다. 그 경찰이 착용한 배지와 제복은 그가 대표하는 정부의 권위를 갖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바로 여기서 한 가지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우리의 권위가 사탄을 능가하는 것은 우리가 사탄보다 강하기 때문이 아니다. 우리는 사실 사탄보다 강한 존재가 아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송하실 때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었으니 너희를 해할 자가 결단코 없으리라”(눅10:19). 예수님께서 하신 이 말씀의 의미는 “보라, 내가 너희에게 원수의 모든 능력을 이길 수 있는 권위를 주었다”는 것이다. 힘과 권위의 차이를 주목하라. 경찰이 트럭을 멈추게 한 것은 힘이 아니라 권위를 가지고 한 것이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힘을 가지고 사탄을 이기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권위를 가지고 이기는 것이다.

예수님의 갈채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든 것을 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갈채와 명예를 위해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성전으로서 나의 삶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는 오직 한 가지 목적만을 위해 드려져야 한다. 이것은 바로 베드로의 목표였다.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토록 있느니라 아멘”(벧전4:11). 바울도 똑같은 소원을 피력하였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10:31)

예수님께 갈채를 보내는 삶은 예수님의 승인을 받아 예수님의 권위로 살아가는 삶뿐이다. 성령으로 살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든 것을 행한다는 말은 예수님의 이름에 먹칠하는 일은 절대로 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한다.

  3

결코 홀로 있지 않다

주 예수께서 내가 십대 소년이었을 때에 나를 만나 주신 데 대하여 나는 하나님을 찬양한다. 나는 비록 심각한 문제를 일으킨 적은 없었지만 부모님께 상당한 마음의 고통을 안겨 드렸음에 틀림없다. 나의 가족은 선하고 근면했으며 세상의 소금이 되는 사람들이었다. 아버지께서는 자동차와 가구 사업으로 생계를 꾸려 나가셨다. 나는 매도 맞으면서 자랐는데 아버지께서는 매를 드실 때마다 그것은 나를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나는 아버지께서 가장 총애하는 아들임에 틀림없다고 종종 생각하곤 했다. 왜냐하면 나는 다른 자녀들보다 이런 사랑을 더 많이 받고 자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모두와 마찬가지로, 나는 인생에서 부모님의 모범과 훈육 그 이상의 어떤 것을 필요로 하였다. 플로리다 주의 웨스팜 비치에 있는 고향에서, 어느 날 전형적인 부흥회가 있었는데 우리 아버지는 그날 자신의 마음과 삶을 그리스도께 드리기 위해 제단 앞으로 걸어 나가셨다. 그때 나도 아버지를 따라 앞으로 나갔는데 내 생각에는 바로 그 순간에 어떤 영원한 변화가 일어난 것 같았다. 그날 밤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것이다. 나는 죽은 자였으나 구원을 받은 것이다.

하나님께서 밖으로 나가셨을 때

복음이 좋은 소식이 되기 이전에 먼저 나쁜 소식이 되어야 한다. 구원받는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를 충분히 이해하고 인식하기 위해서는 먼저 죽어 있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를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죽어 있다는 것은 영적인 죽음의 상태에 있다는 것이다. 이 영적인 죽음은 아담의 경험 속에 가장 잘 예시되어 있다. 아담의 죽음은 나의 죽음과 연결되어 있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는 죄를 범한 확실하고 즉각적인 결과는 바로 죽음이었다. 하나님께서는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2:17)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아담이 정녕 죽었는가? 성경은 말하기를 그가 계속해서 수백 년을 더 살았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러나 아담은 정말로 죽은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어떻게 죽었는가를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아담은 범죄한 즉시 영적으로 죽었다. 영적인 죽음은 영혼이 육체에서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영혼이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는 것이다. 아담은 범죄한 바로 그날, 비록 두 발로 땅에 서 있기는 했지만 영적으로는 죽은 것이었다. 그때 일어난 것은 하나님의 성령이 떠나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더러운 집에는 거하시지 않는다. 아담은 성경에서 말하는 바 죄와 사망의 정죄 아래 놓이게 된 것이다. 아담이 범죄 했을 때 주님께서는 그에게서 나가신 것이다. 그리고 주님이 나가시자 그의 생명도 나간 것이다. 그리고 그 생명이 나가자 그 빛도 나갔다. 아담은 범죄한 즉시 영적으로 죽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혼이 “점진적으로” 죽게 된 것이다. 인간은 대부분의 동물들이 갖고 있는 본능을 갖고 있지 않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의 성령을 인간에게 보내셨기 때문이다. 어떤 의미에서, 다른 동물들에게는 본능이 있듯이 인간에게는 성령이 있어야만 한다. 그러나 아담의 영은 하나님을 상실하게 되었다. 아담은 더 이상 영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이제 자연인이 된 것이다. 즉 죄로 인해 그는 혼에 의해서만 움직이는 사람이 되어 버린 것이다. 자연인이 어떻게 행동하는지 주목해 본 적이 있는가? 자연인의 지성은 “나는 이런저런 이유로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한다. 그의 감성은 “나는 그것을 하고 싶은 느낌이 든다”고 말한다. 그의 의지는 “좋아, 내가 할게”라고 말한다. 세상은 바로 그런 사람들로 가득 차 있다. 그들은 살아 있으나 실상은 죽은 자들이다. 많은 사람들은 무엇인가가 잘못되어야만 그들이 비참한 상태에 처해 있음을 깨닫는다. 그들은 진정한 생명의 원천에서 잘려 나가 영적으로 죽은 것이다. 궁극적으로는 육체적으로도 죽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다시 들어오실 때

이제 구원의 좋은 면을 살펴보자. 아담의 영은 즉시 죽었다.

그리고 혼은 점진적으로 죽었으며 궁극적으로는 육체도 죽었다.

그러나 한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그의 영은 즉시 의로워지고, 혼은 점진적으로 성화되며, 몸 역시 궁극적으로 영화된다. 예수님은 완전하고 새로운 인류, 곧 하나님이 거하시는 사람들의 맏아들로서 하나님이 인간과 함께 거하실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입증해 주셨다. 하나님의 공의는 우리의 죄 문제를 처리하기를 요구하신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한 번 더 인간에게 내주 하실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죄의 장벽을 제거하고자 돌아가셨다.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나가셨기 때문에 그 죄 문제가 완전히 처리되지 아니하고는 하나님께서 다시 돌아오실 수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십자가가 필요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제 깨끗해진 우리 몸의 전으로 자유로이 들어오셔서 우리 안에 내주 하실 수 있다. 왜냐하면 죄의 장벽이 제거되었기 때문이다. 우리의 영이 즉시 의로워질 뿐 아니라 우리의 혼도 점진적으로 성화될 수 있다. 명심할 것은 칭의가 즉각적인 반면에, 성화는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있을 때까지 끝나지 않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빌1:6). 그러나 언젠가 그 과정은 끝날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는 우리의 몸도 영화롭게 될 것이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주 예수의 오심을 고대하고 있어야만 한다.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빌3:21). 그러므로 부활 때에 우리의 몸이 영화롭게 되어야 비로소 우리의 구원이 완성될 것이다. 우리의 구원은 세 단계로 이루어진다.

과거 : 나는 영적으로 의롭게 되었으며 죄의 형벌에서 구원받았다.

현재 : 나의 혼이 성화되고 있으며 죄의 권세로부터 구원받고 있다.

미래 : 나의 몸이 영화될 것이며 죄의 가능성으로부터 구원받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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