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인의 재물사용 원리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에서 형제 중에 형이 부모로부터 유산을 더 많이 물려받았습니다.
동생은 자신의 몫으로 돌아올 유산이 부족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동생은 예수님께 찾아가 형이 태도를 고쳐서 자신과 유산을 공평하게 나누도록 해달라고 간청합니다.
예수님은 비유를 들어 재물은 소유하기보다는 잘 나누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은 단지 부자이기 때문에 어리석다거나 재물 자체를 부도덕하다고 보시지는 않습니다. 기독교인들이 재물을 바르게 사용하려면 몇 가지 원리에 충실해야 합니다.
첫째,물질의 가치관을 바꾸어야 합니다. 어리석은 부자는 이웃을 배려할 줄 모릅니다.
부자의 독백에는 소유를 나타내는 말밖에 없습니다.
그는 ‘나’밖에 모르는 이기심과 탐심의 노예가 된 전형적인 인물입니다.
오직 재물을 통한 자신의 행복만을 외치는 어리석은 자입니다.
주님은 “제자가 되려면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으라” (마 16:24)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자신을 위해서는 절제하고 아끼고 인색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웃에 대해서는 언제나 넉넉하게 배려하고 이해할 줄 알아야 합니다.
성도 중에 ‘꼬리가 되지 않고 머리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보다는 ‘머리 된 자로 꼬리 된 자를 섬기겠다’고 고백하는 기도가 옳습니다.
사람들은 기독교인들이 거리에서 전도지를 나눠주며 외치는 것에 주목하지 않습니다.
그것보다는 나누고 섬기는 성숙한 모습의 기독교인이기를 기대합니다.
우리가 참된 인생의 의미를 발견하려면 나 중심에서 이웃 중심으로,쾌락 중심에서 절제로, 세상 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가치관을 바꾸어야 합니다.
둘째,생활의 균형을 이루어야 합니다.
어리석은 부자는 많은 소출을 얻었는데 그것을 보관하기 위해서 곡식창고를 짓기로 했습니다.
그가 지을 창고는 오랫동안 먹고 마시고 즐기기 위해서입니다.
배부른 자는 하나님을 바라볼 수 없고 참된 영성이 나오지 않습니다.
비유의 부자가 어리석다는 것은 재물에 대한 참된 이해가 부족하다는 뜻입니다.
비유에서 부자는 이웃을 생각하는 마음이 조금도 없습니다.
풍성한 소출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말하지 않습니다.
이 사람은 영적으로나 육적으로 균형이 깨진 채 살아갑니다.
불의하게 재산을 형성한 사람은 자기 재물로 보람 있게 살지 못합니다.
사도 바울은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딤후 6:10)라고 했습니다.
성도는 재물을 얻되 다스릴 수 있는 영적인 감각과 균형이 있어야 합니다.
셋째,재물을 나누고 섬기는 일에 써야 합니다.
오늘 본문의 부자는 자기 소유를 나눌 줄 몰랐기에 어리석은 자가 되었습니다.
본문의 부자는 나눠주거나 섬길 사람을 찾을 생각이 없었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이 일어날 때 먹을 것이 없었지만 예수님의 말씀과 작은 것을 나누고자 하는 자들의 헌신과 노력이 있었기에 생명의 잔치가 되었습니다.
나누고 섬기면 풍성한 생명의 기쁨과 평화를 맛봅니다.
아직도 우리 사회는 봉사에 대한 이해가 낮고 더불어 살아가는 의식이 약합니다.
어떤 학교에서 선배가 후배들의 점심 급식을 도와주는 제도를 만들어서 운영하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하루만에 폐지했다고 합니다.
학부모들이 이구동성으로 “내 귀한 자식을 천박한 밥 배달이나 시키려고 학교에 보내지 않았다”는 항의가 빗발쳤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우리 사회의 이기적인 모습입니다.
그 아이들의 부모들은 대부분 1970∼80년대에 대학을 다닐 때 ‘자유 진리 정의’를 외치며 민족과 나라의 장래를 염려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나누고 섬김이 없는 사회는 지옥이며 그런 사회는 희망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물질로 나누고 섬길 때 인생의 참된 의미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기독교인들의 올바른 재물 사용의 원리입니다.
유영설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