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4-02-05 18:31
평신도 신학강좌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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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웹섬김이
조회 : 610  


‘성령체험=하나님 만남’ 누구나 가능하다

한국교회에는 성령체험에 대한 간증이 많다. 신자마다 성령에 대한 인식과 체험은 참으로 다양하다. 성령체험을 신앙생활의 유일한 목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부터 성령에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까지 차이가 크다. 어떤 신자는 오늘날에는 성령이 직접 역사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어떤 신자는 현대가 바로 성령의 시대라고 강조한다. 오늘 강좌는 지금도 성령이 역사하는지, 그리고 누구나 성령을 체험할 수 있는지를 보려 한다.

성령의 역사는 동일

오늘도 성령이 역사하는지에 대해서는 두 대립되는 주장이 있다. 첫째는, 신약시대와 초대교회에는 기적이 많았고 성령의 역사도 강했으나, 현대에 와서는 성령의 역사가 약해졌다는 주장이다. 이 주장은 성령의 활동 중에 상당한 부분은 초대교회 당시에만 일어날 수 있는 종류라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은 성령의 체험에 의존할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요즘도 성경공부를 강조하면서 말씀에만 의존하겠다는 부류에서 종종 보인다. 또 성령체험을 신비체험으로 여기고 거부하는 사람도 있다. 이런 신자는 상당히 차갑게 신앙생활을 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이 주장은 성령 역사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됐다. 왜냐하면 성령이 초대교회 당시에만 활동했다면, 그 후 2000년의 기독교 역사 동안 성령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말이 된다. 성령이 죽었거나 주무시지 않았다면, 가능하지 않은 주장이다.

둘째는, 구약이나 신약 시대에 비해 오늘날에 성령의 역사가 더 강하다는 주장이다. 이 주장은 구약은 야훼가 다스리던 성부의 시대였고, 신약은 예수님이 가르치던 성자의 시대였으며, 지금은 성령이 직접 지도하는 ‘성령의 시대’라는 것이다. 이 주장의 근저에는 성부, 성자, 성령의 역사를 세 시대로 구별하려는 생각이 놓여 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을 세 분의 분리된 신성으로 말하지 않는다. 이런 주장은 삼신론이 될 가능성이 크며, 삼위일체적 관점에서 볼 때 상당히 위험하다. 이 부류의 사람은 성령체험과 은사에 모든 관심을 두는 경우가 많다. 오직 주변에 성령을 체험했다는 말과 어떤 은사를 받았는지에만 관심이 있다. 그러다 보니 성령의 능력이 있다는 부흥사를 따라다니거나, 성령체험이 잘 일어난다는 특정 기도원에 몰려다니기도 한다.

위의 두 주장 모두 성경적이지 않은 생각이다. 성령은 초대교회 때나 오늘이나 동일하게 역사한다. 그때나 지금이나 동일한 성령이니 동일하게 역사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다만 성령은 각 시대와 상황에 맞게 역사한다. 구약에서는 구약의 시대에 맞는, 신약의 시대에는 신약의 시대에 맞는, 그리고 오늘은 우리 시대에 맞게 활동한다.

초대교회는 박해의 시대였다. 고난의 시대에 성령의 역사가 더 강하게 나타나는 것으로 보일 수는 있다. 하지만 성령의 역사는 동일하다. 오늘날도 그 어느 시대보다 성령의 도움이 필요한 시대이다. 위기의 21세기, 무신성의 시대 속에서 담대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하고, 생명과 평화, 정의와 사랑을 위해 헌신할 때, 성령이 오늘을 사는 신자들에게 놀라운 방법으로 임하고 힘과 용기를 주실 것이다. 성령이 각 시대마다 다양한 형태와 모양을 가졌다고 해서 다른 성령이 아니다. 우리에게는 주님도 한 분이시고, 성령도 한 분이시다(엡 4:4).

성령 하나님을 만나다

초대교회 때나 오늘이나 성령이 동일하게 활동한다면, 누구나 성령을 체험할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성령체험’을 어떻게 정의 내리는지에 따라 달라진다. 성령체험이 어떤 특별한 현상이나 상태를 의미한다면, 누구나 가능하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예를 들면, 성령체험을 병 고침이나 예언과 같은 현상으로 제한한다면, 누구나 이런 경험을 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한편 성령체험을 ‘성령 하나님’을 만나는 사건으로 규정한다면, 누구나 가능하다. 성령은 삼위 하나님의 한 위격이다. 따라서 성령체험은 하나님을 ‘만나는 경험’을 의미한다. 그렇기에 성령체험은 누구나 가능하고, 또 모든 신자들은 반드시 이런 체험이 필요하다. 다만 그 체험이 신자 각자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는 점을 염두에 둬야 한다. 성령은 다양한 방법으로 우리와 교제하고 만난다.

즉 성령은 성경을 읽을 때 깨달음으로 임하고, 정의와 진실을 위해 애쓸 때 함께하고, 봉사를 위해 헌신할 때 현존한다. 또 삶 속에서, 말씀과 성찬에서, 기도를 통해, 성도의 교제 안에서 성령을 만난다. 성령은 자유의 영이시다. 어느 한 영역에서, 어느 하나의 방법으로만 역사하지 않는다.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이 있다. 우리가 소외된 자에게 봉사할 때 우리는 소외된 자만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만난다는 사실이다. 사랑을 할 때, 사랑하는 대상만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행위를 통해 성령을 만난다. 생명 살림의 운동을 할 때, 그 운동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그 헌신의 행위 속에서 성령을 만난다.

테레사 수녀를 예로 들어보자. 테레사 수녀는 자신이 예수님을 만난 경험을 고백한 적이 있다. 어느 날 테레사는 병에 걸려 길거리에서 처참하게 죽어가는 한 노숙인을 목격했다. 아무도 그 남루하고 냄새 나는 노숙인에게 다가가지 않았다. 테레사 수녀가 무릎을 꿇고 그 죽어가는 사람을 품에 안았다. 그 순간 테레사 수녀는 자신의 품에 안겨있는 ‘예수님’을 발견했다. 테레사 수녀는 그 노숙인과 함께 있던 예수님을 만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아로 죽어가는 어린이를 도울 때, 얼마의 물질을 기부할 때, 소외된 자에게 새로운 용기와 희망을 줄 때, 생명의 성령을 체험할 수 있다. 이렇게 우리는 삶의 도처에서, 역사의 구석진 곳에서 성령을 만날 수 있다. 여러분, 기억하라. 헌신의 행위 안에서 헌신이라는 ‘의무’를 만나는 것이 아니고, 소외된 이웃을 도울 때 그 ‘당위성’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성령 하나님’을 만날 것이다!

김동건 교수 <영남신대 조직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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