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은 생명·사랑 넘치는 세상 만드는 주역
오늘은 성령의 활동과 사역을 구체적으로 보려 한다. 성령활동과 교회의 관계를 먼저 보고, 역사 속에서 활동하는 성령에 대해 다루겠다. 이를 통해 우리가 성령의 활동에 어떻게 참여할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성령과 교회
성령의 역사가 교회와 깊은 연관이 있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성령의 활동이 교회 안이나, 교회의 직제에 갇혀 있을 수는 없다. 가톨릭과 개신교의 성령에 대한 입장을 보자.
가톨릭은 예수님 이후 사도적 계승이 베드로를 거쳐 교황으로 연결된다고 믿는다. 가톨릭에서 최고 권위와 결정권은 교황을 수장으로 하는 위계질서(hierarchy)가 갖는다. 여기서 성령의 역할은 교회와 그 직제를 신성하게 하는 것이 된다. 교회가 성령의 권한을 대신하는 구조다. 이런 구조가 고착화하면 교회가 성령에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교회의 포로가 될 위험이 있다. 이는 위계질서를 축으로 하는 직제 안으로 성령이 들어간 구조다. 사역의 주체도 성령이 아니라 교회가 되기 때문에 가톨릭에서 성령론이 활발하게 발전하지 못했다.
개신교의 공식 입장은 예수님의 권위를 대신하는 것은 성령이라는 것이다. 교회의 직제나 제도는 어디까지나 성령의 도구다. 하지만 개신교는 많은 교파로 인해 교회와 성령의 관계가 매우 다양하고 일관성이 부족하다. 또 같은 교파 안에도 교회에 따라, 목회자에 따라 편차가 심하다. 하지만 개신교에도 어느 정도의 경향성은 있다. 즉 개신교에서는 성령의 활동을 ‘각 교회’와 ‘개인의 체험’에 맡겨두는 경향이 강하다. 성령에 매우 관심이 높은 교회조차도 성령의 활동을 목회자가 주도하는 교회활동의 영역 안에 두려고 한다. ‘교회 밖’의 성령활동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다. 신자들도 직접 겪은 자신의 성령체험은 귀하게 여기지만 역사 속의 성령 활동에는 관심이 없다. 따라서 개신교는 성령의 활동을 교회의 범위 안이나, 신자들의 체험의 영역 안에서 이해하는 경향이 짙다.
생명의 영, 사랑의 영
성령의 활동은 교회나 개인의 체험에 머물지 않는다. 성령은 역사를 인도하고 우주를 섭리한다. 성령의 역사-우주적 차원 안에 교회의 활동도 포함된다. 성경은 성령이 천지창조에서부터 하나님 나라의 완성까지 이 역사를 섭리하는 것을 보여준다. 성령의 활동은 참으로 다양하다. 성령은 창조의 영(창 1:2)이고 생명의 영(창 2:7, 욥 33:4)이다. 성령은 지혜의 영(엡 1:17), 자유와 해방의 영(사 61:1∼2), 모두를 하나로 만드는 공동체의 영(고전 12:13)이다. 성령이 계시는 곳에 믿음(고전 12:9), 진리(요 14:17), 평화(갈 5:22)가 이뤄진다. 성령은 위로와 평강의 영(롬 14:17)이고, 희망의 영(롬 15:13)이다. 또한 성령은 새로운 세계를 꿈꾸게 하는 종말의 영(욜 2:28∼29)이며, 하나님의 나라를 완성하는 영(마 12:28)이다.
즉 성령은 하나의 공동체를 위해, 평화를 위해, 자유를 위해, 진리를 위해 활동하신다. 다른 말로, 해방이 없어 고통 받는 곳에, 희망이 없어 절망이 엄습하는 곳에, 전쟁과 분쟁으로 생명이 억압받는 곳에 성령이 탄식하며 계신다. 그러므로 우리가 자유를 향해, 진리를 향해, 소외받는 사람을 향해 헌신할 때 성령의 사역에 동참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다양한 성령의 활동 중에서 가장 근본이 되는 ‘생명’과 ‘사랑’을 좀 더 보자. 성령은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셨다. 창조는 흑암과 혼돈,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무(nothingness)에 생명을 주는 사건이다. 모든 살아 있는 것은 성령의 기운 속에 있다(시 104:30, 겔 37: 4∼5). 성령이 생명을 거두면 피조물은 죽음으로 돌아간다(창 6:3, 시 104:29). 성령은 모든 피조물을 새롭게 하는 생명의 근원이다.
예수님은 생명이고 살리는 영이다(요 6:48, 고전 15:45). 예수님은 성령의 능력으로 사탄을 물리치고 어둠의 힘을 물리쳤다. 죽음은 모든 것을 무(無)로 돌리는 허무의 힘이고, 흑암의 힘이다. 성령은 모든 허무의 힘을 이기는 생명의 영이다. 또한 성령은 그리스도를 죽음에서 일으킨 부활의 영이다. 부활은 죽음을 이긴 생명의 승리다. 그리스도가 부활한 것은 영원한 생명이 실현된 것이다.
생명의 다른 모습은 사랑이다. 하나님의 창조도 사랑 때문이었고, 성육신도 이 세상을 사랑하기 때문이었다. 성령의 생명 주심과 살리심도 모두 사랑의 행위다. 살리는 모든 행위 안에는 사랑이 있다. 사랑 없이 생명만 주는 냉혹한 행위는 없다. 그렇기에 성령은 ‘사랑의 영’이다. 하나님은 영이고 사랑이다(요 4:24, 요일 4:7∼8).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다. 인류와 세계와 우주를 하나로 유지하고, 생명으로 결합시킬 수 있는 유일한 동인은 사랑이다.
성령의 살리심과 사랑의 활동은 교회의 한계를 넘어 일어난다. 교회는 성령의 활동에 참여해야 한다. 성령이 임하는 모든 곳에서 생명과 사랑이 역사한다. 만물을 생동시키는 성령의 임재가 생명과 사랑의 사귐 속에서, 삶과 역사와 우주 안에서 발견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랑이 있는 곳에서 성령을 만날 수 있고, 생명을 살리는 곳에서 성령을 만날 수 있다.
교회가 부패하고 잠들어 있을 때에도 성령은 활동하신다. 역사적으로 교회는 많은 과오를 저질렀다. 교회가 절대적이 될 수 없다. 교회가 성령의 활동에 복종하고 성령의 역사 섭리에 참여할 때, 바른 교회가 된다. 결국 생명과 사랑이 교회의 권위를 이길 것이다. 생명과 사랑이 율법을 이길 것이다.
성령은 이 세상을 생명과 사랑이 넘치는 하나님 나라로 만드는 주역이다. 교회와 신자는 성령의 중요한 도구다. 성령이 있는 곳에 생명과 사랑이 있다. 교회에 생명과 사랑이 없으면, 교회는 하나의 건물이 되고 인간의 집단이 된다. 이런 의미에서 교회가 있는 곳에 성령이 있는 것이 아니고, 성령이 있는 곳에 교회가 있다.
김동건 교수 <영남신대 조직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