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은 성부·성자와 동일한 인격
역사·우주를 섭리하고 개인에 임해 삶 인도
성령은 어떤 분인가? 성령은 어디서 활동하는가? 단순하면서도 어려운 질문이다. 독자들은 어쩌면 ‘교회 안’ ‘마음속’ ‘기도원’ 같은 단어를 떠올릴지도 모르겠다. 물론 성령의 역사는 교회나 신자들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하지만 성령의 활동은 매우 넓다. 오늘은 성령은 누구인지, 또 어디서 활동하는지를 보려 한다.
얼굴 없는 하나님?
이렇게 기도하는 사람이 자주 있다. ‘아버지, 성령을 주시옵소서!’ 독자들도 이런 기도를 해봤을 것이다. 이런 표현이 올바른 것인지를 보자.
기독교인은 구약을 통해 성부 하나님에게 익숙하다. 또 예수님도 분명한 ‘인격’을 가진 존재로 이해한다. 성부와 성자의 인격성은 어렵지 않게 인식되었다. 성화를 그릴 때도 성부와 성자는 쉽게 형상화할 수 있다. 여러분도 성화에서 성부나 성자의 모습을 종종 보았을 것이다.
그런데 성부와 성자에 비해 성령의 ‘인격성’은 잘 부각되지 않았다. 성부, 성자, 성령은 등급의 차이가 없는 동일한 신성이지만 기독교 역사에서 성령의 ‘인격성’은 매우 늦게 확보되었다. 신자들은 삶 속에서, 종교적 행위 속에서, 역사 속에서 분명히 성령의 임재를 경험했다. 하지만 성령은 언제나 ‘체험되는 존재’로 여겨졌다. 신자들은 성령을 체험했지만 성부나 예수님처럼 분명한 인격으로 생각하지 못했다. 교회 역사에서 성령은 얼굴 없는 숨겨진 존재였다.
그러다보니 성령을 ‘힘’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은연중에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아버지, 성령을 주시옵소서!’라는 표현도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이 표현에서 아버지는 하나님을 의미하고, 성령은 힘이나 능력을 의미한다. 따라서 ‘아버지, 성령을 주시옵소서!’라는 기도는 이상한 표현이다. ‘성부 하나님이여, 성령 하나님을 나에게 주십시오’라는 말이 된다. 필자는 표현을 문제 삼아 꼬투리를 잡으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이런 기도에서 성령의 인격이 배제되고, 성령이 성부의 ‘힘’처럼 ‘비인격적인 것’으로 간주되는 것을 경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도할 때 적절한 표현은 이런 정도가 좋겠다. ‘성령님, 저와 함께해 주십시오.’ 혹은 ‘성령이여, 저에게 임하옵소서’와 같은 표현도 무리가 없다. 이제 성령이 누구인지 답하자. 성령은 하나님이 부리는 힘이나 능력이 아니다. 성령은 성부와 동일한 인격이다.
역사의 주, 개인의 주
한국교회는 성령활동을 개인의 내면적 체험에 국한시키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삼위일체의 한 위격인 성령의 활동에는 제한이 없다. 성령의 활동을 역사-우주라는 차원과 개인의 차원이라는 두 측면에서 볼 수 있다.
첫째, 성령은 역사와 우주를 섭리하는 분이다. 성령은 우주와 천지를 지은 창조의 영이고, 역사를 이끄는 영이다. 구약에서 성령은 다양한 임재의 방법으로 이스라엘을 인도하며 구원의 역사를 펼쳤다. 예수님의 사역도 성령과 함께 행한 사역이다. 예수님의 선포, 치유, 구원활동은 언제나 성령과 동행하는 사역이었다. 성령은 지금도 역사를 이끌고 구속사의 완성을 향해 나아간다. 성령은 하나님의 나라를 완성해 나가는 주체이시다.
그렇기에 성령의 활동은 역사·우주적 지평을 가지고 있다. 여기서 ‘역사’나 ‘우주’라는 말을 너무 어렵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단순하게 말하면 ‘역사적 차원’은 인간의 사회나 문화와 같은 영역이고, ‘우주적 차원’은 자연을 포함한 피조세계의 영역이다. 즉 성령은 인간 사회의 갈등을 치유하고, 소외된 이웃을 위해 활동하며, 하나님이 만드신 생태계와 우주에서도 활동한다.
그동안 교회는 성령의 역사·우주적 지평을 간과해 왔다. 성령의 역사·우주적 차원을 보지 못하면 성령활동의 중요한 측면을 놓치게 된다. 다른 말로 역사 속에서 행하는 성령의 활동에 참여할 기회를 상실하고, 자연과 피조세계를 향한 성령의 뜻을 못 보게 된다.
둘째, 성령은 각 개인에게 임하며 그의 삶을 인도한다. 성령은 보잘것없고 나약한 한 명의 소자도 소홀히 하지 않는다. 개인이 어려울 때 위로하고, 그의 세밀한 기도를 듣고, 고난 중에 소망을 준다. 성령은 가장 작은 한 인간의 하잘것없는 기도도 외면하지 않는다. 성령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마지막 날까지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을 살도록 인도한다.
물론 성령은 ‘신비로운 방법’으로 각 개인에게 임해 용기를 주고 믿음에 이르는 체험도 허락한다. 하지만 성령체험을 어느 한 순간, 특정 장소, 특정 행위 속에서 체험되는 ‘신비적 상태’로 규정하지는 말아야 한다. 그보다 성령은 우리의 전 삶을 통해 체험되는 분이다. 성령은 우리가 일생을 살면서 만나고, 그리스도의 뒤를 따르는 삶에서 체험되는 분이다. 이런 의미에서 성령은 우리를 거듭나게 하고 평생에 걸쳐 성화의 삶을 살도록 인도하는 영이다.
마지막으로, 역사·우주적 차원과 개인적 차원의 관계를 보자. 역사·우주적 차원과 개인적 차원에 임하는 성령을 동시에 볼 수 있는 시각이 중요하다. 어느 한 측면만 보면 안 된다. 눈이 닫혀 있으면 보지 못한다. 성령이 ‘역사 속’에서 우리를 부를 때 듣고 응답할 수 있어야 하고, 또한 우리 ‘각자의 삶’에 임할 때 느끼고 감격할 수 있어야 한다.
역사·우주적 차원과 개인적 차원은 서로 배제하지 않는다. 역사·우주적 차원은 우리에게 성령활동의 더 넓은 지평을 제공하고, 개인적 차원은 우리에게 내적 확신을 준다. 즉 성령체험이 개인적 차원에만 머물면 성령활동의 역사·우주적 지평을 상실하고, 역사·우주적 지평만 가지면 성령에 대한 내면적 확신이 약해진다. 두 차원의 경험은 보완적이다. 개인적 차원에서 체험된 성령의 힘이 역사·우주적 차원으로 승화되고, 역사·우주적 차원에서 활동하는 성령에 참여하기 위해 개인적 차원의 결단이 요구된다. 이 두 차원을 함께 볼 수 있을 때 성령의 활동에 가장 가까이 갈 수 있다.
김동건 교수 <영남신대 조직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