균형잡힌 성령론, 신앙생활에 활기 줘
기독교 역사에서 성령에 대한 태도는 이중적이었다. 성령은 교회의 관심에서 소외되기도 했고, 때로는 과도한 관심을 받기도 했다. 지금도 성령에 대한 관심은 이렇게 양 극단이 함께 존재한다. 이렇게 된 이유가 있다. 오늘은 그 이유를 보면서 성령에 대한 기본적 이해를 하려 한다.
소외와 과도의 악순환
기독교 공동체가 처음 형성될 때 모든 관심은 예수님에게 집중되었다. 예수님과 성부 하나님의 관계를 교리적으로 확정하기까지는 상당히 긴 시간이 걸렸다. 삼위일체론의 성격상 예수님에 대한 교리가 먼저 확정돼야 성령을 다루기가 용이하다. 그러다보니 성령에 대한 교회의 공식 입장 정립은 더디게 진행되었다.
교회가 성령에 대해 교리적인 정립을 못하는 동안에도 신자들의 성령 체험은 다양하게 나타났다. 그중에는 성령에 대한 극단적인 주장도 있었다. 예를 들면, 기독교 초기인 2세기경 몬타누스주의(Montanism)는 열정적으로 성령을 강조하며 시한부 종말론을 주장했다. 몬타누스주의는 교회에 상당한 타격을 가했고, 결국 교회로부터 이단으로 규정됐다. 성령과 연관된 종교운동으로부터 위협을 느낀 교회는 과도한 성령운동을 경계했다.
기독교 초기부터 제도교회는 성령에 대한 열광적 움직임이 일어날 때마다, 매우 신중한 자세를 가졌다. 역사적으로 볼 때, 교회는 자신의 통제를 벗어난 신앙운동에 관대하지 않았고 경직된 태도를 보이곤 했다. 자연히 교회 내에서는 성령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지 못했고 성령이 소외되는 현상이 나타났다.
한편 신자들은 자신의 성령체험을 교회 안에서 드러내어 말하기 어려웠다. 그러다보니 성령체험이 개인적 차원이나 일부 그룹 차원에서 행해졌다. 교회가 성령체험에 대해 양성적이고 자유롭게 문을 열어주지 않자, 신자들의 성령체험은 더욱 억눌리는 양상이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억눌려 있던 성령체험이 외부로 드러날 때는 과도한 형태로 터져 나왔고, 그중에 일부는 열광적인 성령운동으로 표출됐다.
제도교회는 이런 열광적 성령운동을 대하면, 다시 억압하고 더욱 경계를 하였다. 그러면 성령체험은 음성적이 되어 각 개인에게 맡겨질 수밖에 없었다. 성령운동의 역사를 보면, 한편으로 성령에 대한 경계와 소외, 다른 한편으로 과도와 열광이 반복되었다. 오늘날도 이런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으며, 한국교회에도 양극화 현상이 강하다.
성령은 교회의 영이 아니다
그러면 소외와 과도의 악순환이 일어나는 원인을 보자. 교회가 성령을 독점하거나 교회의 구조 안에 가둘 수는 없다. 성령은 삼위의 한 위격으로 하나님이시다. 성령은 교회의 간섭 없이 신자들과 교제할 수 있다. 교회는 신자들이 그들의 삶에서 만나는 폭넓은 성령체험을 경계해서는 안 된다.
정확하게 말하면, 교회가 ‘성령’ 자체를 경계한 것은 아니다. 교회는 교회의 범위를 벗어나는 신앙운동을 두려워한 것이다. 물론 교회가 그렇게 한 것에는 긍정적 측면도 있고, 부정적 측면도 있다. 긍정적으로 보면, 교회는 언제나 이단문제를 겪었다. 교회는 교회를 위기로 몰아넣고 신자들을 현혹하는 이단의 세력을 막아야 할 책임이 있었다. 기독교에 나타난 상당수의 이단이 성령론이나 종말론과 연관돼 있었다. 그러다보니 교회는 성령에 대한 과잉 현상에 대해 경계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런 좋은 의도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교회의 규모가 커지면 교권이 형성되고 제도화하게 된다. 교권 중심의 교회는 자신의 통제를 벗어나는 신앙운동을 좋아하지 않는다. 교회는 신자들이 교회가 인정하는 성령체험의 범위 안에 있기를 원한다. 그렇기에 지금도 일부 교단이나 교회는 성령운동에 대해 매우 냉담할 뿐 아니라, 성령체험을 강조하는 집회에 대해 ‘미신적’인 운동이 아닌지 의심의 눈초리를 던진다.
교회는 성령의 역사에 겸허해야 한다. 성령체험을 교회의 권위나 목회자의 권위 아래 둘 수 없다. 교회나 목회자는 성령을 독점하려는 시도를 해서 안 된다. 오히려 신자들에게 올바른 ‘성령론’을 가르쳐 활기 있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개인의 체험에 제한되지 않는다
신자들은 성령을 ‘체험’하면, 그 체험을 절대화하는 경향이 있다. 인간이란 자신이 경험한 한계 안에 머물기 쉽다. 개인의 성령체험에는 두 가지 위험이 따를 수 있다. 조금 구체적으로 말해보자.
첫째, 성령체험이 성경과 유리될 위험이 있다. 누구든지 자신의 성령체험을 절대화하면, 성경이 눈에 안 들어온다. 성경과 상관없이 자신의 체험에 빠져 간증을 하고 다닌다. 각 개인은 다양한 체험을 하는데, 그중에는 위태로운 체험도 있다. 그렇기에 성령체험을 하면 언제나 신중하게 성경을 살펴야 한다. 개인의 경험은 성령체험의 작은 부분일 뿐이다. 성경에는 성령에 대한 많은 증언이 있다. 누구나 성령에 대한 객관적 진술을 겸허하게 볼 수 있어야 한다. 개인의 성령체험이 기준이 아니고, 성경에서 말하는 성령이 각 개인의 체험을 평가하는 기준이다.
둘째, 교회 공동체를 훼손할 수 있다. 성령은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 공동체를 하나로 만들지 분열시키지 않는다(엡 4:1-5).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이다. 그렇기에 바른 성령체험은 언제나 그리스도의 교회를 세운다. 그런데 어떤 신자는 자신의 체험에 도취돼 교회나 목회자도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자신의 성령체험을 절대화하면서 분파주의자가 되어 교회를 시험에 들게 한다.
오늘의 강좌를 정리하자. 교회가 개인의 성령체험을 억누르거나, 혹은 개인이 자신의 체험을 절대화하면, 교회와 신자의 성령체험이 다시 악순환의 구조로 들어간다. 그러므로 교회는 신자들의 성령 체험을 양성화하고 잘 지도해야 하며, 신자들은 자신의 성령체험을 성경에 따라 판단하고 언제나 겸허하게 교회공동체의 덕을 세울 수 있게 사용해야 할 것이다.
김동건 교수 <영남신대 조직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