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의 첫 개신교 순교자 (요 19:31-37)
로버트 저메인 토마스(Robert Jermain Thomas, 1840년~1866년) 선교사입니다
로버트 저메인 토마스는 1840년 9월 7일 영국의 웨일즈 북부 라드노주 라야더에서 회중교회 목사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선교에 대한 소망을 갖고 런던대학 뉴칼리지(New College) 신학과정에 입학해서 공부했다. 신학을 공부하면서도 동시에
어학을 준비하며 초교파적인 선교단체인 런던선교회(London Missionary Society)를 통해 선교사로서 파송을 받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다 하였다.
토마스는 대학 졸업후 1863년 6월 4일 하노버 교회에서 목사안수를 24세에 받고 중국선교사로 파송을 받게 된다.
(하노버교회는 토마스가 8살부터 줄곧 자랐던 고향 교회이며, 그의 아버지가 목회하던 곳이기도 하다.) 선교를 나가기 전 그는
캐롤라인 갓페리(Caroline Godfery)와 결혼을 하고, 1863년 7월 21일 아내와 함께 런던 선교회의 파송을 받고
중국으로 떠나는 배를 탄다. 그해 12월, 꿈에 그리던 선교지인 중국의 상하이(上海)에 도착했으나 그에게 닥친 계속된 시련은 한때
선교사역을 포기하게도 했다. 그
러나 문화적 차이, 음식, 언어, 기후 등의 어려움과 함께, 선임 선교사와의 갈등, 아내의 임신으로 인한 고통까지 이중 삼중의
고난을 당하게 됩니다. 그때마다 기도로 참고 견디던 토마스 선교사는 1864년 3월에 지방으로 출장을 다녀옵니다. 그 사이에
이웃에 살던 미국 선교사 부인이 갑자기 풍토병으로 죽었고 이것을 곁에서 본 아내 캐롤라인은 심한 충격을 받고 아기를 유산한 채
혼자 쓸쓸히 숨지고 말았습니다.
결국 상하이에 온 지 1년 만에 토마스는 다른 일터를 향해 거처를 옮겨야 했다. 상하이를 떠나 산동성 즈푸로 갔다. 그곳에서
그는 세관에서 일하던 로버트 하트 경에게 어학적인 재능을 인정받아, 선교를 위해서는 언제든지 떠난다는 조건 아래 통역관으로
일하게 되었다. 몸은 비록 세관에 묶여 있었지만 토마스의 선교활동은 쉬지 않고 계속 되었다. 그가 시작한 성경공부모임은 얼마 후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모여들었으며, 중국인들 스스로가 전도해 오는 일도 비일비재하였다. 믿음이 분명한 자에게는 세례를 주기도
하였다. 토마스는 즈푸에 머물며 스코틀랜드 성서공회 소속 알렉산더 윌리엄슨을 만나게 되었고, 그로부터 조선의 천주교 신자 김자평(金子平)과 최선일(崔善一)을 소개받았다. 그들에게 조선의 천주교 박해 소식을 들으면서 토마스는 조선 선교에 관심을 갖게 된다.
토마스는 세관에 사표를 내고, 한국으로 가는 배 한척을 만나 윌리엄슨이 제공해 준 많은 양의 한문 성경책을 가지고 승선(乘船)하였다. 1865년 그 배는 황해도 연안의 창린도(昌麟島)에 도착하여, 약 두 달 반 동안 머물렀는데, 그는 그곳에서 한국어를 배우기도 하고, 성경을 나누어 주며 열심히 전도를 했다.
그 후 미국의 상선 제너럴셔먼호가 많은 물건을 싣고 한국으로 떠난다는 말을 듣게 된다. 토마스는 1866년 8월, 상당량의
성경책을 갖고 통역 겸 안내자로 제너럴셔먼호를 타게 되었다. 일주일후 배는 대동강 입구 용강군(龍岡郡)에 도착하였다.
제너럴셔먼호는 조선에 통상을 요구했으나, 당시 조선에서는 대원군의 쇄국정책으로 통상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오히려 제너럴셔먼호에
불을 지르게 된다.
배에 타고 있던 사람들이 죽거나 물에 빠지게 되었다. 배에 불이 붙자 토마스는 가지고 온 성경을 바다 위로 던졌고, 몇 권의
성경책을 품에 안고 배에서 뛰어내려 헤엄쳐 나왔다. 그때 퇴교(退校) 박춘권(朴春權)이 칼로 토마스의 머리를 치려하였다. 토마스는 품고 온 성경을 여기저기로 뿌렸고, 자기를 죽이려고 하는 박춘권에게도 한 권을 주었다. 결국 토마스는 박춘권의 칼에 의해 참수를 당하였다. 한국 땅에서 기독교(개신교) 선교사로서 첫 순교를 당한 것이다.
후에 박춘권은 토마스가 건네 준 성경을 읽은 후 예수를 믿고 신자가 되어 안주교회의 영수(장로)가 되었다.
당시 군중 속에 있던 12살 소년 최치량은 토마스가 던져준 성경 세 권을 주워서 영문주사 박영식에게 갖다 주었다.
박영식은 그 성경을 뜯어 벽지로 사용했다. 후에 박영식의 집은 평양 최초의 교회인 널다리골(장대현 교회) 예배당이 되었다고 한다. 박춘권의 조카 이영태는 박영식의 집에 갔다가 벽에 바른 성경을 읽고 감동을 받아 예수를 믿은 후 평양 숭실학교를 졸업하고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 레이놀즈의 조사(전도사)가 되어 한국 성서번역위원의 한 사람으로 일했다.
1866년 9월, 토마스는 27살의 젊은 나이로 이역만리 조선 땅의 대동강 변에서 한 알의 밀알이 되어 죽어갔지만 그가 전한 성경은 살아서 조선에 교회가 세워지는데 소중한 밑거름이 되었다.
조선땅에 복음을 전하러 들어와 성경을 전하다가 죽은 토마스 선교사님, 그의 죽음이 한알의 밀알이 되어 ~~ 그를 죽인 박춘권이 그가 전한 성경을 읽고 회심하여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성경은 놀라운 책입니다.
최치량 이야기(토마스 선교사가 순교할 당시 목격자 12살 소년)
토마스 선교사가 순교할 당시 11세였던 최치량은 숙부와 함께 대동강변에 구경하러 갔다가 토마스 선교사가 뿌린 성경 3권을
얻어 집으로 가져왔고, 그때 20세였던 여인 이신행도 성경 한권을 얻었고, 훗날 그녀는 평양에서 최초의 여성기독교 신자가 되었다.
그녀의 아들인 이덕환도 교인이 되어 장대현 교회의 장로로 시무하였다.
1866년 9월 4일 제너럴셔먼호의사건이 종결된 후 박규수 평양감사는 토마스 선교사에 의해 뿌려진 수백권의 성경과 전도책자의
소지자에 대한 체포령과 회수령을 내려 많은 사람들이 그 성경을 버렸다. 이때 버려진 성경을 수집한 사람이 있었으니 그는 평양
대동문 안의 영문주사의 관직자였던 박영식이었다. 그는 자신의 집에 걷어드린 성경을 뜯어 벽지로 사용하였다. 후에 박영식의 집을
토선교사가 나누어준 성경을 갖고 있었던 평양의 최치량이 구입하여 여관으로 사용하므로 이 여관에 머무는 여행객들은 자연스럽게 성경을
자신도 모르게 접하게 되었다. 1893년 마팻선교사는 평양에 선교부를 두기 위해 이곳을 방문했을 때 바로 이 여관에 투숙하게
되었고, 이를 통해 집 주인인 최치량이 기독교인이 되어 그 여관이 나중에는 교회로 사용되었다. 최치량은 그 교회의 개척멤버였다
마펫선교사가 평양에 선교본부를 두기위해 평양을 방문할 당시 놀랍게도 이미 토마스에 의해 뿌려진 성경으로 인해 자생적인
기독교인이 형성되었던 것이다. 이는 마팻선교사가 평양도성 대동문안에 교회를 개척할 때 토마스 선교사에게 얻은 성경책을 들고 온
사람들이 많이 보였다는 것이다. 토마스 선교사에 의해 평양애 뿌려진 성경을 가진 사람들은 그의 마음속에 복음의 새순이 돋아나고
있었던 것이며, 마팻 선교사는 그 증거를 확인한 것이었다.
이같이 토마스 선교사가 죽는 순간까지 힘써 성경을 뿌린 것이 평양 초대교회의 태신자들을 탄생시켰으며 평양 교회의
초석을 이루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박춘권 영수가 섬긴 평양 널다리골 교회는 1894년 마팻선교사가 그 동네의 29명의
기독교인들과 함께 예배드림으로 개척된 것이다. 이 널다리골 교회는 후에 크게 부흥되어 1903년에 72칸짜리 큰 예배당으로
건축하면서 교회 이름을 장대현교회로 개명하였다. 이 장대현 교회는 평양의 장자 교회 역할을 했으며 한국교회의 부흥의 전환점을
가져온 1907년 대부흥의 발원지가 바로 이 교회였다.
이는 토마스 선교사의 평양에서의 한알의 밀알이 된 순교가 장대현 교회의 탄생과 그 교회를 통해 발원된 부흥운동을 잉태시킨
것이라 볼수있다 (그뒤 장대현 교회는 남문밖 교회를 분화 개척하고, 창동 교회, 능라리 교회 분화하여 개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