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한국교회는 버림받고 있나?"
- 마가 16:21-24
한완상(새길공동체 말씀 증거자)
최
근 한국 개신교 신자들에 대한 여론조사가 우리를 놀라게 하고 있습니다. 한국 개신교 신자들에 대한 세상의 인식과 평가가 대체로
부정적입니다. 몇 가지 보기만을 들겠습니다. 먼저 한국사람의 절반쯤이 무종교인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이들 중 34%는 과거에
종교를 가져 본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지금은 그 종교를 버렸습니다.
버림받은 종교를 보면 놀랍습니다. 가장 많이
버림받은 종교가 바로 개신교입니다. 56%의 무종교인이 지난 날 개신교 신자였지요. 불교는 20%, 천주교는 18%에 불과합니다.
그러니 불교나 천주교에 비해 개신교를 폐기처분한 사람은 거의 3배가 된다는 뜻이지요. 한마디로 한국 개신교는 가장 인기 없는
종교로 전락되고 만 듯합니다.
일반 시민들이 살고 있는 거주지역에 개신교 교회가 너무 많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전체의
67%에 이릅니다. 그렇지 않다고 보는 사람들은 12%에 불과합니다. 개신교교회가 너무 많아 귀찮거나 싫다는 뜻이겠지요. 게다가
개신교 신자들이 비개신교 신자들보다 더 정직하다고 믿는 사람도 26%에 불과합니다. 다수의 국민들이 크리스천의 정직성에 대해
회의적입니다.
도대체 한국 개신교에 관한 한 소금과 빛의 역할은 이미 증발되어 없어진 듯하며 한국 크리스천의
윤리성도 실종된 듯합니다. 세계에서 제일 잘 나간다고 알려진 한국 개신교가 자기 나라에서는 불신과 모멸과 비판의 대상으로 전락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여 우리를 서글프게 만들고 있습니다.
'믿싸오니'의 열정에 있어서 세계 둘째가라면 서러워 할
한국 크리스천들이 예수의 삶을 '따름'에 있어서는 자국민들로부터 경멸을 받고 있는 것 같아 우리를 답답하게 합니다. 안타깝게
합니다. 어떻게 해서 이 지경에 이르렀는지를 우리는 깊이 깊이 자성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석고대죄하는 심정으로 우리
스스로의 행태, 우리 개신교들의 관행, 우리 개신교교회의 문화를 반성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하기야 이미 너무 늦은 일인지도
모릅니다.
'믿싸오니' 안에 숨겨진 영적 허구
오늘 본문은 우리의 일그러진 모습을 똑바로 쳐다보게 해주는
영적 거울이 될 것입니다. 예수의 공생애의 끝머리가 가까워오는 어느 때, 예수님은 자기의 공적 사명에 대해 마음을 열어 제자들을
깨우치셨습니다. 한심했던 제자들에게는 예수의 그 깨우침의 말씀이 충격과 실망을 불러 일으켰던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 당시 유대 지도층에게 고난을 당해 죽임을 당할 것임을 알렸기 때문이지요. 물론 사흘 후 부활하실 것도 알렸지만,
그때 제자들은 승승장구하는 승리자 예수를 모시고 있다는 탐욕적 환상에 사로잡혀 있었기에 그의 고난과 죽음의 예고는 충격 그
자체였던 것 같습니다.
"우째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이것이 제자들의 즉각적 반응이었습니다. 영광의 찬란한
왕관을 쓰고 세상을 멋지게 통치하실 메시아에게 어떻게 그런 고난의 비극이 생길 수 있나를 강하게 반문한 것이지요. 그래서 제자의
대표격인 베드로가 예수를 단단히 붙들고 말리듯이 이렇게 대들 듯 항변했습니다.
“주님, 안됩니다. 절대로 이런 일이 주님께 일어나서는 안됩니다.”
이
때 제자들의 정서를 대변했던 베드로는 바로 얼마 전 예수님을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해서 칭찬을 받았던
일을 회상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면류관을 쓴 왕이기에 영원히 살아 세상을 다스린다고 그는 확신했기에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을
상상할 수 없었던 것이지요. 그때 예수님은 베드로를 정말 심하게 꾸짖었습니다. 예수는 수제자에게 “사탄아 물러가라"고 극언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둘러보시면서 그 유명한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 오라."
이
명령은 모든 크리스천들이 반드시 경청해야 하고 실천해야 할 지엄한 말씀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명령은 크리스천의 정체성을
뚜렷하게 밝혀준 영원한 주님의 지침입니다. '예수따르미'들이 반드시 걸어가야 할 길을 제시한 예수의 확고한 지침입니다. 개신교든
천주교든, 서구교회든 동방교회든, 예수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이 말씀을 따라야 합니다. 그래야 비로소 진정한
크리스천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이 명령이 지난 천 수백 년간의 기독교 역사
속에서 조직적으로 왜곡되어 왔다는데 있습니다. 이 왜곡으로 인해 이른바 기독교인들은 크게 양산되었으나 진정한 예수따르미들은 오히려
줄어들거나 심지어 때로 핍박을 받아온 것 같습니다. '믿싸오니'를 외치는 예수신자 곧 '예수믿으미'는 많아졌으나, 이 명령을
올곧게 따르는 '예수따르미'는 적어진 듯 합니다. 최근에 와서 예수믿으미와 따르미간의 간격이 더욱 커진 듯 하여 우리를 더욱
곤혹스럽게 하며 슬프게 합니다.
따지고 보면 이 같은 왜곡은 기독교가 제도화되면서 생겨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학화 작업이 진척되어 일정한 교리와 교조의 틀이 굳어지면서 예수 따르기는 힘들게 되었습니다. 아예 예수는, 특히 역사적
예수는 증발되고 만 것 같습니다. 대신 그리스도에 대한 교리는 더욱 강조되었습니다.
기독교의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가르침을 따르는 실천적 결단이 아니라, 그 분에 대한 교리의 절대 수용을 뜻하게 되었습니다. 기독교가 강력한 로마제국의
국가종교로 굳어진 뒤 예수님의 그 명령은 더욱 변질되었습니다. 십자가를 앞세워 이교도를 박멸하려 했던 저 11세기 십자군 전쟁은 이
같은 왜곡의 극적 표상이라 하겠습니다.
십자군은 예수의 십자가 정신을 짓밟는 행위였음에도 불구하고 기독교
왕국(Christendom)은 그 뒤 십자가의 정신을 더욱 망각하면서 십자군 정신(Crusade mentality)만은 더욱
강화해왔습니다. 서구의 세속적 제국주의 침략 뒤에도 이 같은 크루세이드식 발상이 뒷받침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비록 세속적
정치운동이긴 하지만 히틀러의 세계정복 야욕도 다분히 십자군적 발상에서 나온 것으로 볼 수 있지요. 실제로 나치의 상징인
스와스티커(Swastika)는 십자가의 변형이었습니다.
이 같은 왜곡을 바로 잡고, 예수따르미의 본질을 올곧게
확인하기 위해서는 오늘 본문의 명령의 뜻을 우리의 국내외 상황에서 다시 적절하게 해석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미국의 대
테러전쟁, 특히 이라크전쟁이 또 다른 십자군 전쟁으로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부시 대통령과 그 주변의 개신교
근본주의자들, 확신주의자들, 승리지상주의자들이 21세기형 십자군 전쟁을 앞으로도 계속 터트릴 수 있기 때문이지요. 우리가 정말
말로만 요란하게 '믿싸오니'를 외치는데 그치지 않고 예수를 조용히 그러나 착실히 따르려면, 예수님의 명령의 뜻을 새롭게 그리고
올곧게 되새겨야 할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결단과 행동
예수를 따르는 첫째 요건은 자기를 부인하는
결단과 행위입니다. 이 첫 요건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면 심각한 왜곡현상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모든 십자군적 발상은 자기 부인을
부인하는데서 생깁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을 따르기 위해 제일 먼저 해내야 할 일은 바로 자기 부인이라고 강조하셨습니다.
자
기 부인은 곧 자기 비움을 뜻합니다. 자기 비움이란 내 속에 가득 차 있는 온갖 탐욕을 비워내는 일입니다. 남을 지배하고 싶은
욕망, 남보다 더 많은 것을 소유하고 싶은 욕구를 먼저 비워내야 합니다. 특히 지도자가 되려는 사람은 예수님을 유혹했던 마귀의 세
가지 탐욕을 비워내야 합니다. 자기 비움의 정반대는 바로 독선을 통한 자기 채움입니다. 독선은 정말 금물입니다. 종교적 독선은
더더구나 예수따르미들이 반드시 버려야 할 첫 번째 금기사항입니다. 그런데 현실을 보면 종교인일수록 비종교인보다 더 독선적이고,
종교적 지도층일수록 더 독선적인 것 같지 않습니까?
자기의 비움은 비움 그 자체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비움은
남의 채움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자기의 탐욕을 비워내되 남에게는 좋은 것으로 가득 채워 주는 것, 이것이 자기 비움의
참뜻입니다. 남에게 희망과 용기와 위로로 가득 채워 주게 되면, 나와 남 사이에는 누룩처럼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하나님 나라의
모습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나와 남 사이에 가로 놓여 있던 온갖 장벽들, 성의 장벽·인종의 장벽·계급의 장벽·종교의
장벽·이념의 장벽 등이 무너지기 시작할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이 같은 장벽들을 제거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활동은 바로 이 장벽 허물기 선교활동이었습니다. 사도 바울도 주인과 종간의 벽, 유대인과 이방인간의 벽, 그리고 남녀간의 벽을 헐어버렸습니다.
나
를 철저히 비워 남을 가득히 좋은 가치로 채워주는 이 행위는 나에게 뜻밖의 큰 선물을 안겨다 줍니다. 그것은 새로운 나의
발견입니다. 곧 비워진 내 자신이 새로운 자신으로 채워진다는 뜻입니다. 나는 더 아름다운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는 것이지요. 이른바
'참 나'가 나와 남 사이에 생긴 새로운 관계(하나님나라의 관계) 속에서 나타나게 되지요. “보라 내가 새로운 존재로다” 하는
기쁨의 고백이 터져나오게 되지요.
결국 나를 비워 남을 채워주는 과정에서 내 빈 공간은 마침내 새로운 자아로
채워지게 되는 기쁨을 맛보게 됩니다. 이것이야말로 예수따르미들이 감동으로 체험하게 되는 영적 환희라 하겠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
같은 영적 기쁨을 항상 체험했기에 “항상 기뻐하라”고 당부하신 것입니다.
한마디로 이 기쁨은 사랑의 기쁨이기에 바로
하나님의 기쁨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하나님 사랑은 바로 자기 비움의 사랑임을 확인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라는 고백이 저절로 나오게 됩니다. 그런데 무서운 외재신(外在神)은 이 같은 사랑과는 거리가 멉니다. 예수님이 직접
체험하셨던 하나님은 자기를 비워 아들을 좋은 것으로 채워주시는 '아빠'(Abba) 하나님이십니다.
병으로 시달리는
사람들에게 낳게 하는 힘을 값없이 선물로 주시는 하나님이시지요. 오랫동안 혈루병에 걸린 여성이 예수님 옷자락만 만져도 그녀에게
값없이 흘러들어간 그 힘. 그녀에게 나음의 기쁨으로 가득 채워주는 그 사랑의 힘. 그것이 바로 자기를 비우시는 하나님 사랑의
작동입니다. 그래서 그녀가 새롭고 건강하고 온전한 존재로 우뚝 설 수 있게 해주는 값없이 그저 주시는 값진 힘 말입니다.
십자가를 앞세우지 않고 등에 져야
둘째로 예수따르미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합니다. 이 의미를 보다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십자가의 역사적 의미를 먼저 알아둘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 십자가가 무엇을 뜻했는지를 살펴봅시다.
십
자가는 고대 세계에서 행해진 가혹한 형벌의 도구였습니다. 페르샤와 카르타고에서는 고급관료들이나 군지휘관과 같은 상류층을 징벌할 때
십자가가 처형틀로 활용되었습니다. 로마에 와서는 달아난 노예나 폭행죄를 범했던 하류층을 처벌할 때 십자가를 사용했습니다. 게다가
식민지에서 로마체제에 반역하는 자들을 징벌할 때 이 방법을 애용했습니다. 이것은 인간이 겪을 수 있는 고통 중에 가장 견디기
어려운 고통을 겪도록 짐짓 고안된 형틀입니다. 원래 고통의 시간은 길게 느껴지게 마련이기에 육체적으로 그 고통을 최대한 연장시키는
방법으로 고안된 것이 바로 십자가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극도의 수치심을 불러일으키는 처형 방법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다중이 지켜보는 앞에서 옷을 벗기고 먼저 채찍으로 때린 뒤 무거운 십자가를 지워 모멸과 고통의 행진을 하게
했지요. 그뿐입니까. 나무에 달려 천천히 죽어 가는 죄인의 머리 위에는 시체를 뜯어먹으려는 까마귀나 독수리 떼가 그 죽음을
기다리며 날고 있었고 십자가 밑에는 들개들이 먹이를 뜯어먹으려고 으르렁대고 있었습니다. 십자가에 처형된 범죄인의 시신은 온전하게
매장될 수 없었다고 합니다. 한마디로 그것은 시체에 대한 최소한의 인간적 대접도 허용하지 않은 인간 존엄성의 완벽한 박탈
행위였습니다.
이 같은 십자가 처형에 견주어 보면, 근대식 또는 현대식 사형방식은 다분히 인간적이라 하겠습니다.
프랑스 혁명 때 사용된 길로띵은 한순간에 대컥 죽게 하니까 '자비로운 사형틀'로 볼 수 있지요. 총살도 그렇습니다. 약물로 죽이는
것은 더욱더 인간적 배려에 바탕한 것 같습니다. 그러기에 예수 당시의 십자가 처형은 인간이 고안해낸 가장 잔인한 처형이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바로 그 사형틀에 우리 주님께서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십자가를 지라는 뜻은 자기를 부인함에 있어
가장 잔인한 육체적·정신적 고통을 겪을 각오를 하란 뜻입니다. 그러기에 예수 따르기란 정말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지요.
십자가형이 없어진 오늘의 상황에서는 '십자가 지기'가 무엇을 뜻할까요?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겪으셨던 육체적 아픔과 정신적
고통은 철저한 자기 부인의 고통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억울한 고통과 극심한 수치심을 이겨내는 것, 특히 예수로부터 세속적
메시아를 기대했던 많은 사람들의 값싼 기대와 소망을 과감하게 좌절시키는 아픔을 이겨내는 것, 이것이 십자가 지는 뜻이지요.
세
상 사람들의 강렬한 값싼 기대를 저버리는 용기는 곧 자기 부정의 용기입니다. 특히 십자가 처형이 없어진 오늘의 상황에서 십자가
짐의 뜻은 육체적 고난보다 메시아 도래라는 탐욕적 기대를 철저히 비워내는 자기 부인의 아픔을 뜻하겠습니다.
다른
식으로 말하자면 예수의 십자가는 그의 허무한 죽음을 뜻하기도 합니다. 세속적 욕망의 차원에서 보면 그것은 허망하고 허무한 고행일
수밖에 없지요. 그러나 그 허무한 죽음은 승리지상주의적 욕망의 완벽한 포기를 뜻합니다. 특히 공생애 기간 예수님께서 보여주셨던
놀라운 기적 행위에 견주어 볼 때, 무력하기 짝이 없이 십자가를 지고 그 고통과 수치의 길로 걸어가셨던 예수의 처량한 모습은
너무나 놀랍게도 허망해 보입니다. 그러나 놀라운 정도로 무력한 예수의 모습은 승리주의(triumphalism)의 철저한 극복의
모습이기에 그 허무한 모습이 결단코 허무주의의 표상은 아닙니다. 오히려 참된 소망과 능력의 징표입니다.
십자가 지고
나를 따르라는 명령에서 우리가 또 주목해야 할 진리는 십자가를 '진다'는 데서 찾을 수 있습니다. 십자가는 지는 것입니다. 그것은
지고 가는 것이지 앞세워 가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우리 예수따르미들은 '십자가 지기'와 '십자가 앞세우기'간의 차이를
뚜렷하게 깨달아야 합니다. 십자가 앞세우기는 십자가를 이용하는 일입니다. 십자가를 이용하여 자기 탐욕을 채우는 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사사롭게는 십자가를 개인의 부(富)를 가져다주는 종교적 부적으로 이용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로 보석을 만들어 자기
신분의 상승을 과시할 수도 있겠습니다. 여기에는 십자가를 플러스(+)의 부적으로 보는 생각이 깔려있지요.
십자가
앞세우기를 집단적으로 강조할 때 그것은 집단이기주의를 극대화하는 일로 이어지고, 그 집단의 승리를 담보해내려는 집단적 탐욕의
몸짓이기도 합니다. 앞에서 말한 십자군은 으레 십자가 군기를 앞세워 진군했습니다. 이교도(異敎徒)나 이단자를 박멸하기 위해
십자군을 출동시킬 때 으레 십자가를 앞세웠습니다. 이때 십자가는 부족주의적 승리를 위한 부적으로 작동하게 되지요. 이것은 예수
십자가 지기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차원의 행태입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것은 '예수 십자가 지기'를 오히려 지워버리는
반(反)예수적 행위라 하겠습니다.
오늘 개신교 신자들이 세상으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거나 심지어 경멸을 받게
되는 데는 그만한 까닭이 있습니다. 그 까닭 중에 하나가 십자가 지고 가라는 예수의 명령을 개신교도들이 십자가 앞세워 가라는
명령으로 오해했거나 왜곡시켜왔기 때문입니다. 우리 동네에 교회 십자가가 너무 많다고 생각하는 세상 사람들에게 그 십자가는 바로
종교적 탐욕과 독선의 상징으로 여겨질 것이며 값싼 축복을 바라는 신자들의 종교적 부적으로 여겨질 것입니다. 정말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베드로, 예수따르미에서 사탄따르미로
이제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 예수의 꾸지람을 들었던
베드로의 모습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자화상을 똑똑히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도 베드로처럼 예수님을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다고 고백합니다. 그런데 이 믿음을 그토록 자랑스럽게 고백했던 베드로에게 주님은 끔찍스러운 책망을
하셨습니다. '믿싸오니'를 외치면서 자기 욕심을 채우려했던 베드로, 진정한 메시아는 고난의 메시아임을 깨닫지 못했던 베드로,
오로지 승승장구하는 승리자 메시아만 믿싸오니를 외치면서 예수를 좇았던 베드로는 바로 오늘의 우리 자신의 모습이 아닙니까? 그런데
말입니다. 바로 이 모습을 예수님은 사탄의 모습으로 보신 것입니다. 수제자가 사탄의 제자로 일시 나타났던 셈이지요.
그
렇습니다. 골고다의 수치와 고통, 그 억울한 죽음, 그 허무한 패배의 죽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예수믿으미들은 진정한 예수따르미가
아니라 사탄따르미가 되고 말았습니다. 주님은 바로 이 점을 깨우쳐 주셨습니다. 광야에서 예수를 유혹했던 사탄은 결단코 십자가를
지지 않습니다. 그것은 십자가를 이용하고 악용하며 남을 비워 자기를 채우는 이기적 존재입니다. 남에게는 절망, 고통, 비겁함으로
가득 채워 주면서 자기에게는 쾌락과 특권으로 가득 채우는 것이 바로 사탄의 특기입니다. 마치 나치가 했듯이 말입니다.
예수님의 고난과 패배의 참뜻을 깨닫지 못하고, 예수께서 극구 승리의 큰길로 내닫기를 원했던 베드로의 얼굴은 광야에서 예수를 유혹했던 바로 그 사탄의 얼굴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사탄아 물러가라"고 꾸짖으셨던 것입니다.
만
일 오늘 한국 개신교도(예수믿으미)들이 자기들에 대한 세상의 비판을 겸손히 받아들이지 않고, 앞으로 더욱더 '믿싸오니'를 소리
높이 외치면서 십자가를 앞세워 자기집단 확장에만 열을 올린다면, 이제는 영의 귀를 활짝 열어 예수믿으미이에게 벼락처럼 꾸짖는
주님의 육성 곧 "사탄아 물러가라 너희들은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라는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큰
교회들이 십자가를 앞세워 불투명한 교회 운영에 더욱 열중하고 십자가를 앞세워 자식에게 세습시키면서 예수를 오히려 내쫓는 짓에 더욱
심취하는 듯하여 더욱 곤혹스럽습니다. 우리 한국 개신교들은 베드로에 대한 예수님의 질책을 우렛소리로 두렵게 들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