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는 이런 인체 바이러스들의 새로운 역할이 밝혀지고 있다. 인체 박테리아들과 더불어 인체의 건강과 질병에 영향을 주는 ‘보이지 않는 손’ 또는 ‘암흑 물질’로도 불린다. 게티이미지뱅크(gettyimagesbank.com) 제공
【인체와의 전쟁과 평화】
‘바이러스가 면역계를 자극해 암세포 공격을 돕는다.’
무서운 독감 바이러스를 조심해야 하는 요즘에, 바이러스가 질병 치료에 도움을 준다니 뜬금없는 얘기 같다. 감염병의 주범인 바이러스가 오히려 암세포와 싸우는 면역세포의 힘을 키워준다는 주장은 언뜻 엉뚱하게 들릴 수 있다. 그러나 영국 리즈대학 연구진은 최근 의생물학 저널 <거트>에 이런 논문을 냈다. 실험용 쥐를 대상으로 한 연구이긴 하지만 정식 발표된 실험 결과다.
기특한 일을 해낸 이 바이러스는 질병을 일으키는 병원성 바이러스와는 다르다. 인플루엔자나 지카, 에이즈 바이러스와 달리, 실험에 쓰인 레오바이러스는 면역계가 다 성숙하지 못한 어린이나 면역력이 약해진 노약자에겐 감기나 복통을 일으킬 수 있지만 보통 성인에겐 감염돼도 별 증상을 일으키지 않는다고 한다.
연구진은 이 온순한 바이러스에 감염된 실험쥐에서 면역물질인 ‘인터페론’이 더 많이 분비되었으며, 그래서 면역세포인 ‘엔케이(NK) 세포’가 더 활성화해 암세포 공격력을 높인 것으로 나타났다고 보고했다.
우리 몸을 감염시키고도 별 증상을 일으키지 않은 채 머물다가 갖가지 방식으로 해로움이나 이로움을 주는 이른바 ‘인체 공생 바이러스’가 잇따라 발견되고 있다. 인체와 바이러스의 상호작용, 즉 감염, 면역, 질병에 관한 새로운 발견을 국내 연구자의 도움말과 해외 과학매체의 보도를 통해 살펴본다.
질병-면역-건강의 재인식
기초과학연구원(IBS) 면역미생물공생연구단에서 장내 박테리아와 면역체계를 연구하는 김광순 연구위원은 이렇게 말했다. “장내 박테리아가 우리 몸과 사실상 공생하며 상호작용을 한다는 게 많이 밝혀졌죠. 그런 관심이 점차 우리 몸 안팎에서 함께 기거하는 바이러스나 곰팡이 같은 다른 미생물 연구로 확장하고 있는 거죠.” 그는 “노벨생리의학상(1958)을 받은 조슈아 레더버그가 인간을 정의하면서 ‘슈퍼오거니즘, 즉 ‘초개체’라 했는데, 실제로 우리 몸의 면역과 건강은 우리 몸만의 문제가 아니라 박테리아, 바이러스, 곰팡이와 상호 작용하는 관계임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흔히 바이러스는 병원체로 여겨진다. 실제로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바이러스는 그동안 동식물에 심각한 감염병을 일으켜 퇴치해야 하는 그런 바이러스들이 대부분이었다.
최근 나오는 물음들은 새롭다. 우리가 아는 바이러스가 바이러스의 전부일까? 이런 물음이 나오는 건 무엇보다 최근 바이러스 연구에서 별다른 질병을 일으키지 않은 채 건강한 사람한테서도 검출되는 바이러스들이 속속 보고되고 있기 때문이다. 일례로 거의 모든 성인의 피에서 검출되는 아넬로바이러스는 일부 변종이 질병을 일으키지만 대부분은 증상 없이 우리 몸에서 그냥 기거한다.
연구자들은 이런 바이러스들이 인체에서 보통의 면역계에 의해 억눌려 있다가 면역계가 흐트러질 때 증식하는 경향을 띤다는 걸 알아냈다. 그렇기 때문에 보통 성인은 이런 바이러스들에 ‘만성적으로 감염된’ 상태에 놓이곤 한다. 연구자들은 “모든 바이러스가 질병을 일으킨다는 생각은 이제 사라지고 훨씬 더 복잡하게 생물학 현상이 설명돼야 한다”고 말한다.
박테리아만 감염시키는 바이러스 역할
이런 바이러스들이 행하는 ‘보이지 않는 손’과 같은 활약이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학계에 보고된 새로운 발견 중에서는 놀랍게도 이런 바이러스의 만성적 감염이 다른 질병의 증상을 억제하기도 한다는 보고도 나오고 있다. 후천적 면역결핍증 바이러스(HIV)의 증식을 억제하는 구실을 한다고 알려진 ‘시형 지비 바이러스’(GBV-C)가 대표적인 예로 꼽힌다. 이 바이러스에 감염된 에이즈 환자는 그렇지 않은 에이즈 환자보다 수명이 더 길었다는 보고가 있었다. 학자들은 인체에 상주하는 이 바이러스가 에이즈 바이러스의 감염과 증식을 억제하는 구실을 한다는 해석을 내놓고 있지만 아직 메커니즘이 상세히 밝혀진 건 아니다.
또한 박테리아만을 감염시키는 바이러스인 ‘박테리오파지’가 인체에 끼치는 역할도 자세히 조명되고 있다. 그동안 많은 장내 미생물 연구에선 장내 박테리아의 생태계가 어떻게 구성되어 있느냐가 인체 건강과 질병에 영향을 준다는 보고들이 잇따랐는데, 박테리오파지 바이러스가 장내 미생물 생태계에 상당한 영향을 끼칠 수 있어 결국에 사람 몸에도 간접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2015년 미국 연구진은 생물학저널 <셀>에 박테리오파지가 장내에 증식할 때 장내 박테리아의 종 다양성이 줄어든다는 실험 결과를 발표했다. 바이러스가 장내 미생물 생태계의 불균형을 일으켜 질병의 요인이 될 수 있다.
특히 큰 관심은 암세포만을 골라 감염시키는 이른바 ‘항암 바이러스’다. 김광순 연구위원은 “자연에 존재하는 바이러스 중 몇 종은 암세포에서만 선택적으로 증식하며 암세포 사멸을 일으킬 수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고 전했다. ‘빠르게 분열하는 세포’를 골라 감염시키는 바이러스가 존재하며, 빠르게 분열하는 특성을 지닌 암세포가 이런 바이러스의 공격 대상이 되는데 암세포는 게다가 바이러스 대항 체계도 잘 갖추지 못해 손쉽게 무너질 수 있다는 것이다.
윤채옥 한양대 생명공학과 교수의 연구실은 암세포만을 표적으로 삼아 사멸시킬 수 있는 바이러스 치료제를 연구하는 연구실들 중 한 곳이다. 윤 교수는 “암세포에만 감염, 증식해 암세포를 선택적으로 사멸시키는 다양한 종양 살상 바이러스가 개발돼 미국, 유럽, 오스트레일리아 등지에서 일부 암종의 치료제로 지난해부터 시판되기 시작됐다”며 “국내에서도 우리 연구실을 비롯해 여러 회사들이 종양 살상 바이러스 치료제를 개발 중”이라고 전했다.
균형 깨질 때 생기는 게 질병
우리 몸 안에서 조용히 기거하는 바이러스들의 정체는 무엇일까? 우리 면역계와 어떤 영향을 주고받는 걸까? 인체의 또 다른 동거자인 박테리아와 바이러스의 관계는 어떠할까? 아직 이런 물음들은 충분히 설명되지 않고 있으나 여러 추론이 나오고 있다.
이런 온순한 바이러스들이 아기의 정상적인 면역체계 발달을 돕는 구실을 하며, 뚜렷한 증상 없이 약한 염증을 일으켜 평시에 면역계를 자극하고 활성화해 다른 질병을 억제하는 구실을 할 수 있다. 또한 기나긴 생명진화 과정에서 인체의 디엔에이(DNA) 안에 ‘화석’처럼 자리를 차지한 오래된 바이러스 염기서열 흔적들은 인체가 질병과 싸우는 면역 전쟁에서 어떤 도움을 주고 있을지도 모른다.
인체 미생물과 바이러스에 관한 연구들은 우리 몸이 거대한 생명복합체임을 보여준다. 윤 교수는 “우리 몸은 2만4000여개의 유전자, 수십조개의 세포, 1000억개의 뉴런(신경세포) 등으로 복잡하게 이뤄지는데 무수한 박테리아와 바이러스도 더해져 우리 몸은 짐작하기 힘들 정도의 복잡한 초거대 복합체”라며 “유기적으로 정교하게 작동하는 초거대 복합체의 균형이 깨질 때 나타나는 현상이 질병이라고 말할 수 있다”고 말했다. 김 연구위원은 “우리의 디엔에이, 단백질, 세포가 이뤄내는 생명현상만으로 다 이해할 수 없는 여러 현상이 인체 안팎의 박테리아, 바이러스, 곰팡이와 인체 면역계가 주고받는 상호작용을 통해 이해될 수 있다는 인식이 커지고 있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