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바빌로니아 포로시대(주전 586-538년)
1) 성전 멸망과 바빌로니아 유배(流配)
기원전 721년 북이스라엘이 앗시리아로부터 멸망당한 후 남유다는 여러 왕들의 개혁과 발전 의지를 통하여 독립을 계속 유지해 왔다. 드러나 약소국가인 유다는 강대국인 이집트와 바빌로니아 사이에서 생존권을 유지하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유다의 마지막 왕인 시드기야(Zedekia)는 예언자 예레미아의 강력한 권고(렘 27장)에도 불구하고 국제 질서의 변화에 적절히 대처하지 못한 채 바빌로니아와 맺은 맹약을 깨뜨 리고 이집트에게 기울어지고 말았다. 이러한 약소국가의 반역은 대제국 바빌로니아의 느브갓네살 왕의 신속하고 강력한 응징을 불러들인 결과를 가져오고 말았다.
주전 589년 정월 예루살렘은 포위되었으며, 3년 5개월의 포위는 급기야 이스라엘의 멸망을 가져왔다. 예레미아는 이미 선언하기를 "바빌로니아 왕을 섬기지 아니하리라 하는 선지자의 말을 듣지 말라. 그들은 너희에게 거짓을 예언하여서... 내가 그들(유대인)을 그 땅(바빌로니아)에 머물러서 밭을 갈며 거기 거하게 하리라"(렘 27:9b,11) 하였다. 예루살렘의 함락과 성전의 파괴는 이스라엘의 삶을 크게 변화 시켰다.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정치적 수도일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의 종교적, 신앙적 삶의 뿌리를 두고 있는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이러한 모든 삶의 터전을 상실한 채 바빌로니아에서의 유배 생활을 시작해야만 했다.
2) '이산'(Dispersion)과 '포로'(Exile)
예루살렘 멸망 이 후 가장 중요한 외적인 변화 가운데 하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산'(離散)이다. 익숙한 표현 바빌로니아 '포로'(捕虜)는 유다가 완전히 멸망당한 이후에 일어난 일시적인 강제 이주를 암시하는 것으로써 유다 백성의 극히 일부만이 바빌로니아로 포로로 잡혀갔다는 사실만을 의미하는 용어이다.
성경의 기록에 의하면 4,600명의 유다 백성이 세 차례에 걸쳐 사로잡혀 갔다(렘 52:28-30)*. 이 숫자는 고작 당시의 전 주민의 5퍼센트를 넘지 않는다. 물론 수많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하였으며(cf.애2:11-21;4:9f.), 상당수의 사람들은 자의 및 타의에 의해 팔레스틴을 빠져 나가 바빌로니아보다 훨씬 가까운 이집트(왕하 25:26; 렘 42장), 페니키아, 시리아, 요르단 동편 등지로 흩어져 나갔다. 반면, 계속 팔레스틴에 남아 거주하였 던 다수의 유대인들(겔 33:24)은 비록 정치적 독립을 상실한 땅에서 살아가면서도 나름대로의 전통 문화와 관습에 충실하였다. 비록 이스라엘의 중심적인 역할에서는 벗어낫지만 이들은 새로운 이방 문화와의 접촉을 통한 영향을 비교적 적게 받고 살았다는 점에서 역사적 소임을 한 것으로 보여 진다.
*그러나 다른 보고는 제1차 추방 때에만 약 1만 명이었다(왕하 24:14-17).
이처럼 이스라엘의 멸망은 백성들을 이산 집단과 계속 팔레스틴에 머물러 살아가는 거주 공동체로 나누어 놓았으며, 시간이 흐를수록 두 집단 사이의 구조적, 문화적 차이는 커져갈 수밖에 없었다. 또한 바빌로니아로부터 귀향하게 될 때 이산 공동체 일부는 예루살렘으로 돌아오지 않고 여전히 바빌로니아에 남게 되었다. 여하튼 바빌로니아로부터 돌아온 복귀 공동체와 팔레스틴에 남아 있던 거주 공동체 사이의 갈등은 이 시대의 가장 중요한 사회적 특징으로 요약된다.
3) 바빌로니아의 유대인
바빌로니아에 잡혀간 유대인들은 유다의 정치적, 종교적, 지적 지도층에 속한 자들이었다. 이들은 비록 수적으로는 소수였지만 이스라엘의 신앙에 새로운 방향성을 부여하면서 이스라엘의 장래를 설계하게 될 사람들이었다.
바빌로니아의 식민 정책은 비교적 온건하였다. 북이스라엘을 멸망시킨 앗시리아의 경우, 식민지의 지도자들을 추방하고 본토인들에게 이주와 혼 혈(混血)의 정책을 시행하여 식민지의 백성들을 지배자 집단과 동화시킴으로써 식민지의 정치, 종교, 사회, 문화를 모두 파괴하고 말살시키려 하였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바빌로니아의 느브갓네살은 제국 국민의 집단 이주 등의 정책은 실시하지 아니하였다. 다만 미스바에 관청을 둔 그달리야에게 권한을 위임하여 그 땅의 주민들을 다스리도록 하였다.
그달리야가 그 땅에 남아 있던 왕족에게 암살을 당한 후(왕하 25:25; 렘 41:1-3) 주변의 암몬, 에돔 사람들이 팔레스틴에 들어와 약탈을 일삼 았던 사실을 고려한다면, 바빌로니아의 팔레스틴에 대한 관심은 그다지 크지 않았다고 여겨진다. 나아가 느브갓네살의 후계자인 아멜 마르둑(Amel Marduk, 기원전 561-559년)은 감옥에 오랫동안 갇혀 있던 여호야긴왕을 석방시켜 자유롭게 하는 등 유대인들에게 비교적 우호적이었다(왕하 25:27-30; 렘 52:31-34). 이러한 바빌로니아의 식민 정책은 바빌로니아로 강제 이송된 유대인들의 포로생활에도 영향을 미쳤다. 이때의 일들을 기록한 성경의 여러 구절들을 살펴보면, 포로민들은 주로 황폐한 농업 지역에 정착하여 포로수용소 같은 집단을 조밀하게 건설하고 살았으며(cf. 겔 3:15; 스 2:59; 8:17; 시 137), 어느 정도 자유로운 생활을 할 수 있었다(렘 29:5-7; cf.겔 8:1; 14:1; 33:30f.). 토착민들과 포로민들 사이의 법적인 차별은 발견되지 않으며, 비교적 안정된 가운데 생활해 나갔던 것으로 여겨진다.
전혀 새로운 문화적 배경을 가진 바빌로니아에서의 포로생활은 유대인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신앙과 전통에 관하여 재정립하도록 하였다. 성전 예배를 계속할 수 없었던 이들로서는 새로운 예배 형식을 개발해 내지 않으면 안 되었고, 예배에 필요한 문서들의 작성을 요청받게 되었다. 여기서 율법 교사들의 역할과 지위가 부각되기 시작하였으며, 다양한 의견을 가진 다양한 종파들이 생겨나기 시작하기도 하였다. 나아가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가려는 희망과 소원은 암담한 그들의 현실 속에서 점차 싹터오기 시작하였다. 이들이 꿈꾼 희망은 제2의 출애굽 같은 정치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야훼의 전적인 능력으로 인한 종말론적 회복이었다: "내가 너희를 만민 가운데서 모으며, 너희를 흩은 열방 가운데서 모아내고 이스라엘 땅으로 너희에게 주리라"(렘11:17).
4) 팔레스틴의 유대인
팔레스틴에 남아 있던 유대인들은 "가난한 땅의 백성들"(암 하레츠, am ha-are
tz,왕하 24:14; 25:12)이라 불리었는데, 이들의 경제적 조건은 매우 열악했던 것으로 보여 진다. 당시의 황폐해진 도시와 농경지에 관해서는 고고학적 발굴 결과가 증명해 주고 있으며, 이는 과다한 과세와 소작으로 인한 영세성이 주원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유대인의 자기정체성을 유지하고 보전하는 주체로서 그 역할을 담당하였다. 폐허가 된 예루살렘에서는 세겜, 실로, 사마리아 등지에서 온 자들과 함께 예배가 드려졌으며(렘 41:4-8), 이 제의는 추방을 면한 하위직 사제들이 관장하는 동물 희생 제사였다. 특히 성전 멸망을 기념하는 금식 기간 중에는 애가와 시편 70편, 105편, 106편 등이 공적으로 읽혀졌다(슥 7:2-7; 8:18-19). 한편, 일부에서는 예루살렘 중앙집권화로 인하여 뒤로 물러났던 이전의 지방 제단들이 복구되면서, 이스라엘 종교에 혼합주의적 현상이 다시 나타나기도 하였다(렘44:16-17). 특히 사마리아인들의 그리심산 제의는 대표적인 이 시대의 모습이었다.
5) 포로생활과 이스라엘의 신앙
이스라엘에 몰아닥친 엄청난 재앙은 절망에 빠진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신앙에 관하여 근본적인 질문을 하도록 하였다: 하나님께서 스스로 자신의 거처로 삼으신 거룩한 예루살렘 성전이 이방인들의 손에 의해 유린된 이유는 무엇인가, "영원한 기업"으로 삼으시겠다는 다윗 왕에 대한 약속은 파기된 것인가 하는 질문들이 그것이다(사 63:19; 겔 33:10; 37:11). 이러한 질문들은 이 시대에 이르기까지 한 번도 제기된 적이 없었는데, 지금까지의 이스라엘은 언제나 인종적으로나 제의적으로 잘 정의된 하나의 단일 공동체를 의미했었기 때문이었다.
모든 것을 망가뜨린 이러한 시련 속에서도 이스라엘은 이러한 질문들에 대한 답변들을 단순한 물리적인 생존보다 중요하게 생각하고, 이에 관한 신학적 해명을 제시하면서 미래에 대한 소망의 불꽃을 살려 나갔다. 이러한 작업은 백성들과 함께 바빌로니아로 잡혀갔던 예언자 예레미아와 에스겔에 의해 준비되었다. 이들은 멸망을 하나님의 심판으로 받아들임과 동시에, 새로운 미래를 위해 이스라엘을 준비시키는 과정으로 해석하면서 하나님과의 "새로운 계약"을 통하여 새로운 공동체를 형성해 나갈 것을 역설하였다(렘 31:31). 특히 그들은 귀환의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다. 의심할 여지없이 포로 공동체의 대부분은 자기들의 처지가 잠정적이라는 것을 의식하고 있었으며, 미래에 대한 이러한 긍정적인 희망은 강력하게 형상화 되었다(겔 40-48장). 새로운 공동체에 대한 이상은 유대인들로 하여금 자신들만이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이라는 의식 속에서 싹터 나갔는데 이것은 곧 이방 제의나 문화와의 단호한 격리주의적 조처로 이어지면서 불가피하게 배타주의적 성격을 띠게 되었다.
이러한 신학적 경향은 유대인들로 하여금 이 세계를 선과 악의 대결 구도로 이해하게 하면서, 하나님의 공의와 악의 문제에 관하여 많은 관심을 갖도록 하였다. 바로 이 시기에 쓰여진 작품들에서 천사, 사탄, 악마, 귀신 등의 주제가 자주 등장하기 시작하며, 아울러 하나님의 사후 심판과 상급에 관한 신앙이 널리 퍼지기 시작하였다. 특히 임박하게 예정된 '하나님의 날'에 있을 심판과 미래에 대한 완성의 희망은 점차 일관된 체계 를 갖춘 종말론적인 역사의식으로 발전해 나가면서, 묵시문학과 묵시문학적 사상의 태동(胎動)을 가져오게 하였다.
또, 그들은 성전이 없이도 유지될 수 있는 새로운 공동체를 구상하면서 율법의 중요성을 강조해 나갔다. 이스라엘의 신앙을 지켜주는 두 기둥-성전과 율법-중에서 파괴된 성전에 대한 재건의 희망과 열정이 식었다고 말할 수는 없으나, 율법을 보다 강조함으로써 성전대신 율법을 중심으로 한 디아스포라 공동체의 재편은 자연스런 것이었다. 즉, 새로운 공동체의 재건이라는 목표는 바로 율법을 통하여 이룩될 수 있다고 믿었다. 성문화된 토라가 바로 이 시기에 정리되어 최종 편집된 사실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이런 의미에서 이스라엘은 필연적으로 율법 중심의 유대교(Judaism)를 출현시켰다.
5. 제2차 성전시대(주전 538년~주후 70년)
근동 지방의 국제 정세의 변화에 따른 이스라엘의 멸망은 민족의 강제적 이동과 추방, 그리고 새로운 백성들의 이주, 이민 등을 발생시켰다. 따라서 이런 인구의 대단위 이동으로 인하여 근동의 다양한 문화와 사상들의 교류가 생겨나게 되었으며, 이러한 변화에 적응하기 위한 새로운 사조(思潮)들의 발흥(勃興)은 이 시대의 특징을 이루고 있다. 특히 이스라엘 백성들의 경우, 바빌로니아와 페르시아를 거쳐 헬라, 로마로 이어지는 열강들의 지배를 팔레스틴 현지는 물론 유배지와 디아스포라(이주지) 등에서 겪게 되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그들은 과거의 전통과 새로운 사조들과의 충돌과 갈등을 경험하고, 또한 그 결과, 다양하고 복잡한 사상을 낳게 되었는데 이것은 곧 이스라엘의 새로운 종교 전통으로 연결되어 발전하게 되었다.
흔히 "신구약 중간사"(The Intertestamental Period)라 일컬어지기도 하는 이 기간은, 이스라엘 백성이 바빌로니아의 포로 생활을 거쳐 본토로의 귀향 그리고 세계적 제국 페르시아, 헬라(그리이스)에 의한 지배는 물론, 마침내 로마에 의한 예루살렘의 멸망 등으로 이어지는 약 600여년의 기간을 말한다. 이스라엘은 이 기간 동안 매우 복잡하고 다양한 변화를 경험하게 되었는데, 그 결과 유대교와 구약성서를 산출해 내었다. 그리고 마침내 이 시대 말기에 예수와 예수 운동, 원시 기독교가 탄생한 것이다.
1) 페르시아 시대의 유다(주전 538~331년)
페르샤 왕 고레스는 주전 539년 바빌론을 정복하였으며, 유대인들이 유다로 돌아가서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도록 허락하였다. 그들이 여러 어려움에 부딪혀 성전 거축 사업은 주전 515년이 되어서야 완료되었다. 주전 445년 느헤미야는 유다로 돌아가서 예루살렘의 성벽들을 보수하고 그곳에 유대인들의 부속주(州)를 건설하도록 하라는 허락을 받았다. 아마 주전 397년, 에즈라는 우리의 성서의 처음 다섯 책들이었을 하나님의 율법 기록을 가지고 바빌론으로부터 유다로 돌아왔다. 이 기록은 예루살렘 유대 공동체 생활에서 규례로 사용될 것이었다.
(1) 고레스의 칙령(勅令)과 이산(離散) 공동체의 귀향
메소포타미아 동쪽 고지대에서 발흥한 신흥 페르시아 제국의 고레스(Cyrus, 기원전 539-529년)는 주전 539년, 바빌로니아의 수도에 무혈 입성하였다. 바빌로니아의 세력은 느브갓네살이 죽자 급속도로 기울었다. 신바빌로니아의 마지막 왕인 나보니두스(Nabonidus, 기원전 555-539년)의 실정(失政)에 불만을 품고 있던 바빌로니아의 관리들과 사제들은 고레스의 편이 되었고 고레스의 무혈입성을 환영하였던 것이다. 이로써 페르시아는 동쪽의 인도 국경으로부터 서쪽의 그리이스 맞은 편 에게해, 남쪽의 이집트에 이르는 바빌로니아 제국의 두 배가 넘는 영토를 다스리는 대제국이 되었다.
고레스는 일부 피지배 민족들에게 상당한 자율권을 부여하고, 그들의 고유한 문화 및 종교생활을 존중하는 이른바 개화된 페르시아 정책을 발표하였다. 기원전 538년 신년 축하식(New Year Festival)에서 고레스는 [고레스 칙령](The Edict of Cyrus)을 발표하였는데, 예루살렘 성전의 재건에 관하여 언급하였다: “바사왕 고레스는 말하노니 하늘의 신 여호와께서 세상 만국으로 내게 주셨으니 나를 명하사 유대 예루살렘에 전을 건축하라 하셨나니...”(스 1:2-4; cf. 6:3-5). 성경의 이 본문은 히브리어가 아닌 칙령의 언어(당시의 국제어)인 아람어로 기록되어 있다.
적어도 고레스의 이 칙령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서 하나의 꿈같은 사실이었다. 예언자 이사야는 고레스를 일컬어 “나의 기름 받은 고레스”(사 45:1)라 하였으며, 동시에 “그는 나의 목자”(사 44:28)라 불렀다. ‘기름 받은’의 히브리어는 메시아(Messiah)를 의미하는 말이며, ‘목자’ 역시 일반적으로 ‘하나님’을 지칭하는 용어이다. 고레스에 대한 이사야의 칭호는 곧 그의 등장이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인지를 단적으로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윗 왕조의 회복(cf.사11:1-10;54:10)과 성전의 중건(사44:28, 45)이라는 그들의 꿈같은 희망을 이방의 왕 고레스를 통하여 이루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구원사적 사건으로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2) 성전 건축과 반대자들
고레스의 칙령이 포고된 직후 페르시아의 왕실은 포로민 유대인들의 대표단을 예루살렘으로 파견하여 공동체 재건을 위한 정지(整地) 작업을 하도록 지시하였다(스1:5-11;5:13-15). 이 일을 맡은 첫 번째 유다 총독은 다윗 왕가에 속한 세스바살(Scheschbazzar)이었다(스 1:8). 그가 귀환할 때 어느 정도의 유대인들은 바빌로니아 상부 도시에 여전히 남아 있었다.그는 제1차로 약 사천여명의 귀향자들을 이끌고 바빌로니아에게 빼앗겼던 제기(祭器)들을 품고 예루살렘에 도착하였다(스 2장, 느 7장).
예루살렘에 도착한 세스바살이 시행한 가장 중요한 일은 예루살렘 성전의 기초를 놓는 일과 귀향자들의 거주지를 마련하는 일이었다. 그는 성전 건립을 위하여 금전과 헌물을 헌납 받았고, 백성들로부터 세금을 징수하였다. 그러나 이 일은 여러 가지 갈등과 재정난으로 인하여 고레스의 후계자인 캄비세스 2세(Cambyses II, 기원전 529-522년)의 통치 기간에 이르기까지 아무런 진전이 없었다. 세스바살은 또한 귀향자들의 지방분산 정책을 시행하였는데 이는 일종의 강제 조처였기 때문에 상당한 반발과 불만이 내재된 것이었다. 이러한 불만은 성전 재건이라는 명분에 얼마동안 잠잠하였으나, 점차 지역 간의 갈등과 충돌로 말미암아 벽에 부딪히게 되었고 특히 귀향 공동체와 그 땅에 계속해서 머물러 살던 토착민 공동체 사이에 점차 심화되는 현상을 낳게 되었다.
한편, 페르시아의 왕 캄비세스 2세가 이집트 원정 후 메데인들의 폭동 소식을 듣고 귀국하던 길에 시리아에서 사망하자, 그의 뒤를 이어 다리우스 1세(Darius I, 기원전 522-485년)가 등극하였다. 그는 여러 지방에서 일어난 폭동을 진압한 후 확고한 왕권을 가지게 되었으며, 주전 520년 예루살렘 총독에 스룹바벨(Zerubbabel)을 임명하였다(학1:1). 스룹바벨은 유다의 첫번째 총독인 세스바살의 조카요, 여호야긴의 손자였다. 그는 선임자의 사업을 계속 추진하였다. 특히 예루살렘 성전의 재건 사업은 그에게 있어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사업이었다. 그는 적절한 협력자를 찾았는데 역시 포로에서 귀향한 대제사장 여호수아(Joshua,학 1:1,14)와 예언자 학개와 스가랴가 바로 그들이었다.
성전은 주전 520-515년 동안에 스룹바벨과 여호수아의 감독 하에 착실히 건설되었다(스 5:1-2; 학 1:1-2:9; 슥 4:9). 이때 예언자 학개와 스가랴는 성전 재건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면서 백성들을 격려하였다(학1:2-3).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전 공사는 다리우스 1세 제2년인 기원전 520년에 강제로 중단되었다(스 4:23-24).
이때의 상황은 자세히 알 길이 없지만 매우 큰 좌절과 역경의 시기로 여겨진다. 먼저, 팔레스틴의 유대 공동체는 인구가 약 20,000명을 넘지 못했던 극히 작은 규모였다. 희박한 인구 밀도(느7:4)는 성전 공사를 어 렵게 만드는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또한 경제적인 궁핍은 그 자체가 힘겨운 일이었다. 흉작(학1:6-11;2:15-17)으로 양식이나 의복을 구하는 일조차 어려웠다. 가장 곤혹스러운 사실은 성전 공사를 방해하는 자들의 문제였다. 계속해서 유다 땅에서 살아 왔던 유대인들은 여러 가지 이유로 이주자들의 유입과 성전 건축을 원하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 성전재건사업은 감당하기 벅차고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성전 건축을 반대하였던 자들을 "유다와 베냐민의 대적"이라 불렀으니, 연구에 의하면 이들은 앗시리아에 의해 멸망당한 후에도 여전히 팔레스틴에 머물러 살았던 사마리아인(Samaritians)들로 밝혀졌다. 귀향한 유대인들은 그들을 가르켜 귀족이나 제사장 그룹에 속하지 않은 자들을 통칭하던 "땅의 백성"(am haaretz)이라는 칭호로 불렀던 것이다. 본래 이들의 갈등은 표면적으로 유다에 남아 있던 사람들이 귀향한 자들에게 성전 건축을 함께 하자고 제안하였으나, 스룹바벨이 이를 거절한데서 비롯된다(스 4:1-6).
그러나 드디어 예루살렘 성전은 "다리오왕 제6년 아달월 3일에 필역하였다"(스 6:15). 성전 봉헌일인 이 날은 마침 유월절 축제와 겹쳐졌다(스 6:16-22). 이 해가 바로 기원전 515년이었다. 이로써 “이 나라들은 70년 동안 바빌로니아 왕을 섬기리라”는 예레미아의 예언(렘 25:11)과 “예루살렘의 황무함이 70년만에 마치리라”는 다니엘의 예언(단 9:2b), 그리고 “70년 동안...금식하고 애통하리라”는 스가랴의 예고(슥7:5)가 성취된 셈이다.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은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함으로써 위기를 극복하고 새로운 제의 공동체를 세워나갈 준비를 완료한 셈이었다.
(3) 에스라와 느헤미아의 개혁운동
주전 515년 성전 재건 이 후 주전 458년 학사 에스라(Ezra)가 부임하기까지 반세기가 넘는 동안의 유대인 공동체에 관하여 우리는 아는 것이 별로 없다. 유다 총독 스룹바벨은 더 이상 언급되지 않는데, 이는 예루살렘 성전이 재건된 후 총독보다는 성전의 대제사장의 역할이 더 부각되었기 때문으로 추측된다. 특히 성전 건축에 적극적으로 반대하고 나섰던 사마리아의 귀족들조차 예루살렘의 종교적 지위를 인정하고 예배한 것으로 알려졌다(슥2:11;8:23; 사56:3-7). 그러나 성전 건축 이후 유대인 공동체의 모습과 그 공동체의 장래는 여전히 불투명했다.
구약 성경에서 아하수에로(Ahasuerus, 스4:6)로 나오는 페르시아의 크세르크세스(Xerxes, 주전 486-465년)는 다리우스 왕가를 잇는 왕으로서 매우 강력했다. 크세르크세스의 아들이며 후계자인 아르닥크세르크세스(Artaxerxes, 주전 464-424년)는 성경에서 아닥사스다(Arthahsasth)로 불리는데 이집트까지 그의 세력을 떨쳐 나갔다. 이때 아닥사스다는 불투명했던 팔레스틴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었고, 유대 학사 에스라와 유다 총독 느헤미아를 파견하여 유다의 새로운 변화를 위한 전기가 마련되었던 것이다.
에스라는 아닥사스다왕 제7년(기원전 458년)에 예루살렘으로 올라왔다(스7:7-8). 그는 이스라엘 하나님 야훼께서 주신바 모세의 율법에 익숙한 학사(sofer,스7:6)였으며, 제사장 가문의 고급 관리였다(스7:1-5). 그는 바빌로니아로부터 백성들, 제사장들, 레위인들, 노래하는 자들, 문지기들 도합 약 1,500여명과 그 외의 많은 재물을 가지고 귀향하였다(스8장).
에스라의 주요 관심은 모세의 율법(Torah)을 중심으로 개혁을 단행하여 새로운 이스라엘 공동체를 재건하는 일이었다. 특히 그는 당시의 귀족들과 제사장 계층 사이에 유행하던 이방 여인들과의 국제결혼을 강력히 거부하면서 예루살렘에 성회를 베풀고 “하나님 앞에서 죄를 자복하고...이 땅의 족속들과 이방 여인을 끊어 버리라”(스10:11)고 설교하였다. 그리고 에스라는 이방 여인을 취한 자의 일을 조사(스10:16-17)하여 그 명단을 모두 공표하였다(스 10:18-44). 아마도 그의 과격한 개혁 조치들은 여러 귀족들로부터 상당한 반대에 직면하여 더 이상 추진하지 못한 채 중 단된 것으로 추측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스라는 가장 위대한 율법학자, 새로운 모세로 인정되었다(느8:4은 출24:1,9의 모방이다). 그가 취한 일련의 조치들은 근본적으로 새로운 이스라엘 공동체를 모세의 율법을 토대로 세우려 했다는 점에서 성공 여부를 떠나 큰 의미를 가진다.
한편, 하가랴의 아들 느헤미아(Nehemiah)가 유다 총독으로 부임하게 된 것은 "아닥사스다왕 제20년"(느1:1;5:14)이었다. 연도로는 기원전 444년인 셈이다. 그는 본래 페르시아의 관료로 활동적이고 유능한 사람이었다. 그가 파견되던 때의 예루살렘은 아직 요새화 되지 않았고 인구가 매우 적은 도시였다(느 2:3-5). 예루살렘에 도착한 그는 성문과 성벽, 그리고 새 총독의 관저를 건축하였다. 역시 많은 반대와 방해가 있었으나 이 일은 52일 만에 완성되었다(느 3-4장; 6:15). 느헤미아는 개혁 사업을 활발하게 진행하였으나(느1:1-7:4;11:1-13:31), 부임한지 12년 후인 주전 432년에 페르시아로 돌아간 것으로 여겨진다(느5:14;13:6a). 그 다음해인 주전 431년에 다시 예루살렘에 돌아와 활동하였으나 그 모습에 관하여 성경은 침묵을 지키고 있다(느13:6ff.). 에스라와 마찬가지로 그는 반대자들로부터 조직적인 방해를 받으면서(느4:7-12) 더 이상 그의 과업을 수행할 수 없는 어떤 상황이 벌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느헤미아가 취한 일련의 조치들 가운데 핵심적인 내용은 일종의 도시 재건사업이었다. 그는 예루살렘 축성과 더불어 유다 인구의 10분의 1을 추첨으로 선별하여 예루살렘으로 이주시킨 것이다(느 11:1). 이 조치는 성벽 재건을 강력히 반대하고 나선 사마리아의 산발랏(느4:1), 암몬의 토비아(느4:3), 아랍의 게셈(느2:9), 그리고 아스돗인(느4:7) 등을 상당히 위축시키는 작용을 하였다. 느헤미아는 또한 안식일 준수를 엄격히 시행 하고(느10:31;13:15-22), 외국 여인들과의 국제결혼을 반대하였으며(느10:30;13:23-31), 모국어인 히브리어를 잃어버린 사실을 책망하였다(느 13:24,cf.8:8). 그러나 그가 취한 가장 강력한 조치가운데 하나는 역시 부채 탕감이었다. 특권을 이용하여 이익을 얻는 부자들과 이로 인하여 부채를 짊어지고 살아가는 가난한 자들 사이의 계층 분화가 유다의 안정을 해치는 심각한 위협이 되자 취한 조치였다. 느헤미아는 자신과 측근들에게 지급되는 식량권 조차 포기한다(느 5:14-19). 그러나 이와 같은 급진적인 개혁은 두 계층 간의 갈등을 해소하기 보다는 한 쪽만을 위한 개혁 조치였다는 점에서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말았다. 결국 그가 취한 조처는 "그 땅의 사람"들과의 분리 정책으로서(느 10:29-31) 상당수의 귀족들의 반대에 부딪혀 페르시아로 돌아가고 만 듯하다. 그의 뒤를 이어 그의 형제 하나니(Hanani)가 유다의 총독으로 부임하였으나, 그가 취한 조치들에 관하여는 기록이 없다.
(4) 페르시아 시대의 유대인의 종교생활
페르시아의 개막과 함께 큰 희망으로 시작된 귀향과 예루살렘 성전의 재건의 역사는 적어도 외형적으로는 목표를 달성한듯하나 유대 사회의 내면적 갈등과 분열은 이 시대의 흐름을 혼돈으로 규정하고 있다. 이 공동체는 과거의 체제를 되살리지도 못하고 또 반대로 미래지향적인 새로운 공동체를 완성하지도 못한 매우 불완전한 시대에 놓여 있었다. 느헤미야 이후부터 알렉산더 대왕의 등장까지 팔레스틴의 역사에 관하여 성경은 침묵하고 있으며, 성경 밖의 자료도 매우 빈약하여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매우 적고 불확실하다. 이러한 상황 가운데서 많은 문학 작품이 생산되는데, 이들 가운데 일부는 바빌로니아와 페르시아로부터 받은 영향과 풍조를 반영하고 있다. 이 시대의 문학 작품들이 비록 저자가 속해있는 공동체의 입장을 대변해 주고 있지만, 이들을 통하여 이 시대의 다양한 모습을 어느 정도 확인해 볼 수 있다.
적어도 이 시대는 예루살렘 성전이 재건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 성전이 모든 유대인-팔레스틴내의 유대인과 디아스포라의 유대인-을 하나로 묶어주는 역할을 담당하지 못하였다. 사마리아인들은 그리심산에 세 운 그들의 성전에서 예배하였으며, 이집트의 엘레판틴(Elephantine)에 머물던 유대인 공동체는 자신들의 성전과 제의 형식을 지니고 있었다. 물론 이들이 예루살렘의 성전과의 교류를 단절하지 않고 있다 하더라도, 적어도 전통적인 유대교의 입장에 통합되어 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이러한 상황에서 에스라, 느헤미아의 급진적인 개혁조치들은 특히 포로로부터 귀환한 공동체(유대인들)와 그 땅에 남아 있었던 공동체(사마리아인들) 사이의 관계를 악화시켜 신약성서에서 보는 바와 같이 결국 돌이킬 수 없는 상태로 몰고 간 것으로 보여 진다.
에스라-느헤미아서를 통해 우리는 유대인의 종교 생활의 일면 특히 분리주의자와 동화주의자 사이의 갈등을 볼 수 있으며, 정경 외 문헌인 토 빗(Tobit)과 유딧(Judit)서에서는 이 시대의 예배 의식의 발달 과정을 엿볼 수 있다. 또한 이방 문화와의 동화를 꾀하려는 룻기(Ruth), 유대인의 민족구원을 강조하는 에스더서(Esther) 등을 통하여 이 시기의 다양한 경향성을 엿볼 수 있다. 유대교가 이방의 여러 문화들과의 접촉을 통하여 내외적으로 근본적인 변화를 경험해 가는 일종의 과도기에 처해 있었다고 추정되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어떤 통일적인 종교생활보다는 다양한 생활 방식, 가치관, 사상 구조 등이 형성되고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2) 그리이스 시대의 팔레스틴<기원전 331-63년>
그리이스의 알렉산더 대제는 지중해 연변의 거대한 지역과 페르샤 제국을 포함한 근동지방을 정복하였다. 그의 사후(死後)에 그의 후계자들은 제국을 여러 분리된 왕국들로 나누어 통치를 계속하였다. 주전 323년부터 주전 198년까지 유대인들은 에집트를 다스리던 프톨레메오가(家)에 의해 지배를 받았으며, 이어서 셀류커스(Seleucus)가(家)가 유다를 지배하게 되었다. 셀류커스가의 안티오쿠스(Antiochus) 4세는 유대교를 파괴하고 그리이스 관습들을 유대인들에게 강요하려고 하였다. 마카비가(家)로 알려진 일단의 유대인들은 안티오쿠스 4세에 대한 저항을 주도했으며, 비록 그들의 나라가 아직도 그리이스 제국의 일부였으나, 마침내 유다를 다스리는 그들 자신의 왕들을 세우게 되었다(하스모니안 왕조). 그러나 얼마 후에 마카비가(家) 내에서 벌어진 분쟁을 틈타 로마인들은 유다문제에 개입하였고(주전63년) 이제 유다는 로마에 속하게 되었다.
(1) 알렉산더 대왕의 등장과 헬레니즘
① 알렉산더 대왕(주전 336-323년)
소년 시절 아리스토텔레스의 가르침을 받은 마게도니야의 빌립의 아들 알렉산더(기원전 336-323년)는 희랍의 도시국가들을 통합한 후, 기원전 333년에, 그라니쿠스(Granicus)와 이소스(Issus)에서 페르시아의 다리우스(Darius) 군대를 패퇴시키고 새로운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였다. 이집트로 진군하는 알렉산더를 맞은 시리아-팔레스틴은 제대로 저항 한 번 못한 채 항복하였다. 알렉산더의 동방 원정은 바빌로니아와 수사, 페르세폴리스 및 인더스강에 이르기까지 계속되었다. 그는 33세의 나이로 병에 걸려 죽었지만, 그의 짧은 생애는 고대 오리엔트의 삶과 역사에 새로운 시대의 개막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약 1,500여 년 동안이나 팔레스틴에 거의 절대적인 영향력을 끼쳐왔던 이집트, 바빌로니아, 페르시아 등은 알렉산더의 등장 후로 팔레스틴의 역사의 무대로부터 물러나게 되었다. 알렉산더의 등장은 팔레스틴 뿐만 아니라 근동의 정치사 및 문화사의 새로운 장을 맞게 된다.
② 동방과 서방의 만남과 헬레니즘(Hellenism)
알렉산더의 동서 세계의 통합(Cosmopolitanism)이라는 원대한 꿈은 그가 동방의 인도까지 점령하면서 서서히 실현되기 시작하였다. 그의 이상은 희랍의 스토아(Stoa) 철학에 기초한 것으로서 '하나의 세계', '하나의 시민권'으로 통합을 이루는 것이었다. 나아가 그의 동서 문화의 통합이라 는 꿈은 단지 한 문명이 다른 문명을 침식하고 정복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여러 문화를 통합시켜 나가는 혼합주의(Syncretism) 현상을 그 바탕으로 삼고 있다. 이러한 특징의 사상 체계를 헬레니즘(Hellenism)이라 부른다.
알렉산더의 꿈은 그가 비빌로니아에서 말라리아에 걸려 33세의 젊은 나이로 죽게 되어 완성되지는 못하였으나, 그의 영향력은 수 세기 동안 동서양의 사상적, 정치적, 경제적 교류의 길을 열어 놓았다. 특히 팔레스틴은 지정학적 위치 때문에 이러한 역할을 성실히 수행하는 길목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으며, 헬레니즘의 영향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은 유대인과 비유대계 그룹간의 정치적 사건, 종교적 경향, 사회적 특성, 문화적 혼합 등의 상호 작용을 통하여 급진적이고도 커다란 변화를 맞게 된다. 이 시기에 쓰여진 벤 시라(Ben Sira)서는 헬라 문화가 유대 전통 문화에 얼마나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작품이다. 유대인들의 헬라 문화와의 접촉과 동화(同化)는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알렉산더와 그의 후계자들은 헬레니즘을 가장 효과적으로 전파해 가기 위하여 도시(Polis)를 건설하고, 도시 문화를 정착시켜 나갔다. 시민들에 게 시민권(Politeia)을 부여하고, 원로원을 두어 소위 민주 의회 제도를 시행하였다. 도시는 극장, 목욕탕, 경기장, 및 체육관의 시설을 갖춘 헬라식으로 건설되었다. 이 시기에 건설된 헬라식 도시로는 세바스테(사마리아), 프톨레미(악고, 행21:7), 스키도폴리스(벧산), 필라델피아(암만) 등이 있다. 그러나 그리이스 문화 중에서 가장 결정적인 영향력은 헬라어(Greek)를 통하여 퍼져나갔다. 헬라어 방언인 코이네(Koine)는 새로 출현한 세계의 공용어로 발전하였으며, 근동에서 사용되던 아람어(Aramaic)를 밀어내고-물론 얼마간은 이중 언어(lingua franca)로 남아 있었지만- 정치와 행정, 상업과 철학을 위한 언어로 자리매김하였다.
팔레스틴에 많은 그리이스의 문학과 신화가 소개되면서 당시 시민들의 생활양식, 신앙, 철학 등은 변화되기 시작하였다. 그들의 이름은 점차 헬라식 이름이 가미된 이중 이름을 가지게 되었으며, 도시의 이름들로 바뀌 어 갔다. 유대인들에게 영향을 미치기 시작한 헬라 문화와 사상은 그들로 하여금 헬라적 문화에 몰두하도록 하여 점차 유대인의 고유한 율법과 관습을 저버리도록 만들게 되었다. 이때 이러한 경향에 심한 적개심을 가진 바리새인들과 같은 유대인들이 생겨나게 되면서 점차 문화적 계층 간의 심각한 위기 상황의 국면으로 달려가게 되었다.
③ 알렉산더의 후계자들(Diadochi)
기원전 323년 알렉산더 대왕의 갑작스러운 죽음 후, 마게도니아와 그리이스의 장군들의 권력 장악을 위한 투쟁이 시작되었다. 이 힘겨루기에서 승리한 자들을 헬라어로 디아도키(diadochi, 후계자)라 부르는데, 알렉산더의 고향 마게도니아를 차지한 안티고누스(Antigonus)와 이집트 및 리비아를 차지한 프톨레미(Ptolemy) 그리고 시리아-팔레스틴과 페르시아를 장악한 셀류커스(Seleucus)가 그들이다. 팔레스틴은 프톨레미와 셀류커스 왕국 사이에 위치하여 기원전 320년부터는 프톨레미의 지배를 받아 오다가 기원전 200년부터는 셀류커스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 프톨레미 왕조(기원전 320-200년)
헬라어로 '전사(戰士)'라는 의미의 프톨레마이오스(Ptolemaios)는 알렉산더의 가장 유능한 장군 가운데 하나였다. 알렉산더가 죽자 그는 재빠르게 이집트를 장악하였으며, 알렉산드리아를 수도로 정하고 팔레스틴 정벌을 나섰다. 기원전 312년 가자에서 승리한 그는 예루살렘과 유다를 차지하면서 그 세력을 시리아-팔레스틴 전 지역으로 뻗어 나갔다. 그는 상당수의 유대인과 사마리아인들을 이집트로 끌고 가 리비아의 동북부에 정착시켰다. 그는 마게도니아의 안티고누스로부터 공격을 당하였으나 격퇴하였으며, 페니키아 해안의 통치권을 확보하였다. 그의 후계자인 프톨레미 1세(306-285년 B.C.E.), 프톨레미 2세(285-246년 B.C.E.), 그리고 프톨 레미 3세(246-221년 B.C.E.)로 이어지는 프톨레미 왕조는 셀류커스 왕조와의 경쟁 가운데 고대 이집트의 땅을 헬라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지역으로 만들어 갔다. 프톨레미 왕조의 수도인 알렉산드리아(Alexandria)는 매우 왕성한 상업과 무역으로 놀라운 문화를 이룩하였으며, 당시 수 십 만권의 장서를 갖춘 도서관은 너무나 잘 알려진 곳이었다. 또 이곳에서는 프톨레미 2세의 명령으로 히브리어 성경이 헬라어로 번역되어 희랍어 성경(Septuagint, LXX)을 출간하기도 하였다. 희랍어 성경의 출간은 유대인들과 이방인들 간의 의사소통을 위한 길을 열어 놓았으며, 동시에 헬라 사상이 유대인들의 정신세계에 영향을 미치게 되는 계기도 마련하였다. 이 시기의 유대인의 이집트 거류는 급속히 증가하였으며, 프톨레미 1세는 다수의 유대인을 이집트의 용병으로 데려가 거주시켰다. 유대인들은 이집트의 도처에 흩어져 살았으며 알렉산드리아는 흩어져 사는 유대인의 중심지가 되었다.
팔레스틴 자체는 이집트의 프톨레미 왕조에게 있어서 그리 중요한 곳이 되지 못하였다. 다만 페니키아 지방의 풍부한 삼림 자원을 이집트 지역으로 옮기기 위해 악고(Acco)라 불리던 항구를 크게 만들면서 프톨레미아(Ptolemia, cf.행 21:7,"돌레마이")라 칭하였다. 해안과 내륙을 연결하는 도로가 건설되면서 팔레스틴은 행정적, 경제적 발전이 시작되었다. 예루살렘은 이러한 프톨레미 왕조의 정책에 의해 마치 중심부에서 격리된 성역처럼 취급되었으며, 유대인의 정신적 지도자인 대제사장에 의해 상당히 자치적으로 다스려졌다. 대제사장은 매년 약 20달란트*를 황실에게 지불하면서 정치적, 종교적 권한을 위임받아 가지고 비교적 평화로운 시대를 보내고 있었다.
*1달란트는 6000드라크마이고, 1드라크마는 양 한 마리의 값에 해당되었다.
주전 3세기 말, 셀류커스 왕조의 안디오커스 3세(Antiochus III)는 예술 애호가요 여성 찬미가인 프톨레미 4세를 공격해 왔다. 프톨레미 4세는 기원전 218년 라피아(Raphia)에서 그들을 격퇴시키는 데는 성공하였으나, 프톨레미 왕조 내의 귀족들은 서서히 반기를 들기 시작하였으며, 왕국은 점차 쇠퇴해 갔다. 이 때 예루살렘의 대제사장인 오니아스(Onias) 3세는 매년 내는 황실세를 중단하였다. 그러자 프톨레미 왕조는 유다를 군사적 식민지로 만들겠다고 위협하였고 마침 재력있는 토비아(Tobias) 가문의 요셉(Joseph)이 황실세를 대신 지불함으로써 위기를 모면하였다. 그러나 계속되는 셀류커스 왕조의 공격은 급기야 기원전 200년 프톨레미 4세를 몰아냄으로써 팔레스틴은 새로운 주인을 맞이하게 되었다.
㈏ 셀류커스 왕조(기원전 200-167년)
주전 200년 파네이온(Paneion) 전투에서 승기를 잡은 안디오커스 3세는 팔레스틴에서 100년을 통치하던 이집트의 프톨레미를 쫓아낸 후 소아시아, 트로이카, 및 마게도니아로 진격하였다. 동쪽으로부터 서쪽으로의 정복 길인 셈이었다. 그러나 그는 패전을 거듭하면서 엄청난 전쟁 배상금의 부채를 안고 주전 187년 엘리마이스(Elymais)에서 암살당하고 말았 다. 선왕의 부채를 안고 후계자의 자리에 오른 셀류커스 4세(주전 187-175년)는 그의 동생이었다. 그가 부채를 갚기 위해 예루살렘의 성전 금고를 탐낸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전에 팔레스틴을 정복한 안디오커스 3세는 이집트의 프톨레미 5세를 자신의 사위로 삼아 예루살렘으로부터 받던 황실세를 계속 받을 수 있는 권리를 가지도록 하였기 때문에, 이 일을 맡았던 토비아 가문의 요셉은 계속적으로 중요한 지위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셀류커스 4세가 등극하면서 예루살렘의 성전 금고를 탐내게 되면서 유다의 귀족들과의 정치적 갈등이 시작되었다. 당시 예루살렘의 성전 금고는 요셉의 아들 힐카누스(Hyrcanus)가 관리하고 있었는데, 시리아의 총독 헬리오도로스(Heliodorus)는 예루살렘 민중의 소요와 반감을 두려워한 나머지 이 일을 중단하였다. 유대인들은 이 일을 기적으로 여기며 축하하였다.
얼마 후 헬리오도로스의 뒤를 이어 그의 동생 안티오커스 4세(주전 175-164년)가 왕위를 계승하였다. 안티오커스 4세는 기본적으로 선왕의 정치 노선을 이어 받았으나, 스스로를 제우스의 현현(顯現; epiphanes)라 불렀으며, 자신을 올림피아의 제우스로 숭배하도록 하였다. 그는 예루살렘에 제우스 신전을 짓고 이러한 자신의 정책을 시행하기 위하여 문화적, 종교적 강압 정책을 사용하였다. 이러한 그의 정책이 토착 종교를 탄압할 의향을 가지고 시작된 것은 아니었으나, 과거로부터 전승되어 오던 소수 민족의 토착 제의를 헬레니즘적인 삶의 양식으로 대치하려했다는 의미에서 결과적으로 격렬한 반발을 불러일으키고야 말았다. 그의 정책은 예루살렘의 개방적인 헬라주의자들에게는 협력과 지지를 얻었으나, 유대 율법에 충실한 자들에게는 심한 반대에 부딪히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적어도 경건한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안디오커스는 가장 나쁜 폭군이었다. 나아가 프톨레미 왕조의 정책과는 대조적인 셀류커스 왕조에 대한 유대인들의 반감은 민족 내의 서로 다른 이상을 가진 다른 계층 간의 갈등을 자극하였으며, 급기야 시민전쟁으로 비화되기에 이르렀다.
(2) 마카비(Maccabee) 전쟁(기원전 167-134년)*
① 마카비 전쟁의 배경
안디오커스 4세는 이집트 원정을 떠나기 전에 먼저 유다의 헬라화 정책을 발표하였다. 보수적인 사독(Zadok)계의 대제사장 오니아드(Oniads) 3세의 동생 야손(Jason)은 그의 형과는 달리 매우 진보적이고 헬레니즘적인 성향을 가진 자였는데, 그는 왕에게 헬라화를 위한 일련의 조치들을 제안하면서 기원전 174년에 대제사장으로 임명되었다. 야손은 예루살렘 성 안에 경기장(Gymnasion)과 청년훈련소(Ephebeion)를 건축하고, 청년단을 결성하는 권한을 얻는 조건으로 왕에게 150달란트를 바쳤다. 그는 온갖 형태의 헬라화 정책을 적극적으로 실천하였다.
*마카비 전쟁의 배경과 과정 그리고 마카비 형제들의 무용담은 구약 외경인 마카비1, 2서에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안디오커스 4세가 제1차 이집트 원정(주전 170-168년)에 나간 사이에 야손은 기원전 171년 성전 경비대장의 형제요 사제 가문에 속하지 않았던 마넬라우스((Menelaus)에 의해 축출되었다. 그 역시 왕에게 돈을 바치고 대제사장의 직을 사들인 자였다. 그의 임기 동안 예루살렘은 그리이스식 도시로 건설되었으며, 체육학교(gymnasium)를 세워 유대 청년들에게 그리이스의 운동경기를 보급시켰다. 또한 왕에게 약속했던 뇌물을 조달할 수 없게 되자 그는 성전의 기물들을 내다 팔기 시작하였다.
기원전 168년, 제2차 이집트 원정을 실패하고 돌아온 안디오커스 4세는 자신의 실추된 정치적 위신과 경제적 부담을 해결하기 위해 팔레스틴을 헬라화 시키는 종교 정책을 발표하였다. 그는 예루살렘성전 위에 '파멸의 우상'을 세웠으며, 율법책을 불살랐다. 그리고 성전의 기물들을 약탈해 갔다. 그의 이러한 종교 정책의 목적은 반유다적이라기보다는 그 당시의 만성적인 재정 적자의 상황을 벗어나려는 의도의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조치는 그동안 헬라주의자(Hellenizer)와 전통주의자들 사이의 종교-문화적 갈등과 계층 간의 정치적 대립의 양상을 증폭시키는 작용을 하였으며, 이는 안디오커스 3세에 의해 어느 정도 보장된 유대인의 종교적 자유를 빼앗는 명백한 배교 행위로 간주되었다. 정통주의 신앙을 가진 유대인들은 이 행위를 '황폐케 하는 가증한 일'(단 11:31; 12:11)로 규정하며, 종교적 자유를 위한 투쟁을 시작하였다. 이러한 저항은 전에 느헤미아와 그를 따르던 자들이 행했던 개혁 운동의 영향을 받은 자들에 의해 진행되었다. 그들은 율법에 충실한 자들로서 제사장 가문의 출신들이 중심이 되었다. 이러한 저항은 맛다디아(Mattathias)의 다섯 아들에 의해 조직적으로 시작되었는데, 그 가운데 가장 출중한 유다 마카비(Judas Maccabee)*의 이름을 따서 ‘마카비 일가’ 혹은 '마카비 전쟁'이라고 일컬어졌다. 이 마카비 가문은 귀족에 속하지 않은 지방의 사제 가문으로서 토비아 가문과는 달리 헬레니즘화를 거부하였던 것이다.
*마카비는 히브리어로 ‘망치’라는 뜻이다. 유다의 강인한 품성을 짐작하게 하는 그의 별명이다.
유대의 헬라화 과정은 마카비와 토비아 두 집단 사이의 적대 행위에 의해 이용되었으며, 두 집단 사이에 있었던 많은 유대 백성들은 분명한 입장에 서지 못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발생한 마카비 전쟁은 유다와 헬라와의 대결이라는 형식보다는 유다 공동체 내의 헬라주의자들(Hellenizing Party)과 민족주의자들(National Party) 간의 시민전쟁(Civil War)의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었다. 특히 헬라의 정책에 동조하면서 개인의 이익을 누리던 제사장을 포함한 귀족 계층들은 전통적인 율법에 대한 이해를 크게 달리하면서 헬라화 정책에 앞장섰으며, 또한 그들은 헬라식 교육과 생활을 장려하던 자들로서 헬라 문화를 통한 유대교의 개혁을 부르짖었다. 마카비 가문을 포함한 전통주의자들은 이에 전혀 동조할 수 없었고, 그들 간의 대립과 갈등은 급기야 시민전쟁의 양상으로 발화하게 된 것이다.
② 유다 마카비, 요나단, 시몬(주전 167-141년)
기원전 167년 안디오커스 에피파네스 4세는 정치적, 문화적 통합을 목 적으로 다음과 같은 칙령을 내렸다:
*유대인들은 이교도들의 관습을 따를 것.
*성소 안에서 제사 행위를 금함.
*안식일과 기타 축제일을 지키지 말 것.
*성소와 성직자들을 모독할 것.
*이교의 제단과 성전과 신당을 세울 것.
*돼지와 부정한 짐승을 희생 제물로 잡아 바칠 것.
*사내아이에게 할례를 주지 말 것.
*음란과 더러운 일로 스스로 몸을 더럽힐 것.
*율법서를 저버리고 모든 규칙을 바꿀 것.
*이상과 같은 명령을 따르지 않는 자는 사형에 처한다
이 무렵 모디인(Modi'in)에는 맛다디아(Mattathias)라 하는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제사장 가문의 아들이었다. 그는 정부가 파견한 제의 관리들에게 "왕의 영토에 사는 모든 이방인이 왕명에 굴복하여 각기 조상의 종교 를 버리고 그를 따른다 작정하였다 하더라도 나와 내 아들들과 형제들은 우리 조상들이 맺은 계약을 끝까지 지킬 결심이오"(마카비1서 2:19-20)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는 이 선언에 개의치 않고 제의를 드리려고 나선 한 유대인을 쳐 죽이고 이어 왕의 사신까지 죽여 버렸다. 곧 그는 그의 다섯 아들을 데리고 유다 광야로 나아가 그곳에서 의병을 조직하고 헬라주의의 신봉자들과 맞서 싸웠다. 그들의 목표는 어디까지나 종교의 자유와 예루살렘에서의 성전 제의의 회복이었다. 이 때 율법에 열심인 하시딤(Hasidim)*도 합세하였다.
*하시딤(Hasidim)은 안식일에 무기를 들지 않는 등 본래 소극적인 저항을 하였으나, 후에 투쟁적인 마카비 일가에 합류한 것이다. 이 하시딤에서 바리새파, 에세네파 그리고 쿰란공동체가 나왔다. 쿰란공동체는 아마도 세속(世俗)에서 벗어나려 한 하시딤의 일부로 여겨진다.
기원전 166년 맛다디아가 유언을 남기고 죽은 후 그의 셋째 아들인 유다 마카비(Judas Maccabee, 주전 166-160년)가 지휘관이 되었다. 그는 그가 전사한 160년까지 "사자처럼 용맹했다"(마카비1서 3:4). 그는 종교 적이기보다는 군사적이고 정치적인 역량을 가진 유다 민족의 영웅이었다. 그와 그의 군대는 유다의 여러 도시를 다니면서 "하나님을 배반한 자들"을 찾아 진멸시켰다. 시리아의 군대 장관은 리시아(Lysias)였으며, 그에게 는 "하나님을 배반한 유대인들"이 따르며 전투에 참여하였다. 유다 마카비는 벧 호론(Beth-Horon), 엠마오(Emmaus), 벧 쥬르(Beth-Zur) 등지에서 승리하였다. 이어 예루살렘에서 "황폐케하는 가증한 것"인 제우스 제의를 제거하였다. 그들은 예루살렘에 가증한 것이 들어선 이후 3년 반(단 7:25, cf.계 12:6)만인 주전 164년 12월 25일에 레위인의 희생 제사를 부활시킨 것이다. 이를 기념하는 축제가 해마다 열렸는데 그것이 바로 하누카(Hanukkah), 즉 성전봉헌일이었다(cf.요10:22).
주전 164년 안디오커스 4세가 페르시아에서 갑자가 사망하자 그의 뒤를 이어 등극한 안디오커스 5세(주전 164-162년)는 그의 나이 겨우 10세였다. 이 때 시리아의 군대 장관 리시아(Lysias)는 섭정관이 되어 유다 반란군을 본격적으로 토벌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의 군대는 벧 사가리야(Beth-Zacharia)를 격파한 후 예루살렘을 포위하였다. 그런데 바로 이 때 왕위를 노리는 리시아의 정적(政敵) 필립비(Philippi)가 페르시아로부터 시리아를 공격해 오자 리시아는 급히 철군하고 말았다. 이어 셀류커스의 아들 데메드리오 1세(Demedrio I, 주전 162-150년)가 등극하면서 헬라 주의자 알키모스(Alcimus)를 대제사장으로 임명하였다. 또 그가 임명한 니가노르(Nikanor) 장군은 사정없이 유대인을 공격하였으나, 예루살렘을 포위한 그는 벧 호론 전투에서 사망하였다. 그러나 그 후 얼마동안 유지된 그들과의 평화는 주전 160년 베레아 전투에서 이스라엘의 영웅 유다 마카비가 전사하게 되자 곧 깨어지고 말았다: “유다가 죽은 후 이스라엘 전 영토에서 율법을 저버린 자들이 머리를 들기 시작하였고 악을 일삼는 자들이 사방에서 나타나기 시작하였다”(마카비1서9:23).
유다 마카비의 후계자는 막내 요나단(Jonathan, 주전 160-142년)이었다. 그는 형 유다와는 달리 그가 지닌 비상한 외교술로 그가 활동하던 기간에 일어난 국제 정치의 변화에 매우 적절히 대응하였다. 즉 셀류커스 왕가의 데메드리오 1세보다 안디오커스 왕가의 알렉산더 발라(Alexander Balas, 150-145B.C.E.)에게 더 접근하면서 이익을 취하였다. 또 로마 등과 관계를 맺으면서 국제 정치의 변화에 유연하게 대처하였다. 그는 여러 전투에서 승리하였는데 데메드리오 1세가 화친을 요청하여 얼마간의 평화의 기간을 맞이한다. 요나단은 기원전 152년 예루살렘 성을 수축하고 맞은 초막절에 스스로 대제사장(kohen hagadol)이 되어 사제복을 입었다.
이로써 마카비 일가의 힘은 견고해졌으며, 이어 주전 150년에는 요나단이 왕으로서 자색 옷을 입고 당당히 나서게 되었다. 이제 왕과 대제사장의 역할을 동시에 담당하게 된 것이다. 이것은 하스모니안(Hasmonian) 일가가 유다의 공식적인 통치권을 가지게 되었다는 명백한 증거였고 따라서 예루살렘에 성전이 세워진 후 계속되어 오던 사독 가문의 제사장의 전통은 무너지게 된 셈이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외교적 기술은 한계를 가지게 되었다. 왕이 되려는 야망을 가진 시리아의 야전군 사령관인 트리폰(Tryphon)은 요나단을 매우 강력한 경쟁자로 인식하면서, 주전 143년 벧 샨(Beth-Shean), 즉 스키토폴리스(Scythopolis) 전투에서 요나단을 포로로 잡아 처형하였다.
요나단의 뒤를 이은 시몬(Simon, 기원전 142-135년)은 요나단과 유다 처럼 많은 성과를 올렸다. 특히 그는 요나단과는 정 반대로 데메드리오 2세(145-138 B.C.E.)와 동맹을 맺으면서 그로부터 세금을 면제받는 특권을 얻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시몬은 “유대인의 대사제이며, 사령관이며, 지도자”로 불리게 되었으며, 그는 또한 표면에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새긴 독립적인 화폐를 주조하였는바, 이것은 곧 이스라엘의 독립을 상징하는 사건이었다. 이로써 유대인들은 모디인에서의 반란 이후 25년간의 전쟁이 끝나고, 주전 586년 예루살렘이 멸망한 이후 약 444년 만에 처음으로 주전 142년에 다시 독립국가를 세우게 된 것이다. 이로부터 79년 동안(142-63 B.C.E.)에 걸친 하스모니안 왕국(Hasmonean Kingdom)의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종교적 자유'를 쟁취하기 위한 이들의 노력은 '정치적 자유'를 얻는데 까지 이른 것이다.
시몬은 그가 이끄는 군대를 욥바(Joffa)에 보내 안디오커스 4세 아래 주둔하고 있던 외국인들을 몰아냈으며, 게젤(Gezer)을 점령하고 그곳에 자신의 왕궁을 짓고, 그의 아들 요한 힐카누스(John Hyrcanus)를 그 도시의 사령관으로 임명하였다. 나아가 시몬은 141년 B.C.E. 주민들의 환 호 속에 예루살렘 요새를 점령하고 이 날을 경축일로 정하였다. 또한 그는 로마와는 물론 스파르타와의 동맹을 갱신하였으니, 온 유다백성들은 모여 시몬에 대한 찬사를 보내며 그의 지도에 따를 것을 다짐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번영과 평화의 시대는 마카비1서 14:8-15에 잘 나타나 있는데 마치 묵시문학적 환상(암 9:11-15; 미 4:4; 사 32:15; 35:1-10 등)이 성취된 모습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마카비의 다섯 형제가 영웅적인 헌신으로 싸우던 30년간의 마카비 전쟁은 기원전 134년 시몬의 죽음으로 막을 내리지만, 존폐의 위협에 놓였던 이스라엘을 구한 영웅적인 기간이었다. 유다는 다시금 종교적 및 정치적 자유를 쟁취하여 한 왕조의 시작에 동참하게 된 것이다.
(3)하스모니안 왕조(Hasmonean Kingdom)
여하튼 유대는 시몬의 치세 때인 주전 142년을 새 시대의 원년으로 생각했다(마카비1서13:41ff). 비록 시몬과 그의 아들들이 시몬의 사위 프톨레미에 의해 여리고 근처에서 살해되었지만, 다른 지방에서 군대를 지휘하고 있던 그의 아들 요한이 프톨레미보다 먼저 예루살렘에 입성하여 대제사장과 통치자가 되어 하스모니아 왕조는 지속되었다. 요한 힐카누스는 예루살렘의 백성들의 지지로 권좌에 올랐는데, 영역을 넓히기 위해 용병(傭兵)을 사용하였으며, 그리심산의 사마리아 성전을 파괴하고 강제로 이두메 사람들에게 할례를 하여 유대화하려고도 하였다. 다윗이나 아론의 후손도 아닌 그가 성직과 세속권력을 동시에 장악하고 이런 정책을 펴는 것을 바리새인들은 반대하였고 이에 힐카누스는 사두개파를 지지하였다.
주전 104-103년에 아리스토불루스 1세가 대제사장으로 잠시 통치했는데 그는 그의 어머니를 굶어 죽게 하고 형제 안티고누스를 죽였으며 갈릴리와 이투래아를 유다에 통합했다. 103년 그의 미망인이 그의 형제 알렉산더 요나단을 왕과 대제사장으로 만들고 그와 결혼했다. 그는 트랜스 요르단과 사마리아 지역을 점령하고 헬라 도시들을 유대화했다. 그러나 따돌림 당하던 바리새인들이 시리아의 데메트리우스 3세와 손잡고 내란을 일으켰지만 요나단이 승리하여 6000명이나 되는 반역자들을 살해하였다. 주전 76년에 요나단의 미망인 알렉산더 살로메가 왕위를 계승했다. 그리고 바리새인들과 화해하려는 의도에서 아들 힐카누스 2세를 대제사장으로 임명했다.
살로메가 주전 67년에 죽자 힐카누스의 형제 아리스토불루스는 사두개인들의 협조로 힐카누스 2세를 몰아내고 잠시 왕과 제사장이 되었다. 힐카누스는 이두메의 안티파테르와 나밧의 아레타스의 지원을 얻어 예루살렘을 포위하여 아리스토불루스를 공격했다. 이때에 로마의 폼페이 장군이 시리아로 진군하여 예루살렘을 장악하고는 힐카누스를 대제사장으로 세우고 아리스토불루스는 로마로 끌고 갔다. 이런 상황에서 가장 큰 이익을 얻은 사람은 안티파테르였는데 로마가 안정된 통치를 위하여 그를 의지했기 때문이다. 그는 후에 로마로부터 유대 행정장관(procurator)이라는 직책을 받았고 그의 가문은 로마의 후광아래 계속 팔레스틴을 통치했다. 그의 아들이 예수님이 태어날 당시의 헤롯 대왕이었다. 여하튼 종교권력과 정치권력이 분리되었다. 교회와 국가는 늘 불편한 동반자이다. 이 둘을 결합하려는 유대인의 시도는 우리에게 커다란 교훈과 숙제로 다가온다.
*구약성서 역사서 부분(신명기역사와 역대기역사)이 역사가 아닌 이유는 성서 자체에 이미 증언되어 있다. 첫째, 신명기역사서의 편찬자들은 자신들이 편찬하는 기록물이 다른 역사 자료들을 참조했음을 밝혔다(왕상11:41, 14:19, 15:7). 둘째, ‘신명기역사’가 말 그대로 ‘역사’라면 ‘역대기역사’는 존재하지 않아야 한다. 그러나 ‘신명기역사’가 있음에도 많은 시대적 부분이 그와 겹치는 ‘역대기역사’의 존재 이유는 이들이 ‘역사책’으로서보다는 ‘역사 해설서’에 가까운 책임을 반증한다. 구약성서-성경의 수집, 편찬자들은 이스라엘 역사의 신학적 해설서가 하나(신명기역사)로는 흡족할 수 없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