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5-02-12 15:34
바빌로니아 포로시대(주전 586-53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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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웹섬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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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빌로니아 포로시대(주전 586-538년)

 

1) 성전 멸망과 바빌로니아 유배(流配)

기원전 721년 북이스라엘이 앗시리아로부터 멸망당한 후 남유다는 여러 왕들의 개혁과 발전 의지를 통하여 독립을 계속 유지해 왔다. 드러나 약소국가인 유다는 강대국인 이집트와 바빌로니아 사이에서 생존권을 유지하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유다의 마지막 왕인 시드기야(Zedekia)는 예언자 예레미아의 강력한 권고(렘 27장)에도 불구하고 국제 질서의 변화에 적절히 대처하지 못한 채 바빌로니아와 맺은 맹약을 깨뜨 리고 이집트에게 기울어지고 말았다. 이러한 약소국가의 반역은 대제국 바빌로니아의 느브갓네살 왕의 신속하고 강력한 응징을 불러들인 결과를 가져오고 말았다.

주전 589년 정월 예루살렘은 포위되었으며, 3년 5개월의 포위는 급기야 이스라엘의 멸망을 가져왔다. 예레미아는 이미 선언하기를 "바빌로니아 왕을 섬기지 아니하리라 하는 선지자의 말을 듣지 말라. 그들은 너희에게 거짓을 예언하여서... 내가 그들(유대인)을 그 땅(바빌로니아)에 머물러서 밭을 갈며 거기 거하게 하리라"(렘 27:9b,11) 하였다. 예루살렘의 함락과 성전의 파괴는 이스라엘의 삶을 크게 변화 시켰다.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정치적 수도일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의 종교적, 신앙적 삶의 뿌리를 두고 있는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이러한 모든 삶의 터전을 상실한 채 바빌로니아에서의 유배 생활을 시작해야만 했다.

 

2) '이산'(Dispersion)과 '포로'(Exile)

예루살렘 멸망 이 후 가장 중요한 외적인 변화 가운데 하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산'(離散)이다. 익숙한 표현 바빌로니아 '포로'(捕虜)는 유다가 완전히 멸망당한 이후에 일어난 일시적인 강제 이주를 암시하는 것으로써 유다 백성의 극히 일부만이 바빌로니아로 포로로 잡혀갔다는 사실만을 의미하는 용어이다.

 성경의 기록에 의하면 4,600명의 유다 백성이 세 차례에 걸쳐 사로잡혀 갔다(렘 52:28-30)*. 이 숫자는 고작 당시의 전 주민의 5퍼센트를 넘지 않는다. 물론 수많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하였으며(cf.애2:11-21;4:9f.), 상당수의 사람들은 자의 및 타의에 의해 팔레스틴을 빠져 나가 바빌로니아보다 훨씬 가까운 이집트(왕하 25:26; 렘 42장), 페니키아, 시리아, 요르단 동편 등지로 흩어져 나갔다. 반면, 계속 팔레스틴에 남아 거주하였 던 다수의 유대인들(겔 33:24)은 비록 정치적 독립을 상실한 땅에서 살아가면서도 나름대로의 전통 문화와 관습에 충실하였다. 비록 이스라엘의 중심적인 역할에서는 벗어낫지만 이들은 새로운 이방 문화와의 접촉을 통한 영향을 비교적 적게 받고 살았다는 점에서 역사적 소임을 한 것으로 보여 진다.

   *그러나 다른 보고는 제1차 추방 때에만 약 1만 명이었다(왕하 24:14-17).

이처럼 이스라엘의 멸망은 백성들을 이산 집단과 계속 팔레스틴에 머물러 살아가는 거주 공동체로 나누어 놓았으며, 시간이 흐를수록 두 집단 사이의 구조적, 문화적 차이는 커져갈 수밖에 없었다. 또한 바빌로니아로부터 귀향하게 될 때 이산 공동체 일부는 예루살렘으로 돌아오지 않고 여전히 바빌로니아에 남게 되었다. 여하튼 바빌로니아로부터 돌아온 복귀 공동체와 팔레스틴에 남아 있던 거주 공동체 사이의 갈등은 이 시대의 가장 중요한 사회적 특징으로 요약된다.

 

3) 바빌로니아의 유대인

바빌로니아에 잡혀간 유대인들은 유다의 정치적, 종교적, 지적 지도층에 속한 자들이었다. 이들은 비록 수적으로는 소수였지만 이스라엘의 신앙에 새로운 방향성을 부여하면서 이스라엘의 장래를 설계하게 될 사람들이었다.

 바빌로니아의 식민 정책은 비교적 온건하였다. 북이스라엘을 멸망시킨 앗시리아의 경우, 식민지의 지도자들을 추방하고 본토인들에게 이주와 혼 혈(混血)의 정책을 시행하여 식민지의 백성들을 지배자 집단과 동화시킴으로써 식민지의 정치, 종교, 사회, 문화를 모두 파괴하고 말살시키려 하였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바빌로니아의 느브갓네살은 제국 국민의 집단 이주 등의 정책은 실시하지 아니하였다. 다만 미스바에 관청을 둔 그달리야에게 권한을 위임하여 그 땅의 주민들을 다스리도록 하였다.

그달리야가 그 땅에 남아 있던 왕족에게 암살을 당한 후(왕하 25:25; 렘 41:1-3) 주변의 암몬, 에돔 사람들이 팔레스틴에 들어와 약탈을 일삼 았던 사실을 고려한다면, 바빌로니아의 팔레스틴에 대한 관심은 그다지 크지 않았다고 여겨진다. 나아가 느브갓네살의 후계자인 아멜 마르둑(Amel Marduk, 기원전 561-559년)은 감옥에 오랫동안 갇혀 있던 여호야긴왕을 석방시켜 자유롭게 하는 등 유대인들에게 비교적 우호적이었다(왕하 25:27-30; 렘 52:31-34). 이러한 바빌로니아의 식민 정책은 바빌로니아로 강제 이송된 유대인들의 포로생활에도 영향을 미쳤다. 이때의 일들을 기록한 성경의 여러 구절들을 살펴보면, 포로민들은 주로 황폐한 농업 지역에 정착하여 포로수용소 같은 집단을 조밀하게 건설하고 살았으며(cf. 겔 3:15; 스 2:59; 8:17; 시 137), 어느 정도 자유로운 생활을 할 수 있었다(렘 29:5-7; cf.겔 8:1; 14:1; 33:30f.). 토착민들과 포로민들 사이의 법적인 차별은 발견되지 않으며, 비교적 안정된 가운데 생활해 나갔던 것으로 여겨진다.

전혀 새로운 문화적 배경을 가진 바빌로니아에서의 포로생활은 유대인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신앙과 전통에 관하여 재정립하도록 하였다. 성전 예배를 계속할 수 없었던 이들로서는 새로운 예배 형식을 개발해 내지 않으면 안 되었고, 예배에 필요한 문서들의 작성을 요청받게 되었다. 여기서 율법 교사들의 역할과 지위가 부각되기 시작하였으며, 다양한 의견을 가진 다양한 종파들이 생겨나기 시작하기도 하였다. 나아가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가려는 희망과 소원은 암담한 그들의 현실 속에서 점차 싹터오기 시작하였다. 이들이 꿈꾼 희망은 제2의 출애굽 같은 정치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야훼의 전적인 능력으로 인한 종말론적 회복이었다: "내가 너희를 만민 가운데서 모으며, 너희를 흩은 열방 가운데서 모아내고 이스라엘 땅으로 너희에게 주리라"(렘11:17).

 

4) 팔레스틴의 유대인

팔레스틴에 남아 있던 유대인들은 "가난한 땅의 백성들"(암 하레츠, am ha-aretz,왕하 24:14; 25:12)이라 불리었는데, 이들의 경제적 조건은 매우 열악했던 것으로 보여 진다. 당시의 황폐해진 도시와 농경지에 관해서는 고고학적 발굴 결과가 증명해 주고 있으며, 이는 과다한 과세와 소작으로 인한 영세성이 주원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유대인의 자기정체성을 유지하고 보전하는 주체로서 그 역할을 담당하였다. 폐허가 된 예루살렘에서는 세겜, 실로, 사마리아 등지에서 온 자들과 함께 예배가 드려졌으며(렘 41:4-8), 이 제의는 추방을 면한 하위직 사제들이 관장하는 동물 희생 제사였다. 특히 성전 멸망을 기념하는 금식 기간 중에는 애가와 시편 70편, 105편, 106편 등이 공적으로 읽혀졌다(슥 7:2-7; 8:18-19). 한편, 일부에서는 예루살렘 중앙집권화로 인하여 뒤로 물러났던 이전의 지방 제단들이 복구되면서, 이스라엘 종교에 혼합주의적 현상이 다시 나타나기도 하였다(렘44:16-17). 특히 사마리아인들의 그리심산 제의는 대표적인 이 시대의 모습이었다.

 

5) 포로생활과 이스라엘의 신앙

이스라엘에 몰아닥친 엄청난 재앙은 절망에 빠진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신앙에 관하여 근본적인 질문을 하도록 하였다: 하나님께서 스스로 자신의 거처로 삼으신 거룩한 예루살렘 성전이 이방인들의 손에 의해 유린된 이유는 무엇인가, "영원한 기업"으로 삼으시겠다는 다윗 왕에 대한 약속은 파기된 것인가 하는 질문들이 그것이다(사 63:19; 겔 33:10; 37:11). 이러한 질문들은 이 시대에 이르기까지 한 번도 제기된 적이 없었는데, 지금까지의 이스라엘은 언제나 인종적으로나 제의적으로 잘 정의된 하나의 단일 공동체를 의미했었기 때문이었다.

모든 것을 망가뜨린 이러한 시련 속에서도 이스라엘은 이러한 질문들에 대한 답변들을 단순한 물리적인 생존보다 중요하게 생각하고, 이에 관한 신학적 해명을 제시하면서 미래에 대한 소망의 불꽃을 살려 나갔다. 이러한 작업은 백성들과 함께 바빌로니아로 잡혀갔던 예언자 예레미아와 에스겔에 의해 준비되었다. 이들은 멸망을 하나님의 심판으로 받아들임과 동시에, 새로운 미래를 위해 이스라엘을 준비시키는 과정으로 해석하면서 하나님과의 "새로운 계약"을 통하여 새로운 공동체를 형성해 나갈 것을 역설하였다(렘 31:31). 특히 그들은 귀환의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다. 의심할 여지없이 포로 공동체의 대부분은 자기들의 처지가 잠정적이라는 것을 의식하고 있었으며, 미래에 대한 이러한 긍정적인 희망은 강력하게 형상화 되었다(겔 40-48장). 새로운 공동체에 대한 이상은 유대인들로 하여금 자신들만이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이라는 의식 속에서 싹터 나갔는데 이것은 곧 이방 제의나 문화와의 단호한 격리주의적 조처로 이어지면서 불가피하게 배타주의적 성격을 띠게 되었다.

이러한 신학적 경향은 유대인들로 하여금 이 세계를 선과 악의 대결 구도로 이해하게 하면서, 하나님의 공의와 악의 문제에 관하여 많은 관심을 갖도록 하였다. 바로 이 시기에 쓰여진 작품들에서 천사, 사탄, 악마, 귀신 등의 주제가 자주 등장하기 시작하며, 아울러 하나님의 사후 심판과 상급에 관한 신앙이 널리 퍼지기 시작하였다. 특히 임박하게 예정된 '하나님의 날'에 있을 심판과 미래에 대한 완성의 희망은 점차 일관된 체계 를 갖춘 종말론적인 역사의식으로 발전해 나가면서, 묵시문학과 묵시문학적 사상의 태동(胎動)을 가져오게 하였다.

또, 그들은 성전이 없이도 유지될 수 있는 새로운 공동체를 구상하면서 율법의 중요성을 강조해 나갔다. 이스라엘의 신앙을 지켜주는 두 기둥-성전과 율법-중에서 파괴된 성전에 대한 재건의 희망과 열정이 식었다고 말할 수는 없으나, 율법을 보다 강조함으로써 성전대신 율법을 중심으로 한 디아스포라 공동체의 재편은 자연스런 것이었다. 즉, 새로운 공동체의 재건이라는 목표는 바로 율법을 통하여 이룩될 수 있다고 믿었다. 성문화된 토라가 바로 이 시기에 정리되어 최종 편집된 사실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이런 의미에서 이스라엘은 필연적으로 율법 중심의 유대교(Judaism)를 출현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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