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장시대에서 사사들의 시대까지
“구약은 역사 속에서 발생했으며, 그 내용의 많은 부분이 역사와 관련되어 있다. 그러나 그 기록은 신앙의 증언이다.” -베르너 H. 슈미트-
1. 족장시대 (주전 20~15세기)
“우리가 족장들의 생애를 연구할 때, 우리는 역사가 아니라 전설들을 취급하고 있다는 사실을 항상 기억해야 한다.” -데이비드 F. 힌슨-
이 시기에는 유목민들이 메소포타미아와 에집트의 비옥한 땅에 정착하여 농업의 이득을 얻으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그들 중에는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인 이사악, 에사오, 야곱 및 요셉을 포함하는 야곱의 열 두 아들들이 있었다. 그들은 메소포타미아에서 팔레스틴으로, 그 후에 에집트로 이주하였다. 주전 1,550년 이후에 에집트인들은 유목 정착민들로부터 독립을 되찾았으며, 이스라엘 사람들은 에집트의 노예들이 되었다.
1) 족장 이전의 팔레스틴
족장 이전의 팔레스틴의 환경에 관하여는 우리가 아는 사실이 극히 제한되어 있다. 왜냐하면 성경의 역사는 아브라함의 이주 이후의 역사로 부터 취급되어 있기 때문이다. 다만 그동안 고고학적 발굴의 결과로 인하여 족장 이전의 모습에 관하여 대강의 모습을 구성할 수 있는 정도이다.
기원전 2,000년의 팔레스틴을 포함한 고대 근동의 역사는 인종적, 문화적, 정치적 패턴의 대 변혁기였다. 이집트는 신왕조(제18-24왕조, BC 1,570-1,085)의 시작과 함께 막강한 힘을 뻗어 나갔으며, 북쪽의 힛타이트제국 역시 엄청난 세력을 가지고 있었다. 팔레스틴은 이러한 강대국들의 틈에서 여러 차례 침략과 지배를 받게 되었다. 그 후 에돔, 모압, 암몬, 블레셋 등의 세력들이 함께 팔레스틴에 머물며 살면서 가나안의 문화는 주로 도시국가형태를 갖춘 고등문화 수준을 갖추게 되었다. 팔레스틴 지역은 한 통치자(왕)를 중심으로 한 귀족 계급이 형성되었는데, 때로 는 도시국가 간의 동맹 체제를 이루어 중앙 집권 형태의 구조를 가진 제국들과 맞서기도 하였다.
시리아-팔레스틴은 대략 기원전 1,550~1,225년경까지 이집트의 속국에 불과하였다. 최근 발견된 엘 아마르나(El-Amarna) 문서는 이집트의 식민지의 상황을 알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외교 문서로서 이 시대의 가나안의 환경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고 있다. 특히 세겜, 라기스, 아쉬켈론, 예루살렘, 가자 등과 같은 가나안의 도시 국가의 목록과 군대 규모, 정복한 도시 통치자들을 다스리는 방법 등에 관한 다양한 기록을 담고 있다.
2) 아브라함의 이주와 이스라엘의 여명
구약 성경이 말하고 있는 최초의 이스라엘 역사는 이스라엘 백성의 조상인 아브라함에게 내리신 하나님의 명령으로부터 시작된다: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창12:1). 아브라함의 순종은 이스라엘 문명-종교사의 전환점이 된다. 성서 이스라엘의 역사는 팔레스틴의 원주민으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라, 이처럼 메소포타미아의 최고의 도시 우르(Ur) 출신인 한 유목민의 이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는 당시 매우 번창했던 도시 하란(Haran)을 포함한 '기름진 초생달' 지역을 지나 가나안이라 일컬어지는 팔레스틴 땅으로 이주해 들어왔다.
아브라함이 메소포타미아를 떠나 가나안에 입주하던 시기를 정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성서고고학자인 올브라이트(Albright)와 드보(De Vaux) 등은 이 시기를 기원전 2,000-1,500년경의 중기 청동기시대로 잡았으며, 이러한 주장은 유프라데스의 마리(Mari)에서 출토된 문서에서 뒷받침되고 있다. 그러나 코프만(Kaufmann), 고든(Gordon) 등과 같은 다른 학자들은 가나안 정복과 정착 시기와 비슷한 기원전 14세기로 주장하는데, 이러한 주장의 성경적 근거로 “네 자손은 4대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리니”라는 창15:16을 들고 있다. 야곱 이후의 4대는 야곱-레위-고핫-아므람-모세이다.
그런데 성경의 족장들의 이야기에 시대착오적인 기록으로서 ‘약대’가 등장한다는 사실이다(창12:16,24:10,30:43,31:17등). 인간이 낙타를 길들여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12세기였다. 이처럼 성경의 연대는 일반 역사적인 연대와 많은 차이를 가지고 있다(cf.대상7:22-27).
아브라함을 비롯한 족장들이 살던 시대의 삶의 상황과 형태는 반(半)유목문화적 형태를 띠고 있었음에 거의 확실하다. 그들은 “유리하는 아람인”(신26:5)으로써 여기 저기 이주하면서 살았다. 세겜(창12:6,33:18), 베델과 아이(창12:8), 헤브론 근처(창13:18,35:27), 브엘세바(창26:25)등의 중앙산지가 그들의 중요한 거처들이었다. 이곳은 잘 발달된 목초지로 목축에 가장 적합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또 족장 가운데 이삭은 부분적으로 농업을 하기도 하였다(창26:12). 이들은 분명히 사회, 경제적으로 반유목문화의 배경을 가지고 있었다.
유목문화의 특징으로는 ①계절에 따라 이주하는 생활, ②가축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한 조직 사회의 구성-족장을 중심으로 한 씨족이나 부족 사회(각 부족의 특색), ③지파간의 권리 보호를 위한 계약제도 형성(규율), ④계약 위반자에 대한 철저한 피의 복수법(명예), ⑤손님에 대한 융숭한 대접과 친절한 행위(나그네 보호법), ⑥상속법 등을 들 수 있다. 유목민들은 대체로 열려진 광야에서 살면서 종교적이거나 혹은 정치적인 것이거나 간에 그 어떤 속박도 용납하지 않는 자유를 가진 자들이었다.
이러한 족장들의 삶의 형태는 최근 고고학적인 발굴 자료를 통하여 어느 정도 확인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발굴을 통한 자료가 직접적으로 아브라함을 비롯한 족장들에 관한 자료는 아니라 할지라도 그 시대의 문화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특히, 초기 히브리인들의 이름들은 대부분 근동지방의 고고학적 자료에서 나타나는 이름들과 유사한 셈어적 이름들-야곱, 아브람, 나홀, 데라 등-이라는 사실에서 이스라엘의 조상들과 유사한 주민들이 살고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이상을 요약하면 먼저 족장들은 한 곳에 머물러 살지 않았으며, 도시문명지대의 영향권 밖에 머물면서 도시 문명을 건설하지 않았고, 천막을 치고 이주하던 생활 구조를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몇몇 무덤(cf.창23;35:19-20)이 발견된 것을 제외하고는 고고학적인 증거를 거의 발견할 수 없는 것이 특징이다.
다만 아브라함에 관한 유일한 기록으로 남아 있는 구약 성경이 가지고 있는 중요한 관심은 아브라함 이후의 족장들(Partriarchs)은 이스라엘 민 족의 조상으로서 이스라엘 민족의 씨가 확산되는 근거가 되었다는 점과 그들이 살 땅을 유산으로 받았다는 점이다. 이 두 가지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이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창12:2,7).
3) 아브라함-이삭-야곱-요셉
아브라함 이후의 이스라엘의 역사는 소위 족장들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족장들은 단지 고독한 개인이 아니라 꽤 규모가 큰 씨족들의 추장들이었다. 이 시기의 팔레스틴은 수없이 많은 유목민 씨족들로 뒤섞여 있었으며, 이스라엘의 족장들은 이들 가운데 한 집단들을 대표하고 있었다.
아브라함과 그의 아들 이삭, 그리고 야곱으로 이어지는 족장들의 역사와 삶은 대체로 고대 이스라엘의 문화를 잘 반영해 주고 있다. 특히 야곱은 얍복 강가에서 천사와 씨름하면서 [이스라엘](Israel)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는데, ‘하나님과 씨름하다’는 뜻을 담고 있다.
야곱은 4명의 아내로부터 모두 12명의 아들을 두고 있는데, 그들은 이스라엘의 각 지파의 조상이 된다. 레아에게서 낳은 장자 르우벤을 비롯한 시므온, 레위, 유다, 잇사갈, 스블론, 라헬에게서 낳은 요셉 과 베냐민, 빌하에게서 낳은 단과 납달리, 실바에게서 낳은 갓과 아셀이 그들이다(창35:22-26). 이스라엘의 역사는 12지파의 역사로 전개되어 가고 있으며, 각 지파간의 협력과 갈등의 역사이기도 하다.
한편, 요셉의 생애는 문학적으로 잘 구성된 기록을 가지고 있다. 그는 형들의 미움으로 이집트에 팔려 갔으며(창37장), 머슴살이를 시작으로 이집트의 총리대신에 이르기까지 지혜롭게 살아간다(창38-41장). 훗날 가나안 땅에 큰 기근이 들어 야곱과 그의 형제들이 이집트로 내려와 살게 된다(창42-46장). 바로 여기서 요셉의 이야기는 족장들의 약속과 이집트 탈출 사이의 연결 고리를 이루고 있다.
종합하면, 주전 20~18세기 ‘기름진 초생달’ 지역의 북부지역으로 수많은 이주민들이 들어왔으며, 그들은 작거나 큰 조직 사회를 형성하였다. 팔레스틴에로의 이주가 제법 오랫동안 계속되면서 이 지역의 문화를 결정해 나갔다. 특히 족장 중심의 성경 기록은 이 시대의 여러 민족들의 이주와 더불어 이해될 수 있으며, 이들은 각각 개별적인 민족 혹은 부족으로써 존재해 오던 것이 하나의 계보(부족집단)로 결합된 것으로 여겨진다. 그들은 대체로 반유목민의 생활 방식을 유지하고 있었다. 족장들은 각각 씨족의 수호신을 숭배하고 있었으며, 토착적인 종교 제의가 행해졌다.
이러한 여러 각기 다른 전승들이 하나의 체계적인 전승으로 묶여 확장 혹은 손질을 보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전승은 조상들의 역사를 고증하기 위한 전승의 편집이라기보다는 이스라엘 공동체의 영웅적인 조상들을 새로운 사회 종교적 질서의 창립자 또는 선각자로 찬양하기 위한 보도이다.
우리가 알 수 있는 초기 이스라엘의 족장들의 역사는 성경 이외의 이들에 관한 직접적인 자료의 부족으로 다만 추론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족장들의 초기 유산은 이스라엘의 민족의식과 신앙을 형성하는데 중요한 영향을 끼쳐왔으며, 그런 점에서 족장들은 진정한 의미에서 이스라엘의 역사와 신앙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성경에서 이스라엘이 아브라함을 자신의 ‘조상’이라 부르는 것은 역사상 타당한 이유가 없지 않은 것이다(창15:6,롬4:3,히11:8-10).
2. 이집트 탈출(Exodus)과 이스라엘 민족의 형성(주전 15~13세기)
BC 15~13세기경에는 에집트인들이 가장 강력하여 이 시대의 대부분 동안 팔레스틴을 지배하였다. 이때 아브라함의 후손들은 에집트의 노예들이었는데, 하나님이 모세를 지도자로 삼아 그들을 에집트로부터 시나이산으로 인도해 내셨으며, 거기에서 그들은 하나님과의 언약관계를 맺었다. 그들은 하나님에 대한 섬김과 서로에 대한 행동의 지침으로 십계명을 받았다. 이러한 체험 전체는 출애굽(Exodus)으로 알려지고 있다.
BC 13~11세기에는 에집트인들의 세력이 약화되었으며, 팔레스틴에서 일어난 사건들을 별로 통제하지 못했다. 이스라엘 사람들을 포함하는 많은 유목민 종족들은 팔레스틴에서 영토의 지배권을 놓고 싸움을 벌였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팔레스틴으로 인도하였고, 다수의 사사들(Judges)-지도자들의 명칭-이 외국 종족들과의 투쟁에 있어서 그들을 도왔다. 블레셋 사람들은 그들의 가장 위험한 경쟁 대상이었다.
1) 민족의 이동과 '아삐루'
성경 전승에 따르면 아브라함, 이삭, 야곱으로 이어지는 족장들의 보도가 요셉의 이집트에로의 이주 기사(창37장 이하)를 기점으로 팔레스틴의 족장 전승의 흐름이 이집트 이후의 모세 전승으로 옮겨가고 있다. 이러한 성경의 기록에서 이스라엘이 단일한 족보상의 발전 과정을 거쳐 출현하였다는 인상을 받기 쉽다. 그러나 성경의 면밀한 검토와 연구는 이스라엘 민족이 대단히 복잡한 과정을 거쳐 형성되었다는 증거를 보여주고 있다.
이집트로 이주한 야곱의 혈속(nefesh)은 모두 70인이었다(출1:5; cf.창46:8-27). 이집트 사람들은 그들을 '히브리'라 불렀다. 그런데 성경은 400년(창15:13) 혹은 430년(출12:40)간 종살이를 한 후 이집트를 탈출해 나온 사람들을 600,000명의 "이스라엘 자손"과 "중다한 잡족"들이었다(출12:37-38)고 말하고 있다. 이스라엘 사람들과 더불어 탈출한 사람들을 "이스라엘 중에 섞여 사는 무리"(민11:4)라고도 불렀다. 이런 기록들을 비추어 볼 때 이집트로부터 가나안으로 이주한 이들은 이스라엘을 포함한 대규모 하류민 집단이었을 것으로 보여 진다. 조상들의 전승과 관련해서 볼 때 이집트 탈출의 무리들은 이스라엘의 자손들뿐 아니라 전쟁 포로 혹은 노예들이 포함되었고, 노예들의 반란과 탈출이라는 사건이 이스라엘 민족의 이주와 연합되어 이집트 탈출이라는 거대한 역사를 이루고 있는 것으로 보여 진다.
사실 히브리인들의 정체에 관해서도 여러 가지 추론들이 있다. 특히 가장 유력시 되고 있는 학설가운데 하나는 아삐루(apiru)와의 관련설이다. 주전 14세기경의 엘 아마르나 문서(El-Amarna Letters)에는 종종 하비루(hbr)라고 표기된, 침입자들에게 대항하는 상황에서 팔레스틴의 도시 통치자들이 이집트 바로에게 원조를 요청하고 있는 글이 발견된다. 아삐루는 대체로 소아시아, 메소포타미아, 시리아, 가나안 및 이집트 등지에서 땅이나 소유가 없이 사는, 외국의 용병이나 약탈자, 또는 포로민들과 노예들로서, 사회의 가장자리에 뿌리 없이 살아가는 “떠돌이” 혹은 “국외자”였다. 그것은 종족적인 개념이 아니라 사회 계층적인 개념으로 취급되어야 한다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학자들은 이 아삐루를 이브리('ibri, “히브리인”)와 동일시하기도 한다. 구약에서 이브리가 완전한 자유인이 아닌 종이나 남녀에게 사용되었던 것과 같이(출21:2,신15:12), 그것은 “가족과 소속이 없는 사람들”을 지칭하는 말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람들은 주로 외국인이었기 때문에 권리가 없는 약한 외국인을 통칭하는 의미로도 사용되게 된 것이다. 성경은 이스라엘의 조상이 된 "히브리 사람 아브람"을 최초로 말하고 있으며, 가나안에 머물고 있던 사람들 사이로 들어와 거주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창14:13).
2) 연대기와 이집트 탈출의 시기
성경의 본문은 연대기적 골격을 제공해 주는 몇 개의 기록을 남기고 있다. 먼저 솔로몬은 이집트를 탈출한지 480년 후에 성전 건축을 시작하였다고 한다(왕상6:1). 성전의 주춧돌을 놓은 시기는 기원전 967-958년이 확실하다. 역으로 계산하면 이집트를 출발한 시기는 기원전 15세기, 즉 1447-1438년경이 된다. 출 12:40에서는 이집트에서의 체류기간을 총 430년이라고 진술하고 있는데(창 15:13에서는 400년), 이에 의하면 야곱이 이집트로 내려간 것은 기원전 19세기, 즉1877-1868년경이 될 것이다. 이에 성경의 여러 연대표를 통하여 추정해 보면(창47:9; 25:26; 24:5; 12:4) 아브라함이 고향 하란을 떠난 시기는 주전 2092-2083년경이 된다.
그러나 이러한 성경의 연대기는 성경 밖의 여러 자료와 비교할 때 상치되는 점이 많다. 먼저 사마리아 오경(Samaritan Pentateuch)과 70인역(Septuagint)에 제시된 수치가 히브리어 성경(MT)의 그것과 많이 다르다는 점과, 보다 중대한 문제는 15세기 이집트 탈출설을 가정하는 것은 성경에 묘사된 당시 이집트의 정치적 상황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며, 또 고고학적으로 이스라엘이 주전 1400-1250년대에 가나안에는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설명해 주고 있지 못한다는 점이다.
이집트 탈출의 연대를 결정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이집트의 증거 자료의 제시일 것이다. 이집트 탈출 연대를 기원전 15세기로 보는 입장은, 이집트로부터 힉소스족을 몰아낸 투트모스 3세(Thutmosis III, 주전 1468-1436년)는 추정컨대 아시아인을 무척 혐오하게 되면서 그들이 지배하고 있던 히브리 노예들을 가혹하게 억압했을 것이라는 가설을 세운다. 이는 바로에게 총애를 받던 요셉과 그의 가족들이 후에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출 1:8)의 출현으로 학대당하게 되는 것, 또한, 주전 1425-1350년 동안에 가나안의 여러 도시국가들을 무너뜨리며 활동하던 아삐루(apiru)에 관한 엘 아마르나 문서의 언급 등을 성경의 기록과 일치하는 것으로 보는 관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주장은 성경에 나오는 여러 다른 기록과 정황에 관하여는 설명을 하지 못하고 있다. 예를 들면 히브리 노예들이 노역에 시달렸다는 비돔(Pitom)과 라암셋(Ramses)(출1:11)은 텔타 지역의 아름다운 목초지의 도시로서 이집트의 수도인 테베(Thebe)와는 너무 거리가 멀다. 이러한 정황은 오히려 제19왕조의 라암세스 2세(1290-1224 B.C.E.)의 그것과 일치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즉 제19왕조는 델타 평원에 있던 힉소스의 수도인 아바리스(Avaris)에 도시를 재건하여 "라암셋(Raamses)의 집"이라 불렀으며, 그 외에 몇 개의 도시를 건설하고 가나안과 시리아 출정 기지로 삼고자 대규모의 건축 사업을 시작하였다. 이러한 건축을 위해 아시아계의 노예들이 징집되었을 가능성은 상당히 크다.
나아가 기원전 13세기경에 가나안의 몇몇 도시들이 파괴된 고고학적인 증거와 함께 1220년경에 이스라엘을 패퇴시킨 것에 대해 말해 주고 있는 메르넵타(Merneptah)의 승전 비문은 이집트를 떠난 이스라엘 사람들이 기원전 1225-1200년까지는 이미 가나안 내에 머물고 있었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또 이집트 탈출의 과정에서 나타나고 있는 요단 동편의 민족인 에돔인, 모압인, 블레셋인, 가나안 거민들(출15:14-15)은 12세기에 이르러서 가나안에 공존했던 민족들이라는 점도 아울러 지적되고 있다.
요약하면 고대 이집트의 배경에 의거하여 모세 전승을 역사 비평적으로 평가한 결과 이집트 탈출의 가능한 역사적 배경은 기원전 13세기경임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 역시 하나의 가설로서 이집트 탈출 사건이 일어난 시기를 몇몇의 자료로만 결정하기에는 성경의 전승은 너무도 다양하고 복잡하다. 우리는 성경에 기록된 이러한 여러 전승을 충분히 고려한 연대를 확정할 만한 성경 밖의 증거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 다만 모세의 전승이 어떤 역사적 사건과 결부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면, 그것들은 당시의 이집트와 가나안 배경과 이러이러한 방식으로 조화를 이루게 될 것이라고 추론할 수 있을 뿐이다.
3) 지도자 모세의 전승과 역할
모세는 자기 민족을 노예 상태로부터 해방시킨 자로서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우뚝 솟은 지도자로 나타난다. 그는 이집트 노예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그가 태어난 시대는 히브리 사람들이 아들을 낳으면 죽이도록 명 령된 시대였다(출1:22). 석 달을 숨겨 키운 어머니는 그 아기를 갈대 상자에 담아 나일강에 띄운다. 마침 나일강에 목욕을 하러 나왔던 이집트의 공주가 발견하여 궁중으로 데리고 간다. 궁중에서 왕실 교육을 받으며 성장한 그는 그 시대의 몇 몇 히브리 사람들(홉니, 비느하스, 므라리 등)처럼 이집트식 이름을 가지게 된다. ‘모세’라는 이름은 투투-모세(Tut -Mose), 라-암세스(Ra-mses)등의 이름에서도 나타나듯이 '아들', 혹은 '태어난'을 의미하는 이름이다.
모세는 성장하면서 자신이 히브리인이라는 자의식을 갖게 되고, 살인 사건을 저지른 후에 시나이 반도의 미디안 광야로 도망쳐 그곳 제사장 이드로의 가문에 들어간다. 40년의 세월을 미디안에서 생활하던 모세는 마침내 호렙산 떨기나무 불꽃 속에서 야훼(YHWH)를 만나는 체험을 한 후 이집트에 돌아가 히브리 노예들을 해방시켜 광야로 탈출한다. 그는 그들과 광야에서 40년간 생활하면서 그에게 나타났던 야훼와 시내산 계약을 체결하였고 백성들을 가나안땅 입구까지 인도한 후 계약에 따라 그곳에서 죽었다. 참으로 성서는 모세를 이스라엘 종교의 창시자로 기록한다.
모세에 대한 성경 밖의 확실한 기록이 없는 상태에서 우리는 그가 수립, 형성해 나간 수많은 종교 사상이나 신앙이 어떤 곳으로부터 영향을 받고 있는가에 관해서 말할 수 없다. 그는 이집트의 마술사들처럼 기적을 행하는 사람이었고(출7-10장), 외교적 협상가였으며, 광야 길을 인도한 안내자, 군사전문가, 하나님과의 계약 중재자, 입법가, 행정가, 지휘관, 예언자였다. 그에게 제외된 기능은 왕으로서의 기능 한 가지뿐이었다. 모세에게 부과된 역할들은 분명히 지나치게 과중하였던 것은 명백하다(민11:10-15). 새로운 사회조직을 과감히 시도해 나가는 과정에서 모세에 대한 끈질긴 반역과 내적인 분쟁은 계속되었다.
4) 이집트 탈출의 여정(route)과 광야 생활
이집트에서부터 가나안에 이르기까지의 행군 경로를 재구성하는 일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민수기 33장은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서부터 가나안 접경지대까지 이르는 동안의 완전한 여정을 제시해주고 있는데, 이 여정은 성경의 다른 자료에서 제공하고 있는 여정과 약간의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불행하게도 성경이 말하고 있는 이집트 탈출 여정의 도시 가운데 비돔, 라암셋, 카데스, 에시온 게벨, 그리고 모압 지역의 일부 도시를 제외하고는 우리가 알고 있는 지명은 거의 없다. 특히 “갈대바다”(yam suf,출14:21)가 홍해라는 전통적인 견해는 수용되기 어렵다. 또 하나의 문제는 시내산의 위치이다. 기원 5세기 기독교의 전승에 따르면 시내산/호렙산은 시나이 남부에 있는 제벨 무사(Jebel Musa,“모세의 산”)라 일컬어지는 곳이나, 많은 다른 전승들이 남아 있어 그 산의 위치를 실증할만한 증거는 찾을 수 없다.
한편, 광야 40년의 생활가운데 38년간이나 머물렀던 가데스 바네아(신2:14)에 관한 전승은 광야 생활의 형태를 알 수 있는 열쇠가 되기도 한다. 성경의 몇 몇 귀절들은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곧장 카데스로 갔음을 시사하고 있다(출 15:22;삿 11:16). 가데스는 브엘세바 남서쪽 약 80km 떨어진 아인 엘 쿠데랏(Einel-Qudeirat)과 동일한 지역인데, 그 곳은 풍부한 물이 있는 커다란 오아시스로서 농사가 가능한 곳이기도 하다. 카데스의 다른 이름이 성경의 여러 다른 곳에 남아있어(삿11:16; 창14:7; 출 17:7; 민20:1,13; 겔47:19; 48:28) 이 시대의 전승이 얼마나 중요하게 취급되고 있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결과적으로, 계약 체결과 율법 수여를 포함하는, 광야에서 일어난 대부분의 모세 전승은 시내산 전승과는 전혀 독립적인 가데스 전승과 관계된 것이 아닌가하는 추측을 가능케 한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성경의 증거는 역사적으로 너무나 단편적이고 간접적인데다가 성경 이외의 정보 자료들까지 너무나 미미하여 이 시대의 역사 연구는 매우 불완전한 설명에 만족해야만 할 것으로 여겨진다.
여하튼 구약성서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출애굽 사건]과 [시내산 사건]은 가장 중요한 사건으로 결합되어있으며 이스라엘 백성들의 40년 광야 생활은 무엇보다도 중요한 경험으로 기록되고 있다. 특히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받음으로써 이스라엘은 하나의 민족-계약 공동체이며 선택된 백성-으로 형성되었으며, 율법과 언약을 중심으로 한 신앙이 바로 이 광야에서 기원되었다는 주장이 널리 받아들여짐이 당연해 보인다.
5) 가나안 정복과 사사시대
(1) 자료
히브리인들의 가나안 진입과 그 정착 과정은 어떠하였으며, 또, 이들이 가나안 문화와의 접촉을 통하여 그들과 어떠한 관계를 유지하게 되었는가에 관한 많은 연구가 있었고 논쟁은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기원전 1200-1000년경의 이스라엘이 가나안에서 신진 세력으로 존재한 것에 관한 자료는 주로 여호수아서와 사사기(판관기)에 나와 있다. 여호수아서는 모세의 후계자 여호수아가 가나안 서쪽 구릉지대의 상당 부분을 정복할 때 이스라엘의 연합 부족들을 지휘한 방법과, 그 정복한 땅을 부족들에게 분배한 내용을 담고 있다. 사사기는 여호수아 이후부터 왕이 세워지기 이전에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활동하였던 사사들의 군사 공적과 통치에 관하여 이야기하고 있다. 이 자료에는 풍부한 전승-시, 민담, 속담 등이 복합적으로 배열되어 있으며, 이러한 구성은 일정한 역사관(신명기적 역사관)을 가지고 편집되어 있으나, 단일하고 일관성있는 기사를 우리에게 제시해 주고 있지 않기 때문에 논쟁이 끊이지 않는다.
(2) 가나안의 도시 국가들과 가나안 정복
가나안에 이주해 들어온 히브리인들의 초기 생활은 이미 그 이전부터 팔레스틴에 머물러 살던 원주민들의 문화에 비해 매우 뒤떨어진 상태에 머물고 있었다. 다시 말하면, 가나안의 원주민들은 도시 국가(city states)를 건설하고, 철병거 등을 포함한 막강한 군사력을 지닌 고도의 철기 문명을 소유하고 있었다. 적어도 이러한 가나안의 상태에서 광야에서 이주해 들어 온 이스라엘이 어떻게 가나안을 점령하고 지배하게 되었는가라는 질문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 이 질문에 대한 지금까지의 대답은 크게 3가지로 분류된다.
① 정복설(The Conquest Model)
이 이론은 이스라엘은 가나안을 집중적이고 통일된 군사적 정복을 통하여 점유했다는 주장이다. 이 주장은 여호수아서 1-12장에 보도된 대로 여호수아의 지휘 아래 이스라엘의 12부족 연합체가 가나안을 체계적으로 정복해 나갔다는 데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 우리가 성경 본문을 있는 그대로 읽으면 이스라엘이 가나안의 도시들을 하나하나 압도적으로 정복해 가면서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땅을 분할하고 정착한 것으로 이해된다.
정복설을 뒷받침하기 위해 고고학이 동원되었는데 이스라엘이 그 땅에 들어갔다고 믿어지는 시기(기원전 1230-1175년경)에 가나안 도시들 즉 하솔(Hazor), 므깃도(Meggido), 수꼿(Succoth), 베델(Bethel), 벧세메스(Beth-shemesh), 아스돗(Ashdod), 라기스(Lachish) 등이 광범위하게 파괴되었다는 점과 파괴된 몇몇 도시들에서 보여지는 새롭고 일정한 점유 방식은 성경의 가나안 정복 기록들과 잘 부합된다는 점이다. 이처럼 정복설 지지자들은 성경의 기사에 대한 중요한 확증 자료를 고고학적 증거에서 찾는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을 전적으로 뒤바꿀만한 증거는 아니라 할지라도 이 시대에 나타난 고고학적 자료 중 일부는 다른 것들과 현저하게 불일치함을 보여주고 있다. 즉, 첫째로 여호수아서 12:7-24에 나오는 31명의 정복된 왕들의 목록은 고고학적으로 완전히 일치하지 않으며, 또 여리고(Jericho), 아이(Ai), 기브온(Gibeon) 등지의 고고학적 결과는 성경의 기록과 전혀 상치하고 있다. 나아가 기원전 13-12세기에 파괴된 흔적을 가지고 있는 도시라 할지라도 그 도시가 이스라엘에 의한 것인지 아니면 블레셋이나 다른 가나안의 도시들에 의한 것인지를 밝혀낸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따라서 성경의 기록을 이스라엘이 반드시 이 도시를 점령하고 파괴하였다는 증거 목록으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도시의 목록이 정리된 것은 이스라엘의 승리를 원형적인 여호수아에게 돌리기 위해 확대된 것이 아닌가하고 의심케 된다.
둘째로, 이 이론이 대답해 주지 못하고 있는 한 가지 사실은 이러한 정복이 이스라엘 지파들의 연합에 의한 것인지 아니면 각 지파의 개별적인 것이었는지에 관한 것이다. 여호수아서13:1-6a를 제외하고 정복 설화들의 대부분은 후대의 정리로 보여 진다. 또, 사사기 1장에서도 보듯이 가나안의 정복은 매우 오랜 동안 계속되어진 사건으로서 일사 분란한 여호수아의 정복 과정은 다분히 어떤 형태로 짜여진 기록임이 틀림없다.
셋째로, 여호수아서 24장의 세겜 총회와 결부시켜 볼 때, 중앙 지역의 군사적 공격에 관한 기사가 없이 그 땅의 중심부에 모일 수 있었던 이스라엘의 총회는 다분히 그 지역의 다른 민족들과 평화 협정을 통해서만 가능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점이다.
② 평화 이주설(A Gradual-Peaceful Infiltration)
이 가설에 따르면 이스라엘의 가나안 점유는 평화적 유입, 조약 체결, 그리고 자연적인 인구증가에 의한 것이었다. 이들은 성경의 전승들 사이의 상호 모순적인 성격을 밝히면서 지지를 얻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평화적 유입, 현지 민족들과의 평탄치 못한 융합, 그리고 다윗 시대에 와서야 겨우 성취된 이스라엘의 정치적, 군사적 승리라는 길고 복잡한 과정을 이론화(체계화)하였다. 이들의 이론을 뒷받침해 주는 것은, 족장들은 대체로 거주민들과 화목하게 지냈으며, 또 가나안 도시의 전 주민들이 므낫세에서는 이스라엘의 씨족이 되었으며(수17:12-13), 유다가 공공연히 가나안사람들과 결혼하기도 하였다(창38장)는 성경의 기록들이다. 이 주장에 의하면, 이스라엘은 처음부터 기존 거주 지역에 평화롭게 침투하여 정착해 나가면서 인구가 증가하였고 가나안인들에게 충분한 위협적인 존재로 커지기까지 아주 완만한 속도로 빈터(공지)로 들어갔다는 것이다.
이주설의 가장 큰 특징 가운데 하나는 이스라엘인들이 통합되지 않은 채 각기 다른 시기에 다른 방향에서 가나안으로 들어갔음을 강조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은 이집트 탈출 사건에 관하여 매우 회의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으며, 이 기록이 부분적으로 사실이라 하더라도 이들은 이 사건을 일부만이 경험한 사건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이주설 지지자들은 이스라엘의 기원의 특성을 설명함에 있어서 고고학적 증거의 역사적 가치를 무시하거나 평가 절하하는 경향이 있다.
③ 사회혁명설(A Peasant Revolt or an Internal Social Revolution)
이스라엘은 도시 국가의 군주들과 지배층에 대하여 반란을 일으키고 그들의 독자적인 사회 정치적, 종교적 질서를 확립한 토착 가나안 민중의 부분(sector)이었다는 주장이 최근에 전개되었다. 이 설은 정복설과 이주설의 주요 요소들을 이용하고 그것들을 재정리하여 이스라엘 정복에 관한 새로운 개념을 세웠다. 이들은 이스라엘의 정복 과정이 귀족적인 관료들로 구성된 도시국가들로부터 억눌리고 소외된 가나안 사람들 사이에서 오랫동안 계획되어 온 사회적 혁명의 과정을 통하여 이룩되었음을 강조하면서, 성경의 무력 투쟁은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도시국가의 억압과 고질적인 부패는 가나안 원주민들의 농산물 수탈, 현물세, 강제부역, 징용 등으로 나타나며, 이러한 사회적 부담에 항거하는 가나안 민중들은 이에 동조하는 여러 다른 부족들과 협력하면서 동맹을 맺기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이때를 맞추어 기존 사회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소외되어 이집트 탈출한 히브리인들의 도착과 함께 야훼 종교는 이들의 혁명 이데올로기로 작용하여 효과적인 혁명을 완수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는 가설이다.
그러나 가나안의 사람들 가운데는 이러한 혁명에 동조하거나 반대하였던 그룹들도 있어서 일관성있고 일사분란한 사건으로 보기 어려운 여러 다양한 모습이 나타나고 있다. 예를들면 아모리와 시혼의 백성들(민21:27b-30), 여리고의 라합과 그녀의 일가친척들(수2장; 6:22-25), 베델 의 정보원들과 그 가족들(삿1:22-26)등은 "동조자"로 나타나며, 이스라엘의 내정에 간섭하거나 상관없이 존재했던 므낫세의 세겜과 다른 도시들(창48:22; 수24장; 삿9장), 상부 갈릴리의 도시들(수11장), 그리고 예루살렘(수10:1-5; 15:63; 삿1:1-8; 19:10-15)등은 "중립자"로, 마지막으로 독립을 유지하면서 이스라엘의 정복을 지원했던 베냐민의 기브온과 후리 족속들(수9-10장; 삼하4:1-3; 21:1-14), 메로스(삿5:23), 수꼿과 브누엘(삿8:4-17), 그리고 켄 족속(삿1:16; 4:11; 삼상15:6-7; 30:29)등은 "동맹자"로 나타난다.
이상에서 살펴 본 세 가지 이론은 나름대로 당시의 정복과 정착의 과정을 설명하고 있으나, 그 어떤 한 가지의 주장이 전적으로 옳다고 판단하기에는 각기 이론적-역사적 장점과 약점을 지니고 있다. 다만 이스라엘이 팔레스틴(가나안 땅)에 정복, 정착하기까지의 오랜 세월 동안의 실상은 위의 가설들의 묘사보다는 훨씬 더 복잡하였음이 분명하다. 오히려 성경은 이러한 여러 가설을 모두 종합적으로 뒷받침해 주고 있는 다양한 정보를 제공해 주고 있다고 여겨진다(cf.삿6:8a-9).여호수아서와 사사기 모두는 이집트 탈출을 통한 이스라엘의 구원과 가나안 사람들의 축출, 그리고 가나안의 신 숭배 거부와 야훼만을 섬길 것 등에 관한 주제들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가나안 사람들을 축출한 이유를 진술함에 있어서는 두 책이 서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여호수아서에서는 이스라엘이 가나안 사람을 축출한 것은 원주민을 몰아내고 그 땅을 차지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사사기에서는 이스라엘이 가나안 사람을 축출한 것은 가나안 땅에서 자기들을 억압하던 왕들을 몰아내고 자유를 쟁취하기 위함이다. 또, 여호수아서의 본문에는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차지했다는 암시는 있으나 이스라엘이 가나안에서 받았던 억압의 내용은 겉으로 분명하게 나타나 있지는 않다.
(3) 지파의 정착(Tribal Settlement)과 그 이후
19세기에 들어오면서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과 정착의 방식에 대한 논의는 초기 이스라엘의 공동체의 사회 구조의 연구와 더불어 중요한 논쟁의 주제가 되었다. 다시 말하면 전통적으로 학자들의 관심과 질문은 이스라엘이 어떻게 그 땅을 점령하였는가라는 지리적, 역사적 문제에 관한 것이었는데, 보다 사회학적 관심으로 이 사건을 바라보게 되었다. 즉, 이스라엘은 처음부터 복잡한 다양한 종족들이 결합되어 있었으며, 지파라는 조직으로 편성되었다 하더라도 각 지파 간에 얼마만큼 적절한 협조가 되었는가? 또 산악 지방을 장악하고 하나의 통일적인 사회 공동체를 갖춘 이스라엘의 공동 목표는 무엇이었으며, 가나안 정복의 과정에서 흡수한 비이스라엘계 주민들(수9장; 삼하21:1-9)과는 어떤 형식으로 교류했으며, 지파간의 결합 구조는 무엇이었는가 하는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땅 점령과 정착 과정, 그리고 이스라엘의 사회 체제와 구조를 한 묶음 속에서 이해하자는 것이다.
① 목축 유목설(Pastoral Nomadic Model)
앞서 말한 정복론자와 평화 이주론자들은 이스라엘의 사회 구조를 기본적으로 목축 유목민으로 규정하고, 그들이 가나안을 침공하거나 정착하였다는 입장에 서 있다. 즉, 많은 이들의 주장에 의하면 이스라엘의 사회 구조는 유목민들의 체제를 갖추고 유목 문화의 형태를 띤 공동체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최근 이러한 가설은 철저하게 재평가되고 있다.
물론, 성경의 많은 부분에서 언급되는 이스라엘 민족의 이동은 계절적인 이유로 인한 유목 문화적 이주형태를 띠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집트 탈출같은 사건에서 나타나는 이주는 유목민의 계절적 집단 이주로 볼 수 없는 것이었다. 또한 이들의 땅(토지)에 대한 철저한 개념도 유목민적인 문화적 개념이 아님을 간과할 수 없다.
② 종교적 동맹설(Amphictyony)
이 가설에 의하면 이스라엘은 그리이스와 고대 로마 등의 도시 국가들의 제의 동맹과 유사한 것으로, 성소에서 행해진 야훼 제의를 중심으로 한 12부족의 종교동맹체였다. 델피(Delphi)의 아폴로 동맹에 의해 가장 잘 입증된 이 고전적인 종교, 정치 제도가 그리이스인들에게는 암픽티오니(Amphictyony)로 알려져 있다. 일반적으로 이 말의 어원은 "이웃 구역의 주민들" 또는 "공동 성역 주변의 거주민들"을 의미하는 용어로 추정되는데, 이스라엘의 종교적 동맹은 중앙 성소가 있고, 부족 대표들을 중심으로 한 평의회가 있으며, 이들의 결정은 12부족들 사이에서 구체적으로 시행되었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중앙 성소로는 세겜(13세기), 실로(11세기), 베델, 길갈, 기브온(10세기) 등에 위치하였을 것이다. 이 시대의 사사들의 역할은 바로 평의회의 집행관으로 여겨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가설은 본질적으로 국가 이전 형태에 속하는 사회 조직 내에서 계약과 법이 갖고 있는 기능을 설명하는데 크게 기여하였으나, 그것이 이스라엘 사회 전반을 설명해 주고 있지는 못하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이 이론의 출발점은 이스라엘 부족들이 군주제 이전 시대에 이미 공통된 종교적 이데올로기로 연합되었다는 사실을 객관화 하였으나, 그것이 어떻게 가능하였는가에 관하여는 설명을 하고 있지 않다. 또, 이들의 결정적인 약점 가운데 하나는 부족 간의 동맹 체제가 군주제 이전의 이스라엘에서는 존재하지 않았으며, 다만 부분적인 종교적 제휴 형태로서 협력하는 개별적인 부족들만이 있었다는 사실을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③ 사회 종교적 재부족화설(Socioreligious Retribalization Model)
이 이론에 의하면 이스라엘은 처음부터 유목민, 용병, 각종 장인, 그리고 하층민들로 구성된 잡다한 연합체로써 가나안에 들어와 가나안 안에 살고 있던 같은 부류의 계층들과 제휴함으로써 보다 큰 사회 집단으로 확대 되었으며, 그러한 힘을 바탕으로 하여 도시 국가들의 군사적, 정치적 지배권으로부터 탈출하여 정착하게 되었다.
이 가설은 이스라엘의 동맹체제가 처음부터 사회적, 경제적 단위를 기초로 하고 있음을 강조한다. 즉 가나안의 사회 경제적 현실이 이곳으로 이주해 들어온 이스라엘의 종교적 신앙과 연합하여 새로운 부족동맹을 결성하여 정착 이후의 새로운 이스라엘의 기초를 놓고 있다는 점을 설명한다. 그런 점에서 가나안인들은 이스라엘인들이 되었다.
그러나 이 가설에서 주장되는 것은 집단의 끊임없는 공동의 위기가 이스라엘의 일체감을 강화시켜 주었다기보다는, 오히려 한 민족으로서의 이스라엘의 통일성이 사사시대의 위기들보다 선행하였으며(삿5장), 이러한 공동체 의식은 여호와 신앙에 근거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신앙이란 이스라엘의 이집트에서의 종살이 경험과 그 경험을 바탕으로 한 평등주의 이데올로기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사실은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과 지파간의 체제는 극히 복잡한 과정에서 생겨났다는 것이다. 각 지파 체계는 여러 출신 배경을 가진 종족들로 채워졌으며, 의심할 나위 없이 이스라엘이 팔레스틴에 정착하여 생활을 시작한 후에야 비로소 표준적인 형태의 사회구조를 갖추게 되었다. 정복 사업이 마무리 된 후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의 대표자들은 세겜에 모여 엄숙한 선언을 통하여 여호와의 백성이 되고, 오직 그 분만을 섬기기로 서약하였다(수24장). 이 서약은 이스라엘이 하나의 민족으로 표준적인 형태를 갖춘 최초의 사건으로써 시내산 사건을 재확인하고 확대시킨 것이기도 하였다.
(4) 정착과 사사들의 역할
이스라엘이 팔레스틴에서 정착 생활을 시작하면서 왕정이 시작되기까지 약 200여 년 동안 이스라엘은 비교적 느슨하게 조직된 지파체제로 유지되고 있었다. 이 기간 동안에 이스라엘에는 중앙정부나 단일한 국가 체제를 가지고 있지 않았으며 상비군조차 가지지 못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변의 강한 이웃 나라들과는 구별되는 강인한 신앙과 전통을 가지고 자신들의 체제를 유지해 왔다. 이러한 과정에서 "여호와의 영"에 의해 능력을 입은 사사들(판관)의 역할은 어느 정도 인정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과연 사사들이 사회, 경제적 면에서 얼마나 충실한 지도자였으며, 얼마만큼의 종교적 신앙의 수호자였는가를 밝혀야 할 것이다.
이스라엘의 점령지는 잘 균형 잡힌 하나의 영토를 이루고 있지 못하였다. 이스라엘의 초기 정복은 주로 산악 지대로서 평지의 원주민들이 가지고 있던 철병거가 활동하기에 좋지 못한 지역에 주둔하였다(삿1:19;수17:16). 아람왕 벤하닷은 이스라엘의 이러한 모습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기도 하였다: "저희의 신은 산의 신이므로 저희가 우리보다 강하였거니와 우리가 만일 평지에서 저희와 싸우면 정녕 저희보다 강할찌라"(왕상20:23). 이러한 현상은 이스라엘의 대부분의 지역에서 일어난 것으로 "골짜기 땅에 거하는 가나안 사람에게는 벧 스안과 그 향리에 거하는 자든지 이즈르엘 골짜기에 거하는 자든지 다 철병거가 있나이다"(수17:16)하는 기록에서 쉽게 알 수 있다.
가나안 정착 이후의 이스라엘의 역사에 관하여는 주로 사사기에 기록되어 있는데 이 책은 역사적 주기성(the historical periodicity)의 관점에서 이스라엘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즉, 기자는 ①여호수아 이후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숭배함으로써, ②하나님께서 이방의 왕을 세워 그들을 지배하게 하여 고통을 당하게 하시다가, ③이러한 위기의 시기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 카리스마적인 지도자(사사)를 보내어 이들을 무찌르고 구원하신다는 역사의 패턴으로 통일 왕국을 이루기까지의 역사를 반복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이들 사사 옷니엘(유다 지파), 에훗(베냐민 지파), 기드온(므낫세 지파), 드보라(에브라임 지파), 입다(길르앗 지파), 삼손(단 지파), 삼갈(비이스라엘 사람) 등은 ‘구원자-심판자’의 이중기능을 가진 자로 묘사되어 나온다.
본래 사사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이스라엘의 전체 지파를 묶는 구심점이 없던 시대에 활동하였다(삿21:25). 그들은 때로는 지파 동맹을 통하여 적들과 싸웠으며, 중앙 성소에서의 공동의 종교 제의를 통하여 그들의 이상을 실천해 나갔다. 이들은 가나안의 도시 국가들로부터의 정치 적 억압과 경제적 수탈 및 종교적 지배로부터 자신들의 평등 이념을 기초로 한 해방 공동체를 지켜 나가려는 종교 공동체의 성격을 가지고 투쟁해 나갔던 것이다(cf.삿1:1-2:5). 그런 점에서 그들은 "거룩한 전쟁"을 수행하는 "야훼의 용사"들이었다.
사사시대의 전 기간을 통하여 이스라엘이 하나의 국가를 창건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는 증거를 우리는 가지고 있지 않다. 또한, 가나안의 도시국가의 체제를 모방하려는 움직임도 전혀 없었다. 사사 기드온이 왕위를 거절한 이야기(삿8:22-28)와 요담의 풍자적 우화(삿9:7-21)가 보여주는 바와 같이 실제로 이스라엘 사람들(신명기사가)에게는 왕정 제도는 그 개념 자체가 부정적인 것이었다. 이는 이스라엘이 오직 여호와만이 자신들의 지도자임을 믿는 신정정치의 이상을 추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사사들의 정복 과정에서 가정 현저하게 등장하는 이스라엘의 적은 역시 블레셋(Philistines)이었다. 이스라엘은 적어도 그들과 200년이 넘는 투쟁을 해야만 했다. 블레셋은 기원전 13세기경 힛타이트 제국이 멸망한 이 후 에게(Aegean)문명의 원류에 뿌리를 두고 발생한 해양 민족으로서 새로운 근동의 질서를 세워 나갔다. 성경에 의하면 이 해양 민족인 블레셋은 갑돌(암9:7)에서 부터 왔다. 또 예레미아는 "갑돌섬에 남아있는 블레셋 사람"(렘47:4)에 관하여 언급한다. 이 섬은 오늘의 크레테섬(Crete)를 말한다. 이들은 기원전 1220년 경 메르넵타(Merneptah) 제5년에 이집트 델타 평원에 나타나는 것을 시작으로 가나안의 해안 평야에 상륙하였다. 지리적, 인종적, 어원적 관점에서 볼 때 인도-유럽계로 인정되는 이들 블레셋 사람들은 다곤(Dagon) 신, 혹은 바알 제불(왕하1:2ff.)을 그들의 신으로 섬겼다. 모두 지중해 남부 해안 지대에 위치했던 그들은 각각의 도시국가를 건설하고 중앙 성소를 중심으로 연맹(league)을 이루며 살았으며, 적어도 다윗왕 때(기원전 10세기)까지 이스라엘의 가장 강력한 적이었다. 사무엘 때에 실로의 법궤가 블레셋에게 빼앗기는 수난을 당하기도 하였으며(삼상4-7장), 사울왕은 길보아에서 벌어진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사망하기도 하였다(삼상31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