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가톨릭(Roman Catholic)은 로마에서 발생한 기독교 교파로, 교황을 최고 수장으로 삼고 있다. 동아시아 지역에서는 천주교(天主敎)로도 불린다. 약 13억의 인구가 이 교파를 믿으며, 서유럽권 문명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로마 가톨릭은 사도 베드로를 초대 교황으로 받들며, 자신들을 ‘하나요, 거룩하고 보편되며,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교회(제2차 바티칸 공의회 교회 헌장)’라 칭하고 있다. 그러나 로마 가톨릭의 모습은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그대로 따르던 초대교회와 사뭇 다르다. 초대 교황이라 주장하는 베드로의 신앙과도 차이가 있다. 로마 가톨릭은 과연 어디서 기원되었을까? 지금부터 역사를 거슬러 살펴보자.
‘로마 가톨릭’ 명칭의 유래
‘로마’라는 지역명 뒤에 붙은 ‘가톨릭’은 ‘보편적인’, ‘널리 알려진’, ‘일반적인’ 등의 뜻을 가진 그리스어 형용사 카톨리코스(καθολικός)에서 유래됐다. ‘가톨릭’이라는 단어 자체는 본래 교회의 정통성을 강조하기 위해 사용되어 온 언어이다. 2세기 초 교회를 설명할 때 최초로 사용되었으며, ‘가톨릭교회’라는 표현은 AD 110년경 안디옥 교회의 감독 이그나티우스가 서머나 교회 성도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처음 등장한다. 이후 교회에 보내는 공문서나 서신 등에 간혹 쓰이다가 4세기경 니케아 공의회,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서방의 로마 교회가 ‘가톨릭’이라는 명칭을 쓰면서 공식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AD 1054년,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가 분열되면서 동방교회(콘스탄티노플, 예루살렘, 알렉산드리아, 안디옥)는 자신들을 ‘동방정교회(Orthodox)’, 서방교회(로마)는 ‘가톨릭교회(Catholic)’라 칭했다.
동서 교회의 분열 이후 서방 교회는 또 한번 분열됐다. 교회 내 비리와 교황 제도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종교 개혁이 일어난 것이다. 이로써 서방 교회는 교황 제도를 반대하는 개혁파(Protestant, 현재의 개신교)와 교황과의 관계를 유지하는 개혁반대파로 나뉘게 된다.
이후 교황과 친교하지 않는 교회와 로마 교황을 최고 권위자로 삼는 가톨릭교회를 구별하기 위해 가톨릭이라는 명칭 앞에 ‘로마’가 붙어 ‘로마 가톨릭’이 되었다. 현재까지도 교회의 정통성을 강조하기 위해 ‘가톨릭’이라는 표현을 쓰는 교파들이 있으나, 일반적으로 가톨릭이라 하면 로마를 중심으로 한 로마 가톨릭교회로 인식한다.
로마 가톨릭의 탄생 배경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당
초기 로마 교회
그리스도의 복음은 팔레스타인, 그리스를 넘어 로마에까지 전파되었다. 그러나 초창기 로마 교회는 로마인에게 환영받지 못했다. 당시 로마에는 다신교 사상이 성행했는데, 로마인들은 사람, 장소, 사물을 신격화하여 숭배했다. 로마 제국은 정복한 나라들을 수월하게 다스리고자 각 민족의 종교를 수용하고 있었다.
이러한 시기에 다른 신을 배척하고 오직 하나님만 신앙하는 기독교의 유일신 사상은 로마인들의 종교 관념, 로마의 정치 목적과 대립되었다. 로마 제국의 수호신인 황제를 숭배하지 않는 것 역시 제국의 평화를 위협하는 행위였다. 설상가상으로 유대인들이 로마 통치에 대항하는 유대 전쟁을 일으키면서 유대교와 같은 신앙의 뿌리를 둔 기독교인들은 더욱 눈엣가시 같은 존재가 되었다.
때문에 기독교는 여러 황제와 로마인들의 박해를 받았다. 로마 제국은 기독교 집회를 금하고, 모든 교회 건물을 파괴했다. 기독교인들은 콜로세움의 투기장에 던져져 사자 밥이 되거나, 인간 촛대가 되어 화형 당했다. 사도 요한은 밧모섬에 유배되었고, 베드로도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했다. 혹독한 박해로 기독교인들은 동굴로, 무덤으로 숨어 들어가 겨우 신앙의 명맥을 유지했다.
로마 교회의 변질
로마 교회는 잔인한 핍박과 박해 속에도 진리를 지켰으나, 점차 핍박에서 벗어나고자 세속과 타협하고, 이방 종교의 습속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이러한 교리 변질은 당연히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르던 동방 교회 감독들의 반대를 불러왔다. 동방 교회 감독들은 로마 교회 감독들에게 편지를 보내 그리스도와 사도들의 전승을 따라야 한다고 여러 차례 설득했지만, 로마 교회의 감독들은 예수님의 부활하신 요일 등을 근거로 들어 자신들이 들여온 이방 종교의 습속을 합리화했다.
필경에는 로마 황제와 손잡고 본격적으로 예수님께서 세워주신 새 언약의 규례를 변개하기에 이르렀으며, 변개된 예배법대로 따르지 않는 자들은 이단으로 정죄하고 탄압했다(다니엘 7:25).
초기 로마 교회는 순수한 새 언약의 진리를 지켰다. 핍박에서 벗어나고자 세상과 타협한 세력이 진리를 변질시키고, 로마의 다신교적 특성을 받아들이면서 로마 가톨릭이 탄생한 것이다.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의 달콤한 함정, 밀라노 칙령
현재의 로마 가톨릭은 약 13억 명의 신도를 갖고, 일부 국가 문화에 영향을 줄 정도로 큰 규모이나, 3세기까지만 해도 로마 제국의 작은 교회 중 하나였다. 로마 가톨릭은 콘스탄티누스의 밀라노 칙령을 기점으로 황제의 비호 아래 세력을 넓혔다.
AD 313년, 로마 제국과 로마인들의 박해를 받던 기독교는 일생일대 전환기를 맞이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밀라노 칙령을 내려 ‘종교의 자유’를 선포한 것이다. 기독교에 매우 우호적이었던 황제는 기독교인에게 특혜를 주는 정책까지 펼쳤다. 기독교인들은 신앙의 자유를 얻은 것은 물론 몰수당했던 재산을 돌려받고, 세금 면제, 병역 면제 등의 혜택을 받았다.
콘스탄티누스가 밀라노 칙령을 통해 기독교를 공인한 데는 정치적 목적이 있었다. 황제는 기독교를 이용해 네 개로 분리된 로마 제국을 하나로 통합하고자 했다. 기독교는 심한 박해에도 로마 제국 인구의 20%가 신앙하던 종교였다. 황제는 이런 기독교를 이용해 로마 제국의 사상을 하나로 모으려 했던 것이다.
콘스탄티누스는 교회 감독들을 궁으로 초대하는 등 호의를 베풀고, 교회를 후원했다. 나중에는 교회 문제의 최고 권위를 가진 자, 교회 감독을 자처하며 공의회를 소집해 교리까지 간섭했다. 황제가 기독교를 신앙하는 것처럼 보이나 사실 그는 태양신 미트라를 숭배하고 있었다. 콘스탄티누스는 예수 그리스도와 자신이 믿는 태양신을 동일시했다. 이로 인해 태양신 미트라의 신앙 의식이나 관습 등이 대부분 교회 안으로 수용되었다.
태양의 후광을 특징으로 만들어진 독일 쾰른 대성당의 예수상
로마 교회 감독들은 이러한 황제와 친교해, 이방 종교 사람들이 개종 시 마음의 갈등을 덜도록 성전에 이방신 신상을 들이고, 새 언약의 규례를 이방신을 섬기는 관습들로 교묘하게 바꾸었다. 이로 인해 다신교 신앙을 믿던 사람들이 교회로 물밀듯이 유입되었다. 신앙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믿음이 없는 무분별한 개종 방식으로 유일신 하나님만을 경배해야 할 성전에는 불법이 무성하게 되었다.
AD 395년, 황제 테오도시우스가 ‘그리스도교 국교령’을 내리면서 로마 가톨릭은 더욱 비약적으로 성장한다.
로마 가톨릭과 복음의 변질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복음은 하나였고, 세우신 교회 역시 하나였다. 사도들이 사역하는 동안에도 다른 복음과 이단이 발생하였으나 사도들은 불법을 철저히 배척했다(갈라디아서 1:5~9, 고린도후서 11:3~4). 그러나 사도들이 모두 세상을 떠나자 불법은 교회 안에서 본격적으로 뿌리를 내렸고, 그리스도께서 가르쳐주신 진리는 변개되기 시작했다.
로마 가톨릭과 주일 예배
성경의 예배일은 일곱째 날 안식일이다. 요일 제도상 토요일에 해당한다. 예수님과 사도들 역시 안식일에 예배를 드렸다(누가복음 4:16, 사도행전 17:2). 그러나 로마 가톨릭은 예수님께서 세상 끝 날까지 지키라고 하신(마태복음 24:3, 20) 안식일을 변개했다.
기독교가 로마에 전파될 시기, 로마에서 가장 성행하던 종교는 미트라교였다. 미트라교는 태양신을 숭배하는 종교로, 이 미트라교의 성일이 바로 일요일(Sunday)이다.
1-2세기 로마 제국과 유대인 사이 갈등으로 유대 전쟁이 일어나면서 로마는 유대인을 탄압했다. 유대인의 거듭된 반란에 분노한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로마 제국에 토라(모세 오경) 금지, 할례 금지, 안식일 예배 금지 조치를 내린다. 이는 기독교인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쳤다. 기독교인 역시 유대인처럼 유일신 신앙을 가졌으며, 성경을 읽고, 일곱째 날 안식일에 예배를 드렸기 때문이다.
당시 외국인 신자가 주축을 이루던 서방 교회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유대인들에게 강한 적대감을 가지고 있었는데, 유대인들로 인해 자신들까지 핍박을 받게 되자 하나님의 계명인 안식일마저 유대교의 예배일 정도로 치부하기에 이른다.
이들은 로마의 박해를 줄이고, 유대교와 차별성을 두고자 미트라교의 성일인 일요일에 예배를 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일요일에 부활하신 것을 근거로 들어 합리화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AD 321년 선포한 일요일 휴업령은 안식일을 폐지하고, 일요일 예배를 확립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로마 교회는 일요일 예배를 합법화 하기 위해 몇 차례 종교회의를 진행했다. 그리하여 AD 343년 사르디카 종교회의에서 일요일을 ‘주의 날’로 개칭하고, 성직자가 주의 날을 세 번 범할 경우 제명시킬 것을 명시하도록 의결한다.
AD 364년 라오디게아 종교회의에서는 일요일 예배를 공식적으로 인정하며 ‘그리스도인들은 주의 날을 특별히 존중히 여기고, 안식일에는 일하여야 하며, 안식일을 지키면 그리스도로부터 저주를 받을 것’이라는 내용의 종교법을 선언했다.
동방교회는 꿋꿋하게 안식일을 지켰으나, 불법이 매우 강성하여 4세기 이후 안식일은 사라지고 만다.
로마 가톨릭과 유월절 성찬식 논쟁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고난을 당하시기 하루 전, 성력 1월 14일 저녁에 제자들과 함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상징하는 떡과 포도주를 먹고 마시며 새 언약의 유월절을 세워주셨다. 그러나 로마 교회는 이 성찬식을 부활절에 거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로 인해 동방 교회와 서방의 로마 교회 사이에서 논쟁이 일어난다.
First Council of Nicea, by V.Surikov (1876)
첫 번째 성찬식 논쟁은 AD 155년경 로마 교회 감독(교황) 아니케터스(아니체토)와 서머나 교회 감독 폴리캅(폴리카르포스) 사이에서 일어났다. 사도 요한의 제자였던 폴리캅은 성력 1월 14일 저녁에 성찬식을 행하는 것이 예수님 때로부터 이어온 전승임을 강조했으나 아니케터스는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그러나 동서방 교회 사이에는 차이가 있었다. 아시아에서 본 가장 중요한 날짜는 닛산(Nisan) 14일이었는데 … 서방교회에서는 닛산 14일 다음의 일요일까지 금식을 계속하고 그리고 유월절 성찬식을 거행하였는데, … 155년에 폴리캅은 로마 교황 아니케터스(Anicetus)와 이 문제를 토론하였으나 양편이 다 상대방을 설복시킬 수가 없어서 서로 다르게 그날을 지키기로 합의를 보았다
교회사 초대편, J.W.C. 완드 저, 이장식 역, 대한기독교서회, 2000, 121-122쪽.
AD 197년경 두 번째 논쟁이 벌어진다. 당시 로마 교회 감독 빅터(빅토리오 1세)는 성만찬을 유월절이 아닌 유월절 다음에 오는 첫 일요일, 즉 부활절에 행하는 것이 ‘도미닉의 규칙(Dominical Rule, 주의 규칙)’이라 주장하며 여러 교회에 이를 강요했다.
이 논쟁의 보다 더 중요한 단계는 197년 로마에서 일어났다. 아니케터스보다 훨씬 더 유력하던 로마 교황 빅터(Victor)는 모든 혼란을 중지시키고 부활절을 일요일에 지키는 도미닉의 규칙을 채용하도록 전 교회에 강요하였다. … 빅터는 거기에다 자기의 특권을 행사하여 완고하게 거절하는 교회를 책벌하였다.
교회사 초대편, J.W.C. 완드 저, 이장식 역, 대한기독교서회, 2000, 121-122쪽.
서방 교회는 빅터의 주장을 따랐으나, 동방 교회는 이를 거절했다. 에베소 감독 폴리크라테스는 빅터에게 편지를 보내어 아시아 교회를 지도한 사도 빌립과 요한도 성력 1월 14일에 성만찬을 행하여 유월절을 지킨 사실을 언급하며 새 언약 유월절을 지켜야 함을 강하게 피력했다.
“우리는 바르게 절기를 지키고 있습니다. 우리는 거기에 아무 것도 덧붙이거나 감하지 않았습니다. … 열두 사도의 한 사람인 빌립과 … 순교자였던 요한도 에베소에 묻혀 있습니다. … 이 사람들은 모두 조금도 빗나가지 않고 신앙의 규칙을 따르면서 복음에 따라 14일을 유월절로 지켰습니다. 나 폴리크라테스는 비록 당신들 중에서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에 불과하지만, 전임 감독들의 전승을 따르고 있습니다. … 모든 성서를 연구해온 나는, 나를 위협하기 위해 취해지는 일에 전혀 놀라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나보다 훨씬 위대한 사람들이 ‘우리는 사람에게 순종하기보다 하나님께 순종해야 한다’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이 서신을 받은 로마 교회의 감독 빅톨은 즉시 아시아의 모든 교회와 그 인근의 교회들을 비정통으로 몰아 보편 교회에서 제거하려 했다. 그는 널리 서신을 발송하여 그곳의 모든 형제들이 파문되었다고 선포했다. 그러나 이것은 감독들의 일치된 견해는 아니었다. 감독들은 즉시 그에게 서로에게 평화와 일치와 사랑을 진작시키리라고 생각되는 방침을 강구하라고 권면했다. … 또 빅톨에게 전승으로 전해진 관습을 지키고 있는 하나님의 교회들을 축출하지 말라고 권고하였다.
유세비우스의 교회사, 유세비우스 팜필루스 저, 엄성옥 역, 은성출판사, 2003, 262-264쪽.
그러나 AD 325년, 니케아 공의회에서 유월절은 폐지되고, 부활절에 성찬식을 행하기로 결정된다. 유월절 날짜를 기준으로 지켜오던 부활절은 로마 교회의 주장대로 춘분 뒤에 오는 만월 후 첫 번째 일요일로 정해졌다. 이후에도 그리스도의 가르침대로 성력 1월 14일에 유월절을 지키는 자들이 있었으나 이들은 ‘십사일파’로 불리며 이단으로 낙인 찍혔다.
세속의 권력에 업혀 세력을 키우고, 세상의 권세를 잡은 로마 가톨릭은 자신의 교리를 따르지 않는 자들은 모두 이단으로 정죄했고, 종교재판에 넘겨 학살했다. 진리를 따르던 자들이 순교하면서 그리스도와 사도들이 지켜오던 새 언약 진리는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로마 가톨릭의 교리가 성경과 맞지 않음을 깨달은 자들이 진리를 되찾고자 여러 번 개혁을 시도했으나 새 언약의 진리는 쉽게 복구되지 못하였다. 그 결과 현재까지 각양각색의 교파들이 난립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