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0-11-25 0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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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신학을 신론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에 대해서는 전통적인 신학자들이 단순한 논리적 순서로서의 가치를 뛰어넘는 의미를 부여하는 것 같다. 루이스 벌코프는 "교의학 혹은 조직신학에 관한 연구는 대개 신론으로부터 시작한다. 만약에 우리가 신학이 - 만유의 시작이며, 근거이며, 귀착점인 - 하나님에 관한 체계적인 지식이라는 전제를 계속 밀고 나간다면, 신론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은 충분한 이유가 있다. 19세기초에 이르기까지는 교의학 연구를 신론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거의 일반적인 관례였었다. 그러나 슐라이에르마허(Schleiermacher)의 영향으로 인하여 변화가 일어났는데, 그는 새로운 방법을 소개함으로써 신학의 학문적인 특성을 보장하려고 노력했다. 인간의 종교적 의식이 신학의 자료로서의 하나님의 말씀을 대체해 버렸다. 하나님의 권위 있는 계시로서의 성경에 대한 신앙이 불신을 받게 되었으며, 인간 스스로의 감정적이거나 혹은 합리적인 이해에 근거한 인간의 통찰이 종교적인 사상의 표준이 되었다. 그는 신론을 연속적인 것이 아닌, 단편들 속에서만 다루었으며, 삼위일체에 관한 항목으로 교의학을 끝맺었다. 그의 출발점은 신학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인간학적이다"라고 말했는데, 그는 조직신학을 신론으로 시작하는 것이 곧 복음적인 신학을 고수하기 위한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하고 있는 듯하다.
여하튼 우리도 신론을 처음으로 놓고 조직신학에 대한 논의를 해 보려고 한다. 전통적으로 신론에서는 하나님의 존재와 인식(하나님이 계신가 아니 계신가, 그리고 그것을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나님의 속성(to be의 문제),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역(to do의 문제) 등을 다루어왔다. 대부분의 조직신학 책들이 다 이 순서를 따르고 있고, 논리적인 순서를 따져 보아도 이 순서가 합리적이다(합리적인 것이 바로 조직신학의 특성이지만).
1. 하나님의 존재와 인식
1) 하나님의 존재 신학에 있어서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말은 전제로서 존재하는 것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말한다면, 이미 그에게 있어서 신학은 설 곳이 없게 된다. 소위 "사신신학"(알티머)이 신학일 수 없다는 것이 바로 이를 지적하는 것이다. 그리고, "개혁파 신학은 하나님의 존재를 전적으로 합리적인 전제로 간주하지만, 합리적인 논증에 의하여 이러한 사실을 증명할 수 있다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기독교인은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진리를 신앙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이 신앙은 맹목적인 신앙이 아니라 증거에 기초한 신앙이며, 그 증거는 근본적으로는 하나님의 영감된 말씀인 성경 안에서 발견되며, 이차적으로는 자연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 속에서 발견된다." 결국 우리는 하나님께서 존재하신다는 사실에는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다. 이는 맹목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계시와 증거에 근거하는 것이다.
2) 하나님에 대한 인식 이는 사실 서론에서 다룬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계시에 근거해서, 성경을 통해, 성령의 조명을 받아 하나님을 인식한다. 다른 방법을 통해서 하나님을 아는 방법은 없다는 것이 전통적인 입장이다. 그럼에도,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말할 때에 "선천적 지식"과 "후천적 지식"을 나누어 말하는 경우가 있다. 선천적 지식이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접촉하게 될 때에 그것을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하는 것이지, 어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태어나면서부터 갖게 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서 알게 되는 것은 대부분 후천적인 지식에 근거한다. 후천적 지식은 일반, 특별 계시로부터 나온다. "그것은 정신 속에서 자발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지식에 대한 의식적이며 끊임없는 추구의 결과로 생겨진다. 그것은 감각과 반성, 논구와 토의 등 지루한 과정을 통해서만 얻어질 수 있다. 그러므로 그것은 인간의지의 자발적인 탐구와 끊임없는 노력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2. 하나님의 속성
1) 하나님의 이름 하나님의 속성을 다루기 전에 서론적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다루곤 하는데,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의 속성을 나타내는 하나님의 자기계시이기 때문이다. 구약에서는 엘, 엘로힘, 엘리욘, 아도나이, 샤다이, 엘 샤다이, 야웨, 야웨 츠바오트, 신약에서는 데오스, 퀴리오스, 파테르(아버지) 등의 명칭이 제시되어 있다. 이들이 전부가 아니고, 신구약 성경에는 하나님을 지칭함에 있어서 비유적인 표현들도 많이 사용되고 있는데, 여하튼 이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속성을 알 수 있다고 한다.
2) 하나님의 비공유적 속성(절대적 속성) 하나님의 속성을 논할 때에, 주로 비공유적 속성과 공유적 속성을 나누어 설명한다. 비공유적 속성이란, 하나님께만 있고 피조물, 특히 인간에게서도 찾아볼 수 없는 속성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좀 더 깊이 생각해 보면, 이 분류가 유용하기는 하지만 완전하지는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왜냐하면 완전하게 공유적이거나 완전하게 비공유적인 하나님의 속성이란 없기 때문이다." 여하튼 비공유적 속성에는 독립성(자존성), 불변성, 무한성(영원성-편재성), 통일성(단순성) 등이 제시되어 왔다(하나님의 속성에 대해서는 웨인 그루뎀의 설명이 매우 유용하다).
독립성(Independence)을 자존성(aseity)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는 "하나님께서는 인간이나 피조물들을 필요로 하시지 않는다. 그럼에도 우리와 다른 피조물들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고 기쁘시게 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하나님은 아주 특이하신 분으로서, 단순히 피조물을 필요로 하지 않으실 뿐만 아니라 필요로 할 수도 없는 분이시다. 그럼에도 이 교리를 균형 있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나 다른 피조물들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도 있고 그를 기쁘시게 할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하고, 하나님의 독립성이 우리를 무의미하게 만들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하나님의 불변성은 "하나님은 그의 존재, 완전성, 목적 그리고 약속에 있어서는 불변하나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행동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각 상황에 따라서 다르게 행동하신다"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하나님께서 마음을 바꾸신 것처럼 보이는 부분도 있다. 그루뎀은 "이 사례들은 어느 시기에 주어진 상황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와 의도에 대한 진실한 표현으로 이해해야 함에는 틀림이 없다. 만일 상황이 바뀐다면, 당연히 하나님의 의도나 태도에도 변화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는 단지 하나님께서 각각의 상황에 대해 다르게 반응을 보이신다는 의미일 뿐이다"라고 주장한다. 그루뎀은 하나님의 불변성을 상당히 역동적인 개념으로 파악하고 있는데, 그는 성경적 표현의 테두리를 넘지 않으려 하고 있다. 하나님의 불변성을 지나치게 확대하여 하나님은 감정을 가지지 않으시는 분이라는 주장이 있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성경에 근거하여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구축하는 것이라기보다 하나님의 불변성에 대해서 철학적 논의를 전개한 것에 불과하다고 본다. "우리의 감정의 근원이시며 우리의 감정을 지으신 하나님은 감정을 소유하고 계시다." 이렇게 생각을 전개하다 보면, 하나님의 불변성에 대한 교리는 그리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만일 하나님이 변하신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잠시 해본다면, 이 교리의 중요성이 좀 더 선명해질 것이다."
하나님의 무한성에는 영원성과 편재성이 있는데, 이를 따로 다루어 보자. 영원성이란 하나님께서 시간적으로 무한하시다는 말이다. "하나님은 그 존재에 있어 시작이나 끝, 혹은 순간의 연속이 없고 모든 시간을 똑같이 생생하게 보신다. 그럼에도 시간 안에서 사건과 행동을 관찰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시간을 초월하신다. 하나님은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것을 똑같이 생생하게 보시고 아신다. 그러나 이는 하나님께서 사건을 시간 안에서 보시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게 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시간을 초월하고 계신 분임에도 불구하고, 시간 안에 들어오셔서 역사하신다.
편재성은 "하나님은 크기나 공간적인 차원을 갖지 아니하시며, 모든 공간에 자신의 전 존재로 현존하시며, 또한 각각의 상이한 장소에서 상이하게 행동하신다."12)고 정의된다.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우주 어디에나 계신다고 고백하는 부분이 많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모든 곳에 계시지만, 그 각각의 장소에서 다르게 행동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우주를 주관하시고 하나님께서 의도하신대로 운행하도록 하시기 위해 임재하시며, 사람들에게 복을 주시며 또한 벌을 주시기 위해 임재하신다. 구약에는 하나님의 임재를 위한 특별한 장소가 지정되지만, 새 언약 아래에서는 우리는 어디에서나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게 되었다. "요약하자면, 하나님께서는 그의 전체로 우주의 모든 부분에 임재해 계시지만, 그럼에도 각각 다른 장소에서 다르게 행하신다. 또한 성경이 하나님의 임재에 관해 말씀하실 때는 대체로 복을 주기 위해 임재하시는 것을 의미하며, 그래서 우리의 일상용어도 이와 같은 성경의 의미를 반영하고 있다."
하나님의 통일성은 "하나님은 여러 부분으로 나누어지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각각 다른 시간에 강조된 다른 하나님의 속성을 본다." 이를 하나님의 단순성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이에 의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여러 속성들이 모여서 하나님의 성품을 이룬다고 생각해서는 안 됨을 알 수 있다. 또, 하나님의 속성은 하나님의 참 존재에 부가된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완전히 통일되고 하나가 되신 분이다. "하나님의 각 속성은 단지 하나님의 전체적 성품의 일면을 묘사하고 있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더욱이 하나님의 통일성에 관한 교리는 하나님의 어느 한 속성을 다른 속성들보다 더 중요한 것으로 생각하지 못하게 해준다."
3) 하나님의 공유적 속성 "하나님의 공유적 속성들은 인간의 속성들과 어떤 유사점을 띄고 있는 속성들이다. 그러나 인간 속에서 발견되는 것들은 하나님의 무한, 완전한 것에 비해, 다만 유한, 불완전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임을 명심해야 한다." 여기에는 지식, 지혜, 선, 사랑(은총, 긍휼, 오래 참으심), 거룩, 의(義), 진실, 주권 등이 포함되어 왔다. 이 각각의 속성에 대해서도 많은 논의들이 있으나, 여기서는 하나님께서 이러한 속성을 가지고 계시며, 그와 비슷한 속성들이 택함을 받은 자들에게서, 그리고 일반은총(계시)의 범위에서 모든 인류에게 미치고 있음을 아는 것으로 멈춘다.
3. 삼위일체
삼위일체는 하나님의 속성(존재)의 문제와 연관되는 것이지만, 그 중요성 때문에 따로 다룰 필요가 있다. "하나님은 그의 본질적 존재에 있어서는 한 분이시나, 이 한 분 안에는 성부, 성자, 성령이라 불리우는 삼위(3인격)가 존재한다. 그러나 이 삼위는, 여러 사람의 여러 인격들처럼, 전혀 분리된 세 인격이 아니다. 삼위는 오히려 신적 본질이 존재하는 세 형태인 것이다. 동시에 명심해야 할 것은 신적 존재에 있어서의 이들 자기 구별은, 그들이 서로 인격적 관계를 가질 수 있다는 그런 성질의 것이라는 점이다. 성부는 성자에게 말씀하실 수 있으시며, 또한 성령을 파송할 수 있으시다. 이 삼위가 그 본질적 존재에 있어서 하나라고 하는 여기에 삼위일체의 참된 신비가 있는 것이다."
이 삼위일체 교리는 성경 안에서 점진적으로 계시되어 온 것이다. "구약성경에 삼위일체에 관한 교리가 공공연히 증거된 적은 없지만, 하나님이 단순히 한 위(person)로 존재하신 것은 아님을 제시하거나 암시하는 구절들은 여럿 있다. 신약성경은 성자께서 이 땅의 역사에 들어오신 사건으로 시작한다. 따라서 이 사건은 하나님의 삼위일체적 본질에 관한 것을 좀 더 분명하게 가르쳐 주는 계기가 될 것을 기대할 수 있고, 실제로 그러하다."
Grudem은 이 삼위일체에 대한 중요한 명제가 세 가지 제시하고 있다. 1. 하나님은 삼위이시다. 2. 각 인격체는 한 하나님이시다. 3.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 그리고 이 세 명제들 중에 하나라도 부인되어서는 안 된다고 언급한다. 그러나, 이 세 명제들은 서로 조화되어서 하나의 진리로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 교리를 설명하기 위해 자연이나 혹은 경험으로부터 유사한 것을 끌어내려고 했다. 이 유비들은 초보 단계에서는 도움이 되지만, 좀 더 주의 깊게 살펴보면 모두 결함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삼위일체를 유비로 설명할 수가 없는 것이다. 삼위일체의 진리는 하나님의 존재 자체를 설명하는 것이기에,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피조물에서 찾을 수 없다.
4. 하나님의 사역
신론의 마지막 부분은 하나님께서 어떤 사역을 하고 계신가에 대해서 설명하는 것이다. Berkhof는 하나님의 사역의 첫 부분을 하나님의 작정으로 시작하는데, Grudem은 창조로 시작한다. 하나님의 작정으로 시작하는 것은 사실 성경의 순서라고 보기는 힘들다. 분명 성경은 창조로 시작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작정, 창조, 섭리로 대표되는 하나님의 사역 중에서 작정의 부분은 구원으로 넘기는 입장을 취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이는 Calvin의 입장이기도 하다.
1) 창조 하나님은 자유적인 행위로 우주를 창조하셨다. 이는 필연에 의한 것이 아니다. "그는 자아충족자이시기 때문에 세계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우주창출은 하나님의 고유의 필연성에 의하지 않고,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의 완전한 자발적 결단에 의한 것이었다. 이것은 일체의 범신론적 교리에 대항하여 강조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창조사역을 통하여, 세계를 만드실 때 자기 존재와 구별되어 있는 분리된 존재로 만드셨다. 그러므로 우주는 그 자체가 하나님이나 또는 하나님의 한 부분으로 생각될 수 없다. 동시에 하나님은 세계를 구성하시되, 세계가 항상 하나님께 의존하여, 매일같이 그의 권능에 의하여 유지되도록 하셨다. 하나님은 결코 그의 전창조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고, 그 속에 현재하고 계신다."
하나님은 태초에 말씀으로 온 만물을 창조하셨다. 이는 어떤 기존 재료를 사용하지 않으셨음을 의미하며, "태초" 이전에는 끊없는 영원히 있었을 뿐임을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세계를 창조하신 것의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시기 위함이었다. 인간은 하나님의 모든 창조로부터 혜택을 받지만, 창조의 궁극적인 목적이 인간을 위한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창조하셨다는 것은, "하나님이 본래 피조물에게서 경배와 찬송으로 영광 받으려고 세계를 창조하셨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고, 다만 그의 영광의 나타나심을 위하여 창조하셨다는 것을 뜻한다."
2) 섭리 "섭리란, 하나님께서 모든 피조물을 보존하시며, 세계에서 생성하는 모든 일에 행동하시며, 그리고 만물을 그 정해진 목적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사역"이라 할 수 있다. 여기에는 보존, 협력, 통치가 포함되어 있다. 섭리를 다시 일반 섭리와 특별 섭리로 나누기도 하는데, 일반 계시와 특별 계시의 구분과 그 틀이 같은 것이라 볼 수 있다.
전통적인 입장에서 섭리를 다룰 때에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악의 문제와 이적의 문제다. 하나님이 통치하심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이 세상에 악이 존재할 수 있느냐의 문제, 그리고 자연법칙에 의거하지 아니한 현상들이 기적이 있을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를 상당히 중요하게 보는데, 이는 성경의 무오성 문제와 깊이 연관되기 때문이다. Grudem은 기도의 문제도 섭리에서 중요한 것으로 다루고 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당신의 계획에 의해 섭리해 가고 계신 것이라면, 우리의 기도는 그 가운데에서 어떠한 역할을 감당하고 있는 것인가? 이런 문제는 역시 그리 쉽게 풀릴 문제처럼 보이지 않는다. 일단 우리는 악, 기적, 기도의 문제들이 모두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있다"고 고백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들 문제에 대한 언급은 개관의 수준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기 때문에 이들에 대한 논의는 다음 기회로 미루려 한다.
지금까지 조직신학 신론을 개관하였다. 특히 하나님의 비공유적 속성에 대해서 조금 더 관심을 두고 있는데, 사실 각각의 모든 영역들이 여러 저작들을 통하여 첨예한 토론이 벌어질 수 있는 문제들이다. 우리는 여기서 신론을 알았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다만 신론에서 어떠한 문제들이 떠오르고 있는가를 개관하고, 우리의 기본적인 태도가 무엇이겠는가를 제시하는 선에서 마감하였으므로, 이후에 더욱 관심을 가지고 탐구하는 모습이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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