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0-11-25 04:05
기독교 강요 1-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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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웹섬김이
조회 : 8,019  
제 5 장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우주 창조 속에서 빛이 비추어 지고 그리고 우주를 계속 지배 하신다.

(하나님은 창조 사역에서 자신을 계시하셨다. 1-10)
1. 하나님이 스스로 명백히 모습을 드러내시므로 우리는 모든 변명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더욱이 축복된 생활의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을 아는데 있다(요 17 : 3 참조).
그러므로 하나님은 어떠한 사람도 행복에 이르는데서 제외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인간의 마음속에 이미 말한 바 있는 종교의 씨앗을 심어 주셨을 뿐만 아니라, 자기를 계시하셨으며 우주의 전 창조 속에서 매일 자신을 나타내시는 것이다. 그 결과 인간은 눈을 뜨기만 하면 하나님을 볼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실로 하나님의 본질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이어서
그 신성은 인간의 모든 지각을 훨씬 초월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모든 창조물 위에 영광의 명백한 표적을 새겨 놓으셨으며 그것은 너무나 뚜렷하고 분명하기 때문에 아무리 무식하고 어리석은 사람이라 해도 무지를 구실로 삼을 수 없다. 그러므로 시편 기자는 "주께서 옷을 입음같이 빛을 입으시며"(시 104 : 2)라고 아주 적절하게 외쳤다. 말하자면 이 말은 우주 창조이래 하나님께서 눈에 보이는 화려한 복장으로 자신을 보여 주시기 시작하신 이후부터 우리가 언제 어디서든지 자신의 영광의 훈장들을 볼 수 있도록 우리에게 보여 주셨다는 말과 같다.
시편 기자는 또한 같은 곳에서 능란하게 광대한 하늘을 왕궁에 비교하여 다음과 같이 "물에 자기 누각의 들보를 얹으시며 구름으로 자기 수레를 삼으시고 바람 날개로 다니시며 바람으로 자기 사자를 삼으시며 화염으로 자기 사역자를 삼으시며"(시 104 : 2-4)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하나님의 권능과 지혜의 영광이 위에서는 더욱 찬란하게 빛나고 있기 때문에, 흔히 하늘을 하나님의 궁전이라고 부른다(시 11 : 4). 더욱이 무엇보다도 먼저 눈을 어디로 돌리든지 이 세계에는 어느정도 하나님의 영광의 섬광이 빛나지 않는 곳은 하나도 없다. 우리는 그 가장 거대하고 아름다우며, 광대한 이 우주의 구조를 그 광채의 무한한 힘에 완전히 압도당하지 않고는 잠시라도 바라볼 수 없는 것이다.
히브리서 기자가 이 세계를 "보이지 않는 것들의 실상"(히 11 : 3)이라고 우아하게 표현하였던 이유는, 정교하게 조화와 균형을 이루고 있는 이 세계야 말로 일종의 거울(mirror)이요, 바로 이 거울로 달리는 볼 수 없는 하나님을 똑바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편 기자가 천체에다 만민이 다 이해할 수 있는 언어를 사용한 이유는(시 19 : 2이하), 그 천체가 너무도 명백하게 하나님을 증거해 주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가장 미련한 사람이라도 그 관찰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이 사실을 더욱 명백하게 밝혀 주었다.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롬 1 : 19-20).

2. 하나님의 지혜는 누구나 다 알고 있다.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를 보여 주는 수많은 증거는 하늘과 땅에 셀 수 없이 많다. 그것은 천문학이나 의학, 또는 일체의 자연 과학의 엄밀한 연구 대상으로 정해진 심원한 것들만이 아니라 가장 배우지 못하고 가장 무지한 자라도 보지 않을 수 없게 제시되어 그들이 눈을 뜨기만 하면 반드시 그것들을 목격하게 되는 것들이기도 하다. 사실 이러한 학문을 다소나마 수학한 사람들이라면 그 도움으로 하나님의 지혜의 비밀을 보다 더 깊이 통찰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학문에 무식하다고 해서 하나님의 창조의 솜씨를 충분히 관찰할 수 없다든가, 하나님을 마음껏 찬양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분명히 더 한층 나아가 별의 운행을 조사하고, 그 위치를 정하며, 그 간격을 측정하고, 그 특성들을 기술하기 위해서는 기술과 정밀한 수고가 필요하다.
이러한 것을 연구할 때 하나님의 섭리가 한층 더 명백하게 그 자체를 보여 주는 것처럼 인간의 마음도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기 위해서는 더 높은 수준에 도달해야 한다. 오로지 눈으로만 배운 일반 대중이나, 가장 배우지 못한 사람이라도 하나님의 그 기술의 탁월함은 깨닫게 마련이다. 그것은 특수하면서도 질서 정연한 천체의 무수한 다양성이 그 자체를 보여 주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지혜를 풍부하게 보여 주지 않은 사람은 이 세상에 하나도 없는 것이 분명하다. 인체의 구조에 관해서도 이와 마찬가지로 생각할 수 있다. 곧 우리가 갈렌의 노련한 기술로 인체의 관절, 균형, 미, 효용 등을 조사하기 위해서는 탁월한 재간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인체의 구조가 정묘하기 때문에, 그 창조주가 당연히 놀라운 일꾼으로 판단되어야 한다는 것은 모든 사람이 인정하는 것이다


3. 인간이 신의 지혜로우심을 최고로 증명 한다.
따라서 오래 전에 어떤 철학자들은 인간을 가리켜서 하나의 소우주라고 한 것은 적절한 표현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하나님의 권능과 자비하심과 지혜의 특별한 표본이며, 우리가 그러한 것들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는 것에 대하여 싫증만 느끼지 않는다면,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한 경이로움을 그 안에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사람으로 하나님을 혹 더듬어 찾아 발견케 하려 하심이로되"라고 말하고 곧 이어서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 계시지 아니하도다"(행 17 : 27)10라고 첨가하였다. 왜냐하면 그것은 각 사람이 자신을 깨우쳐 주는 하늘나라의 은혜를 내적으로 지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나님을 이해하는 데 인간의 한계를 넘어설 필요가 없다고 한다면 하나님을 발견하기 위해 자신을 낮추기를 원하지 않는 자들의 그 게으름이 어떻게 용서받을 수 있을까?11 이와 똑같은 이유로 다윗은 도처에서 빛나는 하나님의 그 놀라운 이름과 영광을 간단히 찬양하고, 곧 이어서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시 8 : 4)라고 외쳤다. 그는 다시 "어린아이와 젖먹이의 입으로 말미암아 권능을 세우심이여"(시 8 : 2) 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인류는 하나님의 사역에 대한 맑은 거울일 뿐만 아니라, 어머니 가슴에서 젖 먹는 어린아이들까지도 다른 웅변가를 필요로 하지 않을 만큼 하나님의 영광을 전파하는 데 충분한 웅변적인 언어를 가지고 있다고 그는 선언했다. 그래서 다윗은 악마적인 교만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없애고자 하는 자들의 그 광란을 충분히 반박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주저하지 아니하고 어린아이를 여기의 논전에 끌어내 온 것이다. 따라서 바울도 또한 아라투스(Aratus)의 말을 인용하여,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행 17 : 28)고 말하였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와 같은 훌륭한 탁월성을 우리에게 부여해 주심으로써, 자신이 우리의 아버지임을 증명해 주셨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이교의 시인들도 상식과 경험의 지시를 따라 하나님을 "사람들의 아버지"라고12 불렀던 것이다. 진실로 아버지로서의 하나님의 사랑을 먼저 맛보고 다음에 자기편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며 경배드리지 않는 한, 아무도 자기를 바쳐 자발적으로 하나님을 섬길 수 없는 것이다.

4. 인간은 배은망덕하게 하나님께 반항한다
그러나 여기서 인간의 파렴치한 배은망덕이 드러난다. 인간은 자기 안에 하나님의 무수한 사역으로 아름답게 꾸며진 공장과, 동시에 측량 할 수 없는 부요함이 넘쳐흐르는 창고를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인간은 마땅히 하나님을 찬양해야 하는데 그와는 반대로 더욱 더 교만에 부풀어 스스로 잘난 체한다. 하나님께서 여러 가지 놀라운 방법으로 그들 안에서 역사하고 계심을 그들은 깨닫고 있다. 그들은 또한 각종의 많은 은사가 하나님의 관대하심에서 왔다는 것을 경험으로 배운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간에 이것들이 신성의 표시임을 그들은 알게 된다. 그러나 그들은 이것들을 자기 안에 감추어 버리고 만다. 실로 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을 자신에게 귀속시키고, 하나님을 분명히 볼 수 있도록 마음을 비추어 주는 것들을 땅에 묻어 버리지만 않는다면 그들은 탈선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심지어 오늘날에도 이 지상에는 많은 기괴한 정신의 소유자들이 있어서 하나님의 이름을 도말하기 위하여 인간성 안에 널리 뿌려져 있는 신성의 모든 씨앗을 그릇되게 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인간이 자신의 영육에서 수백 번이라도 하나님을 발견함에도 불구하고, 이 탁월성 자체를 구실로 삼아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는 이 광란이야말로 얼마나 가증한 것인가? 그들은 인간이 우연히 동물과 구별되었다고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만물의 창조주이신 분을 "자연"으로 대치시키고 하나님의 이름을 삭제해 버린다. 그들은 극히 절묘한 하나님의 솜씨를 입과 눈에서부터 심지어는 발끝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각 지체 전체를 통하여 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여기서도 하나님을 자연으로 대치시킨다. 그러나 영혼의 신속한 운동, 그 탁월한 기능, 그 특수한 은사, 이러한 것들은 특히 쉽게 감춰질 수 없는 신성을 그 면전에 보여 주는 것들이다. 그러나 에피큐로스 학파는 키클로페스(Cyclopes)와 같이 그러한 고귀성을 이용해서 더욱 더 뻔뻔스럽게도 하나님을 대항하여 싸웠던 것이다. 그렇다면 전우주에는 이러한 특권이 없어서 인간이라고 하는 겨우 5척밖에 안 되는 버러지를 다스리기 위하여 하늘나라의 모든 지혜의 보화가 한 곳에 다 동원되었단 말인가? 첫째, 그 영혼 안에 육체의 각 부분과 부합하는 어떤 기관이 있다고 먼저 주장하는 것은 조금도 하나님의 영광을 흐리게 하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그것을 더 빛나게 하는 것이다. 에피큐로스로 하여금 다음의 질문에 답하게 하자. 곧 원자의 집합이 어떻게 식물과 음료를 분해하여 한 부분은 배설물로 다른 부분은 피로 변하게 하는가? 그리고 마치 많은 영혼이 상의하여 한 육체를 다스리기나 하는 것처럼 무엇이 각 지체로 하여금 열심히 각자의 임무를 수행하게 하는가!

5. 창조주와 피조물의 혼동
그러나 나는 지금 그런 돼지 떼와 같은 것에 대하여는 아무 관심도 없다. 오히려 해괴한 것들에 끌리어 영혼의 불멸을 부정하며 하나님으로부터 그 권리를 박탈하기 위하여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의 그 냉소적인 교설을 부정한 방법에 따라 자발적으로 받아들이는 자들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영혼은 유기적인 여러 기능을 가지고 있으므로 그들은 이것을 구실로 삼아 영혼을 육체에 구속시키고, 육체 없이는 영혼이 존재할 수 없다고 하며 자연을 찬양함으로써 하나님의 이름을 최대한 억압한다.17 그러나 영혼의 여러 능력이 지체를 돕는 기능에만 국한된다고 말할 수는 없다. 천체를 관측하고 별의 수를 계산하며, 그 크기를 결정하고 별과 별 사이 거리를 알며, 그 운행의 신속함과 완만함을 알고, 궤도의 여러 모양의 기울기의 정도를 아는 일에 있어서 도대체 사람의 육체가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인가. 실로 나는 천문학의 유용함을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내가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천체에 대한 이러한 깊은 연구에는 영혼과 육체의 유기적인 조화가 있는 것이 아니고 육체와는 구별된 영혼의 활동이 있다는 사실이다. 내가 위에서 제시한 한 실례로 인해 독자들은 나머지 문제들도 쉽게 추리할 수 있을 것이다. 하늘과 땅을 관찰하며, 과거와 미래를 결합시키며, 오래 전에 들은 것을 계속 기억에 담아 두며, 즐겨하는 것은 무엇이나 다 생각해 낼 수 있는 영혼의 그 다방면의 민첩함 그리고 훌륭한 것들을 발명해 내며 많은 놀라운 발명품의 어머니인 영혼의 그 다방면의 교묘함 이러한 것들은 분명히 인간에게 신성이 있다고 하는 확실한 증거이다. 이 외에도 사람이 잠자고 있는 동안에도 영혼이 여기 저기 배회할 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유익한 것들을 생각하며 여러 가지 문제를 추리하며 심지어는 미래의 일을 예시하기까지 하는 것은 어찌된 일인가? 인간에게 심어져 있는 영혼 불멸의 흔적은 지워 버릴 수 없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 외에 또 무엇을 말해야 하겠는가? 그런데 신적 존재인 인간이 창조주를 알지 못한다고 하는 것은 도대체 무슨 이유에서인가? 실로 우리가 받은 판단력에 따라 정과 사를 분별할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나라에 심판자가 없을 수 있겠는가? 수면 중에도 우리에게는 지능의 어떤 부분이 활동하는데 하물며 하나님께서 깨어 계셔서 세계를 통치하지 않으신다고 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자신을 그렇게 많은 예술과 유익한 것들의 창안자로 자처하면서 하나님은 그가 받으실 찬양을 빼앗겨도 좋단 말인가? 그러나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은 무엇이나 다 다른 근원으로부터 여러 가지 형태로 주어 졌음을 경험이 풍부하게 가르쳐 주고 있다. 더우기 전 우주에 생명을 주는 것은 은밀한 영감이라고 헛소리를 지껄이는 자들이 더러 있는데 그들의 말은 설득력이 없을 뿐만 아니라 전적으로 불경스러운 것이다. 그들은 버질(Vergil)의 다음과 같은 유명한 시를 좋아하고 있다.

최초에 한 영이 있어
하늘과 땅, 해면, 빛나는 달
그리고 타이탄의 별들을 부양한다.
이 영은 모든 부분에 고루 퍼져서
그 덩어리를 움직이며 또 그것과 융합한다.
이 영으로부터
인류, 짐승, 창공을 비상하는 날개 달린 아름다운 새들
그리고 유리같이 빛나는 대양 밑의 고기들이 나온다.
이 영은
만물에서 불의 열과 생명의 기원을
나오게 했다.19

이 시는 하나님의 영광의 장관(壯觀)으로 세워진 이 세계가 마치 그 자체의 창조주인 것처럼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 시인은 다른 곳에서도 헬라 사람과 라틴 사람의 공통적인 견해에 따라서 다음과 같이 노래하였기 때문이다.

꿀벌은 하늘나라 마음의 한 부분
천상에서 어떤 힘을 발아 들인다.
그것은
신이 땅과 바다와 하늘
그리고 만물에 편재하여 있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양과 소
사람, 짐승들이 태어날 때
실낱같은 생명을 받는다.
그리고.
만물이 그에게로 돌아가서 해소되고
또 회복된다. 다시는
죽음이 없다. 그러나 별 많은 하늘나라
높이 올라가 거기서 살리라.20

세계에 생명을 불어넣으며 그것을 움직인다는 우주정신에 대한 그 빈약한 사색이 인간의 마음에 경건을 일으키며 키우는 일에 무슨 가치가 있다는 말인가! 이러한 사상은 또한 위와 같은 원리에서 연역해 낸 추악한 루크레티우스(Lucretius)의 그 모독적인 시구에서 더욱 명백히 드러나고 있다.21 이 시는 실로 우리가 마땅히 두려워하고 찬양해야 할 참되신 하나님을 몰아내기 위하여 영광적인 신격을 고안해 낸 것이다. 물론 경건한 마음에서 그런 말이 나왔다고 하면 자연이 하나님이라고 하는 말은 경건하게 말해질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그러나 이 말은 귀에 거슬리며 부적당한 말이다. 왜냐하면 자연은 오히려 하나님께서 정하신 질서라고 하는 것이 더 타당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특별히 경건을 요하는 중대한 과제에 있어서, 하나님을 그 사역의 열등한 과정과 혼동하는 것은 위태로운 일이다.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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