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0-11-25 0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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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7 장 성경은 반드시 성령의 증거로 확인되어야 한다.그러므로 그 권위는 확실한 것으로 세워지게 될 수 있다. 그리고 성경의 신빙성이 교회의 판단에 기인된다는 것은 사악한 거짓이다
1. 성경의 권위는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지 교회에서 온 것이 아니다
더 나아가기 전에 우선 여기서 성경의 권위2에 대해 다소의 의견을 이야기하는 것이 보람 있는 일이라 생각된다. 그것은 우리의 마음을 준비시킬 뿐만 아니라 모든 의문을 제거하기 위해서이다. 공포된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인정되었을 경우 사람이라면 누구나 상식을 벗어나거나 인간성 자체가 결여되어 있지 않는 한, 그렇게 말씀하신 분에 대한 신뢰를 감히 비난할 만큼 비극적인 오만에 빠질 수는 없는 것이다. 현재 우리는 매일같이 하늘로부터 직접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성경 안에서만 자기의 진리를 영원히 기억할 수 있도록 신성(神聖)하게 보존하기를 원하셨기 때문이다(요 5 : 39 참조). 마치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을 하늘로부터 직접 듣는 것처럼 성경의 기원이 하늘로부터 유래되었다고 생각될때만 비로소 성경은 신자들로부터 완전한 권위를 얻게 되는 것이다. 실로 이 문제는 더 충분한 논의와 더 주의 깊은 고찰을 하기에 매우 가치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만일 이 문제의 광범한 성격이 요구하는 중요성 보다 본서의 계획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인다 해도 독자는 나를 양해해 줄 것으로 안다.
그러나 교회의 승인을 얻을 때에만 비로소 성경은 그 중요성을 가지게 된다고 하는 가장 유해한 오류가 현재 널리 유행하고 있다. 이것은 마치 하나님의 영원하시며 침범할 수 없는 진리가 인간의 결정에 의해 좌우된다는 말과 같은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다음과 같이 물을 때는 성령을 모독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곧 하나님께서 성경의 저자라는 것을 누가 우리에게 믿게 할 수 있는가? 성경이 오늘날까지 완전하게 또는 상하지 않고 깨끗하게 보존되어 왔다는 것을 누가 우리에게 보증할 수 있는가? 만일 이러한 문제들을 위한 확실한 규칙을 교회가 규정하지 않았다면, 한 책은 귀중히 여기고 다른 책은 제거하도록 누가 우리를 설득시킬 수 있겠는가? 따라서 성경은 얼마나 귀중히 여김을 받아야 하는가. 그리고 어떠한 책이 정경(政經)에 편입되어야 하는가는 교회의 결정에 달려 있다고 그들은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교회라는 이름 밑에서 무제한의 횡포를 즐겨 행하는 이 불경한 사람들은 교회는 모든 것에 대하여 권위를 가진다고 하는 이 한 가지 관념을 단순히 사람들에게 강요할 수만 있다면, 자타(自他)를 곤란에 빠뜨리게 하는 그 불합리에 대하여는 아무런 관심도 가지지 않는다. 그러나 만일 이것이 사실이어서 영생에 대한 일체의 약속이 사람의 판단으로 결정되고 또 그 판단에만 의존된다고 한다면, 그 영생의 확신을 찾고 있는 비참한 양심들의 상태는 마침내 어떻게 될 것인가? 그러한 답변을 얻을 때 그들은 그들의 동요하는 마음과 두려움을 진정시킬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우리의 신앙이 만일 인간의 만족에만 의존하는 그런 불안정한 권위를 가진 것이라면, 불경건한 자들은 우리의 신앙을 얼마나 조롱할 것이며, 많은 사람이 우리의 신앙을 얼마나 의심할 것인가!
2. 교회 자체는 성경의 기반 위에 서 있다 그러나 그러한 논쟁자들은 사도 바울의 단 한 마디 말로도 훌륭하게 반박할 수 있다. 곧 교회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었다."(엡 2 : 20)고 사도는 증거하였던 것이다. 만일 선지자와 사도의 교훈이 교회의 기초라고 한다면, 그것은 확실히 교회가 존재하기 이전에 벌써 그 권위를 갖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교회가 그 기원의 시작을 성경에서부터 가졌다 하더라도 교회가 그것을 결정하지 않았다면 어떤 선지자와 사도가 쓴 책이겠는가 하는 것은 여전히 의심으로 남게 된다고 하는 그들의 교활한 반대도 또한 아무런 근거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교회가 처음부터 선지자들의 글과 사도들의 교훈에 기초를 두었다고 하면, 그 교리가 어디서 발견되더라도 이 교회의 승인은 분명히 교회보다 앞서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교리가 없이는 교회 자체가 결코 존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경을 판단하는 권세가 교회에 속하며, 성경의 확실성이 교회의 결정에 좌우된다는 것은 참으로 거짓된 견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교회가 성경을 받아들여 이에 승인의 인장을 받아야 하는 것은, 의심스러운 점과 논쟁점들을 합법화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성경을 하나님의 진리로 인정하기 때문에 경건의 의무로서 교회는 조금도 주저 없이 성경을 존경하는 것이다. 교회의 법규에 의존하지 않는 한, 그들은 성경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것을 우리가 어떻게 확신할 수 있겠느냐고 물을 것이다. 이는 마치 어떤 사람이 우리는 어떤 방법으로 흑암에서 광명을, 검은 데서 흰 것을, 쓴 것에서 단 것을 가려내는 일을 배울 수 있는가고 묻는 것과 같은 말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그 진리의 명백한 증거를 마치 흰 것과 검은 것이 그 색깔이 다르고, 또한 단 것과 쓴 것이 그 맛이 다르듯이 분명하게 나타내는 것이다.5
3. 어거스틴의 말을 반증(反證)으로 내세울 수 없다 참으로 교회의 권위가 복음을 믿도록 마음을 감동시키지 않으면 그는 복음을 믿지 않을 것이라고 한 어거스틴의 말이 일반적으로 인용되고 있음을 나는 알고 있다.6 그러나 그들이 이 말을 얼마나 나쁘게 또는 기만적으로 해석하였는가 함은 전후 문맥으로 보아 쉽게 알 수 있다. 어거스틴은 거기서 마니교도들(Manichees)을 의식하고 그런 말을 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 마니교도들은 그들이 주장하는 바를 아무 반론 없이 믿게 하기를 원하면서도 그들이 스스로 소유하고 있는 진리를 증명하지 못한 자들이었다. 사실상 그들이 마니(Mani)에 대한 신앙을 증진시키기 위한 구실로서 복음을 사용하였기 때문에 어거스틴은 그들에게 이렇게 물었다. "만일 여러분들이 복음을 믿지 않는 사람을 만나면 어떻게 하겠는가? 어떤 종류의 설득력을 가지고 그를 여러분들의 의견으로 돌아오게 하겠는가?" 그는 여기에 더 첨가하여, "실로 나는 복음을 믿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 말이 뜻하는 것은 자기가 만일 신앙에 대해 문외한이라면 교회의 권위로 강요당하지 않는 한, 복음을 하나님의 확실한 진리로 받아들이게 되지 못하였을 것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를 알지 못할 때 인간의 말을 존중하였다고해서 그것이 무슨 이상한 일이라 하겠는가! 그러므로 어거스틴은 경건한 자의 신앙이 교회의 권위 위에 세워진다고 주장하지도 않았고, 복음의 확실성이 교회의 권위에 의존한다고 가르치지도 않았던 것이다. 다만 그가 말하는 것은 교회의 증언이 불신자들을 재촉하지 않으면,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복음의 확실성을 그들이 가지지 못하게 된다는 것뿐이다. 그리고 조금 후에 그는 이 사실을 다음과 같은 말로 명백히 확증하였다. 곧 "내가 나의 믿는 바를 예찬하고, 당신의 믿는 것을 비웃을 때 당신은 우리가 어떻게 판단하고 또 어떻게 행동해야 된다고 생각하는가? 확실한 것을 알도록 초청하고, 후에 가서는 불확실한 것을 믿으라고 명령하는 자들을 떠나야 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아직 충분히 바로 볼 수 없는 것을 먼저 믿으라고 초청하고, 이 믿음으로 힘을 얻어 우리의 믿는 바를 이해하게 하는 자들을 따라야 하지 않겠는가?(골 1 : 4-11,23) 이제 우리의 마음을 내적으로 강화하며 조명하시는 분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다." 이상의 말들이 바로 어거스틴이 하고자 하였던 말이었다. 이 말에서 누구나 다 명백히 미루어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이 거룩한 인물이 의도한 바는 성경에 대한 우리의 신앙을 교회의 동의나 결정에 맡기려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가 지적하고자 하였던 것을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곧 하나님의 영으로 아직 깨우침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 교회에 대한 존경심으로 인해 배우고자 하는 자세를 갖추어 마침내는 복음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을 힘써 배우게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될 때 교회의 권위는 복음의 신앙을 준비하게 하는 서곡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보는 대로 그는 경건한 자의 확실성을 전혀 다른 기초 위에 두기를 원하셨던 것이다. 그러나 한편, 마니교도들이 거절한 성경을 옹호할 생각으로 성경이 전체 교회의 승인을 얻었다고 마니교도들에게 자주 강조한 것을 나는 부정하지 않는다. 그가 다음과 같이 파우스투스(Faustus)를8 비난한 것도 바로 여기서 온 것이다. 곧 "그렇게 기초가 튼튼하고, 그렇게 견고하게 세워졌으며, 그렇게 영광스럽게 찬송을 받으며, 사도 시대로부터 오늘날까지 확실히 계승되어 온 복음의 진리를 그는 순종하지 않는다"라고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성경의 권위가 사람의 결정이나 제정에 의한다고는 결코 말하지 아니하였다. 다만 그가 말한 것은 교회의 보편적인 판단을 제언한 것뿐이니, 그것은 이 문제에 있어서 매우 큰 가치가 있었기 때문에 그의 반대자들을 능가할 수가 있었다. 신앙의 유익에 대하여(The Usefulness of Belief)9라는 어거스틴의 소책자를 읽기 바란다. 그러면 저자가 이 책에서 말한 대로 믿음의 유익이란 바로 탐구의 단서를 제공해 주며 그 적절한 시초를 형성해 주는 것임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단순한 견해로만 만족할 것이 아니라 확실하고 견고한 진리를 신뢰해야 할 것이다.
4. 성령의 증거는 다른 모든 증거보다도 강하다 바로 앞에서 말한 대로10 하나님이 성경의 저자라는 사실을 의심치 않고 확신하기 전에는 교리에 대한 신앙이 수립되지 않는다는 것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11 따라서 성경에 대한 최고의 증거는 일반적으로 하나님이 인격적으로 성경 안에서 말씀하시는 사실에서 얻게 된다. 선지자들과 사도들은 자신의 예민함과 그들의 말을 듣는 자들로부터 얻은 신앙을 자랑하지 않으며, 그렇다고 해서 이성적인 증거를 고집한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은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드러내어 전세계로 하여금 하나님에게 복종하게 하려 하였다. 이제 우리는 그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부주의하게 또는 거짓되게 부르지 않은 것이 정당한 일 뿐만 아니라 명백한 진리에 의해서도 분명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만일 우리가 양심을 위하여 최선의 길이 마련되기를 원한다면 곧 영원히 의심되는 문제로 불안해하거나 동요하지 않고, 또한 가장 작은 말장난에도 놀라지 않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인간의 이성이나 판단 그리고 억측에서가 아니라 이보다 훨씬 더 높은 근원, 곧 성령의 은밀한 증거에서 우리의 확신을 찾아야 한다. 참으로 우리가 이 점을 논하게 될 때, 만일 하늘나라에 어떤 하나님이 존재한다고 하면 바로 그가 율법과 예언의 복음의 원저자(原著者)라는 사실을 쉽게 증명할 수 있는 것들은 많이 들 수 있다. 학식있는 사람이나 최고의 판단력을 가진 사람들이 비록 반대를 일으켜서, 이 논쟁에서 자기네의 정신력을 모두 발휘한다 하더라도 그들이 절망적으로 파렴치해지기까지 강퍅해지지 않는 한, 다음과 같은 고백을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곧 성경 안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명백한 표시를 보게 된다는 것과 그리고 이 사실에서 성경의 교훈이 하늘로부터 왔다는 것을 명백히 알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조금 후에 이 거룩한 성경의 모든 책들이 다른 모든 저작품에 비해 훨씬 우수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만일 순결한 눈과 건전한 정신으로 성경을 읽는다면, 하나님의 위엄은 즉시 우리 시야에 나타나서 우리의 당돌한 거절을 억제하여 우리들이 순종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 것이다.
그러나 논쟁을 통해서 성경에 대한 확고한 신앙을 세워보려고 애쓰는 것은 어리석은 행동이다. 나 개인에 관해서 말하자면, 내게는 특별한 재주나 특별한 웅변을 하는 데 남보다 뛰어난 데가 없다. 그러나 하나님을 멸시하는 데 있어서 가장 교활한 자, 곧 성경의 권위를 약화시키는 데 기지와 기술을 나타내고자 하는 교활한 자들과 논쟁을 한다면, 아무 어려움 없이 그들의 소란한 소리를 잠잠하게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리고 그들의 트집들을 논박하는 것이 유익한 일이 된다고 하면, 그들의 뒷전에서 비밀리에 수군거리는 그 거만한 자들을 나는 큰 어려움 없이 분쇄시킬 것이다. 그러나 누가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을 사람들의 비방에서 옹호했다해서 이것이 곧 참된 경건이 요구하는 확실성을 그들의 마음에 즉시 새겨 주는 것은 아닐 것이다. 불신앙적인 사람들은 종교를 전적으로 견해에 불과하다고 보기 때문에 그들은 어떤 것도 어리석게 혹은 경솔하게 믿지 않기 위해서, 모세와 선지자들이 영감으로 말한 것을 합리적으로 입증해 주기를 원하며 또한 그렇게 요구한다. 그러나 성령의 증거는 일체의 이론을 훨씬 능가한다고 나는 답변한다. 왜냐하면 하나님 자신만이 자기 말씀의 합당한 증인이 되시는 것처럼15 그 말씀도 성령의 내적 증거에 의하여 확증되기 전에는 사람의 마음에서 받아들여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선지자들의 입을 통하여 말씀하신 바로 그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들어오셔서 하나님으로부터 위탁받은 말씀을 선지자들이 충성스럽게 선포하였다는 사실에 대하여 우리에게 확신시킬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이사야는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아주 적절하게 표현하였다. 곧 "네 위에 있는 나의 신과 네 입에 둔 나의 말이 이제부터 영영토록 네 입에서와 네 후손의 입에서와 네 후손의 후손의 입에서 떠나지 아니하리라"(사 59 : 21). 불경건한 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반대하고도 아무런 죄의 대가를 받지 아니하고 그대로 투덜거리는 것을 보게 될 때, 그들을 반대할 만한 뚜렷한 증거를 갖지 못하여 괴로워하는 사람들이 선(善)한 삶 가운데 더러 있다. 그것은 마치 성령께서 경건한 자의 신앙을 견고하게 하는데 "인장(印章)"이나, "보증"으로 불리어질 수 없는 것처럼 생각되는 것과 같다(고후 1 : 22). 왜냐하면 성령이 그들의 마음을 조명하시기 전에는 그들은 영구히 수많은 회의 속에서 흔들려야 하기 때문이다.
5. 성경은 스스로 증명한다 그러므로 다음과 같은 입장을 고수하자. 곧 성령으로 말미암아 내적으로 가르침을 받은 사람은 진심으로 성경을 신뢰한다는 것, 그리고 성경은 스스로 증명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을 증거나 도리에 종속시키는 것은 잘못이다. 그리고 성경이 마땅히 지녀야 할 확실성은 성경의 증거에 의해서 얻게 된다. 왜냐하면 성경이 그 자체의 위엄 때문에 존경을 받는다 하더라도, 그것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 마음속에서 확증되기 전에는 진정으로 우리를 감동시키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의 조명을 받았기 때문에 성경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것을 우리 자신이나 다른 사람의 판단에 따라 믿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인간적인 판단을 초월하여, 성경이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인간의 사역을 통하여 흘러 나왔다는 사실을 마치 우리가 하나님 자신의 위엄을 응시하는 것처럼 아주 확실하게 단정한다. 우리는 우리의 판단을 입증하는 어떤 논증이나 진실의 표시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판단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우리의 판단력과 짐작을 성경에 예속시킨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처럼 알지 못하는 것을 조급히 받아들였다가 그것을 엄밀히 조사한 끝에 곧 싫어하는 그와 같은 것이 아니라, 우리는 확실한 진리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충분히 확신하고서 그렇게 하는 것이다. 또한 우리는 저 비참한 사람들처럼 습관적으로 자기 마음을 미신의 노예로 만들지도 않고, 하나님의 확실한 신적 위엄의 능력이 성경 안에서 살아서 숨쉬고 있음을 실감한다. 이 능력에 의해서 우리는 의식적으로 또는 자발적으로 하나님께 순종하되 인간적인 의지나 지식에 의해서가 아니라 보다 더 생생하고, 보다 더 효과 있게 순종하도록 마음이 끌리게 되며 또한 순종의 불을 태우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가장 올바르게 이사야를 통해서 선지자들과 온 백성은 다 자기의 증인이라고 말씀하셨다. 왜냐하면 그들은 모두가 예언의 가르침을 받아 하나님께서 추호의 거짓이나 애매한 점이 없이 말씀하셨다고 주장하였기 때문이었다(사 43 : 10). 그러므로 이것은 아무 이론도 필요로 하지 않는 확신이다. 곧 이것은 최고의 이성으로 말미암아 입증된 지식이며, 실로 이 지식 안에서 우리의 마음은 어떤 이론에서 보다 더 안심하고 더 견고하게 쉴 수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것은 하늘나라의 계시가 아니면 만들어 낼 수 없는 감정이기도 하다. 내가 지금 여기서 말하는 것은 비록 내 말이 그 문제를 올바르게 설명하기에는 부족하긴 하지만 믿는자 개개인이 마음에서 경험하는 바를 말하는 데 지나지 않는다.
다른 곳에서도 이 문제가 재론될 것이기 때문에 나는 여기서 여러 가지 논의를 생략하기로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靈)이 우리 마음에 인(印)치시는 신앙만이 참된 신앙이라는 것은 여기서 알고 지나가자. 겸손하고 순진한 독자들은 이 한가지 이유만으로도 만족 할 것이다. 즉 이사야는 회복된 교회의 모든 자녀들에게 약속하기를, "모든 자녀는 여호와의 교훈을 받을 것이니"(사 54 : 13)라고 하였다. 하나님은 선민(選民), 곧 전체 인류 가운데서 그가 구별해 내신 자들에게만 이 유일한 특권을 주신다. 실로 참된 교리의 시작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고 하는 민첩한 열망이 아니고 또 무엇이겠는가? 그러나 하나님은 모세의 입을 통해서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우리의 주위를 환기시켰다. 곧 "누가 우리를 위하여 하늘에 올라갈꼬 누가 우리를 위하여 깊은 데로 내려갈꼬 네 마음에 이르지 말라 오직 그 말씀이 네 입에 있느니라"(신 30 : 12,14; 시 107 : 26 참조)고 하셨다. 만일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이 이해(理解)의 보화를 감추기로 결정하셨다면 일반 대중들이 그렇게 무지하고 어리석은 것도 놀라운 일이지만 불합리한 일은 아닐 것이다. 제아무리 뛰어난 자라 하더라도, 그들이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혀지기 까지는 나는 그들을 "일반 대중"이란 말로 부르기를 원한다. 더욱이 이사야는 예언의 교훈이 외국인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가족으로 인정받기를 원하였던 유대인에게까지도 믿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하고 나서, 동시에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첨가 하였다.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사 53 : 1). 그러므로 우리는 믿는 자의 수가 적은 것 때문에 마음의 괴로움을 느낄 때마다 그 반대로 마음을 돌려 "하나님의 비밀은 받은 자 외에는 아무도 이를 이해 할 수 없다"(마 13 : 11 참조)고 하신 말씀을 생각하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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