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명령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하신 이 명령은 신구약 성경을 통틀어 가장 심오한 말씀 중의 하나입니다. 아마도 이 구절만 바로 이해한다면 성경 전체를 이해한다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신구약 성경의 핵심 주제를 모두 담고 있습니다. 이 명령을 지상명령이라 부르는 것은 ‘절대로 복종해야 할 명령’이란 뜻에서 ‘定言的 命令’이라고도 부릅니다.
성경에는 다섯 가지의 대 명령이 있습니다. 문화명령, 십계명과 대계명, 쇄마명령, 산상수훈, 그리고 지상명령입니다.
‘문화 명령’은 아담과 하와가 타락하기 전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생명체에게 주신 명령입니다.(창1:22, 28) 다시 말하면 인간에게만 주신 명령이 아니라, 숨을 쉬고 호흡하는 모든 생명체에게 주신 명령입니다.
두 번째 명령은 ‘십계명과 대계명’은 아담과 하와가 타락한 후, 아담과 하와가 왜 하나님이 주신 안식을 누리지 못하고, ‘안식하셔야 할 하나님’이 안식하지 못하시게 되었는가(요5:17)를 깨닫게 하려고 주신 계명입니다.(롬3:20, 7:9, 13, 갈3:19)
세 번째 쇄마 명령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애급에서 구원하셔서 조상들과 약속하신 언약의 땅에 들어가서 하나님이 주신 구원과 평화와 안식을 상실하지 않기 위해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켜야 할 명령입니다.
네 번째 산상수훈은 죄에서 속량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지켜야 할 명령입니다.
다섯 번째 마지막 명령이 바로 지상명령입니다. 첫 명령인 문화 명령으로부터 둘째 명령인 십계명과 대계명, 셋째 명령인 쇄마 명령, 넷째 명령인 산상수훈을 모두 완성시키는 명령인 것입니다.
1. ‘제자’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이 뜻
첫째 ‘모든 민족으로 제자를 삼으라’는 이 말씀은 누구의 제자를 삼으라는 말씀일까요? 제자를 가리키는 헬라어 '마테테스'는 '따르는 자, 배우는 자'란 뜻으로서, 스승에게서 가르침과 훈련을 받고 그를 따르는 자를 가리킵니다. 좁은 의미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12제자(마10:1)를 가리키고, 넓은 의미에서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그분을 좇는 모든 성도(행6:1,7; 9:19)를 가리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제자’외에 여러 표현들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내 증인이 되리라”(행1:8)고 하신 ’예수의 증인’도 여기에 속하고, 안디옥 사람들이 ‘그리스도인’(행 11:26, 26:28)이라고 불렀든 ‘그리스도인’도 여기에 속하고, ‘하나님의 자녀’(요 1:12, 롬 8:16, 요일 3:1), ‘하나님의 백성’(히4:9, 11:25, 벧전2:10, 계21:3)도 모두 여기에 속합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 삼으라”는 말씀은 다른 말로 하면 ‘내 증인’, ‘그리스도인’,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 백성으로 삼으라’는 뜻으로도 해석할 수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예수께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 하신 말씀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베드로를 비롯한 그 어느 누구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준 자”가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당부에 따라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있는데, 제자들은 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가 아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준 것일까요?(행 2:38, 8:12, 16, 10:48, 19:5, 22:16) 우리가 잘못하는 것입니까, 사도들이 잘못한 것입니까?
사도들은 성령의 빛을 통해 예수께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오신 하나님이심을 깨달은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께서 ‘아버지’이시고 ‘아들’이시고 ‘성령’이 되시는 하나님이심을 깨닫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푼 것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요? 이사야서 9:6절의 증언입니다. “한 아기를 우리에게 주셨는데 그 아기가 아버지이고, 영존하시는 하나님(여호와란 뜻)이시고, 기묘자”란 것입니다.(사9:6) 제자들은 이를 깨닫고 예수님을 ”주 예수 그리스도“라고 부르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푼 것입니다. 예수 외에 다른 하나님이 없고, ”예수만이 참 하나님이시다“(요일 5:20)는 뜻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푼 것입니다.
2. ‘세레’의 뜻
셋째는 ‘세례’란 무슨 뜻이고,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대부분의 사전들은 대동소이하게 ”세례란 신앙생활에 들어선 사람에게 모든 죄악을 씻는 표시로 베푸는 의식“, ”죄를 용서받고 교회의 일원이 됨과 동시에 교회생활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을 부여하는기독교의례“라고 설명하나 그 어느 것도 맞지 않습니다.
신구약성경을 통털어 ‘세례’가 무엇인가를 설명해 주는 구절은 오직 베드로전서 3:21절 뿐입니다. 그 외의 구절들은 ‘세례에 관해서’, 또는 ‘세례 받은 자의 결과’에 대한 설명일 뿐 ‘세례” 그 자체를 설명해 주는 구절은 오직 베드로전서 3:21절 뿐입니다.
베드로는 ‘세례’를 노아의 가족 이야기로 설명합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물로 심판하기로 작정하신 후, 노아에게 방주를 만들게 하십니다. 노아의 가족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일생을 방주 만드는 일에 전념합니다. 막상 홍수가 내려 방주가 물에 떠오르게 되자, 그 순간 노아의 가족은 ”하나님이 물로 세상을 심판하시겠다고 하시더니 정말 이렇게 심판하시는구나!“라고 하나님께로 마음을 돌이키게 된 바로 그것이 세례라는 증언입니다.
‘물’ 곧 홍수가 내리지 않았으면 배는 떠오르지 않았을 것이고. 일생동안 방주를 만들어 온 노아의 가족은 하나님의 말씀이 참이 아니라 거짓으로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일생동안 만든 배가, 물(홍수)로 인해 떠오르게 되자, 그 순간 하나님을 ‘참되신 하나님’으로 마음을 돌이키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노아의 가족 여덟명의 마음을 결정적으로 하나님께로 돌이키게 한 그것이 바로 물(홍수)이었고, 그 물(홍수)이 곧 ‘세례’라는 것입니다.
좀 더 설명드리면, 고린도전서 10장에는 모세 때의 세례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급에서 고난당할 때, 하나님이 열 가지의 재앙을 통해 구원하셨으나, 그때까지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참되신 분으로 믿지를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홍해 바다를 건너면서 이스라엘 백성은 홍해 바다로 인해 살고, 애급 백성은 그 바다로 인해 죽음을 당하게 될 때, “ 하나님은 참되신 분이시구나!”라고 그 마음을 하나님께로 돌아서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홍해를 건넌 백성들이 동서남북을 구분할 수 없는 사막에서 40년 동안 방황할 때, 하나님은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하나님은 참되신 분이시구나!”라고 그 마음을 돌이키게 되었다는 것이 바로 “구름에서 세례를 받았다”라고 증언하는 것입니다. 다시 정리하면 노아 때는 ‘홍수’(물)이고 모세 떼는 ‘홍해 바다’와 ‘구름 기둥’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다릅니다. ‘물’도 아니고, ‘바다’도 아니고, ‘구름’도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못하던 자들이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음당하신 후, 부활하심으로 우리가 그 예수를 하나님으로 믿게 된 것입니다.
왜 부활이 우리에게는 ‘세례’가 되는 것일까요? 부활로 인해 하나님의 아들로 오신 예수를 하나님으로 믿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마치 르비딤에서 뱀에 물렸던 사람이 장대 끝에 달린 구리뱀을 보고 다시 산 것처럼, 에덴 동산에서 뱀(사탄)에게 물려 죽은 아담과 하와의 후손들이 십자가(장대 끝)에 달리신 예수께서 부활하심으로 인해 하나님으로 믿게 되었기에 그 ‘부활’이 우리에게는 ‘구원하는 표’ 곧 ‘세례’가 되는 것입니다. ‘세례’란 ‘선한 양심’을 하나님께로 돌이키게 하는 ‘표’를 가리켜 ‘세례’라 하는 것입니다.
3. ‘분부하신 모든 것’과 ‘항상 함께 하리라’의 뜻
네 번째는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이란 사복음서에 담긴 예수님의 가르침과 교훈과 명령만을 뜻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신구약 성경 전체를 가리키는 것일까요?
히브리서 1:1-2절을 보면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라고 하셨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가 구약전서라고 부르는 책을 가리켜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신 말씀이고, 신약전서를 가리켜 ‘아들로 말씀하시는 말씀’으로 표현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이란 예수께서 말씀하신 말씀 곧 사복음서에 담긴 말씀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옛적에는 선지자들’로, 마지막 날에는 ‘아들로 말씀’하시는 그 모든 말씀을 가리켜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옛적에 선지자들로 말씀하신 말씀은 하나님이 창조를 마치신 후 첫 사람 아담과 하와에게 “너는 죽지 말고 나와 함께 영원히 안식을 누리자” 하셨으나, 이 말씀을 불순종하고 사탄의 말을 듣고 사탄에게 돌아간 아담과 하와의 후손들이 옛 본향을 찾는 이야기로 끝납니다.
히브리서 11장은 구약의 모든 선지자들을 나열한 후, 이들은 아담과 하와의 타락으로 인해 잃어버린 안식, 곧 본향을 찾는 자들로 소개합니다.(히 11:14, 15, 16) 그리고 12장에서 그들이 바라고, 그들이 보기를 원했던 ‘믿음의 실상’과 ‘믿음의 증거자’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라는 말로 이어집니다.
그리고 이어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히12:2)고 하심으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신 예수’ 그가 계시는 그곳이 바로 그들이 가고자 하는 본향임을 소개합니다(히12:2, 13:14)
특히 히브리서 4:8절에서 “만일 여호수아가 그들에게 안식을 주었더라면 그 후에 다른 날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리라”(히4:8)고 한 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하셔서, 약속의 땅 가나안에 이르게 하신 것으로 하나님의 안식이 완성된 것은 아니란 뜻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안식은 “하나님이 자기의 일을 쉬심과 같이 그도 자기의 일을 쉬느니라”(히4:9) 고 하심으로서, 하나님과 함께 누리게 될 안식을 찾고 안식을 구하는 것이 예수께서 분부하신 모든 것을 지키는 것임을 증언한 것입니다.(히4:11)
다섯 번째는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는 말씀입니다. “내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는 이 말씀은 단순히 예수께서 우리 인생들에게 들어 오셔서 내주하시며 동행하신다는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창세기 2:7절을 보면 하나님이 한 줌의 흙으로 사람을 만드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시자 사람이 생령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가 뱀의 꼬임에 빠져 타락하자, 하나님의 영(생기)이 사람에게서 떠납니다. 창세기 6:3절은 이에 대해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창6:3)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말라기 4:5-6절에서는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가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버지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말4:5-6)는 말씀으로 끝납니다.
그리고 마태복음 1:23절은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마1:23)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장 마지막 절에서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28: 20)고 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곧 창세기 6:3절에서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라”(창6:3)고 하셨던 그 하나님이 마음을 돌이키시고(말4:5-6. 메타노이아) 인생들 속에 들어오셔서 영원히 함께 하시겠다는 뜻입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요20:21)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성령을 받으라”(요 20:22)고 하신 창세기 2:7절에서 하나님이 흙속에 생기를 불어넣으신 장면을 연상시키는 것으로서, 아담의 후손들을 다시 창조하시는 하나님의 두 번째 창조장면인 것입니다.(고전 2:14-3:1) 사도 바울도 이를 가리켜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고전 12:13) 고 증언한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살핀 바와같이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지상명령은 신구약 성경 전체의 내용을 함축하고 있는 매우 중요한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단순하게 “제자를 삼으라”가 아닙니다. 모든 민족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하나님이 주시는 의와 평강과 희락을 누리게 하라는 말씀과도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누구의 제자를 만들었습니까? 예수님의 이 지상 명령을 어떻게 이해하고, 순종했습니까? 저는 수년전 성공적인 목회를 이루었다고 존경받는 남서울은혜교회 홍정길 원로목사님이 “나는 가짜 목사였다…목회한 지 50년이 넘었지만, 교회 개척해서 처음 3년을 빼곤 목회자로 불릴 수 없을 것 같다."고 고백한 장면에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2018.04.07. 크리스천투데이).
그 분은 "교회마다 성경공부에 공을 들인다. 제자훈련이라고도 하는데, 이게 큰 모순을 낳았다"는 것입니다. 좀 더 비틀어 말하자면 ‘예수의 제자가 아니라 목사의 기쁨조’(이 표현은 홍목사님의 주장이 아님)를 만들었다는 고백입니다. 나는 어떠했을까요? 나는 제대로 제자교육을 시켰을까요? 그렇다면 이 글을 쓸 필요도 없었겠지요. 나의 제자 교육은 어떤 교육이였을까? 그래서 제 자신에게 물어봅니다.
”당신의 제자 교육은 안녕하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