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3-03-25 16:13
[1]급진신학 운동과 신자유주의 신학
인쇄
 글쓴이 : 웹섬김이
조회 : 10,118  
급진신학 운동과 신자유주의 신학 

     급진신학 운동을 신자유주의로 부른다. 과거의 자유주의 신학이 그리스도 없는 하나님의 신학을 다루었던 것에 비해, 신자유주의 신학은 하나님 없는 그리스도의 신학을 논하였다.

신자유주의 신학은 급진성을 특징으로 하며, 본회퍼의 무종교적 기독교에서 시작하여 불트만의 비신화와 틸리히의 신학의 철학화에 영향을 받았다.

1. 신학 사상적 배경 

a) 폴 틸리히(1886-1965, 독일-미국)

     틸리히 자신은 무신론 신학자로 단정할 수 없다. 그는 신이란 개념이 지성인 사회에서 폐기된 당시 상황에서 신이란 용어대신에 새로운 용어를 대용하였고, 또한 현대인이 수용가능한 새로운 신 개념의 수립을 시도하였다.

그는 “궁극적 관심” 또는 “존재의 기반(基盤)”이란 용어로 신 개념을 나타내었다. 틸리히는 신학적 진리를 철학적으로 표현하려는 선교적 동기를 가진 점에서 불트만의 비신화화 작업에서 나타난 잠재적 동기와 동일하게 볼 수 있겠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신 존재 자체에 대한 독자적 존재성을 신에게서 박탈하는 결과를 초래함으로써 불트만보다 더 급진적이라고 평가된다. 그의 신관은 후에 알타이어져의 무신론적 복음을 싹트게 한 씨앗이 되었다.

b) 루돌프 불트만 (1884-1976, 독일)

     불트만은 기독교를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한 것처럼 단지 윤리종교에 국한된 것으로 보지 않았다. 그는 기독교가 단순한 도덕종교가 아니라, 평면적 차원을 훨씬 넘어서 은혜를 내리는 복음적 요소를 내포한 종교임을 주장하였다.

그는 생명과 실존에 관계되는 십자가 복음을 말하였으며, 비신화화한 복음을 현대인의 실존주의적 사고방식으로 설명하려는 선교적 정열로 가득찬 신학자로 간주된다.

하지만 그가 시도한 비신화화 프로그램은 객관적 계시를 외면한 또 하나의 주관주의의 결과물이란 점에서 오늘날의 급진신학의 전신이 되었다.

     불트만에게서 문제시된 것은 십자가 사건의 역사성까지 비신화화 하느냐 아니면, 그대로 하나의 역사적 사건으로 수용하느냐의 문제였다. 실존주의 철학자 하이데꺼의 영향을 받아 그는 십자가 사건을 한 역사적 시점에 일어난 사건이 아니고, 인간역사의 지평을 넘어서는 영원한 (초월적) 참역사의 사건으로 보게 하였다.

그 는 또한 부활사건도 하나의 역사적 사건으로서가 아니라, 제자들에 의해 종말론적인 사건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역사적 사건으로서 십자가 사건과 부활이 문제가 아니라, 그것들이 다만 실존적 사건이라는 그 신앙이 영원적인 사건성을 가능케 한다고 생각하였다.

불트만은 십자가와 부활의 역사성 자체를 비신화화 함으로써 복음의 변질화를 초래하였다. 이러한 지나친 주관주의적 해석은 새로운 영지주의의 출현으로 이어지고 이러한 주관주의를 온상으로 하여 인본주의적인 급진신학이 싹트게 된 것이다.

c) 디트리히 본회퍼 (Dietrich Bonhoeffer, 1906-1945 독일 루터교회 목사)

     불트만이 비신화화를 주장했다면, 본회퍼는 비종교화를 내세웠다. 그는 비록 옥중이라는 제한된 상황 속에서 그의 신학사상을 개진하였지만, 당시에 다른 모든 신학적 입장을 뒤엎는 혁명적 성격의 신(新)신학을 진술하였다.

그 의 신관은 존재론 대신 실용적인 신론으로 옮겨졌으며, 초월하여 계신 하나님이 아니라, 남을 위해 봉사하는 삶 속에 살아계시는 하나님을 말한다. 그래서 “신앙이란 하나님을 인격적 실존으로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존재에 참여하는 새 삶이다”라고 설파하였다.

본 회퍼는 교회의 사명에 대하여, 영원구원을 위한 선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참여를 통한 사회개혁에 있다고 보았다. 교회는 오직 이웃만을 위해 존재하므로 교회는 영적 차원에서 겸손히 내려와 사회적이며, 정치적인 차원 속에서 이웃을 위해 섬기는 일을 행할 때, 존재할 가치를 갖게 된다는 입장을 취했다.

이 러한 인간화 운동을 역사적 구원이라고 하며, 이 역사적 구원만이 성숙한 세계에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 추구해야할 복음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역사적 구원을 성취하기 위해서 교회가 개인구원의 평면성과 교리논쟁의 불모성을 지양하고, 기독교 속에 잠재해 있는 모든 초자연적인 요소를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2. 급진신학의 여러 형태와 주요 신학자

a) 세속화 신학

     세속화 현상은 르네상스의 인본주의와 계몽주의 시대의 무신론 사상에서 출발하였고 근대 자연과학의 발달로 인하여 가속화 되었다.

이러한 세속화 현상은 60년대 이래 신학계에서도 현저하게 나타났다. 세속화 신학의 출현 배경에는 여러 요인들이 있다. 과학기술 분야에서의 획기적인 발전들은 인간들의 자아상에 여러 변화들을 초래하였다.

자기 가능성의 확대에 비례하여 과학기술의 발전은 인간에게 소외감과 좌절감을 일으켰다. 세속화 신학자들은 기존 기독교 사상들이 이런 인간 소외감 등의 문제 해결에 치명적인 여러 약점들을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

2 차 세계대전을 사전에 방지할 수 없었던 점, 전후에 발생된 여러 시대적인 사건들을 통제할 수 없었던 점, 특히 기존 교회가 당대의 현실들을 반영한 대중들의 심리상태를 주목하기 보다는, 냉전의 심리상태에 압도당하고 있다는 점을 세속화 신학자들은 신랄히 비난했다.

이와 병행하여 성속(聖俗)의 구별이 모호해지고, 성속을 구별하는 것 자체를 잘못된 일로 간주하였다. 이러한 세속화 현상과 이에 따르는 신학적 무관심은 세속화 신학을 창출하게 하는 직접적 동인이 되었다.

(1) 하비 콕스 (1929-, 미국)

     콕스는 펜실베니아 대학 졸업(역사학) 후 예일대학교 신학을 전공하였고, 하바드 대학(역사와 종교)에서 철학박사를 취득(1962)하였다. 아메리칸 침례교 목사로 안수(1956)받은 후 템플 대학 및 오벌린 대학에서 교목으로 재직하였고, 하버드 대학 교수(65년 이후)로 활동하면서 26권의 책을 저술하였다.

콕 스는 사상적으로 라인홀드 니버, 틸리히의 영향을 받아 진보적 신학계열에 속하면서도 보수적 침례교 신앙에서 성장하여 경건주의와 개인주의적 신앙을 잃지 않고 있다. 그는 도시화(都市化) 및 세계 기독교회의 신학적 발전, 세계 속에서 교회의 특별사역(남미교회 성장)에 관심을 나타내 왔다.

그 의 연구는 비서구 교회의 신학적, 사회학적, 정치적 주요 현안들, 그리고 종교적 가치와 문화의 갈등에 연관된 내용에 집중되었고, 세계 교회와 오순절 운동에도 주목하여, 후기에는 진보적인 신학자에서 탈피하여 성령신학을 통해 진보와 보수의 조화를 힘쓰고 있다.

콕스는 세속화 신학을 “인간을 종교와 형이상학의 보호에서 해방시켜 내세에서 현세로 그 관심을 옮겨놓는 운동”으로 정의하였다.

콕스는 “세속 도시”(1965)라는 그의 저술에서 새로 전개되는 도시의 세속적 사회에 적응하는 세속화 신학을 제의하였는데, 혁명적 변화를 겪고 있는 현대 사회의 세속적 무드에 알맞게 기독교가 체질개선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에 의하면, 현대인의 종교적 요구에 부응하려면 신학은 먼저 현대사회의 변화에 대하여 분명한 이해를 해야 할 것이며, 세속화가 기독교와 상반된 것이 아니라는 확신에서 출발할 것으로 요구한다.

왜냐하면 성서가 세속화의 정신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즉 창조 사건은 “자연의 세속화”를 의미하며, 출애굽 사건은 “정치의 세속화”를 의미한다. 시내산 계약은 우상금지를 통하여 “가치의 세속화”를 가르친다고 보았다.

자 연의 비마법화(非魔法化disenchantment), 정치의 비신격화(desacralization), 시내산 계약의 비신성화(deconsecration) 등 여러 표현을 사용하여 창조와 출애굽 및 시내산 사건의 세속적 의미를 설명한다.

또 한 그는 중세역사가 신성로마를 도모하였으나, 실상은 정통과 종속(從屬)의 부단한 투쟁을 통하여 이루어진 세속화 역사에 다름없다고 평가하였다. 이렇게 인류역사가 세속화로 고정된 것은 복음의 중심적인 과정이며, 곧 인간의 해방과 자유의 과정이라는 것이다.

콕스는 인간을 종교와 교리에서 해방시킨 후, 그 다음 과제로 교회의 새로운 개혁을 주장하였다. 이런 개혁은 16세기 종교개혁보다 더욱 충격적인 수준의 개혁이 요구된다고 전제한다.

그에 의하면 16세기 종교개혁은 마치 한쪽 날개로만 퍼덕이며 근대의 세기로 들어왔지만, 결국 교회라는 울타리를 넘지 못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과거의 종교개혁이 교회 내의 개혁으로 그쳤다면, 우리 시대의 종교개혁은 세속사회의 질서와 인간의 정신적 삶과 교회와의 관계 등 전면적으로 제기되고, 지속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콕스가 이해한 세속화를 신학적으로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

ⓐ 그는 세계에 대한 이원론적 이해 즉 초자연 대 자연, 은총 대 자연 등을 구분하는 이원론을 거부한다. 이원론적 사고방식은 종속 형태로의 퇴보로 간주된다.

신에 대한 종교적, 형이상학적인 이해는 인간을 얽어매는 사상적 결박이다. 도시화된 사회, 성인된 사회에서는 이러한 결박에서 인간을 해방시키고, 해방의 과정에서 신학의 정당한 역할을 찾아야 한다. 이 세상만이 사고의 대상이 되어야 하며, 다시 영적 영역으로 도피하는 것은 정사와 권세들의 속박에로 복귀하는 것을 뜻한다.

ⓑ 그의 세속화 신학은 실용주의와 세속성(世俗性: profanity)과 깊이 관련되어 있다.

그 의 세속성은 세속 도시에 거주자들이 갖는 바, 성속의 이원론을 거부하고, 모든 것을 성속구별 없이 중요하게 여기는 태도를 의미한다. 콕스는 그리스도의 성육신 안에서, 곧 하나님이 그의 의와 신적 속성들을 포기하고, 종의 형체를 입음으로써 자발적으로 자신을 세속화 시킨 사실에서 세속화의 이론적 근거를 찾는다.

(2) 존 로빈슨 (1919-1983 영국, 트리니티 신학대학 교수)

     로빈슨은 콕스와 함께 세속화 신앙을 대중화 시키는데 많은 기여를 한 신학자로서 교회와 세속의 구별을 거절하며, 초월적인 신의 존재를 믿는 신앙을 경멸한다.

그에게서 하나님은 세상을 초월하여 계신 존재가 아니라, 개인의 진지한 확신 영역에서 궁극적 실재로 받아들여지며, 개인의 인식여하에 따라 신의 존재여부가 결정되는 상태로 전락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로빈슨은 기독교가 초자연주의를 배제하는 체질개선을 통하여 이 시대에 적응하는 작업을 하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시도는 기독교 자체를 변질시키는 것이 아니며, 현대 지성으로부터 외면당하는 교회를 변호하는 여러 시도 가운데 하나로서, 자신은 신앙 변호자의 사명을 다하려는 데 그 동기가 있다고 강변한다.

로빈슨에 의하면, 거룩의 소재는 지성소가 아니라, 세속 한 가운데에 있는 것이며, 그리스도와의 만남은 이웃을 위한 봉사 가운데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크리스천의 생활은 세속적 성결의 삶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기도는 절대자요 초월자에게 고하는 간구가 아니며, 인간행동의 윤리적 측면에 불과하다는 입장인데, 왜냐하면, 기도와 윤리는 한 가지이며 그 표현이 양면성을 지닌 것뿐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과거의 신화적인 미신 신앙을 버리고 과감하게 생활 속에서 신과 만나는 신앙의 혁명을 이룩해내는 것이다. 이것이 진정으로 생활전체가 신을 만나는 생활신학이라는 것이다.

로빈슨은 우주시대에 상응하는 새로운 신 개념을 도입할 것을 제기한다. 그러면서도 신의 존재 자체를 부인해서는 안 되며 틸리히 신학에서 신을 “존재의 기반”이라 호칭하는 방식을 수용하였다.

또한 그는 본회퍼의 신학에서 말하는 “이웃을 위한 사람”의 개념 및 새로운 도덕성 이론을 기독론의 골자로 삼았고 자신의 도덕성 이론의 근거로 활용하였다. 결과적으로 로빈슨의 기독론은 대인관계의 모델로서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천국이란 지역적으로 별도의 장소가 아니라, 사람 안에서 자기존재의 기반이 되는 이와 하나 되는 것(union in love)이 곧 천국이라고 말한다. 그는 하나님의 객관적 실재성,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 천국의 실재성을 일괄적으로 부인하고 이 모든 것을 다만 상징적이요, 또한 상대적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로빈슨에게 신학적 교사는 세 사람으로 a) 기독교는 메시지를 비신화화하여 현대인들의 사고방식에 적응시킬 것을 주장한 불트만 b) 종교성 없는 기독교를 강조한 본회퍼 c) 하나님은 궁극적 관심의 대상이자, 존재의 기반임을 밝힌 틸리히였다.

그는 신학을 대중화시키고, 신학의 이해를 현대화시키는데 주력하였다고 하지만, 신에 대한 솔직한 신앙이 동기가 되어 저술한 “신에게 솔직히(Honedt to God)”은 솔직한 불신앙으로 일관된 세속화 신학의 한 장을 장식한 신학자로 평가된다.

b) 사신(死神) 신학

     사신신학은 1960년대 신진 신학자들이 제창했던 하나의 반문화 운동의 일환으로 보아야 한다. 토마스 알타이저와 반 뷰렌은 사신신학의 대표 신학자들이다

(1) 토마스 알타이져(Thomas Altizer 1927-)

     100년 전 “신은 죽었다”는 표현이 니체에 의해 사용된 이후, 하나의 신학운동으로 사신신학이 대두된 것은 알타이저의 저술 “기독교 무신론의 복음”의 출판이 계기가 되었다. 그는 이 책에서 신의 죽음을 분명히 선언하고, 창조적 부정을 통하여 생명적 긍정을 찾을 수 있는 “오늘에 사는 신학”을 담대히 제창하였다.

알 타이져는 양극(兩極) 일치론을 내세워, 신의 부정은 곧 긍정과 통하는 점을 강조한다. 신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은 곧 새로운 자유를 얻는 사실을 말한다. 그리고 신의 죽음에 대한 신앙고백은 이 시대의 크리스천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의무라고 주장한다.

그는 전통적 의미에서 “신학의 불가능”을 선언하고, 과거의 신 개념을 청산할 것을 호소한다. 알타이져에 의하면, 오늘의 삶이 긍정되기 위해서는 전통적인 신관을 버려야 하며 초월적인 신은 죽어야 한다.

대신 그 자리에 말씀이 나타나야 한다. 그 말씀이 무엇인지 밝히는 대신에, 그는 “기독교 무신론의 복음”을 주장한다.

알 타이져의 급진적 신학이론은 전통적 기독교가 현대문화와의 만남에서 생긴 심각한 회의와 혼란에서 파생된 결과로 볼 수밖에 없다. 그는 오늘날의 무신적 문화에 대처하는 방법과 대안적 신앙에 대한 물음에 대하여 두 가지 반응을 보였다.

ⓐ 현 시대의 혼란과 문제로부터 교회적 전통 속으로 도피하여 버리는 방법이다. 그러나 이 방법은 현세 속에 현존하는 그리스도를 잃게 되는 위험이 따르므로 그리스도에 충실한 신학은 역사로부터 도피할 수 없다.

ⓑ 신학적으로 신의 죽음을 인정하고 현 세상 속에 현존하는 그리스도의 세속적 형태를 분명해 해야 한다.

알타이져는 만일 크리스천이 후자(b)를 택하면, 그는 이질적인 도덕률에서 해방되고, 외형적인 도덕 판단에서 자유화되고 초월적인 죄책감에서 놓이게 된다고 주장한다.

그는 전통적 기독교 성서관, 즉 계시로서의 전통적 성서관을 부인하고 계시의 완료개념을 비판하면서, 자신의 신학재료를 성서보다는 현대의 세속적 지성의 작품에서 찾는다.

알타이져는 블레이크, 헤겔, 니체 등을 급진적 기독교인으로 받아들이고, 그들이 이 시대가 요구하는 급진신학의 선지자들이라고 불렀다. 또한 신비적인 동양종교와 고대종교 연구에서 그의 신학적 재료를 찾았다. 알타이져는 현대인의 종교적 실황을 니체의 진단을 차용하여 설명하였는데

   (i) 기독교적 서양문명의 기초는 오늘날 이미 붕괴되었고, 전통적 가치개념과 이상(理想)은 현대인에게 무의한 것이 되고 말았다.

   (ii) 기독교는 서구 문명과 긴밀한 상호관계를 가지고, 그 영향을 받고 자라왔으므로 기독교의 신학내용도 서구문명 산물의 결과물이다. 전통적 기독교는 서구 문명과 함께 현대 크리스천에게 아무런 의미를 주지 못한다. 이러한 상황에 도달했다는 사실은 과학자와 역사가들에게는 물론 신학자들에게도 인정되는 지경이 되었다.

알타이져에 의하면, 전통적 신학은 퇴색하여 가고 있으며, 현대 신학자들인 바르트, 불트만, 틸리히 등이 전통적 신론에 대해 침묵하는 것은 과거의 신은 이미 죽었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것이다.

이 상황에서도 현대신학이 풀어내야할 과제는 천국 개념이다. 천국개념은 종말론적 성격을 띠므로, 우리의 신앙은 종말론적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전통적 기독교는 종말론을 경시하여 왔다며, 이유는 기독교가 헬라세계에 도입된 이후 헬라문화와 결합되어 이질적인 종교로 전락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는 기독교에 대해 세속적 이해를 넘어 종말론적 이해를 주장하면서 천국복음의 종말론적 이해를 바로 하려면 서구문명이 아닌 다른 문화와 종교가 필요하며, 이런 필요를 가장 잘 충족시켜 줄 수 있는 대안이 대승불교 사상이라는 것이다.

알타이져가 주장한 대로, 이 세상과 천국동일론은 양극일치론을 연상시키며, 신플라톤주의의 신비설 또는 불가지론과 별반 다를 바가 없다.

그는 결과적으로 불교의 허무주의에 몰입되었고, “신의 죽음 뒤에 허무의 부활이 따른다”고 고백하면서 허무를 신의 자아표현으로 수용해야 한다고 말함으로써, 하나님을 부인하는 곳에 허무라는 어두움이 뒤따르기 마련임을 상기케 한다.

(2) 폴 벤 뷰렌 (1924-98)

     알타이져가 역사적 사실로 신의 죽음을 취급했다면 뷰렌은 언어 분석학적으로 신 개념의 무의미성을 논하였다.

그는 “복음의 세속적 의미”라는 저술에서, 소극적으로 “신”이란 말의 의미성을 상실한 것과, 적극적으로 크리스천 복음의 중심적 메시지는 “신”이란 용어를 사용하지 않고도 표현될 수 있다는 주장을 폈다.

ⓐ 소극적 주장에 대하여 : 하나님 존재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 존재자체에 관한 논의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만일 하나님이 초월하여 존재하신 분이라면, 하나님이란 말을 사용할 때, 우리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를 확인할 수 없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에 관하여 찬반의 이론 전개를 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란 용어가 실재 이해에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 적극적 주장에 대하여 : 하나님에 관한 이야기는 곧 사람에 관한 이야기이므로 하나님이란 용어 없이도 복음의 메시지는 전달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 역사와 생활과 무관하게 신학적 사색의 대상으로만 하나님을 논할 수 없다. 그러므로 신에 관한 모든 진술은 인간에 관한 진술로 해석되어져야 한다.

기독교회 역사는 하나님의 역사라기보다 인간들로 구성된 교회의 역사다. 예수를 논할 때에도 예수 자신의 본질론은 무의미하다. 크리스천 사회를 위하여 예수가 무엇을 의미하느냐가 더 중요하다.

즉, 예수가 소유한 자유가 그의 제자들에게 주어진 것이 중요하다. 예수 부활도 역사적으로 발생한 사건성에 그 중요성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자유가 제자들에게 준 감화가 크기 때문에 제자들이 예수처럼 두려움 없이 죽음을 직면할 수 있게 한 점이 귀한 것이다.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신앙은 예수의 생애 속에 나타난 자유를 자신도 향유하겠다는 다짐이다.

예수의 독특성은 그의 속죄나 부활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는 자유하였고, 그 자유로 인하여 그의 제자들을 자유케 했다는데 있다. 예수의 주(主) 되심도 예수의 자유케 하는 역할에서 성립된다.

뷰렌은 그러나 자유가 무엇인지에 대해 분명히 밝히지 않고, 이 자유에 복음적 특색만을 부여한다. 예수가 전통, 의식, 죽음의 두려움 등에서 자유했던 사람이므로 역사적 예수를 아는 것은 무익하고, 오직 이 자유성의 빛을 통하여 예수를 이해해야 한다. 이 자유는 예수 사건 이해의 열쇠이며, 복음의 세속적 의미의 핵심이다.

c) 과정신학

     과정신학은 화이트헤드의 과정철학 사상과 기독교 진리를 연결하여 성립된 신학이다. 과정신학자들은 사신신학의 극단적 입장에서 한걸음 물러나 사회적 관점에서 “제 3의 유신론”을 주장함으로써 신학적 극단을 피하고 중용을 택하였다.

(1) 존 캅(1925-)의 생애와 신학적 배경

     존 캅은 미국선교사 아들로 일본 출생하여, 미국 시카고 대학을 졸업 후 화이트헤디안으로서 찰스 하츠혼의 조교를 거쳐 과정철학에 전공하여 박사과정을 마쳤다.

그는 에모리 대학 캔들러 신학교에서 교수로 활동, 클레어몬트 신학교의 과정사상연구소를 설립하였다. 그는 화이트헤드의 철학을 이용하여, 과정신학을 태동시켜 현대 신학계에 공헌하였다.

현대의 다양한 문제에 명쾌한 해답을 주시 못하던 신학계에서 존 캅은 틸리히 이후 가장 영향력 있는 형이상학적 신학으로 과정신학이 자리매김 하도록 하였다. 존 캅은 클레어몬트 대학원 교수로서, 동료 교수 존 힉의 동참 하에 종교간 대화에 앞장 섰으며, 불교와 기독교 간의 대화가 심도 있게 전개되도록 활동해왔다.

그의 신학은 언제나 교회를 떠나서는 생각될 수 없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즉 그는 미국 연합감리교회 안수를 받았고, 클레어몬트 신학교에서 23년간 재직하면서, 매번 정기 채플에 참석한 평신도이기도 하다.

그는 교회와 사회가 변화되기 위해서는 신학자는 물론, 평신도들이 변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고, 평신도가 이해할 수 있는 신학을 만들어 내야 한다는 입장을 실천해 왔다.

(2)존 캅의 신학 개요

ⓐ 과정신학의 형성과 새로운 유신론 (有神論)

     존 캅이 화이트헤드의 철학을 이용해서 현대신학의 가장 중요한 대안 가운데 하나로 만들어내게 된 동기를 알기 위해서는 전통적-고전적인 신학이 부딪히고 있었던 문제들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존 캅의 입장에서는 현대에 들어와서, 전통신학의 방법론이 설득력을 잃게 된 근본적인 이유는 17세기 이후 등장하기 시작한 새로운 과학적 사유에 있다고 보았다.

새로운 사유방식의 근간이 되었던 신과학 운동이 펼쳐지기 오래 전부터,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원리와 하이젠베르크의 양자역학 등에 기초한 새로운 과학적 사유는 전통적인 사유방식의 허구성과 문제점을 지적해 내고 있었다.

고전적 사유에 기초한 세계관의 입장에서, 우주는 반드시 절서있는 세계이며, 질서있는 세계는 불변의 실체로 이루어져 존재하는 것으로 생각하였고, 또한 인간은 그런 존재론에 입각한 세계만이 진정한 의미에서 합리성을 가지는 것으로 생각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실체 위주의 존재론에 근거한 고전적 세계관은 현대 물리학의 등장으로 위기를 맞는다. 현대의 물리학은 현대인들로 하여금 질서는 물론, 무질서의 세계까지 포괄할 수 있는 우주론을 정립하도록 요구해 왔으며, 이러한 우주론과 세계관에 맞는 새로운 실재관의 필요성을 절감해 왔던 것이다.

화이트헤드의 과정철학은 이런 새로운 실재관의 필요성을 충족시키기 위해 등장한 하나의 시도였다.이러한 고전적인 우주론에 기초해 있는 전통신학의 신관은 신의 능력을 일방적으로 강조하여, 세계의 가치를 폄하했으며 그 결과로 신과 세계의 날카로운 이분화를 가져왔다고 캅은 지적한다.

그리고 세계를 폄하시키고 신과 세계의 이분화를 말하는 전통신학의 파라다임은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는데, 첫 번째 문제는 악의 문제였다. 유대인 대학살과 두 차례의 세계대전 등에서 나타난 악과 고통의 문제들을 경험했던 서구인들은 전통적인 신학이 가정하였던 고전적 신관의 무기력함을 느끼면서, 악의 문제에 대해 그토록 침묵하는 하나님은 과연 어떤 면에서 전능하며, 선하다고 말할 수 있는 지를 의심하게 된 것이다.

화이트헤드의 과정철학은 존 캅으로 하여금 이러한 신학적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신학적 패러다임을 발견할 기회를 제공했다.

과정철학은 불변하는 존재자를 가정하는 실체론 중심의 존재론을 부정하고, 상호적인 관계를 통해서 성립되는 새로운 존재를 말한다. 캅은 이러한 과정사상의 입장에 동조하면서, 새로운 시대가 요구하는 현대적 대안으로서의 과정신학이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가진다고 주장한다.

과정신학의 신(神)은 생성해가고 있는 과정으로서의 모든 존재들이, 자기만의 자유와 자기 결정력을 갖도록 만드는 근거가 된다.

화 이트헤드의 용어를 따라 캅은 이러한 신의 속성을 “신의 원초적 본성”이라 명명하였는데, 이러한 신의 원초적 본성은 세계 내의 모든 과정적 사건이 다른 사건들로부터 영향을 받아 형성되면서도 어떻게 그것이 자유와 개별성을 확보할 수 있는지를 설명해 주는 개념이 된다.

그러므로 신의 원초적 본성을 인정하는 과정신학의 입장에서는, 전통적인 의미의 무신론은 거부될 수밖에 없다. 만일 전통적 무신론을 승인하게 되면 다른 존재들과 내적인 관계를 맺으면서 생성되어 가는 과정적 사건들이 어떻게 그런 여타 사건들과 구별될 수 있는지를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의 과정적 사건은 언제나 과거의 사건들, 즉 현재의 사건이 여건으로 삼고 있는 자기 앞의 모든 사건들을 자신의 창조적인 입장에서 통합하면서, 새것으로 탄생해 가고 있으며, 여기서 바로 사건 자신이 가지고 있는 통합의 능력으로서의 창조성은 부분적으로는 그 사건 자신의 자기 결정력에서 오지만, 동시에 또한 그것은 신의 원초적 본성에서 기인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캅이 받아들이는 과정신학의 신은 초월적인 속성만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만일 신이 그러한 종류의 속성만을 갖고 있다면, 그러한 신은 현대인들이 직면하고 있는 악의 문제나 고통의 문제 등을 해결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과정신학의 신은 세계의 사건들에 영향을 끼치는 동시에 신 자신도 그 세계에 의해서 영향을 받는 것으로 기술된다.

과정신학에서는 신 자신도 생성과정으로 간주된다. 신이 참으로 존재하는 실재라면, 모든 실재는 과정이요 생성한다는 과정사상의 근본 원칙에서 예외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화이트헤드의 용어를 빌리면, 신은 하나의 과정으로 존재하면서, 세계 내의 사건들과 내적인 관련을 맺기 때문에, 결국 세계의 모든 존재자들은 신에게도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다는 것이다.

ⓑ 그리스도론과 종교 간의 대화

     캅의 그리스도론은 “다원주의 시대에서의 그리스도”라는 그의 저술에서 결실을 맺었다. 세계의 위대한 종교와 기독교를 비교하면서, 그리스도론의 문제를 다루어 가는 방식을 택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기독교인들이 고백하는 “그리스도”라는 개념은 종래의 전통적인 방식을 넘어서 새롭게 이해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즉 그에게 그리스도란 “신의 로고스를 선재적(先在的)으로 이룬 분”과 같다.

그리스도란 신이 세계에 대해서 품고 있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부름을 받은 존재로 정의될 수 있다는 말이다. 예수란 바로 이렇게 세계의 목적으로서 존재하는 하나님의 로고스가 인간의 모습으로 육화된 여러 존재중의 하나라는 말이다.

그리고 캅에게서 예수는 비록 많은 그리스도 중의 하나일지라도, 하나님에게서 주어진 소명으로서의 창조적 변화, 즉 신적 로고스의 화신으로서의 그리스도성을 가장 탁월하게 육화시킨 분으로 기술된다.

즉 예수는 인류로 하여금 새로운 변혁의 가능성에 개방되게 이끈 분이며, 또한 그것을 탁월하게 성취한 인물이라는 것이다. 그 결과, 그의 그리스도론은 기독교와 예수의 독특성을 말하면서도 동시에 종교 간의 대화를 가능하게 만드는 특징을 지닌다.

종교다원주의 현실에 동조하는 캅의 입장은 세계 안에 편재하는 하나님의 창조적이고 변혁적인 목적을 통해 설명된다.

즉 선을 향한 변혁의 능력이 존재하는 곳마다 소위 그리스도의 능력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볼 때, 그리스도의 능력은 오직 기독교 안에서만 발견되는 것은 아니고 타종교 안에서도 발견된다고 한다.

선을 향한 변혁적 능력은 어느 종교에서나 발견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기독교가 타종교와 대화를 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이다.

그러나 캅이 무조건적으로 종교 다원주의를 받아들이면서, 모든 종교와 무차별적인 동등성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종교 다원주의에 대한 캅의 입장은 그의 책 “대화를 넘어서”에서 결실을 보았는데 그는 주장하기를, 종교 간의 대화의 문제를 과정신학적으로 해결하려면, 우선 대화라는 개념을 새롭게 이해하자고 제안한다.

즉 대화란 타자와 담론하는 것이나, 사실 대화라는 개념은 그것보다 더 적극적인 의미를 갖는다고 한다. 즉 종교 간의 대화에서 대화가 풍부할 수 있기 위해서는 우선 두 파트너가 말하는 상대방의 주장에 대해서 귀 기울여야 하며, 또한 그 타자가 어떤 진리를 말하고 있는지를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

즉 모든 대화에서와 마찬가지로, 종교 간 대화에서도, 각 파트너들은 언제나 자신의 입장만을 주장할 것이 아니라, 상대방 의견을 진심으로 귀기우릴 수 있는 태도를 견지해야만 그 대화가 풍성한 가치를 지닐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캅은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왜냐, 그저 타자에게 듣기만 하는 행위는 자신에게는 유익할 지 모르나, 타자에게는 별 소득이 없기 때문이다. 즉 종교 간의 대화의 진정한 목적은 상호변혁이기 때문에, 기독교인과 타종교 간의 대화에서도 기독교인들은 오직 자신의 변혁에만 목표를 둘 것이 아니라, 동시에 타종교인을 변혁시킬 수 있는 것에도 목표를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인 입장에서 볼 때, 타종교의 대화 파트너가 예수 안에서 실현된 진리에 대해서 귀 기울일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하며, 바로 여기에 종교 다원주의 시대에서도 여전이 선교가 가능한 이유가 있다.

ⓒ 정치경제학적 관심과 생명신학

     캅은 1960년대부터 생태학 문제를 심도있게 다루기 시작했다. 이로써 그는 형이상학적 신학자를 넘어서서 인간의 생활 세계와 실천의 문제, 즉 정치경제적인 세계질서는 물론 인류가 마주치고 있는 생명윤리의 문제에까지 관심을 갖는 신학자로 변신하도록 만들었다.

서구의 기계론과 합리주의는 인간과 자연의 분리, 혹은 신체와 영혼의 분리 등을 강조하면서 오직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인간만이 자연의 유일한 주인이며 제어자로 보았기 때문에 결국 그런 입장들은 자연을 인간 이익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시켜 왔다는 것이다.

이런 세계관이 많은 문제점을 내포하므로 이를 해결하기 위해 서구의 이원론적 사고를 극복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캅은 1965년 화이트헤드의 철학을 이용해서, 서구 이원론을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을 그의 책 “새로운 기독교 자연신학”에서 시도하였다.

그에 따르면, 이원론이 가지고 있는 문제는 그리스의 영육이원론(靈肉二元論)에서 기인하는 문제라고 볼 수 있으므로, 이러한 영육이원론을 재해석해야 문제가 해결된다고 보았다.

과정철학에 따르면, 인간의 영혼은 하나의 실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즉 플라톤이나 데카르트의 이원론에서 보이듯이, 영과 육은 서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별개의 실체가 아니라는 것이다.

과정사상에서는 영혼이란, 단지 인간을 구성하는 수 많은 사건 중에 하나의 사건으로서 기능하면서, 모든 신체적인 사건들은 통합하는 중심축의 구실을 하는 존재일 뿐이다.

 

과정신학에서는 영과 육이 근본적인 질적 차이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고 단지 양적인 차이만을 가지고 있다고 보며, 또한 영혼 사건과 신체 사건들 사이의 차이는 단지 하나의 사건 속에 물질성이 더 많이 작용하고 있느냐 아니면, 정신성이 더 많이 작용하고 있느냐의 차이라는 것이다.

물질성이란, 하나의 사건으로 하여금 과거의 영향 하에 있으면서, 그 과거 사건들에 더 순응하도록 만드는 성질을 말하며, 반대로, 정신성이란, 하나의 사건이 과거의 모든 사건들을 통합하면서, 그들에게는 없었던 새것을 만들어 내는 성질을 말한다.

이런 인간론에서 보면, 영혼은 신체와 전적으로 분리되어서 독립으로 존재하는 사건이 아니다. 왜냐하면, 영혼은 자신이 존재하기 위해서 반드시 자신의 환경이랄 수 있는 신체를 필수여건으로 가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반면에 신체는 자신의 활력을 영혼에서, 즉 영혼이 신체보다 많이 가지고 있는 창조적 역할에서 얻어낸다. 이러한 방식으로 영혼과 신체는 서로서로 의존하고 있는 것이다.

한마디로, 영혼과 신체는 서로 연계되어 있으며, 그중 하나가 없이는 다른 하나가 설명될 수 없다고 보는 것이다.



 
 

일반형 뉴스형 사진형 Total 3,369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2697 [4]십계명 강해 웹섬김이 07-21 6935
2696 [5]저술 연대 순으로 나열한 바울 서신 웹섬김이 04-17 6935
2695 이단사이비 문제단체들에는 어떤 곳이 있나… 웹섬김이 04-16 6930
2694 목회경영학 원론 요약 1 (손병호 저) 웹섬김이 05-09 6928
2693 아프리카 선교상황과 선교전략 웹섬김이 12-31 6926
2692 신약교회의 배경 웹섬김이 03-27 6922
2691 [8]노아의 홍수 사실인가? 웹섬김이 12-29 6921
2690 기독교 교육과 행정 웹섬김이 10-20 6907
2689 [5]성경에 나온 인물과 지명의 뜻 웹섬김이 04-29 6906
2688 [1]듣기 싫어하는 설교 웹섬김이 06-17 6899
2687 토레이의 성령론 웹섬김이 07-02 6895
2686 신학개론 요약[6] 웹섬김이 03-06 6891
2685 종교적 다원주의의 오류성 웹섬김이 02-12 6887
2684 예배음악의 기본원칙 웹섬김이 02-19 6886
2683 예배학 바른 예배관[1] 웹섬김이 05-03 6885
2682 교회사에 나타난 지도자의 유형별 분석 (박용… 웹섬김이 05-18 6885
   41  42  43  44  45  46  47  48  49  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