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6-07-31 22:19
[4]한국 교회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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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웹섬김이
조회 : 4,194  

제8장 한국 교회의 수난사

 

십자가 처형 : 일제는 민족운동지도자들을 잔혹하게 처형하였다. 철도를 파괴한 독립투사를 십자가에 처형하였다.

신사참배 : 일본에 가서 신사참배를 한 조선교회 교역자 대표들 (1943 년).

주기철 목사의 묘 :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옥중 순교한(1944년) 주기철 목사의 묘. 서울 국립묘지 소재.

철수하는 선교사들 : 1941년 태평양전쟁 발발을 전후하여 선교사들이 강제로 본국에 송환되었다.

출옥성도 : 8.15해방과 함께 출옥한 옥중 성도들이 평양의 주기철 목 사 사택에 모였다.

출옥성도환영회 : 해방후 1945년 가을 서울남산 신궁터에서 출옥성도 환영회가 열렸다.

통일교 : 문선명의 통일교도 그 세력을 크게 확장시켜 나갔다. 1963년에 서울에서 거행된 124쌍 합동 결혼식.
  
1. 신사참배의 강요와 박해


* 신사참배는 일본천왕과 전쟁 영웅들에 대한 경배이다.
1930년 만주사변 1936년 중국 본토 침략 전쟁 : 일본은 전쟁을 일으키고 '내선 일체' 즉 일본과 조선이 하나가 될수 있는 방법은 신사참배라고 생각하였다. 
평양부터 점령해서 신사참배 시작 1935년 11월 평안남도 일본 지사 야스다께는 도내에 있는 각종학교장 회의를 소집하고 모든 학교는 신사참배를 해야 한다고 명령함. 이 회의에 참석했던 숭실전문 학교 교장 Mccune은 한국인 목사, 장로를 소집하고 신사참배를 할 수 없다고 단호한 결의를 하게된다. 이러한 소식을 들은 야스다께는 Muccne를 면직시키고 미국으로 추방시킴. 그후에도 일제는 대대적인 신사참배를 강요함. 미션 스쿨에 대해 많은 간섭을 하고 교단 총회 소집도 경찰의 허락 없이는 소집 할 수 없었고 예배도 일본 국회에서 일본 종교 단체법이 통과하게 된다.
신사란? 종교의 범위를 초월한 것.
신도란? 절대의 도로써 모든 일본 국민은 반드시 신사 참배를 해야하는 것. 이 에 순종치 않는 자는 절대 용납할 수 없다는 내용도 포함함.

(이 법에 대한 반응) - 
1) 로마 카톨릭 : 1918년까지도 '나 외의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입장에서 반대했는데, 1차 대전이 끝난 후에는 신사참배는 종교적 행사가 아니라 애국 적 행사에 지나지 않으므로 참배를 허락함.

2) 감리교 : 지도자의 대부분이 신사 참배가 국가적 의식이라는 것에 동의함. - 감리교 존속 가는케 함.

3) 장로교 :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1938년 9월 9일 서문 밖 교회에서 열린 장로교 27회 총회에서 여기에 참석한 사람들 모두에게 압력을 가해 신사참배를 합법화하게 함.
주기철, 이기선등은 신사참배 반대. 일본 경찰은 총재를 만나 회유책을 쓰고 예 배당 분위기는 일본 경찰이 안팎으로 감시하는 살벌한 분위기였다.
193명이 이 총회에 참석했는데 결론은 신사 참배를 하는 것으로 끝남. 그 후에 도 일제는 계속 교활한 방법을 씀. 평양신학교 패쇄, 2천여 신도 투옥, 50여 명의 성직자 순교.
각 교단이 일제에 굴복한 다음 한국 교회 전체는 공식적으로 신사참배를 하는 양태를 보여줌.

전체 교회의 88%가 교회에다 일장기를 게양하는 탑을 세우고 일본기에 대한 경례를 하는 교회는 96%였고 동방 요배 실시 교회는 96%, 황국 시민 재창을 93%가 했고 예장은 애국 헌납 기성회를 조직해 그 기성회 이름으로 성금을 모아 일본 육군 비행기를 사주고, 총을 사주었으며, 교회의 종 1540개를 바쳤다.

 

2. 일제의 단말마적 교회 탄압


1895년 청, 일 전쟁
1905년 러,일 전쟁
1930년 만주사변
1936년 중,일전쟁
1941년 태평양 전쟁
일본은 여러 차례 승리로 기세 등등해짐. 우리나라는 지리적으로 '샌드위치'였 기 때문에 많은 피해를 봄. 이러한 때 일제는 신사참배 강요, 저항하면 투옥. 구 약의 모세 5경과 요한 계시록을 그들의 국시사상에 어긋남을 알고 읽지도, 가르치지도 못하게 함. 사도신조 중에 '저리로써 산자와 죽은자를 심판하러 오시라 라'를 뺌. 찬송가도 거슬리는 것 모두 빼버리고 예배 중에도 천황에게 목례하고, 일장기를 달고, 목사에게 일본 군복을 입도록 함. 
1943년에는 주일 오후 예배와 삼일 예배를 막음. 침례교는 재림사상이 강한데 1942년 전국 모든 침례교를 폐쇄시킴. 성결교도 마찬가지로 재림 사상 때문에 1943에 문을 닫게 함. 그래서 모두 뿔뿔히 흩어지고 다른 교단으로 옮김. 많은 성결교 침례교 성직자들이 체포, 구금됨. 일제는 그들의 욕구 충족을 위해 탄압하고 전쟁을 일으키고 하는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역사는 계속 일어나고 있었다.

 

3. 교회 분열의 징조


1930년대부터 분열의 징조가 생김.
* 징조는 지방적 요소와 신학적 요소 
장로교 : 평양을 중심으로 관서지방이 장로교가 많았다. 이곳은 신학적으로 보 수적인 경향이었다. 
1911년 연희전문학교 보조문제로 총회를 열었는데 평양 중심의 교회들은 이 학 교가 남쪽 지방에 있다는 이유로 보조를 반대했다.
1934년에 와서는 북쪽에서 남쪽의 총재들에게 진보 또는 근대주의자들이라고 비난 이에 맞서 남쪽은 북쪽교회에게 교회 전제주의자들이라고 혹평하였다.
그 당시 미국과 일본에 유학을 다녀온 사람들은 신학의 깊이와 넓이가 달랐다.
이들은 너무나도 근본적인 한국신학에 대해 비판을 하기 시작. 그래서 평양 신 학교는 외국에서 공부하고 온 사람들을 싫어함. 평양신학교는 같은 교단의 사람이라도 유학생은 별과에 들어가 공부를 시킨 후 목사로 만들었다.

감리교 : 1930대에 제 1차 총회를 소집하고 여기서 채택한 것이 "기도교의 근본원리가 시대를 따라 다른 형식으로 표명되었고... 우리 교회의 회원이 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아무런 교리적 체험을 요구하지 않는다. 우리의 중요한 요구 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충성과 그를 따르는 다짐에 있다. 그러므로 우리의 입 회 조건은 신학적이기보다는 도덕적이요 신령적인 면을 강조한다.." 이러한 것을 볼 때 감리교는 좀 더 자유주의적이고 개방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평양신학교의 당시 교장이었던 박형용 박사와 그리고 숭인 상업학교의 김재준 박사는 그 당시 신학논쟁의 거두들이었다. 박형용은 미국 프린스턴 대학의 극 보수적인 신학교수의 영향을 받아 성서 무오설과 축자영감설의 교육을 받았다. 김재준은 같은 곳에서 공부하였는데 박씨와는 달리 자유주의적이었다. 그는 한국교회 신학의 부재에 대해 비판하였다.

이 논쟁이 계속되다가 1934년과 1935년 장로교 총회의 문제로 대두함.
김영주 : 모세 5경 저작설 부인 (박형용은 이에게, 스스로 목사 됨을 거절하는 것이라 함) 
김춘배 : 여권운동에 대한 자유주의적 해석을 함.(박씨는 이를 징계에 처함이 옳다고 했다)

1935년 Abingdon 주석이 나왔을 때 감리교의 류형기 감독이 그것을 편집, 번역하였다. 이 일을 채필근, 한경직, 송창근이 같이 했는데 이 책이 아주 자유주 의적이어서 번역한 자들에게 공개사과를 요구하고 Abingdon주석을 교인들로 하여금 사지도, 보지도 못하게 함. 점점 신학적으로 개방적이 되어갔다.

 

4. 교회내의 난기류


1920년대 부터 지적인 변화, 경제적 빈곤, 일제의 탄압 심화 등으로 목회자 양성이 쉽지 않았다. 그 당시 소설가 이광수 왈 " 기독교는 이성을 경멸, 종교 외의 과학, 모든 다른 사상을 경시하는 풍조를 낳아서 현세를 무시하고 죽어서 천당만 가려고 든다"라 고 혹평. 그 때 사회는 소망이 없었으므로 목사들은 재림, 즉 이세상 보다는 저 세상을 바라는 설교를 했다. 
이러한 때 신비주의자들 등장 - 소망을 심어줌.

 

1.이용도 목사 : 협성신학교 졸업. 감리교 목사. 교파 초월 부흥사역. 각교회를 돌아다니며 민족의 고난에 울었고 교회 형식주의를 비판. 전형적인 경건주의자 의 모델. 진리는 말에 있지않고 삶에 있다고함. 종교는 설교가 아니라 곧 삶이 다. 믿음보다 사랑에 진리가 있다. 요한 복음서를 제일로 생각. 그는 무조건적인 사랑을 표방했고 심지어는 사탄, 불경, 사회주의 책에도 진리가 있을 수 있다고 강조. 신학과 기독교 교리를 공격함으로서 신비주의 공통의 오류에 빠짐. 그의 절대적인 사랑은 나무랄 데가 없지만 사랑의 융합을 통하여 그리스도와 혈관적 연관을 잇는다고 믿고 한걸음 더 나아가 그리스도와 자기 자신을 동일시 여김. 
이때 한국교회는 이용도 목사에게 금종령을 내렸고 평양 장로교에서는 그를 부흥사로 초청하지 못하도록 함. 그리고 그가 속해있던 감리교는 1933년 그에게 휴직 처분함. 얼마 후 결핵으로 사망.

 

2. 길선주 목사 : 계시록 1만 2백번을 독파. 신구약 성서를 30독. 절망과 고통 가운데 헤매는 사람들에게 주 예수의 강림에 대해 말하고 설교의 주제는 항상 '마라나타'였다. 그에 의해 세례 받은 자는 3천명 또한 그의 설교를 듣고 기독교로 돌아온 자가 7만을 헤아렸다.

 

3. 황국주 : 백일 기도 중에 은혜의 체험을 했다고 함.
그는 머리와 수염을 기르고 한복을 차려입고 예수그리스도와 비슷한 풍채라 고 하기도 함.예수 그리스도와 영 육간의 합일이 이루어져 자기 속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들어왔고, 자기 목소리는 예수의 목소리로 변했다고 했다. 그 가 가는 곳마다 그를 보고 모여드는 신자가 많았다. 심지어는 가정을 버리고 따 라 다니던 유부녀들도 있었다. 그가 서울역에 왔을 때에는 전국 교회가 떠들석했다. 그는 삼각산에 가서 기도원을 차리고 그곳에서 몸 가름, 피 가름을 하였다. 황국주가 죽은 후 그의 피 가름 교리가 통일교로 이어짐.

 

제8장 한국 교회의 수난사

 

기독교도연맹의 박해 : 이북의 공산정권은 기독교도연맹을 앞세워 공산당에 반대하는 교역자와 교인들에게 박해를 가하였다. 기독교도연맹에 반대한 박봉옥 전도사에게 전달된 지시문이 이것을 증명하고 있다.

재건운동 : 1945년 11월 평북 선천에서 열린 평북 목사수양대회에서 한국교회 재건원칙이 제시되었고 이로써 재건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6.25사변 : 6.25사변 중 한국교회는 수많은 인명과 재산피해를 입었다. 사진은 퇴각하던 공산군에 의해 학살된 우익인사들이 시체들이다.

포로선교 : 아군에 체포된 공산군 포로들을 대상으로 전도하는 피어스 박사(1952)

선명회합창단 : 전쟁고아들로 이루어진 선명회합창단은 음악을 통한 선교에 크게 공헌하였다.

수족절단자복구회 : 토레이 선교사에 의해 대전에 설립된 것으로 전쟁 후 지체부자유자에 대한 사회 선교의 한 측면을 보여주고 있다.

부활절연합예배 : 1953년 수복된 서울의 남산 옛 신궁터에서 초교파적 으로 부활절연합예배가 드려지고 있다.

남북통일기원예배 : 1955년 해방 10주년 기념 및 남북통일원 연합예배 에서 한경직 목사 통역으로 피어슨 박사가 설교하고 있다.


장로교 분열 : 1959년 예장 44회 총회는 NAE측과 에큐메니칼 측으로 나 뉘고 말았다. 

 

1. 해방과 교회 재건


45년 8월 15일 해방이 되었을 때 그동안 많은 수난을 겪은 기독교인들은 남다 른 감격을느겼다. 후에 남, 북 분단의 아픔을 가져오기도 함.
 
(교회 재건 운동)


1)장로교
교회 재건에 있어 선두를 달린 곳이 평양 중심의 관서지방이다.
일제 탄압에 의해서 투옥된 교역자 중 50명이 순교함. 평양 감옥에서 20명이 출옥하고 그동안 지하에 숨어있던 자들이 나와 교회 재건에 힘쓴 곳도 평양이 다. 이기선 목사를 중심으로 한 출옥성도들은 나오자마자 가정을 찾아간 것이 아니라 순교한 주기철 목사님이 시무하던 평양의 삼정현교회에 모여 기도회를 갖고 교회 재건에 관한 협의를 함. 그리고 9월 20일 ' 
교회 재건 5대 원칙'을 발 표함.


1)장로교 
교회 지도자들은 일본 신사에 참배 해 죄를 졌으니 통회 자복 후 사역에 임할 것.
권징을 자책하고 2개월 간 휴직할 것 등등... 
그후 11월 14일에 선천 월곡교회에서 평북 5개 노회의 교직자 연합수련회가 있었다. 
여기에 참석한 사람 가운데 홍택기 목사 등 일제 때 신사참배를 했던 많은 목사들이 5대 원칙에 대해 반발하고 일어섰다. 그래서 출옥성도들과 싸움이 벌어졌다. 교회 안에 난기류가 생김. 같은 해 12월 초 평양 장대현 교회에서 북한 5개도 연합회를 조직하고 북한 교회와 남한 교회의 교류를 위해 북한 교회에서 이인식 목사와 김양선 목사를 서울에 파송함. 남한 교회에서는 부산을 중심으로 한 경상도에서 교회 재건 운동이 일어남. 이곳은 주기철 목사님의 출생지이고 최상 림, 손양원, 한상동,등 이들의 영향력 때문에 부산이 중심지가 됨. 부산 진교회에 서 회의를 소집하고 경남 재건 노회를 조직함. 주남선 목사를 노회장으로 선출.

 

2) 감리교
재건 감리교회
부흥 감리교회 - 둘로 나뉨.
감리교도 해방과 함께 9월 8일 남부 교단 대회가 소집됨. 이 대회에서 변홍규, 이규갑, 윤성범, 나사행, 이봉구 목사들이 불법성을 지적하며 반기를 들었다. 왜냐하면 이 조직을 한 사람들이 일제 시대 때 굴복하고 그들에게 동조했던 자 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재건 감리회와 부흥감리회가 나옴. 이 두파들은 서로가 자기 측 사람이 감독이 되길 원하고 서로 양보하지 못함. 
합동안이 나옴 - 일제 때 신사참배한 사람은 간부나 중요한 요직에서 제외시키 고 두 회에서 동수로 선출하여 간부를 뽑는다. 투표가 끝난 후 결과는 부흥 감리회에서 절대적인 숫자가 나와서 이에 불만을 품은 재건 측은 문제를 제기 또다시 갈라짐. 이때 평신도들이 양 파의 합력을 원하여 노력한 결과 분열 위기를 극복하고 다시 하나가 되어 감리교의 기틀을 마련함. 그 후로 평신도의 발언권이 높아짐.

3) 성결교 
해방 전 성결교는 약 5만 성도가 있었다. 그런데 성결교 교리 중 4중복음이라는 것(성결, 신유, 중생, 재림)이 있는데 이 중 재림에 관한 문제 때문에 성결교가 문을 닫았었다. 해방과 함께 폐쇄되었던 성결교회가 다시 문을 열었다.

 

2. 북한에서의 교회의 참화


해방되던 해 11월 16일 , 북한의 많은 뜻 있는 기독교도들이 보다 더 좋은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 기독교 민주당을 설립했는데 윤영하, 한경직 목사가 중심 인 물이었다. 공산당은 이것을 미리 알고 기독교 민주당의 출현을 막기 위해서 창 당 대회에서 장로 1명을 살해했고 부근에 있는 교회에 방화를 저질렀다. 이에 충격 받은 신의주 학생들이 시위를 벌였는데 러시아의 전투기와 탱크를 동원해 학생들을 저지해 많은 학생들이 수난을 당함. (신의주 학생의거 사건) 2년이 지 난 1947년 11월 북한 평양에서 김화시 목사와 고한규 장로가 있었는데, 이들 이 기독교 자유당을 조직하려 했다. 그런데 역시 이들도 창당 대회 하는날 40여 명의 교회 지도자들이 체포, 투옥되거나 러시아로 유배됨. 1948년 북한에서도 공 산 국가를 위해서 주의를 기해 선거일을 정하고 투표를 하는데 모든 기독교인들을 선거에 동원시킴. 여기에 반기를 들고 북한 기독교도의 입장을 발표하였다.

1) 주일에는 어떠한 행사에도 불참한다.
2) 기독교는 신앙과 집회의 자유를 확보한다.
3) 교회당은 예배 외의 어떠한 것에도 사용을 불허한다.
이것이 화근이 되어 많은 기독교 지도자들이 구금된다. 마침내 50년 6.25사변 이 일어날 때 북한은 남침 준비를 끝내고 기독교인들을 먼저 검거해 투옥시켰다. 이 때 기독교인들을 찾아볼수 없도록 만들었다.

 

3. 민족 분열과 교회의 분열


공산당에 대항해 투쟁하던 목사들 순교.
6.25때 여순 반란 사건시 두 아들을 잃은 손양원 목사, 김익두, 남궁 혁, 송창근 목 사, 그리고 많은 신학자들과 지도자들이 납북됨.
6.25를 거치면서 파괴되고 손실된 교회 수가 장로교 152개, 감리교 84개, 성결교 27개 구세군이 4개 교회였고 순교자도 많았다. 
6.25때 서울은 북괴에 동조하는 교인들이 몇 있었다. 경동교회에 출석하는 김욱 이라는 자는 기독교 민주 동맹을 Y.M.C.A 건물에 걸고 김일성이 서울에 왔 을 때 환영식을 함. 6.25가 나기 전 기독교 사상범으로 투옥되었던 최근식 목사 는 교도소에서 나와 목사들을 고발 해 북괴군에 의해 끌려가도록 했다.
1950년 4월 경남 부산을 중심으로 해서 장로교에서 교회 재건 운동이 있었다. 6.25가 터져서 모든 지방이 공산화가 되었을 때 교회 지도자들이 모두 부산으로 모임. 1951년 5월 당시에 정기 총회를 소집했으나, 이 때 출옥성도들과 일제 때 영창에 들어가지 않았던 사람들간에 의견 대립이 생김.
비 고려파와 고려파 간에 싸움이 일어나고 결국 비 고려파가 고려파 장로교에서 갈라져 나감. 싸움이 여기서 끝난 것이 아니라 같은 해 7월 서로 무서운 공격을 하기 시작했고 고려파는 그 당시 국회의원 22명의 명의로 비 고려파를 용공단체라고 비난함. 
1953년 기장과 예장이 갈라짐. 조선신학교의 김재준 목사의 신학이 신 신학이라고 해서 그 문제를 총회에 제출했고 신학생 51명이 학교를 나가 장신대를 세움. 1953년 정기 총회에서 조선신학교를 나온 사람은 목사 안수를 예장에서 받을 수 없다고 해서 갈라짐.
1958년에 같은 예장에서 통합, 합동으로 나뉘게 됨. 학교 부지 관계 때문에, 부정이 있었음을 들고일어나서 박형용 박사를 지지하는 사람들과 반대하는 자들로 각각 나뉘게 되었다. 1977년 그 후 합동에서 주류와 비주류로 나뉘어짐 그후 사분 오열의 분열이 이어져 많은 교단이 생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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