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6-07-31 22:18
[3]한국 교회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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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웹섬김이
조회 : 4,418  

제6장 한국 프로테스탄트의 형성과 부흥

 

아펜젤러와 언더우드: 1885년 4월 5일 함께 내한한 두 선교사는 한국 개신교회의 개척자였으며 절친한 동역자였다.

선교사들의 순회전도 : 1891년경 미국 북 장로회 선교사들의 서북지방 순회 전도  (마펫. 게일. 베어드 등)

매서인들의 전도 :성경과 전도지를 파는 매서인(권서인)들의 활약으로 한국 교회는 크게 발전하였다. 1890년경 서울지방에서 활약하는 매서인.

소래교회 : 1884년 황해도 장연에 세워진 최초의 교회. 

새문안교회 : 조직교회로서는 한국에 처음 세워진 (1887년) 교회로 정동에 서 시작되었다.

정동제일교회 :한국 최초의 감리교회로 1887년 창설되었다.

장대현교회 : 1893년 평양에 설립된 장로교회이다.

성공회 서울대성당 : 1890년 한국선교를 시작한 영국 성공회는 서울 정동에 대성당을 설립(1891)하고 로마네스크식 건물을 마련(1926)하여 성공회 선교 의 중심으로 삼았다.

강화성공회성당 : 1893년부터 시작된 성공회의 강화. 선교 결과로 1900년 한국의 전통 건축양식을 채용한 성당을 건축하였다. 기독교 토착화의 단면 을 보여주고 있다.

구세군 선교 : 구세군의 한국 선교는 1908년에 이루어졌다 .개척 선교사 호 가드 전도

무교동 성결교회 :동양선교회 복음 전도관이란 이름으로 1907년 서울 무교동 에 설립된 이 교회가 오늘의 성결교회의 모체가 되었다.

동아기독교 :침례교회의 전신인 동아기독교는 캐나다출신 선교사 펜윅에 의해 1889년에 설립되었다

일본인 교회 : 한일합방을 전후하여 일본 교회(특히 조합교회)는 한국 선교를 시작하였는데 이는 일본의 한국 침략과 병합과 그 궤를 같이하는 것이었다. 사진은 해방 전까지 일본인교회로 사용되다가 해방 후 덕수교회 예배당으로 사용되었던 건물이다. 서울 정동에 소재.


배재학당 : 한국에서 최초로 설립된 신교육 기관으로 1885년 8월에 설립되었다. 1887년에 건축된 교사는 한국에서 최초로 설립된 서양식 벽돌 건물이 기도 했다.

이화학당 : 1886년 스크랜톤 부인에 의해 시작된 이화학당은 한국 여성교육 의 요람이 되었다. 
 
1. 개국과 미국 선교사들의 내한


의료와 교육 사업(우리 나라는 의료와 교육이 필요함을 느꼈다) 
중국에 의료 선교하던 알렌 박사가 1884년 9월 20일에 의료 선교사로 자청해서 우리나라에 옴.
같은해 1884년 10월 4일에 갑신정변이 일어났다.
갑신정변 :우리 나라 최초의 우체국을 세워놓고 낙성식을 하는데 내노라 하는 우리나라 인물들이 참석했는데 수구파(옛것을 지키려는, 대장은 민비의 오라비 민영익)와 개화당(개혁으로, 대장으로 박영호, 김옥균)이 있었는데 개화당 사람 이 민영익을 칼로 찔렀음. 개화당이 3일 동안 천하를 이루다가 다시 흩어짐. 이때 알렌이 민영익을 고침.(한의사 14명은 실패했는데) 이것 때문에 알렌의 인기는 치솟음.

알렌은 그래서 궁중 시의가 되어 모든 왕족, 고관을 치료함.
민영익은 알렌에게 고맙다는 표시로 10만냥을 사례함. 
이 돈으로 알렌은 왕립 광혜원을 설립.
이 병원의 설립 2주후 고종황제가 제중원이라는 이름을 줌.
제중원 - 나중 세브란스 병원으로 개명.

당시 의대가 파리 날렸는데 백정인 白哥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아들이 콜레라 에 걸려 죽게 되었는데 세브란스 의사들이 살려 주었다. 의사들이 그 아들을 세브란스 의사로 만듬.

1885년 4월 언더우드, 아펜젤러가 선교사로 오는데 문을 열어주는 도움을 주게 되는 배경은 알렌이 병원으로 정부에 호의를 준 영향이 크다.

교육 
멜렌 도르프 : 영어 강습소 생김.
우리나라 조정에서 외교관, 통역관 양성 목적.
한국정부 : 미국 정부에게 현대 교육자를 보내 달라고 요청.

헐버트 1884년에 육영공원(영재를 교육하는 공적인 학원)- 최초의 미국식 학교인데 주로 정부의 고위 관리들이 다님. 후에 나라에서 이런 학원을 닫게 하자 선교사들이 교육에 직접 뛰었다.

 

2. 선교 활동과 조직 교회의 출현


1885년 4월 5일(부활절) 
알렌의 뒤를 이어 호레스 언더우드와 아펜 젤러가 우리나라에 도착함.(그때는 당장 전도할 수 있는 처지는 아니었다.) 
1887년에 언더우드가 솔래 교회에 가서 7명의 신도에게 세례를 줌. 1887년 9 월 27일에 언드우드가 사랑방에서 예배를 드림.(14명과 같이)- 이 교회가 새문안 교회의 전신이다.

1887년 10월 9일에 아펜젤러는 또 언더우드 처럼 사랑방에서 예배를 드렸다(정 동 제일교회의 전신이다.)

1887년 아펜젤러는 정동 자택에서 교회만 아니라 학교를 세움(2명으로 시작) - 1주년이 되는 때에 고종황제께서 배재 학당(인재를 배출하는)이라는 이름을 줌.

( 언더우드, 아펜젤러가 들어온 후 들어온 선교사) 스크렌턴(감리교 의료 선교 사)의 어머니 미세스 스크렌턴이 자기 사랑방에서 정부 고관 부인 2사람을 데리고 학교 시작- 이화여대 전신(1885)

1886년에 고종 황비의 아내 민비가 이름을 줬는데 이화학당이라 했다.

이런 학교들에는 학생이 별로 없었는데 그 이유는 선교사들에 대한 오해가 많 았다. 당시 선교사들은 모유보다 우유를 먹이는 등 자기들도 먹고(악성 우유통 루머번짐) 광이문(서소문)밖에 콜레라 환자들을 버렸는데 스크렌턴의 모친이 그중 1명의 소녀를 데리고 와서 아들이 고쳐서 이 학교 3회 졸업 소녀가 된다.

1886년 정동의 언더우드 사랑방에서 고아원 스타일의 학교를 시작했는데 1891 년에 와서 예수교 학교로 바뀌고 1905년에 경신 중고등 학교로 바뀜.- 나중에 정신 여자 중 고등학교로 바뀜.

북한에는 숭실 전문학교, 숭의 전문학교, 광성 중 고등학교.

1892년에는 미구 남 장로교에서 파송한 레이놀즈와 6명의 선교사가 입국해 전 라도 쪽에서 선교활동을 했는데 "예수병원"을 설립했다.

1893년 카나다 연합교회에서 와서 함경도 선교함.

동년 동양 선교회가 들어와 년 성결교회를 시작

동년은 영국 구세군이 들어와 선교 시작

1903년에서 1905년 사이에 하와이로 이민 가는 사람이 늘었다.(당시 7300명 정 도였는데 이중 윤은현, 손흥조가 일본에 들렸다가 안식교 전도사를 만나서 돌아와 한국에서 안식교가 시작된다.)

 

3. 성서와 성례전


한국의 프로테스탄트 - 성서와 관련하여 출발했다고 얘기할수 있다.
1885년 4월에 인천에 처음 도착한 언더우드와 아펜젤러의 손에는 이미 한국어로 번역된 성서가 있었다. 그 당시 사람들은 성서 공부에 관한 열정이 대단하였다. 한 선교사 왈 " 이세상의 모든 성서가 불타 없어져도 한국인 5명만 모이면 성서를 재구성할 수 있을 것이다 "
 
교회란? 
루터 : 하나님의 말씀이 바르게 선포되고 성례전이 올바르게 집행되어야 존재 가능하다고.
칼빈 : 그의 기독교 강요에서 제 4부에 보면 루터와 마찬가지로 말씀과 성례전의 중요성을 얘기함.
우리 나라는 말씀에 대한 열정은 컸지만 성례전에 대한 의식은 약하였다. 오늘날도 그런 경향이 있다.

* 교회에서의 말씀과 성례전은 균형 울 이뤄야 한다.

 

4. 선교지역의 분할과 선교 정책


한국에는 많은 선교회가 조직됨.
장로교 - 북 장로교               감리교 - 북 감리교
             남 장로교                           남 감리교
             캐나다 장로교
             호주 장로교

이러한 많은 교단에서 선교지 분할 정책을 쓰게됨.
남장로교는 전라도와 충청도 선교. 이 외에 이미 선교가 시작된 곳은 북 장로교 가 맡음. 부산(경상도)은 호주 장로교, 함경도는 캐나다 장로교가 맡음.
1905년 을사보호 조약 체결. 장로교와 감리교간에도 지역 조정이 있었다.
연변 중심의 지역은 북 감리교, 평북 지역은 북 장로교.
1908년 남감리교는 강원 북부 3분의 2와 경기도 서울 이북을 장로교로부터 모 두 떠맡게 됨. 북장로교는 강원 남부 3분의 1, 서울 동부, 서울의 남감리교 지역을 다 떠맡음. 
* 선교 정책을 보면,
한국에 온 선교사들의 신학 사상은 보수적, 경건 주의자들 이었다. 
저들이 한국에 왔을 당시 한국은 - 샤머니즘 : 무지함에서 생김.
                                     유교  : 형식주의,  허례허식
                                      불교 : 미신적임.
- 위의 3가지의 사상에 어느정도 젖어 있었다.

이때 선교사들은 중국에 주재하던 선교사 John Nevius를 초청하여(1890년) 그들 과 함께 지내면서 선교사업을 위한 원칙을 세웠다. -


  '삼자(三自)정책'
    1) Self-propagation 자력전도 : 스스로 전도하게 한다.
    2) Self-goverment  자치제도  : 스스로가 교회를 관리, 운영하게  한다. 자치제도 마련.  
    3) Self-suport      자치자립 : 자급목회를 하게 한다.

 

5. 1907년대 부흥운동


         1882년 임오군란(직업군의 군량미 부정 사건)
         1884년 갑신정변(개혁파와 수구파간의 구테타)
         1895년 청,일 전쟁
         1905년 러,일 전쟁

이러한 일로 해서 우리나라 사람들은 소망이 없었고 의지할 것도 없었다. 정치, 경 제, 도덕, 정신적으로 절망 가운데 빠짐. 그래서 평양에서 부흥운동이 일어났다. 1895년 서울에 주재하던 선교사가 "한국의 실정을 변해가며 일반 백성들 사이 에 각성의 기미가 보인다"고 보고함.
1895년 당시 우리나라 기독교 인구가 530명 1896년에는 3276명, 1900년대 와서 는 7690명으로 늘어났다. 
<교회성장 요인들> - 당시 황실 고위층과 선교사들 간에 친밀한 관계였다. 1895년 일본 자객에 의해서 민비가 살해되자 위협을 느낀 고종황제는 피신을 하였는데 그 어느 누구도 믿지 못하였지만 선교사들의 말만은 믿었다. 한국에는 미국인들이 250명이 있었는데 그 중 절반 정도가 선교사였다. 선교사들은 선교 사역 뿐 아니라 조선 독립운동에도 힘썼다. 그래서 일본인들에게는 선교사들이 눈에 가시였다.

당시 배제학당의 교사였던 이승만을 비롯, 서재필, 윤치호를 중심으로 해서 배 제학당 안에 소위 '협성회'를 조직해서 애국운동을 벌였다. 이 협성회가 우리나라 최초의 청년 운동의 시발이었다. 그러나 좀더 체계적인 것은 1893년 10월 '황성 기독교 청년회'가 조직됨.(오늘날의 Y.M.C.A가 됨) 서울 종로 2가에 '황성 기독교 청년회'는 3층 양옥을 건립하고 황태자(순종)가 여기에 참석해 낙성식을 치뤘다. 황제를 비롯해 이또오 히로부미와 그 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기부금을 내 었다. 이 청년회는 종교의 차원을 넘어 체육, 공업 교육에도 영향을 끼쳤다. 1896년에 서재필은 독립 신문을 발간한다. 그는 그 신문을 통해 대중계몽에 성 공을 하고 '독립협회'를 조직한다. 그리고 중국 사신이 오면 환영하던 모화관을 없애고 그곳에 독립문을 세워 독립사상을 고취시킨다.
또한 서재필, 윤치호, 홍정우등은 주일마다 집회를 열어 자유사상과 민주주의를 고취시킴. 우국 열사들이 정부의 부정부패를 공격하자 저들은 심한 불쾌감을 갖고 마침내 1898년 12월 독립협회를 해산시켰다. 선교사들은 감옥을 방문해 그들에게 전도를 해서 1901년 3월에 17명중에 12사람이 함께 세례를 받는다.

선교사들은 계속해서 문서 전도와 문예 활동을 통해 우리나라 사람들의 개화 운동에 힘쓰게 되는데 1899년 언더우드와 뜻 있는 사람들이 '성교서회'를 건립 (후에 기독교서회로 바뀜)하여 正音(한글)으로 문서를 발행한다. 1903년에는 이 기독교서회를 통한 출판부수가 25만부나 되었다. 마침내 1907년 우리나라에서 부흥회가 일어났다. 이 부흥회가 일어나기 전 1903년에 원산에서 감리교 선교사 인 하디가 기도하던 중 영감을 받았다고 그 체험을 동료선교사들에게 간증을 했는데 이것이 평양선교사들에게도 퍼져 그 이후 장로교, 감리교 선교사가 함께 모여 합동 집회를 연다. 그래서 이들은 마침내 1907년 1월 6일 평양 장대현 교회에서 집회를 연다. 이 교회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은혜를 사모한다. 블레오 선교사가 고전 12:27의 말씀을 읽자 불이 붙어서 - 길선주 장로의 간증을 통한 회개의 역사가 일어남.
이 부흥운동은 한국교회의 양상을 바꿔 놓았다. 인격적, 소박한, 공동체적 신앙으로 바뀌어 졌다.

1900년대 영국 웨일즈 지방의 탄광 - 무기력함과 무  희망적인 삶을 살던 광부들 - 그들에게 복음이 전해짐. - 180도 달라지는 그들의 삶이 일이 미국을 통해 우리 나라에 들어와 1907년 부흥운동을 갖게함.

 

(6). 교회 행정 기구의 설정
1907년 9월 평양에서 장로교 독 노회 창설
그리고 이 때 평양 신학교에서 배출된 7 의 목사가 안수를 받는다.(서경조, 이기 풍, 길선주, 한석진, 송인서, 방기창, 한승백)
1907년 - 1910년 사이에 한국 교회는 일본, 중국, 만주, 시베리아, 미국 등에 선 교사를 파송한다. 그후 100명 구령운동이 일어남.
감리교는 1901년 김창식과 김기방이 안수를 받는다. 감리교는 처음부터 남,북 감리교 선교사들에 의해서 선교가 시작되었는데 이들이 독자적인 노선을 걷다가 1907년에 합동해서 하나의 조선 감리교를 세우고 목회자 양성을 위해서 신학교를 세움. - '협성 신학교' 그 후에 와서 1930년대에 기독교 조선 감리회라 이름 을 바꿈.

 

 


제7장 일제 치하에서의 교회

 

옥중개종 : 한국교회는 초기부터 민족운동에서 적극 참여하였다. 사진은 독 립협회 사건으로 투옥된 민족지도자들인데 1907년 경 이들은 대거 기독교로 개종하여 기독교의 기도자들이 되었다.

문용기의사 기념비 : 3.1운동 때 이리 만세시위를 주동하면서 순국한 기독교 인 문용기의 기념비. 이리 소재. 

 

1. 십자가를 걸머진 교회


우리나라는 민족운동이나 독립운동은 교회의 움직임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기독교의 교리 - 유일신 사상과 또한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기 때문에 인간의 자유와 존엄성을 귀하게 여겼다.
이러한 사상 때문에 일제는 기독교를 다른 종교보다 더 탄압했다.
그 당시 교회는 일본 침략에 항거하는 강력한 조직체가 되었고 이를 눈치챈 일 제는 기독교를 말살하려는 음모를 꾸밈. 
(기독교 말살 정책) - 1910년 12월 27일 일본의 데라우찌 총독이 압록강 철교를 놓고 그 준공식에 참석하러 갔다. 그곳에 가던 기차는 선천역에 한 번 정지하게 된다. 헌데 이 때 기독교 지도자들이 데라우찌를 암살한 음모를 꾸몄다고 거짓 소문을 퍼뜨려 많은 지도자들을 체포하였다. 
그 당시 인구 2000만명중 크리스챤이 18만명이 넘었다.
700명을 체포하고 그 가운데서 105인을 유죄 판결을 내렸다. 105인은 여러 차례 감형으로 형기를 마치고 나오게 된다.
105인중 94명이 기독교인이었다. 이것이 105인 사건이다. 저들이 평양역에 도착했을 때 9000명이 나와서 그들을 환영했다.

 

2. 3.1운동을 통한 교회의 애국 운동.


1918년 파리에서 세계 평화 회의가 열렸을 때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민족 자 결 주의'를 내세웠다. 이것으로 인해 우리 민족은 여러 가지 생각을 하면서 '왜 우리가 일제의 압력 하에 살아야 하는가?' 라는 회의를 품게됨.

그후 1년이 지난 1919년 3.1운동이 일어났을 때 33인중 16명이 크리스챤이었다. 대부분 기독교인이 앞장섰고 이 운동은 비폭력 무저항주의로 기독교 정신 에 의해 진행되었다. 일본의 헌병과 경찰들은 기독교인들을 투옥시키고, 체포, 교회를 파괴시킴. 이 운동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4월 15일 12시경 수원 부근 제암리 교회에 일본헌병이 몰려와 교민들을 모이게 하고 창문에 못을 박고 교회 주변에 불을 지르고 나오려는 사람들은 칼로 찌르고 죽였다. 많은 교회가 이와 같은 일을 당함. 1919년 일본 보고에 의하면 파괴된 교회가 17개, 일부 파괴된 교회는24개, 그 외에 교회에 큰 손해를 본 곳이 41개, 교회 재산 피해가 3만불이었다. 장로교 보고에 의해 체포된 목사, 장로수가 134명 교인수가 3천 8백 4명, 사살된 신도수가 47명, 감리교 기타 다른 교회의 신도들을 합친 수는 타종교의 신도 숫자를 합친 숫자보다 많았다. 이일을 통해 교회는 많은 피해를 봤지만 또 한 많은 사람들이 교회로 돌아오게 되었다.

3. 선교사의 관여도.
일제는 독립운동 배후에 선교사들이 관여하고, 조종하고 있다고 판단했다.
당시 선교사들은 조선 독립운동의 열렬한 후원자였다. 평양 숭실학교에 모우리 모펫이라는 교수가 있었는데 일제가 그를 잡아갔다. 피신하는 학생들을 은둔 시켜 준 죄였다. 호주에서 온 선교사들도 독립운동 시위에 동향을 미국 선교회 에 보고하고 총독과 일제의 잔악상을 세계에 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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