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6-07-31 22:17
[2]한국 교회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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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웹섬김이
조회 : 5,064  

2. 기해 박해(1839)

 

* 신유박해 후에도 흩어지지 않고 북경 주교에게 성직자 보내 달라고 신자들 이 요청. 
* 정약종 아들 정하상이 있는데 1816년 2차례 걸쳐 북경의 신부에게 요청했으나 여의치 않음. 
* 1827년 정하상의 편지가 라틴말로 번역되어 교황에게 알려져 그레고리 16세 (교황)은 조선교구를 북경 교구에서 분립 하기로 함.

* 초대 주교로 브르기에를 임명함.- 1831년

* 그레고리 16세 교서에서 
첫째로 교회를 양떼로 보지 않고 목장으로 봤다.
둘째로 성직자는 공고 교리, 성례전을 위해 파송 한다.
(즉 천주교는 교리와 구역을 더 중시함을 알수 있다.)
* 브리기에는 부임하지도 못하고 객사함.

* 1835년에 1대 주교가 객사하자 블란서에서 신부들을 파송 하였는데 그중 모팡이 라는 신부가 상복 차림으로 압록강 통해 상륙.

* 2대 주교로 앙베르가 우리 나라에 잠입해 옴.
샤스텡이라는 블란서 신부가 그후 또 옴.

* 이 세 사람의 신부를 통해 카톨릭 부흥.

* 헌종 5년 (1839)에 2차 박해 시작.
당시 영의정 이지현이 사학박멸을 주장하자 순원 황후가 허락.

* 정하상을 비롯한 100명의 교도가 서소문 밖 형장에서 순교 당했고 나머지 세 신부는 한강변 새남터에서 순교 당했다.

* 상제 상서를 정하상이 책을 바침.
우리나라 카톨릭에 대한 최초의 변증서 = 상제 상서
내용 : 3400자로 되 있는데 천주교를 변증하는 부분과 잘못된 오해 부분을 설명하고 마지막에는 우리도 임금의 자녀라고 긍휼을 구함.

* 당시 척불숭유 였는데 정하상은 이 책에서 불교를 공격했다.(즉 기독교가 불교와 다르다는 것 말함-강조)

 

3. 병오 박해(1846)


이 박해전 1845년 앙베르 주교의 후임으로 페레올 주교가 조선 사람으로 최초의 조선 안수 받은 김대건 신부와 한성에 잠입한다.
6개월후 김대건은 외국인 신부 안내 신부라는 일을 하다 군교에게 잡혀 들어감. 
1846년 김대건 신부 처형(살려주려고 했으나 끝내 믿음 지킴) 이 이후로 많은 무서운 박해가 시작되었는데 이것이 병오박해이다.

 

4. 병인 박해와 블란서(1866)

 

이때 우리 나라는 동학 난으로 많은 시련을 격을 때 동북쪽(두만강) 강변에 러시아가 자꾸 통상하자고 압력을 가했다. 
당시 대원군의 측근이 카톨릭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다. 한성에 베르노 주교가 있었는데 로마 교황청에 보낸 편지를 보면 당시 대 원군이 카톨릭에 관대한 생각이 있음과 대원군의 부인은 천주교에 상당한 지식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부인은 아들 왕자가 황제에 등극 할 때 미사 드려 달라고 부탁까지 했다. 또 왕자의 유모는 영세까지 받은 여자였다 한다. 
베르노 주교는 한성에서 열심히 전도한 결과 1865년에는 12명의 선교사와 평신도 2만 3천으로 늘었다. 당시 상황이 이래서 김기호, 홍범주 등이 의논해서 조, 영, 블 의 3개국이 동맹하여 방하책을 대원군에게 건의했다. 
민비(대원군의 며느리) 는 비밀리에 베르노 주교에게 블과 교섭해서 외세에서 지켜 달라고 부탁했다. 
남종삼(조선의 독실한 카톨릭 지도자)을 대원군이 접촉하는 등 카톨릭과 많은 교제가 있었다.

그런데 희소식은 오지 않고 베르노 주교는 카톨릭은 정치적 개입을 원치 않고 방하 책이라는 자체도 부족하다 하여 묵살하였다.
여기에 존심이 상한 대원군이 옛 감정이 살아나고 척외 사상과 서학금지 상소문이 빗발쳤다. 
또 당시 우리가 존중하는 청도 천주교 배척 분위기 여서 더욱 그럼. 
그래서 새남터에서 7명의 선교사와 베르노 주교가 죽는다.
서문에서는 조선의 신도들이 많이 죽음.
한국 통사에는 교도 12만명이 죽었다고 기록되으나 
다른 자료 종합결과 8천명 정도라함.(3년 동안) 
이것으로 인해 블란서 군대를 우리에게 보내 전쟁하도록 하는 원인이다. 
니델이라는 선교사가 포교들을 피해 충청도 해안으로 빠져나가 2명의 신부는 거기 남겨 두고 니델과 조선교도들은 아산에서 어선을 빌려 타고 중국 산동성의 지프라는 곳에 다다르게 된다. 
이곳에 도착한 조선 교도들은 커다란 블란서 군함을 보고 이것으로 조선 을 위협하여 천주교를 널리 펼치자고 말했다. 
이 조선인 11명중 4명은 중국 3대 도시중 하나인 천진의 블란서 공관에 찾아가 공사인 블란서 제독(로쓰)를 만나서 한국 박해를 보고했다. 
이에 분개한 블의은 청국 총리에게 보고하고 니델을 통역삼아 군함을 몰고 강화도에 침공했다.(병인양요) 이것을 계기로 전국에 조서를 내려 어린아이까지 죽임.

* 병인박해와 미국 1866년 7월 평양 대동강에 국적이 미국인 제너럴 셔먼호가 평양 대동강에 들어왔다.(군함이 아니라 상선) - 여기에 로버트 토마스 목사가 타고 있었다. (런던 선교회 소속 선교사)

한강인줄 알고 대동강에서 있다 물이 빠져 남아있다 평양 관군괴 제너럴 셔먼호가 싸움이 벌어졌다.
당시 평양 시민이 모두 합류하여 상선을 불태워 모두 죽였다.

이 일이 있은 후 1871년에 북경에 주지하던 미국 공사 F 로 라는 사람이 청 국의 총리 아문을 통해 조선 정부에게 셔먼호 사건을 묻게 했다.

- 조선정부는 조선은 외국 상선이라 해서 다 적대한 것은 아니다. 1855년, 1865년에도 미국 함정이 황해도, 평안 연안에 표류했을 때 도와주고 헤어 질 때 술까지 했을 정도다.
따라서 우린 의심 받을 것이 없다. 단지 우리 허락 없이 통상 하려고 해서 불가피 했다고 밝혔다.-

미국 극동 함대 소장 로져스는 군함 4척을 이끌고(1871) 강화도 해역을 통해 광성진 까지와 싸움 벌어졌다.(한성 수비대와)

이것으로 외교 문제 발생하자 대원군은 일본에게 쇄국을 다시 재천명 했다.
당시 조선은 외교를 몰랐으며 일본 외에는 설명할 곳이 없었고 일본이 다른 나라에게 알려 달라고 부탁했다.

헤밀턴 피시(미국 국무 장과)는 일본 정부를 통해 조선의 쇄국 정책을 듣고 이제부터 미국과 조선관계는 일본이 좀 처리해 달라고 부탁.
- 1905년의 을사조약, 1910년의 한일합방의 배경이 됨.-

여기에 대해 로빈슨이라는 유명한 역사학자는 고대 로마 기독교인들이 당한 고난보다 한국의 4대 박해 때 고난이 더컸다 고 말했다.
스테판 나일 박사는 책에서 조선 카톨릭 역사는 가장 로멘틱 하고 믿지 못 할 정도의 수난시대라고 말함.

 

* 조선 천주교의 신앙 형태
조선 천주교는 철저히 수난과 박해로 얼룩져 있고 4대 박해를 거쳐오는 동 안 피맺힌 헌신과 형극을 거치면서 신앙형태가 생겼다.

(1) 이들 교회는 수난을 통해 오면서 상류에서 하류층으로 신앙의 계층적 구 조로 변모되었다.
(2) 중류적인 감각에 호소하고 민족 주체의식이나 고유의 민족의식에 접촉함으로서 조선적  기독교에 언문(한글)을 중시하게 ?다.(천주교 서적이 많이 한글로 되어있다.)
(3) 1850년대 와서 천주교가 하류층으로 파고들어 격정적이고 종말적인 위기 의식으로 변모됨. 그래서 마침내 저들은 박해로 인해 종교의 내면화 지향적이다.
(4) 1919. 3. 1일에 개신교 교도들은 많이 참여했으나(33인중 16명) 천주교 교인은 전혀 잠잠.(박해에 그 동안 질림)

 

 

제4장 한국의 protestant church

 

귀츨라프 : 1831년 한국에 온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로 충청도 고대도에 상륙하여 한국어를 배우고 주기도문을 번역하기도 했다.

토마스의 무덤 :1866년 병인교난 중 일어난 제너럴 셔먼호 사건으로 순교한 토마스의 시체가 묻힌 곳이다.

이수정의 개종 : 신사유람단의 일원으로 일본에 건너간 이수정은 그곳에서 기독교인으로 개종하여 세례를 받았으며 성서 번역과 선교사 초빙 및 유학생교회 설립 등 많은 업적을 남겼다. 사진은 1883년 5월 개최된 일본 전국 기독교도 대 친목회에 참석한 이수정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로스역 성서 : 스코틀랜드연합 장로교회의 선교사 로스와 매킨타이어는 만 주 봉천에 머물면서 한국 선교에 관심을 두었고 이응찬, 백홍준, 이성하, 김진 기 등의 협력을 얻어 성서를 한글로 번역하였다. 사진은 1882년에 간행된 최초의 한글성서(예수셩교 누가복음젼서) 이다.

 

1. 시대적 상황


우리는 반만년 역사를 가졌으나 근래에 들어 종교적으로 심한 허탈감을 느낌.
(고려조 : 불교, 조선조 :유교)
그러나 기독교가 전래되기 약간 이전은 종교적 공백기였다.
당시 멕킨지는 당시 서울에는 종교적 행사가 없었다고 보고한다.
1866년 전쟁이 일어나고 1871년 로져스 함대와 전투를 벌이고 운양호를 몰고 온 일본군이 무력 시위하여 1876년 한일 강화조약을 맺으며 계속해서 미, 일, 러시아와 수호조약을 맺음으로 당시 조선이 운둔국(세계속에서 알려지지 않은 나라)으로 알려지기 시작함. 
* 1884년 갑신정변을 계기로 해서 망명 생활 후 돌아온 일본 수신사 박영효 가 일본 요꼬하마에서 조선 선교사로온 스크렌톤 목사(감리교)를 만남.

박영효는 당시에 우리 나라에 선교사가 필요하다고 느꼈다. 
선교사들이 와서 교육등 문화적인 필요를 채워달라고 부탁함.
우리 재래 종교는 한물 갔다고 말함.

* 1886년 한블 수호 조약에서 조약문 속에는 교회라는 말이 들어갔다. (나중 이 단어 하나 때문에 미국 선교사들이 전도할 때 쉬웠다.)

 

2. 유럽 christian들의 도래


 1) 벨트브레와 하멜 일행이 오게됨.

1627년 네델란드 사람 벨트브레 일행 3사람이 동해안에 상륙함으로 시작.
이들은 동양에서 무역하고자 네델란드에서 일본으로 가다가 파선하여 경주 앞 바다에 표류. 이들은 물을 얻기 위해 표류했다가 억류되게 ?고 살아가던 도 중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 났을 때 같이 상륙한 2사람은 참전했다가 전사했고 벨트브레만 남았는데 전공이 인정되어 한 부대를 이끄는 지휘관이다. 
벨트브레가 표류한지 이십 몇 년이 지나 1653년에 하멜 일행이 본국을 떠나 일 본으로 오다가 또 표류해 제주도로 오게 하다. 일행 64명중 36명만이 살아 남았고 제주도에서 14년간 억류되어 살다가 15명이 탈출하여 본국으로 돌아갔다.
- 하멜의 기사에서 보면 그들이 프로테스탄트였음을 알 수 있다. -


2) 바실홀과 멕스웰의 내한.
1816년 영국 정부가 중국에 파송하는 William이라는 군함이 있었는데 Amhert 사절단이 있었다. 함장은 Maxwell, Bashall 사절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중국에 도착하여 암 홀스트 사절을 내려놓고 본국에서는 한국 서해안을 탐사하라 는 명령을 받았다. 같은 해에 한국 해안에 와서 해도를 작성했다.

이들이 마량진 앞 갈곳에 들렸을 때 문정의 임무를 띤 첨사 (조대복)이 가서 물어 볼때 이 조대복에게 성경을 줌.(King James Version) - 최초로 한국 에 전달된 성경. - 바실홀은 돌아가서 책을 씀.-

 

3) 선교 개척자들의 한국인 접근

(1) 칼 큐츠라프 - 한국을 방문한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
독일의 할례대학에서 졸업. 화란 교회 소속 선교사로서 일하기 시작함.
자바 수마트라(인도네시아)중심으로 중국인 상대로 선교 함.
(중국 옻, 음식 잘 적응) 
자바 수마트라에서 - 마카오로 선교지 옮김 - 네델란드 선교회를 떠나 프리렌쓰 미션네리로서 활동함.

1832년에 선교의 방향을 한국의 서해안으로 돌려 7월 17일에 황해도 - 백령도 - 원산도에 도착( 만나는 사람마다 의약품, 병고쳐 줌, 전도함)

홍주 목사 이민회를 통해 왕에게 성경과 서적 보냄.
홍주 목사 서생 양씨의 도움을 얻어 최초로 성경을 번역(주기도문을)
참고: 이것은 비공식. 공식 1884년

 

(2) 토마스 목사(정식적으로 안수 받아 오신 목사)의 내한

큐츠라프 목사가 아산만에 온지 33년만에 온 최초의 개신교 순교자는 스코틀랜드 사람 토마스이다(런던 선교회에서 1863년 중국 상해 선교사로 파송 되어 왔는데 1865년 중국 지프로 옮겼다. 
이때 한국 선교를 자청했다. 1866년 제너럴 셔먼호가 한국을 간다는 소리를 듣고 통역관으로 자청. 관군이 화공을 맞고 대동강에서 죽음)
이때 배가 타던 때 한문 성경을 강 언덕에 던졌는데 관군 중 하나가 한권을 가지 고 있는데 조카가 숭실학교를 졸업하고 (이영태) 
나중 이늘서 박사가 성경번역시 도와주었다.

토마스 목사를 배에서 끌어내 한강 근처에서 목을 쳐죽임.
목을 친 사람은 박춘곤 인데 나중에 회개하여 1899년 세례 받아 평양 초대 교인이 됨. 그후 평양은 한국 개신교의 예루살렘이라 일컬어짐.

 

(3) 로쓰와 멕킨타이어의 고려문 전도(런던 선교회 소속)

중국 만주의 우장과 봉천(심양)에는 한국 교회 설립에 전초 기지 역할을 했다.
특별히 우장은 최초의 한인 수세자를 배출한 곳이다.
봉천은 최초의 한국 성서가 번역된 곳.

로쓰와 멕킨타이어는 처남 매부지간(중국 우장을 거점으로 한국 선교 연구함)
마침 조선의 의주 청년 4사람이 , 한약 약장사를 위장하여 중국을 방문했다.
의주에서 강건너 50킬로미터 떨어진 고려문(중국과 물품교환 하던장소)에 갔 는데(서양 무물을 배울려는 의도로)

마침 1873년 봄 로쓰 목사가 중국인 서기를 대동하고 고려문 방문. 
(이때는 조선사람이 외국사람 만나는 것도 불법일때) 
여기서 의주청년들을 만남.

로쓰는 그들에게 후한 급료를 주는 대신 한국언어와 역사를 가르쳐 달라고 함.

 

 

제5장 한국 기독교인의 발생과 집회

 

이수정의 성서 : 이수정이 일본에서 한문 성서에 이두토를 달아 펴낸 <신약 성서 마가전>(1884)이다. 이수정은 이외에도 마태. 누가. 요한복음 및 사도행전을 같은 식으로 펴냈으며 한글성서로 <신약 마가 전 복음서언>를 냈다


최초의 견미사절단 : 1882년 한미수호조약의 체결로 비로소 기독교선교의 길이 열리게 된 셈이다. 1883년 민영익(앞줄 중앙)을 단장으로 한 견미사절 단이 미국을 방문하는 동안 미감리회의 가우쳐와 만나게 되어 한국선교의 계기가 마련되었다.


고종의 선교윤허 : 미국 감리회 선교부의 지시를 받은 일본 주재 감리교 선 교사 매클레이가 1884년 6월에 내한하여 고종을 알현하고 교육 및 의료 선 교 윤허를 받는 장면이다. 이 장면은 1934년 감리교 선교 50주년 기념으로 배재학당에서 공연된 연극의 한 장면이다.


광혜원 :미국 북 장로회 선교사로 최초로 내한(1884년 9월) 한 알렌이 고종 의 윤허를 얻어 설립한 국내 최초의 서양식 병원으로 오늘의 세브란스병원 전신이 되었다.  (1)백홍준과 서상륜의 수세와 전도활동.
우장으로 백홍준, 이응찬, 이성하, 김진기 4명이 따라감.
로쓰목사에게 한글을 가르쳐 주고 목사님은 이들에게 보수와 문물을 줌.
처음에는 4명이 잘 안 받아 들였다. 
왜냐면 그때 서학은 국법으로 사학이라 하여 핍박했기 때문이다. 
로쓰목사는 1874년에 한영회화라는 책을 만들었고 1875년에는 예수성교문답 을 만들고 1879년에는 한국지 그 역사, 생활, 습관이라는 책을 씀.
만난지 3년째 1876년에 이들 4청년이 세례를 받음(우장에서)- 한국 최초의 개신교 세례자

이들이 세례 받은후 로쓰와 4청년은 한국 성서 번역에 착수해서 1882년 봄에 요한, 누가복음을 번역 1883년에는 마태, 마가복음을 번역했다.

이때 의주청년 서상륜이 찾아옴. 서상륜은 일찍이 조실부모하고 친척을 따라 홍삼 장사하러 중국을 따라오가다 콜레라에 걸렸는데 맥킨타이어가 그를 살게 해 줌.
그래서 이후에 성경번역을 로쓰와 4명과 함께 귀한 역할을 함.

그때 공관복음서를 번역 출판했는데 국내에 배포하기 힘든 상태였다. 
서상륜이 이것을 짊어지고 여기저기 배포함.
이때 3,000권 찍어낸 것을 로쓰역이라 한다.

이것이 관과에 알려져 위험해 지자 서경조(서상륜삼춘)과 둘이서 황해도 송천으로 위험을 무릅쓰고 옮김. 여기서 송천 솔래 교회를 개척함(1884년- 조선 최초의 개신 교회) 1884년 또 다시 성경을 만들었는데 로쓰 목사가 쪽 복음 6천부를 제물포 (인천)로 보냄
-최초의 밀수품이라 칭하기도...

조선은 당시 독일사람인 멜렌 도르프라는 사람을 현재 관세청장 이라는 자리를 줘서 이 사람으로 하여금 관세 업무를 맡게 함.(조선은 너무 외교를 못했기 때문) 
이때 멜렌 도르프가 서상륜을 불렀다.(왜냐하면 제물포에 성경 6천권이 와있어 서) 로쓰는 백홍준과 이성하에게 편지써서 멜렌 도르프에게 잘 봐 달라고 부탁.

폐지/노끈 성경 (성경을 안 들키기 위해 폐지처럼 하기 위해 제본 안하고 나 두고, 제본안하고 노끈처럼 꽈서 나둔것)

참고 : 김재준 박사 아버지는 유학자였다. 성경을 분배하는 상인이 하루는 그 집 에 머물렀 는데 마땅히 줄 것은 없고 해서 성경을 한 권 놓고 갔다. 김재준 박사가 중 학교때 Y. M. C. A뒤에 승동 교회에 갔다가 설교에서 성경을 읽어야 위대한 사람이 되고 영어 공부 한 사람 치고 킹제임스 버젼을 안 읽으면 안 된다고 해서 그 말에 집에 돌아가 그 책을 꺼내 읽고 훌륭한 목사님 됨.
저고리 성경 : 당시 저고리에 솜을 넣는데 아예 성경을 넣고 꼬매서 가져옴.

1884년 솔레 교회가 세워 졌는데 그 마을이 58호 밖에 안되었는데 서경조, 서 경륜 형제가 열심히 전도해서 몇 달안에 50호가 교회에 나왔다. (서경조는 나중에 새문안 교회의 목사됨) 
1년 후에는(1885) 교인들이 자력으로 8칸 짜리(8평) 교회 지음.

 

(2) 일본을 통한 전도
이수정의 개종과 성서 번역
이수정은 한국에서 임오군란(군인들의 월급안에 모래석은 사건)후 일본에 사절단으로 파견 되는데 박영효, 이수정이 사절단으로 일본으로 가게 됨. 이수정은 현판이라는 자리에 있었는데 가서 안 돌아 오게됨. 일본 동경 대학의 조선과 교수로 눌러 앉음. 
쓰다 목사님을 만나게 되는데 그 집에 가서 마태복음 산상설교 벽화보고 감명 받고 영접함. 쓰다는 이수정을 야스까와 목사에게 소개한다. 1883년 4월에 마침내 야스까와 목사에게서 세례를 받음.

일본 성서 공회 루미스 목사가 이 소식에 기뻐함.
이수정을 만나 도움을 받아 성서 번역을 시작해서 1883년 - 4복음서와 행전 번역이 나왔고 1885년 마가복음이 출간되었다.(이수정판)
일본의 감리교, 장로교 선교사들이 본국에다가 조선에 선교사를 보내 달라고 부탁. 1885년 4월에 그래서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오게 되는데 (그들은 제물포 도착당시 이수정판 성경을 갖고 있었다) 오기 전에 일본에서 조선 성경을 보고 기뻐했다.
참조 : 우리 나라가 장로교는 미국, 세계보다 더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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