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교회사
<서론>
한국 교회의 역사는 세계 기독교 역사상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매우 독특한 모습을 가지고 있다. 한국에 기독교가 전래된 과정을 보아도 그렇고, 교세의 놀랄 만한 급성장과 극심한 환난 등이 그렇다.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께서 한국 교회를 향하여 분명한 뜻을 가지고서 역사하셨음을 깨닫게 한다.
한국에 기독교가 전래된 과정에는 편의상 그 이전의 경교와의 접촉 및 카톨릭의 전래 과정이 포함된다. 431년 에베소 회의에서 이단으로 정죄된 네스토리우스파(Nestorius)는 경교(景敎)라는 이름으로 중국에 전파되었다.
당시 중국은 당나라가 지배하고 있었고, 당나라와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던 신라에 경교가 전파된 흔적이 발견된다. 카톨릭은 일본과 중국을 통해서 접촉되었는데, 일본을 통해서는 임진왜란 당시 소서행장이 이끄는 일본군인들이 카톨릭교인들이었고 그 군대의 종군신부로 세스페테스가 내한햇던 것으로 전해진다.
중국을 통해서는 아담 샬, 주준모 신부 등이 카톨릭 전래를 위하여 힘섰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한국인들이 능동적으로 천주교 서적들을 연구하여 먼저 신앙을 가지게 되었고 그 후 천주교 신부들을 초청하는 형식을 취했다. 개신교 역시 이와 유사하게 로스(J. Ross) 및 이수정에 의하여 번역된 성경들 또는 한문성경을 통하여 전파되었다. 그리하여 한국내에 개신교 신앙인들의 공동체가 형성된 후 개신교 선교사들이 입국하게 되었다. 이처럼 한국의 개신교와 카톨릭은 자생적(自生的)이라는 특색을 가지고 있다. 특별히 개신교는 카톨릭과 달리 성경을 중심으로 하는 특성이 초기부터 분명히 드러나고 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한국 교회의 성장에는 2가지의 커다란 요소가 작용하였다. 하나는 네비우스(Nevius) 선교방법이고, 다른 하나는 1907년의 대 부흥운동이다. 네비우스 선교방법은 자립, 자치, 자전을 기초로 하는 선교방법으로 한국의 개신교가 성경을 중심으로 자립하는 교회로 성장하는 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1907년의 대 부흥 운동은 전적인 성령의 역사로 원산과 평양을 주축으로 하여 일어난 회개운동이며 대 각성운동으로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우리는 다른 한편 당시의 한국인들은 극심한 환난 가운데 있었고, 그 가운데서 교회가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컸음을 기억해야 한다. 교회는 능동적으로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헌신했으며 믿지 않는 자들의 칭송을 들었었다. 그러므로 그만한 성장이 가능했던 것이다. 그러나 계속되는 환난과 기독교의 급성장은 한국 교회의 성향에 부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
한국 교회는 이전의 주도적인 입장에서 벗어나 국가와 사회문제를 외면하고 내세 지향적이며 개인적인 신앙생활을 강조하게 되었다. 또한 심각한 교권다툼으로 인하여 교회분열이 가속화되었다. 그리하여 크게는 진보와 보수로, 작게는 그 안의 각 계파간에 주도권 싸움이 그치지 않고 계속되어 왔다.
이제 선교 2세기에 들어선 한국 교회는 이제까지의 구태의연한 논쟁과 주도권 다툼을 멈추고 새롭게 거듭나야 한다. 그리하여 민족과 나라를 위한 활동들도 재개하고 또한 하나님 앞에서 흠잡을 데 없는 신부로서의 모습을 갖추는 데 힘써야 한다. 교회의 세속화, 물질화에서 벗어나 사랑으로 하나되어 조국의 통일과 그리스도 복음의 편만한 전파를 위하여 정진해야 할 것이다.
제1장 근대 이전의 기독교와의 접촉
대진경교유행비 : 781년(당 건중 2년) 중국 서안에 설립된 비로 중국에서의 경고 역사를 증명하는 귀중한 자료이다. 그 탁본이 서울의 한국기독교박물 관(숭전)에 소장되어 있다. (88.8*177.8cm)
돌십자가 : 경주 불국사지에서 출토된 것으로 신라시대에 전래된 경교의 흔적을 증명한다.한국기독교박물관 소장.24.5*24*9cm.
웅천포구 : 임진왜란 중(1594) 한국에 온 최초의 서야 신부 세스페데스가 상륙한 곳으로 추정되는 경남 웅천.
오다 쥴리아의 묘 : 임잰왜란 중 일본에 잡혀 간 조선인 포로 중에는 기리 시단으로 개종하여 순교한 이들이 상당히 많았다. 왕가의 딸로 고시니에 의 해 끌려갔다가 신앙의 절개를 지킨 '오다 쥴리아'의 묘. 서울 절두산 순교성 지 소재.
1) 당나라를 통한 접촉
AD 431 에 에배소에서 기독론에 대한 신학적 논쟁이 있었는데 그리스도는 인성과 신성을 함께 공유하지만 점진적 동화 과정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했다 가 에배소 회의에서 이단으로 정죄됨.
Netorius 퍼시아 에뎃사 AD635년- 인도와 중국을 전파. 중국에서는 경교라함.
nestorian 당시 중국 황제는 당태종. 당태종: 아라곤의 설교 감명, 파사사라는 교회 세워줌. 중국말로 아브라함. 왕이 관심을 가지므로 크게 번창
* 그때 우리 나라는 신라시대(삼국통일을 꿈꾸던 때) 우리 나라는 당나라 힘입어 통일 이루려함.(신라의 김춘추 여러 번 방문)
* 불교의 고승들이 당나라 여러 번 방문.
* 1635 - 중국 서안부(북경)에서 '대진경교유행중국비' 같을 수도 이 비문에는 중국어와 시리아어로 736자(중국어, 시리아)로 기록되었음.
* 1917년에 대진 경교 유행 중국비의 모조품이 금강산의 절에서 발견됨.
* 1956년 불국사 경내에서 돌 십자가가 발견됨
* 1988년 경북 경산 지인면 일원리에서 어린양 안고 있는 것과 기도하는 석상이 발견됨.
* 마테오리치가 1595년에 어떤 서적을 대하게됨. 거기서 당나라에 경교 가 번창함을 알게됨.
* 이런 여러 가지 종합결과 당대 어떤 영향을 받았음이 틀림없음.
2) 몽고를 통해 접촉
징기스칸이 몽고를 세우고 지중해 근처 모슬렘 격퇴 할 때 기독교 국가들은 당시 큰 골치 거리였던 모슬렘을 대신 물리쳐 줘서 고맙게 생각함.
몽고는 세계 제국을 제패하는데 모슬렘이 큰 장벽이라는 것을 깨달음.
* 당시 징기스칸은 야만인 - 그래서 서부 교회의 Innocent 4세는 1차로 선교사(카로핀)을 1246년에 보냄.
* Rubruc은 1253년 콘스탄티 노플을 떠나 몽고 수도 화림에 와서 사둔탁(징기스칸의 아들)을 만남. 사둔탁이 기독교인인줄 알았으나 아니였다.
* 루부룩은 징기스칸에게 개종을 권유하나 거절 당함.
당시 몽고는 우리나라 통해 일본까지 침략할 야욕.
* 루부룩이 최초로 한국(Caulei)을 서방에 서신으로 알림. Coree - Korea
3) 일본을 통해 접촉
* 1517년 마틴 루터가 종교 개혁이 일어나서 루터교가 확장.
* Ignatiu Loyola / Francis Xavier
예수회 :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라.
Francis Xavier 를 동방의 선교사로 파송함.
그는 인도의 고아 - 필리핀(80%이상이 카톨릭) - 일본으로가 구주에 상륙 1549년에 활공총이 복음과 함께 들어감.(1592년 임진란에 있어 타격적 무기)
* 그러나 일본을 통해 기독교 접촉.
오다노 부나가(일본 지도자) - 종교 관용책.
관용 이유 : 당시 불교가 강했기 때문에 한 종교가 커지면 강대해지므로 한쪽 약화를 위해 신학교 부지까지 마련해 줌.
(17세기 당시 일본에 30만의 신자가 있었다고 함.)
* 도요또미 히데요시 : 오사까 (한국인이 제일 많은 곳)에서 예수회 신부들 을 모아 놓고 중국을 침공한 후 예수 믿겠다고 말함.
* 1592년 임진년에 전쟁 일으켜 우리 나라 쳐들어옴. (20-25만의 군인을 이끌고 쳐들어옴. 명나라 가는 길을 확보하려는 명목으로.)
* 이때 일본의 1군단장(고니까 유찌나가)- 세례명 어거스틴,이 선두로 쳐들어왔는데 그가 이끄는 많은 군인이 기독교인이었다.
이들이 20일 만에 서울에 다다르고 이들이 평양성까지 진격했다.
그러나 명나라 군대가 내려와서 경남 웅천으로 일본군은 퇴각을 해야했다.
* 고니찌 유찌나가는 군인중 기독교인이 많으므로 교구장 피터 고메쯔에게 종군 신부를 보내 달라 부탁하니 세스 페데스 신부를 보내줌.
그는 우리 나라에 오자 고메쯔에게 2편의 편지를 보냈다.
내용 : 1. 웅천에 도착한 일과 여정내역 2. 고니찌 유찌나가가 반갑게 맞 아주었 다는 내용과 일본 군인이 힘들게 있다는 말을 전함.
* 세스 페데스는 6개월 수 일본으로 돌아옴.
* 도꾸가와 이에야그(새통치자 출현함) - 기도교 엄청 박해 이때 많은 순교자를 발생. 일본 신자와 조선인으로 끌려가 믿은자도 순교함.
* 이 임진란 때문에 우리 나라는 쇄국 정책을 고수함.(특히 일본에 대해)
결론 : 당나라, 몽고, 일본을 통해 우리 나라는 일찍 간접적으로 기독교 접촉.
제2장 한국에 있어 카톨릭
북경 북천주당 : 중국 북경에 있는 북천주당은 조선사신들의 북경 방문 시 꼭 들려 보는 구경거리의 하나였다. 바로 이곳을 통해 많은 한역 서학 서들이 조 선에 전달되었고 그 속에는 천주교에 관한 서적. 문물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곤여전도(坤與全圖) :예수회 신부 베르비스트 (F.Verbiest)가 제작 (1674년) 한 지도로 1722년에 국내에 유입되어 1860년 국내에서 중간되었다. 8퍽 병풍. 한국기독교박물관 4-5*173.3cm.
천진암터 : 한국 천주교의 발상지로 초기 서학(천주교)의 신앙회의 주역이었던 이벽, 이승훈, 권철신, 귄일신, 정약종의묘가 조성되어있다. 경기도 광주군 퇴촌면 우촌리 소재.
1) 선교사 들어오기 전에 나가서 만나서 받아들임.
* 병자호란과 소현세자 1636년에 국호를 청이라 한 만주의 여진족은 자기들의 요구를 안들어 준다고 10 만을 이끌고 임진란 40여년 만에 한국을 침공. 이때(인조14년)에 우리나라 조종 은 필사의 노력으로 대항했지만 결국 남한산성에 옮겨가서 투항했다가 1637 년 정월에 남한산성에서 내려와서 삼정도에서 청 태종에게 3번 절하고 항복. 이때 인조의 소현세자와 대신들이 청나라의 심양으로 끌려감.
* 1644년에 끌려간지 7년만에 청이 명을 정복하고 수도를 심양에서 명나라의 북경으로 천도 (소현세자등도 같이 감)
* 그때에 베이징에 아담 샬(주교)이 묵고 있었는데 소현세자가 만나 친분 나눔.(2달 동안) - 소현세자가 기독교 저술을 읽을 기회가 있었음.
* 아담 샬은 청나라 왕의 신임을 얻어 통감목사(벼슬)라는 위치에까지 감. 당시 예수회의 선교 정책은 어느 나라에서 선교하든지 왕실과 고위층에 먼저 접촉하는 의도가 있었음.
* 소현세자가 귀국하게 됨. - 이때 서양문물, 기독교 서적을 아담 샬이 줌. 그것을 가지고 온 소현세자는 곧 죽게됨.
* 당시 척불 숭유로 인해 임진, 병자호란으로 당하자 조종에서는 이때부터 조선 경제의 개조책 이라는 책도 만들고 새로운 학문들이 일어남.
2) 학자들의 교리연구
중국을 섬기던 조선에서는 사절단을 보내는 데 정초에 성절사, 원단사, 동지사, 천추사등을 북경에 파송했다.(사절단은 한 행차에 300- 500명 정도가 50일에 걸려 가서 50일 정도 머물고 돌아왔고 진상 갈 때에는 비단, 금, 은, 보석, 호피, 좋 은약 등을 가지고 갔다.)
* 1601년에 마태오리치가 설립한 성당이 있는데 그것이 남당이다.
아담 샬이 살던 곳에 설립한 성당이 있는데 그것이 동당이다.
* 1603년 마태오리치가 쓴 '천주실의' 란 책을 그때 진상 갔던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져옴.
* 조선조 시대에 주자학이 당쟁에 질리고 허례허식 하던 때에 나라 기강이 안 잡혀서 이때에 학자들이 '천주실의'를 가져오자 연구했다.
* 조선조 이수광이라는 사람이 '지봉유설'을 썼다.
지봉유설 - 천주교에 대해 설명함. 윤회를 부정하고 착한 일에 보상이 있고 악 하자는 지옥에 간다는 이야기와 교황은 임기가 끝나면 좋은 사람을 투표로 뽑고 이웃을 제2의 '나' 라고 하는 이야기를 설명하였다. 이수광은 마태오리치와 동 시대의 사람이다. 임진란 전후로 3차례의 명에 사신으로 갔다. 그때 과학책, 천 주교책을 가져옴.
* 당시 천주교를 서학이라 했다.(사람들이 서학에 관심을 많이 가짐)
* 유인용 - '어우야담' 제 1권에서 마태오리치의 천주실의를 언급함.
허균이 천주교를 믿는 것을 말하고 그 교가 동남의 오랑케에게 퍼져 믿는 자가 많은데 우리만 모르고 있다고 밝힘.
* 허균은 만주국에서 언젠가 쳐들어올지 모른다는 말을 했는데 그것 때문에 처형당했다 (그는 천주교인)
* 상제 상서를 정하상이 책을 바침.
우리 나라 카톨릭에 대한 최초의 변증서 = 상제 상서
내용 : 3400자로 되 있는데 천주교를 변증하는 부분과 잘못된 오해 부분을 설명하고 마지막에는 우리도 임금의 자녀라고 긍휼을 구함.
* 당시 척불숭유 였는데 정하상은 이 책에서 불교를 공격했다. (즉 기독교가 불교와 다르다는 것을 말했다.- 강조)
3) 이승훈의 入信
한국 천주교의 발생지 : 경기도 광주, 양근(양평)
이벽, 이승훈, 권..가 여기서 모여 교리를 연구하였다.
이벽의 누이 : 양근 고을의 정약전과 결혼하였다.
* 이벽이라는 사람은 성격이 열화 같은 사람이다.
1777년 에 서학에 관심을 가진 학자들이 한강 터의 외진 곳 주어사라는 곳에서 교리 연구를 한다는 소리를 듣고 100리를 걸어 왔다고 함.
* 走魚寺에서 천주교 교리를 연구했는데 천주교 교리 서적이 너무 빈약해 중국에 가서 도움 요청을 하자고 결정함.
* 이승훈은 아버지가 그 당시 북경에 갈 일이 있어 같이 따라감. (이벽은 이때 이승훈에게 가서 이번에 갈 때 천주교 교리서 많이 가져오라고 부탁함.)
* 이승훈은 북경에 가자마자 북경의 천주 당에 갔다.
그래서 돌아 올 때는 많은 천주교 서적들을 가지고 옴.
* 이승훈은 강원도 평창 사람으로 25세에 진사 급제하고 1789년에 평택 현감이었다.
* 이승훈은 북경의 남당에 찾아갔다.
(여기서 교리를 배우고 1784년에 예수회 신부였던 루이스 글라몽에게 영세를 받는다.) 그래서 이승훈에게 영세명을 주었는데 '베드로'란 이름을 주었다.
* 이승훈이 영세 받고 돌아 올 때 성화, 묵주, 책 가지고 돌아옴.
* 이승훈의 전교 : 이승훈이 돌아온 5년만에 신도 4000명이 불어나고 이들은 1785년 봄 서울 진 고개에 중인(당시 천민, 중인, 양반) 김범우 라는 사람이 자기 집에서 교리 연구를 학자들과 하고 있었다. 여기서 중국 신부에게 안수 받을 신부를 요청함.
* 조선 정부 형조 판서는 진 고개의 예배당을 급습하여 양반은 훈방하고 김범우 는 충청도를 유배하여 그곳에서 타계함. - 최초의 순교자(김범우의 집에 지금 의 명동성당이 서있음)
4) 주문모 신부의 입국과 전교
* 1785년 김범우 집 급습으로 많은 사람이 배교하기 시작함. 이때 이승훈, 이벽도 배교 함.
* 시간이 지나 핍박이 줄어들자 다시 돌아옴. 그리고 성직자의 필요성을 느낌. 그래서 북경의 주교에게 요청.
* 주베아 주교는 중국사람 주문모 신부를 조선에 파견. 주 신부는 윤유일, 지향 의 인도로 밀입국함.(엽부로 가장)
* 1795년 1월 한성에 잠입해 들어옴. 한성에서 조선말을 배우고 부활절 전날 밤에 몇 사람에게 영세 줌.
* 한영익이라는 개심을 가장한 자가 주 신부를 관가에 고발함. 그래서 조선 조정이 주신부의 체포령 내림.
* 믿음 좋은 신자 하나가 주신부를 가장해 자수함.(최이길 이라는 사람인데 턱수염이 없어 들켜서 처형당함.)
* 주 신부는 가장을 하는데 상복도 입기도 하고 남의집 헛간에서 있기도 하는 데 그러는 동안 신도는4천에서 1만으로 늘어남.
* 또 배교가 있자 주 신부는 국외 탈출하려다 그냥 스스로 자수함. 1801년에 마침내 새남터에서 참수형 당함.
제3장 수난 당하는 카톨릭
명동성당 : 한국 천주교 최초의 순교자 김범우의 집이 있던 명례방 자리에 1887년부터 10여년에 걸친 공사 끝에 완성되었다.
1) 수난을 불러온 요소
a. 조상제사의 문제
유교 사상의 뿌리가 되는 사상은 효이다(효는 백행지본이다.)
그러므로 불효는 일천가지 중에 가장 큰 죄이다.
그리고 효 중에 큰 부분이 제사이다.
중국의 마테오리치가 중국에서 선교 할 때 조상제사는 정치적 의식이요 기독교는 유교의 발전이라고 했다.(배타 방지위해) 그러다 보니 종교가 혼합적이다.
후에 선교사 도미니크 일행이 잘못된 이런 것을 보고하자 교황 이노센 트 10세가 제사금지를 내림.
* 조상제사 때문에 첫 희생자는 윤시충 이다.
윤시충은 전라도 사람으로 25세에 진사급제하고 서울에 올라와 김범우 집의 교리 연구에서 감화 받고 3년후 입교함.
그리고 모친이 별세 했을때 상복 입고 호곡하고 위폐를 모시지 않고 제사도 드리지 않았다.
- 이사실이 관가에 알려지자 윤시충과 외종형 권상연은 같이 처형당함.-
* 그당시 천주교 믿는 자는 패륜 외도라 하여 박해했다.
b. 붕당적 요소(당시의 당파 싸움으로 인한 박해)
영조 때부터 천주교가 들어 왔는데 해서, 관동 지방에 널리 퍼져 있었다. 그때 는 사색 당쟁이 극심하던 때이다.
영조왕은 당쟁 화를 절감해서 당쟁을 줄이려고 힘을 썼고 정조 대왕도 성품이 어질어서 당쟁을 줄이려고 힘을 썼다.
* 사도 세자문제 발생시
시파(세자 동정하는 파) - 남인이라는 천주교도가 많이 가입해 있었다.
숙종 때 남인 세력이 약화됨. 남인에 속해 있으면 등용길이 막혔다.
* 이런 남인에게 우호적인 재상인 채재공이 있었는데 1799년 사망했다.
정조대왕이 또 사망하자 천주교 박해가 터졌다.
* 정조 아들 순조(11세)가 왕에 오르자 정순왕후(정조의 첩)가 순조 뒤에서 정치를 함. 이때 천주교에 대한 무서운 박해가 시작됨.
* 채재공이 죽자 죽은 후 관직까지 박탈함.(1801년)
* 1801년 이때는 서학을 박해하는 교서를 발표함.(서학은 인륜에 반역하고, 교황 은 장가도 들지 않고 아들도 안 낳고 밑의 똑똑한 자를 뽑아 자기의 위치를 넘겨 준다고 하는데 이것은 조선의 세습 윤리와 안 맞아 박해해야 한다고 함.)
c. 황사영의 백서가 문제됨
한국 카톨릭의 4대 박해가 있었는데
1. 신유박해(1801년) :
황사영(경상도 창원사람)은 정약전의 형 정약용이다.
* 주신부에게 영세 받음. 17세에 진사 급제를 함.
박해가 시작되자 충북 제천으로 피신해 있다가 그를 찾아온 황심을 만남.
(천주교 구하기 위해 북경의 주교에게 편지 보내자고 약속. 그 편지는 길이 62 센티 폭 38센티의 비단에다 작은 글씨로 13,000자의 글로 보냈는데 내용은 박 해와 참상을 보고하는 것인데 그만 도중 들켜서 조선 조정에 밝혀짐)
* 이 백서가 들켜 카톨릭은 매국종교로 지탄 받게됨.
백서 내용 : 1). 조선 천주교의 실상을 기록하고, 그래서 많은 순교자가 생겼다는 내용.
2). 당시 정계의 사색 당쟁의 실상을 기술. 박해의 이유는 당쟁 때문이 라고 말하고 이것 때문에 경제적으로 교인이 열악하다고 기술.
3). 중국의 신도 1명을 택해 북경 지대에 점포를 개설해서 청국과 조선 사이에 통신 연락을 하게하고, 북경의 청국 황제를 움직여서 조선왕으로 하여금 서교를 받아들이게 하도록 압력 부탁, 또 중국의 공주를 조선조 왕자에 게 정략 결혼시켜 조선을 굴복시키고 서학을 받아들이도록 부탁, 또 군함과 군수 물자를 싣고 와서 이 나라를 치라고 부탁. 나라는 망해도 천주교는 전파 되야 한다고 함.
* 황사영은 1801년 27세의 나이로 모반죄에 의해 참수되고 이 사건으로 300명 이 순교하였다. 이것을 신유박해라고 한다.
* 신유박해 이후 서학의 창대를 염려하여 쇄국 정책을 조선에서는 실시. 북경 외의 모든 문을 닫아 버림.
* 헌조의 명을 따라 발표된 책들이 : 척사윤음이 나왔고 대외쇄국강저, 안정복 (천학고),
천학문답, 김치진(척사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