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6-07-31 22:10
[1]한국 기독교 교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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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웹섬김이
조회 : 4,606  

한국교회사   


제1편 로마 가톨릭 교회의 한국 선교

경교: 

431년 에베소 네스토리우스가 마리아를 '그리스도의 어머니'라 하여 이단으로 정죄  선교사를 양성, 인도, 아라비아, 중국, 타타리까지 전도

대진경교유행중국비 : 주후 635년 알로펜 일행이 당에 도착, 선교. 
9세기 중엽 도교신자인 무종의 종교탄압으로 자연히 소멸
루부룩 : 로마교황청에 보낸 편지에서 한국을 '까울레(Caule;고려)라고 기록.
로마 가톨릭의 중국선교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코르비노 신부가 도착한 1294년 이후
1305년 황제의 후원으로 선교가 크게 성공하여 수세자가 6천명(1307년 중국교구가 창설)
원나라가 1368년에 멸망함으로 소멸.

세스페데스 : 예수회의 선교사가 일본에 도착(1541년 프란시스 사비에르)
임진왜란 당시 소서행장이 독실한 가톨릭 신자/세스페데스를 종군신부로 한국에 옴.
노예로 끌려간 한국인들에게 선교하여 2천여명의 기독교 신자들을 배출,순교자들도 21명
소현세자 : 청에 볼모로 잡혀간 소현세자는 예수회 신부 아담샬과 친분을 맺다가 귀환시 서적, 교리서를 가지고 신앙이 돈독한 환관, 궁녀와 함께 귀국, 70일만에 세상을 떠남.
유학자들의 서학 접촉 : 이수광은 <지봉유설>에서 천주실의를 소개하
천주교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남인 계열의 지식인들로 권철신, 권일신, 정약용, 정약전, 이가환, 이벽, 이승훈 등이다. 이들은 강학회를 열어 교리를 연구하고 계율을 지켰다.
이승훈 : 정약용의 매제인 이승훈은 동지사이행에 딸려 중국에 가서 천주교 신부들과 교제하며 교리강습을 받고 영세를 받은 후 1784년에 돌아왔다. 이는 한국에 기독교가 시작된 분기점이라 할 수 있다. 개신교는 이로부터 100년 후인 알렌의 입국으로 시작되었다.
을사추조적발사건 : 1785년(정조9년) 서울 명동의 김범우 집에서 모였다가 형리에게 발견되어 김범우는 유배당했다. 그는 유배중 고문의 휴유증으로 그 곳에서 순교하였다.
배교자들 : 사학에 대한 탄핵의 소리에 유생들의 규탄의 소리가 높아가는 가운데 이승훈은 1791년 배교하였고 1801년 신유교난시 배교한 상태에서 목숨을 잃었으나 순교자는 아니었다. 정약용도 1797년 배교했고 이벽도 배교후 33세로 급사했다.

신해교난 : 

무군무부의 종교로 오인된 것은 진산사건이다. 윤지충은 1791년 모친의 사망에 사복을 입고 호곡은 하였지만 시신에 절하거나 위폐를 모시지 않았고 후에 제사도 지내지 않았다. 공서파는 천주교에 동정적이었던 채제공의 세력을 꺽을 목적으로 윤지충과 권상연의 제사 폐지문제를 트집잡아 결국 1791년 11월,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다. 

제사문제 :

예수회 마테오 리치는 제사를 단순한 정치적 의식으로 간주하여 제재를 가하지 않았고 기독교도 유교의 발전된 형태라고 선전하여 유교의 상제가 기독교의 하나님과 같다는 보유론(補儒論)입장에서 선교하였다. 그러나 프란시스코 선교사들의 보고에 의해 교황청은 조상 제사의 금지를 명했고 한국 천주교회는 1790년 윤유일이 신부파송을 청원하기 위해 북경에 돌아오면서 비롯되었다. 
신유교난 : 1795년 초에 중국인 신부 주문모가 서울에 잠입했다. 정조는 천주교에 호의적인 시파를 등용하였으나 순조의 섭정이 된 정순황후는 서교를 박멸하려 함으로 많은 천주교도들이 처형되기에 이르렀다. 권철신, 정약종, 최필공, 홍교만, 홍낙민이 순교했고 정약전, 정약용이 배교하였다. 주문모는 6년간 숨어 포교활동을 하다가 중국으로 되돌아가다가 자수하여 1801년 32세의 나이로 효수되었다.
황사영의 백서사건 : 천주교를 사학이요 무군무부의 종교로 확인해 준 사건
신유박해로 배론에 숨어있던 황사영과 황심이 조선 조정의 천주교에 대한 극심한 핍박을 북경의 주교에게 보고하여 이 박해를 면해 보고자 하는 심정에서 쓰여짐. 선교는 물리적인 힘을 동원한 제국주의적인 선교방법이 아닌 오직 복음적 방법이어야 함을 가르쳐 준 사건. 
조선교구의 설정: 1790년 조선의 천주교회가 알려졌고 1816년 정하상에 의해 추진되어 1827년에 교황 레오12세에게 편지가 전달되었고 1831년 9월 조선의 천주교회는 중국으로부터 완전히 독립하여 독자적인 교구로 확정되었다. 1836년 최초의 서양인 신부 모방이 입국
기해교난(1839): 친 천주교 세력이던 시파의 김조순이 죽고 풍양 조씨는 천주교의 박멸을 요구하여 1839년에 사학토치령이 반포되었고 오가작통법이 시행되었다. 특히 김순성 이라는 배교자의 밀교로 정하상, 유진길, 조신철, 앙베르 주교까지 체포되었다. 이때 순교자가 54명, 옥사한 이들이 60여명, 배교한 자들이 50여명 된다.
정하상의 상재상서(최초의 호교문): 정하상이 우의정 이지연에게 천주교의 원리를 설명하며 올바른 이해를 구하는 한국인이 쓴 최초의 호교문이다.
병오교난(1846;김대건 신부의 순교) : 한국인 최초의 신부인 김대건은 1845년 신부서품을 받고 입국하다가 체포되어 참수형 당했다.

병인교난: 철종때 천주교는 발전하여 1857년에 신도수가 1만3천에 이르렀고 서양선교사도 12명이나 되었다. 철종 승하후 대원군이 섭정하였는데 대원군은 자신의 입지를 강화할 목적으로 천주교 탄압(1866년부터 1873년)에 나섰다. 1866년, 프랑스의 신부 9명이 체포되어 참수형을 당했고 이에 프랑스의 로즈함대가 침입하는 병인양요를 일으켰다. 1868년에 순교자수는 이천명을 넘었고 굶주림을 죽은 사람도 팔천명에 이르렀다.

남연군 도굴사건(1868) : 대원군 부친의 유골을 담보로 대원군과 협상하려고 오페르트는 묘를 도굴하였고 1871년 6월에는 미국의 제너럴셔먼호가 불탄 책임을 묻고자 로저스가 침입한 신미양요가 일어나 척화비가 세워지고 더욱 쇄국정책을 썼다.

제2편 선교사 이전의 개신교와의 접촉

칼 귀츨라프의 선교여행:

한국에 첫발을 디딘 성직자(1832년) 성경,의약품,주기도문 번역
알렉산더 윌리엄슨: 중국에서 한국의 천주교 신자들로부터 한국의 천주교 박해상황을 접한 그는 토마스 목사를 도와 1865년에 한문성경을 가지고 셔먼호를 타게 했으나 화재로 한국에서 순교한 최초의 개신교 성직자가 되었다.  
만주에서 입교한 의주 청년들: 고려문에서 백홍준, 이성하, 김진기와 교제하였고 3년후 매캔타이어 선교사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로스는 의주청년들과 성경변역을 시작하여 1882년 봄에 <예수셩교 누가복음젼셔>를 시작으로 1887년 신약 전체 번역이 완료되었다. 
권서, 매서인의 활동: 서상륜은 최초의 권서로 임명되어 전도함으로 최초의 예배를 드렸다. 1884년 로스는 6천권의 복음서를 무사히 반입하여 반포함으로서 많은 신자들이 생겨났다. 
이수정과 성경번역: 신사유람단 일행인 안종수의 친구인 이수정은 진전선박사를 통해 복음을 듣고 세례를 박았다. 이수정은 전도하여 유학생들의 성경공부반을 형성하기도 했고 미국선교부에 선교사를 파송해 줄 것을 호소하였다. 이수정은 한문성경에 토를 달아 읽기와 이해를 쉽게 했고 1884년<신약성서 마가전>을 시작으로 한글성경을 번역하였다.

제3편 선교사들의 내한

가우처:미국의 사절단을 만난후 일본에 있는 매클레이 선교사에게 편지하여 한국을 조사한 후 선교할 것을 요청하였다. 매클레이의 방문후 스크랜톤, 메리 스크랜톤, 아펜젤러가 한국 선교사로 임명을 받았다.
알렌의 입국(1884년 9월): 이승훈 세례후 100년이 지나 중국선교사로 있던 알렌이 제물포에 도착했다. 공사관의사로 있다가 갑신정변을 통해 민영익을 응급조치하여 살림으로 서양의 뛰어난 의술을 알리게 되었고 알렌은 고종의 시의로 임명되었다. 이는 개신교 선교 사역에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이득'이 되었다. 1885년 알렌은 광혜원 개설(세브란스의 전신)

제4편 선교사들의 선교활동 
          
의료선교

: 알렌에 의해 제중원이, 스크랜톤에 의해 시병원이, 여간호사 엘러즈는 신분의 차별없이 모든 부녀들을 맡아 보았으며 홀튼, 하워드에 의해 보구여관이 세워졌다. 성공회에 의해 낙동병원이 세워졌고 1908년에는 7명의 의사를 배출하게 되었다. 시간이 가면서 의료사역은 평양, 선천, 재령, 대구 등 각지로 확대되어 의료선교는 환자를 치료할 뿐만 아니라 위생교육과 예방접종에도 치중하여 사망률을 급격히 감소시켰다.
교육사업: 의료사역보다 포괄적이고 직접 전도의 계기가 된 교육사업은 영어학교, 육영공원, 언더우드학당, 숭실대학등이 세워졌고 여성교육을 위해 메리스크랜톤이 이화학당을 세웠다. 아펜젤러는 배재학당을 세워 1894년에 학생수가 104명에 이르렀다. 스크랜톤의 말대로"병원은 쟁기로 땅을 갈고, 교육은 씨를 뿌리기 위해 써레로 땅을 고르는 작업을 했다."고 할 정도로 한국 초기의 의료와 교육사업은 적절했다 할 수 있다.  

최초의 수세자 노춘경 :

노춘경은 기독교를 배척하는 문서를 통해 지식을 얻은 후 알렌의 집에서 몰래 가져 온 마가복음, 누가복음을 읽는 중 기독교를 접하였으며 1886년 언더우드에게 생명을 걸고 세례를 받았다.

최초의 교회(새문안교회) :

언더우드는 정동에 있는 자기 집에서 1887년 9월 14명의 교인을 데리고 두 명의 장로를 세운 뒤 교회를 조직했다.
성경번역사업 : 선교사들이 오기 전에 성경이 이미 번역되어 있었으나 오류와 문제점이 있으므로 언더우드를 중심으로 1887년에 <성서번역위원회>가 구성되었다. 철저한 심의과정을 두어 선교사들이 조사와 번역을 하고 다른 번역자들이 수정하고 의견을 개진한 후, 위원회에서 토의를 하고, 의견이 이치하지 않을 경우에는 표결을 하여 확정지었다. 1900년에 신약, 1910년에 구약이 완역되었고 1937년에 다시 전면적으로 개정되었다.
사경회 : 1890년 언더우드 집에서 성경공부반이 시작되었는데 네비우스 선교정책의 일환이다. 지교회 지도자들을 일년에 두차례씩 모아 6주에서 한달동안 집중적으로 가르쳤다. 1893년부터는 모든 교회가 사경회 모임을 갖기 시작하였다. 

주일학교 : 

1905년 복음주의선교협의회에서 공과책을 제작하였고 1907년 소아회를 조직하고 아이들만 따로 모아 성경을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1913년 4월에는 창경궁에서 모인 야외집회에 14,700명이 모였다. 1932년에는 주일학교가 1071개, 교사가 4천, 그리고 7만명의 학생들이 공부하였다.
선교부들의 내한 : 호주 빅토리아장로교회는 1889년에 데이비스와 메리를 파송했는데 데이비스는 한국에서 순교한 첫 희생자가 되었다. 성공회는 1889년 찰스 코르프를 첫 주교로 임명하였다. 미국남장로교회 선교는 언더우드의 절대적인 공헌에 기인했다. 미국 남감리교회는 윤치호의 요청이 커서 리이드박사를 기점으로 시작되었다. 캐나다장로교회는 1893년 솔내에서 한국인과 동거동락하며 살다 순교한 매캔지의 솔내교회의 요청으로 계속되었다. 일링 딩 선교단에 의해 침례교회가 시작되었고 러시아 정교회는 1885년 한러수호통상조약을 맺으므로 선교가 시작되었고 아관파천으로 1903년 축성식을 가졌다. 

제5편 선교부의 선교정책과 한국교회의 성장

네비우스 선교정책 :

선교방법론에 탁월한 네비우스 선교사에 의해 세워진 원칙으로 선교사는 폭넓은 순회선교를 통해 전도하며, 성경이 모든 사역의 중심이 되어야 하며, 모든 예배단은 신자들 자신들의 힘으로 건축되어야 한다. 모든 신자들은 조직적인 성경공부를 해야 하며, 엄중한 훈련과 치리를 해야 한다. 적어도 지역을 분할하여 일한다. 보통 3자정책으로 부르는데 자치(自治), 자립(自立), 자전(自傳)이다. 선교지 분할 정책은 예양협정으로 북장로교회는 평안도, 황해도, 경기도, 경북을, 남장로교회는 전라도, 충청도를, 캐나다장로교회는 함경도지역을 담당하여 선교하기로 합의하였다.
  초기 한국 교회 급성장의 원인 : 한국에는 강력한 국교가 없었고, 기독교가 들어올 당시 국내외적으로 무척 어려운 처지에 있었다. 국왕이 공개적으로 기독교에 대해 호의를 보였으며 서구와 서구의 종교에 반감이 없었다는 점이다. 한국인의 전도열이 뜨거웠고 자국어로 된 성경을 일찍 확보하였다. 한국이 문자와 언어의 통일이 되어 있었고 교인들의 기도운동이 뜨거웠으며 한국교회는 사회개혁과 애국애족의 교회로 정착했다는 점이다

초기 선교사 순교자들 : 

데이비스, 헤론, 윌리엄 메켄지, 기포드, 조지 렉, 헨리 아펜젤러, 월터 존슨, 안나 밀러 부인, 번턴 부인, 윌리엄 헌트 부인, 피터스 부인, 사무엘 무어, 전킨, 게일목사 부인등/ 어린 생명들이 의료시설이나 의사 부족으로 이국 땅에서 죽어갔다.

제6편 초기 기독교의 형성과 수난 
  
서민들의 입교 : 

조선의 40년간의 기독교의 통계표는 다른나라의 1백년의 선교보다 더 나은 성적을 보고한다. 천주교는 위로부터 아래로의 전도인 반면, 개신교는 아래에서 위로의 형식을 취했다. 특히 학교와 병원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훨씬 더 중요한 기관이었고 교회는 차별없이 모든 사람들을 돌보아 주고 가르침으로써 대중들의 인기를 끌었다. 서민들의 기독교 입문은 이기적 내지 감정적인 부분이 많았을 것이며 국가가 이제에 넘어가는 불안한 상황에서 생명과 재산의 안전과 안정을 구한 것으로도 보인다.
지식층의 입교 : 그 동기는 초기에 유학자들이 학문에 대한 호기심과 연구심에 접함으로 기독교신앙을 받아들였고 기독교를 통해 국가의 자주독립을 쟁취해 보고자 하였다. 기독교를 통하여 이 땅의 민도를 높이고 부국강병을 모색하고자 하였다. 그러므로 철저한 회개보다 국가의 안위와 독립을 위한 방편으로 예수를 믿고 교회를 이용하였다고 할 수 있다.
초기 기독교의 수난 : 가족 중 신앙을 받아들인 경우, 이름을 호적에서 삭제하였고 쫓아냈다. 1888년에 '어린이소동'이 있었고 1894년 평양감사 민병석이 신자를 체포 구타한는 사건이 있었다. 1899년 경무사 김경준이 1900년 12월1일을 기해 국내에서  활동하는 선교사드과 기독교인을 박멸하려고 했으나 불발에 그쳤다. 천주교에 의한 박해도 있었으나 분별력 없는 사람들에 의해 일어난 일이었다.

제7편 1907년 대부흥운동과 교회연합운동

대부흥운동(1907) : 1903년 감리교선교사들이 원산의 바닷가에서 기도회를 갖었고 강원도에서 선교에 실패한 하디의 통회자복이 불씨가 되었다. 그때에 성령의 충만한 은사를 체험함을 목도하며 부흥의 불길이 시작되었다.  1906년 평양의 선교사들은 하디를 초청하여 일주간 기도회를 갖었고 이때 뉴욕의 존슨목사가 방문하여 인도와 웨일즈의 부흥을 전해 주었는데 장로인 길선주가 일어났다. 1907년 장대현에서 열린 사경회에 성령의 불길이 떨어졌다. 1907부흥운동의 직접적원인은 선교사들의 자성하는 성경공부와 길선주 장로의 새벽기도회에서 비롯되었다. 
길선주 목사 : 조선 기독교의 아버지. 관성교 등 종교편력이 다양했지만 아무것도 그의 영적 만족을 주지 못했다가 존 버니언의 <천로역정>을 본 후 김종섭의 권유로 예수를 믿게 되었다. 1907년 장로회신학교를 1회로 졸업하여 20년간 목회였고 1935년 11월 사경회를 인도하던 중 강대상에서 졸도한 뒤 하늘나라로 갔다.

대부흥운동 결과 : 

기독교진리가 한국 기독교인들 마음에 뿌리를 내리는 계기를 마련해 주어 축첩, 노비소유 등의 죄악을 고백하고 참회하였다. 신자들의 전도에 힘입은 교회의 부흥이어서 1906년 54,987명에서 1907년 73,844명으로 34% 증가했다. 토착적이고 독특한 한국교회의 특징이 확립되어 새벽기도회, 통성기도, 철야기도가 시작되었다. 에큐메니컬정신이 구현되어 한국교회 지도자들과 선교사들간에 갈등이 해소되고 형제의식이 굳어졌다. 
    
  백만명 구령운동 : 

1909년 감리교 선교사 스톡스, 갬불, 리드 등 3인이 사경회와 기도회를 갖은데서 비롯되었다. 이 운동 기간에 가난한 교인들은 물질로 헌금할 수 없었기에 시간을 바치는 '날연보'를 하였다. 
교회 일치를 위한 노력 : 한국에서 하나의 복음주의 교회를 세우고자 했으나 선교사들을 파송한 본국 교회의 비협조적 태도로 실패했다. 또한 한국 교회 지도자들의 연합에 대한 열의 부족이라고 했다. 1905년 개신교 복음주의선교 협의회가 구성되어 연합학교, 신문위 연합 발행, 선교지 분할 문제가  이루어졌다. 
예양협정 : 장로교와 감리교는 지역분할을 한 후 그 지역내의 교인들을 바꾸기 시작했다. 선교지 분할과 교인들의 교환은 한국교회사의 가장 빛나는 에큐메니컬 정신의발현이었다. 
성서공회 : 1889년 문서선교를 위해 '죠선성교서회'가 조직되어 연합찬송가 발행, 연합교회신문, 주일학교 공과 등을 한국어로 출판하였고 1910년에 신약성경이 완역, 구약도 1911년에 완성, 출판되었다. 

제8편 교회의 애국과 사회개혁활동  

을미사변(1895)과 선교사들 : 청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나자 일본은 한국의 국모인 명성황후를 살해하는 을미사변을 일으켰다. 이때 선교사들은 국왕을 위한 헌신적인 노력을 하여 국왕, 대신들, 백성들에게 기독교를 애국충군의 종교로 이해하도록 인식되게 되었다.  
춘생문 사건 : 을미사변후 연금된 고종을 춘생문울 통해 고종을 출궐하려던 사건인데 변절자의 신고로 실패했다. 우연챦게 선교사들이 연루되었지만 국민들의 눈에는 국왕을 위한 헌신적인 노력으로 비쳤음에 틀림없다. 을미사변이 나고 4개월 후 고종은 러시아 대사관으로 피신하는 아관파천을 하였고 고종은 1년후 경운궁으로 환궁하였다.

고종의 탄신 기념행사 :

1896년 9월 2일 국왕 탄신일에 기념예배를 드리고 그의 만수무강을 빌었다. 그럼으로 이런 기회를 통해 전도할 수 있게 되었다. 이를 통해 황해도 은율교회가 생기게 되었다. 
교회의 사회개혁활동 : 복음 선포는 개인구원 뿐만 아니라 민족의 사회적 구원의 틀이 되다. 그 중 가장 중요한 일은 의료와 교육이다. YMCA는 1903년 10월 게일이 첫 회장으로, 윤치호가 부회장으로 선출되었다. 기술교육, 체육교육, 운동 소개, 국민보건과 경기력 향상에 공헌하였고 사회계몽운동을 펼쳤다. YWCA는 3.1운동이후 여자전문학교와 중학교에서 비롯되었다. 종교적, 교육적인 출판물의 간행이었고 음주의 해독에 관한 교육 및 금주운동, 공창반대운동을 했다. 엡윗청년회는 1897년 복음선교와 사회봉사의 목적에서 조직되었는데 1905년 애국운동에 나서자 정치참여라는 이유로 1906년 해산되었다가 1920년에 재결성되었다. 

신분제도 타파 : 
사농공상의 신분계급을 타파를 위해 기독교가 공헌했는데 1894년 갑오경장 때 23개 조항 개혁안을 발표했는데 실질적인 면에서는 교회가 앞장서서 이들에 대한 전도를 강화했다. 
한글전용 : 1893년 선교원칙을 보면, 가능한 한 성경을 빨리 번역한다는 것과 모든 문서는 순수한 한글을 사용한다는 것이다. 성경을 읽기전까지는(서른살까지) 세례를 받지 못했고 교회는 민족교화의 차원에서 한글교육에 열성을 다하였다. 언더우드는 한어사전(1890)을 간행했고 한글 통일 철자법을 위해서도 노력했다.

결핵/ 나병 퇴치 :

한국은 결핵의 온상으로 250만 중 결핵감염자가 5할이었고 100만명이 앓고있었다. 1920년 세브란스 병원의사인 스타이츠가 처음 결핵환자를 위한 병원을 세웠고 셔우드 홀 부인은 결핵퇴치운동을 위해 '크리스마스 실'을 판매하여 기홀병원을 세웠다.    남장로교회는 잔남 광주의 제중병원을 세워 결핵환자 전문병원으로 환자를 치료해 주었다. 나병퇴치는 미국 북장로교회의 어윈, 빈턴, 스미스에 의해 시작되어 1909년 부산에 처음으로 나병환자 수용소가 세워졌다. 장로교 총회에서도 나병에 관심을 깆고 특별헌금을 하기로 결정하여 12회 총회에서 12월 첫주를 나병원 연보주일로 지켰고 14회 총회에서는 근멸회가 조직되었다. 나병환자를 위해 애쓴 한국인은 최흥종으로 선교사 포사이드의 헌신에 감격하여 나병환자를 위해 살았다. 그는 나병근절협의회를 만들고 나병환자 모금운동을 펼쳐 소록도에 나병원을 세웠다. 특히 일본 황실과 총독이 지원금을 보내준 것은 특기할 만 하다.
맹학교 : 로제타 홀이 1894년 앞 못 보는 소녀 하나를 데려다 가르쳤는데 이것이 맹학교의 효시이다. 1915년에는 40명의 학생이 공부를 하였다. 점자, 뜨개질을 가르쳤고 남자맹학교는 마펫 못사의 부인 앨리즈에 의해 시작되었다. 

교회의 항일활동 : 교회의 방법은 복음적인 방법, 즉 비폭력, 무저항의 방법으로 항일의 정신을 보여주었다. 기독교인들은 태극기를 올렸고 국가를 위한 기도회를 가졌다. 1905년 을사늑약이후 민영환이 자결을 했고 홍태순, 정재홍이 자결하였다. 장인환, 전명훈은 스티븐슨을 격살했고 1909년 안중근은 하얼빈에서 이토를 격살했다. 이재명은 이완용을 습격했다.
경제적저항은 일본상품불매운동과 조세저항이었다. 도로, 시설을 위해 일제가 제공한 차관을 갚기 위해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났다. 금주, 금연, 탈환, 감선운동이 일어났고 1920년에는 조만식에 의해 물산장려운동이 일어나 민족단결, 협동정신, 상부상조, 생활개선 등의 다양한 목적을 갖고 출범되었다.  

제10편 한국교회의 조직과 수난  
    
장로교회의 조직 : 1901년 마펫은 김종섭, 방기창을 데리고 신학교육울 시작하여 장로회신학대학교의 효시가 되었다. 1915년에는 등록학생수가 250명을 넘었다. 1907년 길선주, 방기창, 송인서, 한석진, 이기풍, 양전백, 서경조 등 7명이 첫 졸업했다. 1907년 9월 평양 장대현교회에서창립노회를 개최하여 목사7명, 장로 53명, 교회988개, 세례교인 70,000명의 교회로 출발하였다. 1912년에 7노회로 총회가 창립되었는데 총회장은 언더우드, 부회장은 길선주 목사가 선출되어 한국장로교회는 세계교회의 일원이 되었다. 총회 창립후 중국 산동성에 김영훈, 사병순, 박태로 목사를 파송하였는데 크게 성공했다. 
감리교회의 조직 : 1908년 정동교회에서 한국연회가 창설되었고 남,북 감리교회는 각각의 조직을 운영하다가 1930년에 하나로 통합되었다.  

일제의 기독교 정책 : 줄기찬 탄압과 박멸로 일관되었다. 이등은 기독교에 대해 유화적이었으나 사내정의는 노골적으로 반기독교적 태도를 보여 1913년에는 모든 학생들이 국가적 축제일에 일본 천황의 사진에 절하도록 강요했다.

해서교육 총회 사건 : 장로교회 계통의 학교만도 1907년에 405개, 1908년 561개, 1909년에 719개로 늘었다. 1908년 기독교 인사들이 중심이 되어 해서교육총회가 조직되어 한 면에 한 학교를 세워 교육에 전념하자고 다짐하였다. 안명근이 서간도에 학교를 세우려고 모금하러 국내에 들어왔다가 체포되었는데 일제는 해서교육총회의 회원을 모두 체포하였다.

105인사건 : 1907년 안창호가 결성한 신민회는 한국인들에 의한 학교들이 강력한 민족주의적인 색채를 띠고 설립되었는데 일제는 105인사건을 '사내 총독모살사건'으로 규정했고 총독을 살해하려는 음모를 기독교인들이 왜곡했다고 주장하여 목사 6명, 장로50명, 집사 80명을 포함하여 서북지방 지도자 500명이 체포되었다. 그 중 유죄판결을 받은 사람이 105인이었다. 이 사건에서 선교사들과 미국 본국의 역할이 커서 일제의 음흉함을 세계에 폭로했다. 

기독교 학교의 탄압 : 총독부는 1911년 조선교육령을 발표하여 일본학생과 한국 학생들의 차별교육을 규정했고 국채보상운동을 벌여 대학설립 인가를 청원했으나 거절되었다. 1919년까지 보통학교가 전국적으로 249개교에 불과하였다. 1915년 3월 '개정사립학교규칙'을 공포하면서 성경교육을 정규시간에서 빼고 예배를 철폐하라는 규정은 학교의 존립과 관계되는 문제였다. 그리하여 1910년에 2,080교가 1915년에는 1,154교로 다시 1923년에는 649개로 감소했다.
일본교회의 조선교회 간여 : 일본교회는 조선교회에 일본조합교회를 이식시키려고 획책하였다. 이에 앞장 선 도뢰상길의 노력으로 1912년에 전국에 16개 교회가 일본 조합교회에 가입하였으며 총독부는 이 교회들에 보조금을 비밀리 지급하였다. 
교회내의 분쟁 : 전북 대리회 지역의 최중진 목사는 장로교회를 탈퇴하여 자유교회를 설립했다. 이유는 선교사에 대한 적개심인데 최중진은 사기죄로 체포되었다가 후에 일본 회중교회에 합류했다. 김장호는 최초로 자유주의 신학을 부르짖고 나선 사람이다. 1918년 노회는 목사직을 박탈하였고 김장호는 노회를 탈퇴하여 조선기독교회를 창립하였다. 이만집은 1919년 3.1운동이 일어났을 때에 주동자로 활약하였는데 한 청년이 당회에 문제를 몇가지 건의한 것에 대해 출교와 책벌하자는 의견에 이목사와 선교사들이 대립하였다. 이 문제는 법정으로까지 비화하였고 이는 반선교사 정책을 쓰는 일제의 정책이 교묘히 작용하기도 했다. 

일제의 대한 정책 : 동화정책과 우민화정책, 경제적 수탈을 자행하였고 퇴폐문화를 유입하여 공창,아편을 허락했고 교회를 조직적으로 억압하여 모든 일을 허가제도로 모든 교회활동을 철저히 제약했다. 

제11편 한국교회와 3.1독립운동
      
3.1운동의 과정 : 신한청년단은 김규식을 파리에서 열린 만국평화회담에 파견하였다. 일본 유학생들은 조선청년독립단을 구성하였고 2.8독립선언식을 동경YMCA에서 거행하였다. 국내에서는 기독교인 16인, 천도교측에서 15인, 불교 2인이 종로의 명월관에서 독립선언식을 거행했고 파고다에서는 정재용이 독립선언서를 읽으면서 서울, 평양, 진남포, 안주, 선천, 의주, 원산 등지에서 동시에 행해졌다. 대개 기독교 학교가 있는 곳에서 그곳 학생들을 중심으로 시위가 퍼져 1920년 3월까지 사망자 7,645명, 부상자 45,562명, 체포자 49, 818명, 가옥소각 724채, 교회소각 59개소, 학교소각 3개교 등이었다.    

제12편 1920-30년대의 교회상황      
길선주목사의 사경회 : 민족 대표 33인 중 한사람인 길선주목사는 2년의 옥고를 치렀는데 감옥에 있으면서 요한계시록을 거의 외웠고 <말세학>이라는 계시록 강해집을 만들었다. 그의 종말사상은 한국교회로 하여금 내세지향적으로 이끌고 간 것이 아니라 말세학에서 지상의 낙원이 이 땅에서 이루어진다는 독특한 신앙을 가졌다.

김익두목사의 이적집회 : 스왈른 선교사를 통해 예수를 믿고 성례를 받기전에 신약을 백번이나 읽었고 '기도선생'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평양장로회신학교 3회 졸업생인데 1926년 남대문교회에서 지식층청년들이 기독교신앙을 미신적으로 이끌어간다고 반대하기도 하였다.  
그는 억압속에 있는 대중들에게 초자연적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한국 교회에 생명력을 불어넣어 주었고 3.1운동 후에 용기를 불어 넣어 준 예언자였다. 부흥회수가 776회, 설교횟수가 2만 8천여회였다. 불행하게도 해방후 조선기독교연맹에 가입하고 공산당 어용단체에 협력하고도 학살당하는 운명에 처하였다.
이용도목사의 신비주의 : 개인의 영적체험에 근거한 신비주의에 기초하고 있다. 주님과의 합일, 이것이 그가 끌어낸 신앙의 결론이었는데 그가 가는 곳마다 열화 같은 반향을 일으켰다. 1931년 8월 황해노회는 이용도가 재령교회를 훼방하고 여신도와 서신을 거래하며, 불을 끄고 기도하고, 무교회주의자라는 이유로 금족령을 내렸다. 그는 기도의 사람이었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몸으로 실천한 사람이었으나 세속화된 기성교회와 지도자들을 지나치게 공격함으로 스스로의 입지를 좁혔고 유명화에게 '주님'이라고 부른 것은 어느모로나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김교신의 무교회주의 : 그는 교회안에 분규가 일어나는 것을 보고 기성교회에 회의를 느꼈다 무교회주의자인 내촌감산 문하에서 공부하며 영향을 받앗다. 1927년 귀국한 그는 함석헌, 송두용, 유석동과 <성서조선>을 창간하였다. 이 잡지는 기성교회의 교리, 주직, 예배의식을 거부하고 자기들끼리 신앙공동체를 만들어갔다. 따라서 우리 민족의 정신사적, 교회사적 사명을 강조하고 선교사들이 전해준 교파적 신앙을 거부하고 민족신앙을 주창하였다. 그의 일생을 통해 '2C'를 사랑한다고 했는데 이는 Christ와 Chosun이었다. 
적극신앙단 : YMCA총무였던 신홍우는 민족주의적인 의식과 반선교사적인 경향을 자유주의적인 신학과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반서북', '반선교사', '반보수'로 나타낸 운동이다. 

제12편 사회적변화에 대한 교회의 대응

공산주의 사상의 대두 :  레닌은 약소국가들의 독립에 대한 지원을 약속했기에 뜻있는 지사들과 민족주의자들에게는 복음으로 들렸다. 이는 한국교회의 위기였는데 기독교가 들어가 전도해야 할 대상을 공산주의가 침투하여 그 사상을 집어넣고 기독교에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도록 만들었다. 연해주의 한인사회당, 바이칼호 근처의 이르크츠크 한인공산당지부, 아사원의 조선공산당이 조직되었다. 한인겅산당도 여러 갈래인데, 이동휘를 중심으로 한 상해파, 여운형의 이르크츠크파, 일본 유학생 중심의 엠엘파였다. 
공산당에 의한 기독교의 피해 : 한양청년연맹은 1925년 10월 주일하교대회를 방해할 목적으로 반 대강연회를 개최하였고, 성탄절을 '반기독교의 날'로 정하였다. 특히 동아기독교회의 윤학영, 김이주등은 공산당에 의해 순교한 최초의 사람들이다. 
교회의 농어촌 문제 : 토지 소유권을 잃은 농촌문제를 해결하고자 전문가인 러츠가 1920년에 내한하였고 숭실전문학교는 농과를 신설하였다. 특히 YMCA는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20개의 농민지도소가 개설되고 '한국 농촌'이라는 보고서가 작성되었다.

사회계몽운동 : 탄링의 강연회를 시작으로 절제회가 조직되어 금주, 단연, 물산장려운동이 시작되었다. 장로교선교사들은 공창폐지운동, 축첩과 잡기하는 폐습을 철폐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다. 국산품을 애용하고 이제 상품을 배격하자는 물산장려운동은 조만식에 의해 이루어졌다. 성경구락부는 1929년, 킨슬러에 의해 시작되었다. '개척구락부'라는 이름으로 야학을 시작하여 1938년 5천명으로 늘어났으나, 신사참배문제로 결국 폐쇄되었다. 한국전쟁후 전국적으로 확대되어 54년에는 7천명 이상이 공부를 하였다. 
신학적 갈등 : 한국의 신학적 갈등은 미국이나 일본에 유학한 해외파들에 의해 비롯되었고 지방색까지 겹쳤다. 표면화된 것은 송창근 목사의 사임이었고, 논란은 박형룡과 김재준이 대표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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