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6-07-31 22:04
[3]한국 교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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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웹섬김이
조회 : 4,485  

23. 이용도목사와 이단성문제 :

 

이용도목사가 말년 원산 예언자들과의 접속관계에서 악령에게 미혹을 당하였는가는 문제는 그의 이단성 시비와 관련하여 즐기차게 제기된 문제였다. 이문제의 규명은 이용도 목사의 신앙적 건전성 여부와 관련하여 대단히 중요하다. 이용도 목사가 교계로부터 비판을 받은 것은 그의 사역말기였다. 그는 장로교로부터 특히 부흥회와 관련하여 많은 파란을 겪은 후 마침내 1933년 9월 평북 선천읍 남예배당에서 개최된 조선 예수교 장로회 제 22회 총회로부터 백남주 ,한준명, 이호빈, 황국주와 함께 이단으로간주할수 있는 단체의 일원으로 지목을 받았다.

용도의 막역한 친구이자 용도를 곁에서 가까이 지켜보았던 미국인 선교사 피도수목사는 이 예언 운동의 기원이 용도의 사역과 무관하였다고 말한다. 그의 말에 의하면 1932년 2월 신학교 학생들이었던 젊은 여성들이 이른바 입신의 상태에 예언을 하기 시작했다. 몇 개월후 용도는 이들과 교제를 나누게 되었으며 함께 모여 기도하기도 하였다.

이용도 목사는 신탁을 하는 이들 예언자들을 하나님의 예언자들로 믿고 그들의 신탁을 성령의 역사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이용도 목사가 신탁을 성령의 역사로 받아들인 부분적인 이유는 자신이 받은 감리교의 체험신학의 전통과 교리체계가 정립되지 않은 당시의 시대적 상황에서 기인된 것으로 보인다.

이들의 예언을 가장 강력하게 비판한 이들 가운데 한사람은 김인서였다. 두말할 것 없이 그는 이들이 예언이 악령으로부터 나온 것으로 판단하고 있었다.  김인서에 의하면 영계 길선주 목사도 이 운동을 강신술의 일종이자 마귀의 역사로 보았다. 특별히 피도수 선교사의 논술이 우리의 주목을 끈다. 그는 원산 예언자들의 예언운동을 "빛의 천사로 가장한 사탄"에게서 나온 것으로 이해하였다.

이용도의 이단성 문제는 현대교회사가들 사이에 엄청난 시각차를 가지고 있다. 이용도의 예언운동이 성령의 역사라기 보다는 신탁이나 접신과 같은 악령적 성격을 띠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용도는 이를 거부하지 않고 성령의 역사로 받아들인다. 이용도 목사는 지나친 교리적인 틀속에 기독교의 복음을 가두어두는 교리적인시각 보다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은총속에서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강조햇고 이런 시각속에서 예언자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이용도를 비판하는 이들이 주장하듯이 이용도가 이단의 주창자는 아닌듯하며 예언자들에게 미혹되었다고 보인다.

 

24. 김교신과 무교회주의 :

 

1930년대 한국교회가 일제의 회유와 압력으로 흔들리며 일본의 황국신민화 정책에 합류하던 그 때 민족의 자존심을 끝까지 지켜준 인물이 바로 김교신이었다. 일본에 유학하면서 친일로 전향하지 않고 마지막까지 조선사람으로 남았던 민족주의자, 그러면서 교회의 제도와 가견적인 교회관을 거부하고 불가견적인 교회를 유일한 교회로 주창하며 기성교회를 주저하지 않고 공격했던 예리한 비평가, 때문에 그는 마치 초대교회 교부 오리겐처럼 예찬과 비판을 동시에 받은 인물이었다.

무교회주의는 1930년 한국 장로교 총회가 자유주의와 아빙돈 성경주석 여권문제 창세기 저작권 문제처럼 총회적인 차원에서 거론되지는 않았지만 전국교회에 적지 않은 파란을 일으켰던 문제였다. 일본에서 유학중이던 1920년 6월 김교신은 동경에서 노방전도를 통해 그리스도를 영접한후 성결교회에 다니기 시작했다. 담임목사가 교인에게 쫓겨나는 것을 보고 기성교회에 회의를 느낀 그는 우찌무라 문하에 들어가 거기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는 귀국후 우찌무라 문하의 동료들과 함께 성서조선을 만든다.

성서조선이란 조국의 미래를 염려하는 기독교 정신이었고 민족의 독립을 기원하는 소탈한 민족애였으며, 또 민족해방을 가져다 주는 유일한 길이었다. 따라서 조선을 성서의 기초 위에 세우겠다는 희망은 곧 일본의 통치에서 벗어나겠다는 것으로 비추어질 수밖에 없었다.

김교신의 무교회주의 처음부터 일관되게 진행된 것이 아니라 어느 어간에 상당한 변환을 맞았다. 그의 무교회주의는 별다른 것이 아니라 기독교 자체였다. 무교회주의의 핵심은 그가 말하는데로 성서에 있던 교회의 본질적 부정에 있던, 일본에 대한 보이지 않는 무언의 항거에 있던 분명한 사실은 그의 글과 사상 속에는 한국의 기성교회에 대한 공격이 하나의 축을 형성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조선적 기독교를 외쳐야 했고 선교사들로부터 독립과 서구의 자본으로부터의 해방을 외쳐야 했고 또 기성교회를 비판해야만 했다. 그는 이런 주장속에서 성경신학의 맥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제시하거나 이해하는데 실패하였다. 또한 한주 한믿음 한세례를 거부함으로 그는 스스로 비판을 자초했다.

이런 약점에도 불구하고 김교신은 기성교회가 갖기 쉬운 지나친 교권주의, 물량주의를 경계하고 순수한 조선의 기독교를 조창했다는 점에서 한국교회에 미친 영향은 적지 않았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김교신의 무교회주의를 통해 교회가 무엇인가를 고찰하게 하였고, 단순한 예배당을 중시하는 사고에서 그리스도인의 모임자체를 교회의 신성한 본질로 고찰해야할 필요성을 제시해 주었던 것이다.

 

25. 보수주의 응전과 박형룡 :

 

진보주의 측과 보수주의 측 모두 박형룡 박사의 평가는 근본주의자라는 것이다. 박형룡 박사의 신학적 입장은 분명 근본주의라고 볼수 있다. 그는 근본주의를 기독교 자체라고 보았는데 그것은 근본주의야 말로 정통주의로 이해했기 때문이다. 박형룡 박사의 사상을 지배한느 메이첸의 이상 즉 [기독교와 자유주의] 에 나타난 것과 같이 같은 정통신앙의 변호와 전수에 대한 열망이 곧 박형룡박사의 일생을 지배했다. 때문에 주재용 교수는 박형룡 박사의 사상은 반현대주의, 반신정통주의, 반신복음주의로 함축시키고 있다. 박형룡 박사는 끊임없이 성경의 권위를 변호하는데 상당한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박형룡이 프린스톤에서 유학하던 1923년부터 1926년은 미국에서 근본주의 대 현대주의의 논쟁이 절정에 달하던 시기였다. 이런 시대적 배경은 자연히 박형룡의 신학을 형성하게 되었다. 박형룡은 변증학에 관심을 가졌다. 그리고 유학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온 박형룡은 수년후 미국에서 경험한 똑같은 신학적 대립과 논쟁을 한국에서도 목격하게 되었다. 결국 박박사는 제2의 메이첸으로 한국의 보수주의를 변호해야한다는 사명의식을 느끼게 되었다. 이런 시대적 배경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박형룡박사를 이해할수 없는 것이다.

박형룡 박사는 어떤 새로운 신학을 설정하거나 만들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다. 그에게 한국의 신학이 따로 있고 미국의 신학이 따로 있다고 보지 않았다. 구 프린스톤의 신학을 그대로 계승발전시키는 것이 신학자의 소명이며 그것에서 벗어나는 자야말로 신학을 변질시키는 인물로 이해했던 것이다. 워필드나 메이첸이 강력하게 변호했던 성경의 영감 특별히 완전유기적 축자영감은 박형룡 박사 신학의 중심이 되었다.

그는 1930년대 현대주의 도전앞에서 보수주의의 대변자가 되었다. 격변의 시대 정통주의를 보수사고 소위 성경의 권위에 기초한 성서 기독교 신앙을 한국에 뿌리를 내려주었다는 면에서 긍정적인 면이라고 볼수 있다.

그러나 성경의 객관성에 대한 강조가 말씀의 순종과 실천에 대한 강조와 균형을 상실할 때 그 말씀에 대한 강조가 인식론적인 차원에서 맴돈 나머지 실존적인 차원에서의 살아있는 역사가 결여되는 경우를 자주 목격하듯이 박형룡 박사의 사상은 본의아니게 한국교회에 반문화주의, 반사회주의 사상을 심화시켜주었다. 그 결과 한국 장로교 안에는 문화를 보는 부정적인 견해, 사회를 보는 부정적인 견해들이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그와함께 간하배 교수가 지적하듯이 한국의 신학적 보수주의가 신학적 폐쇄주의로 치닫는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했던 것이다. 이런 원인중의 하나는 역사의식의 결여에서 비롯되었고 ,이런 역사의식의 결여는 복음주의에 대한 잘못된 이해로 이어졌다. 또한 변증학적인 접근방법을 한국 조직신학의 기준으로 만들었다. 그러니까 신학자체를 신학의 독특성으로 평가하지 않고 현대주의 변화라는 방향에서 접근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박형룡박사의 위치를 평가절하 해서는 안된다. 그는 1920년대 현대주의 대 근본주의 논쟁시대 1930년대 자유주의 도전과 보수주의 응전의 시대 1940년와 1950년대 분열과 혼돈의 시대 속에서 그가 그런 신학을 형성할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인 상황들로 박형룡 박사를 평가해야 할 것이다. 그는 역사 그 시대의 산물이었다. 박형룡 박사의 긍정적인 것을 평가하고 부정적인 것은 성숙과 발전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26. 신사참배 논쟁 :

 

일제시대 한국교회가 만난 가장 큰 박해는 1936년부터 1945년까지 있었던 신사참배 강요였다. 신사는 종교적 요소가 없는 국가에 대한 예의문제라고 하지만 신사가 종교라는 것에 이의를 둔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신사참배의 목적은 일본신들에 대한 숭배와 민족정신의 말살에 있다는 사실을 간파한 신앙의 선배들은 신사참배는 곧 유일신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배도라고 확신했다.

국내의 여러 교단과 천주교는 타협의 길을 선택하였다. 그러나 남장로교 선교부의 총무 풀톤은 신사참배가 우상숭배이며 기독교학교가 폐교되고 선교지를 철수 한이 있더라도 신사에 참배할 수 없음을 분명히 하였다.

감리교와 장로교 총회가 강압에 못 이겨 신사참배를 결정하였다 그러나 총회의 신사참배 결정에도 불구하고 신사참배 반대운동이 신학생에서부터 박관준 장로, 주기철 목사의 산정현교회를 중심으로 일어났다. 또한 한국인들만 신사참배에 반대한 것이 아니라 남,북 장로교 선교회가 신사참배 반대운동에 적극지원하고 나선 것이다.

60년이 지난 오늘날 신사참배 논쟁의 문제점이 밝히 드러나게 되었다. 첫째 신사참배는 종교라는 점이다. 둘째 신앙과 신사참배의 연관성에서 신사참배는 성경이 행위의 절대적인 표준이 되는지를 알게 해 준 사건이었다. 셋째 신사참배를 결정하거나 신사에 참배한 이들에 관련된 문제이다. 총회는 39회 총회에서 신사참배결의를 취소하고 회개하였다. 이것을 거울삼아 몰역사적이고 비신앙적인 행위가 다시는 이 땅에 있어서는 안될 것이다.

 

27. 소양 주기철 목사 :

 

1930년대 자유주의 도전과 신사참배라는 두가지 도전으로 기로에 선 한국교회의 신앙을 지켜주고 삶을 통해 그 진실을 전달한 인물이 바로 소양 주기철 목사였다. 일제의 한국지배는 소양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 수 밖에 없었고 , 그것이 그의 생애의 한 방향을 결정짓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급작스럽게 달라지는 국내의 정치 경제 , 사회의 변화, 일제의 노골적인 조선의 침략, 그리고 국내의 경제적 파탄을 목도하면서 소양은 어떤 형태로던 이 시대의 지도자로 부름 받았다는 소명의식을 강하게 자각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모든 것보다도 더 결정적으로 소양의 생애와 신앙을 지배하게된 원동력은 그의 회심과 평양신학교에서의 보수주의 신학교육이었다.

소양은 김익두의 집회를 통해 영적각성 체험후 주의 종으로 일생을 헌신하기로 결심하였다. 정치적인 독립의 소망이 종교적 소망으로 대치되어 이 민족이 진정으로 살길은 복음화되는 길이며, 전민족이 자신들의 위치에서 기독교적 이상을 몸소 실천하는 것이라고 확신하기 시작했다.

소양은 처음 초량교회에 부임하였고 , 마산 문창교회 목회와 신사참배 반대운동의 산실인 된 산정현교회로 마지막으로 부임하게 되었다. 그의 일사각오의 정신은 일제의 4차례나 되는 검속속에서도 굴하지 않는 믿음을 보여주고있다.

소양의 생애를 통해 역사적인 교훈을 말한다면 다음과 같다. 첫째 그의 민족에 대한 사랑은 당시의 정치적 민족주의자들과 차이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둘째 그의 바른 신앙은 그가 어릴 때부터 받았던 신앙교육과 평신도 교육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의 생애가 우리에게 주는 가장 큰 교훈은 그의 신앙과 삶이 당대 뿐아니라 이시대의 이상적인 모델이라는 사실이다.

 

28. 민족의 희망과 시련 :

 

1935년부터 1945년까지 한국에는 종말론이 전국적인 현상으로 발흥했다. 이시대 종말론이 전국적인 현상으로 발흥하게 된 원인에는 몇가지 이유가 있다. 그중에 하나는 선교사들의 종말론 때문이다. 또 하나는 네비우스 선교정책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일제의 한국통치는 한국의 종말론을 자연스럽게 고취시키는 동기가 되었다.

한국교회의 사상을 이끌어온 사람들은 박형룡과 박윤선을 제외하고는 거의다 세대주의 종말론을 갖고 있었다. 세대주의 종말론은 종말론의 지류가 아니라 장로교 종말론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었다. 이런 세대주의 종말론은 길선주나 김익두와 같은 초기 한국지도자들의 종말론의 원형을 형성하였다.

박형룡 박사는 세대주의와 역사적 전천년설을 구분할려는 시도를 한국교회에서 최초로 한사람이다. 그는 한국교회의 전천년설을 구분하면서 소위 역사적 전천년설이라고 하는 말을 처음으로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세대주의와 역사적 전천년설에 대한 구분의 시도는 박윤선 박사에 의해 진행되었다. 조직신학적인 틀이 아닌 성경신학적 틀을 가지고 천년설을 논했다는 점에서 박윤선 목사는 중요한 공헌을 하였다.

1935년부터 1945년 사이 전천년설을 전국적인 현상으로 확대시킨 가장 중요한 요인은 신사참배였다. 신사참배는 정통신앙을 판단하는 중요한 시금석이었다. 또한 이 시기는 평양신학교가 폐교되고 1940년 조선신학교가 설립되었다. 1940년대 이후 급속히 자유주의화 되었지만 해방과 함께 해외로 망명했던 보수주의 선교사들과 한국인들이 귀국하면서 한국 장로교는 이들과 조선신학교를 중심으로 한 세력들과의 신학적인 갈등이 빚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29. 분열과 대립의 시대 :

 

1945년부터 1960년대까지는 한마디로 대립과 분열의 시대였다. 혹자는 이 시대를 성경에 대한 논쟁의 시대라고 부르는데 그것은 논쟁의 중심에 성경관이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시대의 공통적인 특징은 신학적 자유주의 세력과 신학적 보수주의 세력이 일련의 갈등을 경험해야 했다는 사실이다.

1940년 조선신학교가 설립되어지고 조선신학교는 세계의 조류에 부응하는 신학교를 설립이념으로 내세웠다. 세계조류라는 것은 그 당시 팽배해 있던 신정통주의 사상을 그대로 수용한다는것이었다. 이런 현대조류와 현대사상의 수용이 곧 자유주의 신앙을 수용한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학문적인 면에서 진보적인 사상을 수용하면서 신앙적인 면에서는 얼마든지 보수성을 견지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런 조선신학교의 진보적인 입장은 정통주의자로부터 반대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주도했던 한상동 목사와 미국 웨스트 민스터의 메이첸 문하에서 구프린스톤의 보수주의 교육을 받은 박윤선 목사가 주축이 되어 설립한 고려신학교는 조선신학교의 진보주의 신학교육에 대한 강한 반동이었다. 이들이 내건 신앙과 신학의 준수는 조선 신학교가 주창하는 신앙은 보수, 신학은 자유라는 이원론에 대한 거부였다. 조선신학교가 평양신학교와의 역사적 단절을 추구했다면 고려신학교는 평양신학교와의 역사적 단절이 아니라 계승을 모토로 내걸었다.

고려신학교만의 외로운 투쟁을 한 것이 아니라 조선신학교에 다니는 재학생중 51명이 총회에 이의를 제기하였다. 조사위원들의 조사와 박형룡의 귀국으로 김재준교수에 대한 명확한 판단을 하게되었다. 그러나 모든 상황이 박형룡에게만 유리하게 진행된 것은 아니다. 세계적인 두 석학인 존 맥케이와 에밀 부르너의 한국방문은 자유주의를 확대시키는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박형룡박사가 귀국하고 고려신학교에서 1년도 있지 못하고 떠나 1948년 장로회신학교를 세웠다. 1949년 총회에서는 3가지 색깔을 띠게 되었다. 고려신학교를 중심한 고려파, 조선신학교를 중심한 기장파, 장로회 신학교를 중심한 박형룡 중심의 세력이었다. 1952년 고려파가 분립하였고 1953년에는 기장이 분열해 나갔다. 1959년에는 W.C.C를 찬성하는 쪽은 통합, 반대하는 쪽은 합동으로 분열하였다.

분열과 연합을 반복하면서도 교단적인 연합을 추구했던 미국장로교회와는 달리 우리의 장로교는 연합의 희망을 포기한 것 같다. 그 원인은 보수주의와 자유주의를 막론하고 신학을 이데올로기와하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간하배 교수의 지적과 같이 한국교회의 신학은 반동주의로 흐르고 말았다. 이제 건전한 신학의 발전을 위해서는 반동주의를 탈피하고 총체적으로 균형잡힌 신학적 발전을 모색해야 할 때가 왔다.

 

30. 조선 신학교와 성경관 논쟁 :

 

1947년 조선 신학교 재학생 51명의 학생들은 그들이 받고 있는 자유주의 신학교육에 반대하여 총회에 진정서를 제출했다. 이것은 전국적인 이슈가 되었고 서양 자유주의가 한국교회에 적지 않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시켜주는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었다.

이들의 핵심은 성경관에 대한 문제였다. 김재준 교수는 성경이 무오하다고 고백하지만 성경이 역사적 과학적, 그리고 연대기적 문제에서도 무오하다는 것은 거부한다. 그는 성경은 구속의 진리라는 점에서만 무오한 것이지 결코 자연, 역사, 과학에서까지 무오한 것은 아니라고 주장함으로써 성경의 권위를 신앙과 행위에 제한시켰다.

박형룡박사는 귀국후 김재준 교수의 문제를 두가지 측면 첫째 현대비평학을 따라 김재준교수가 모세오경의 모세저작권 부인하여 성경의 권위를 파괴시켰다는 사실 둘째 김재준 교수는 성경의 무오를 믿는다고 주장하지만 성경무오사상과 그가 수용한 고등비평은 서로 양립할수 없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51명의 학생들이 진정한 진성서로 시작된 조선신학교의 신학을 둘러싼 수년간의 총회내의 대립과 논쟁과 갈등은 1953년 6월 조선신학교와 그 학교를 지지하는 장로교회들이 총회를 탈퇴하고 한국신학대학(조선신학교 후신) 강당에 모여 소위 법통 38차 총회를 개최하면서 결말이 지어졌다.

 

31. 에큐메니칼(W.C.C) 논쟁 :

 

한국 장로교회는 1954년 미국 일리노이주 에반스톤에서 열린 W.C.C. 총회에 명신홍과 김현정 두사람을 대표로 파송하여 W.C.C.의 신학적 입장과 성격을 정확히 파악한 후 보고해 줄 것을 요청했다.

이둘은 상반된 보고를 하였는데 이것은 두사람의 견해차라기 보다는 한국 장로교 안에 있는 두조류를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었다. W.C.C.를 찬성하는 이들은 한국교회가 이제는 세계조류와 맥을 같이하고 보조를 같이하기 위해서라도 세계교회들의 협의체인 W.C.C.에 적극 참여하여 배워야 된다는 입장이었다. W.C.C.반대하는 이들은 이 단체가 교회의 일치가 아니라 교회의 연합을 꾀하고 있는 단체이며 이를 위해서 신학적인 선을 철폐하여 새로운 신학조류를 받아들였고 심지어 공산주의를 지지하는 용공적인 성향이 있다는 것이었다.

1956년 9월 제41회 총회에서는 에큐메니칼 운동에 대한 찬반논란을 벌인 끝에 이 운동을 좀더 체계적으로 연구하여 보고할 에큐메니칼 연구위원 8명을 발족하였다. 이들은 42회 총회에서 첫보고를 가졌다. 첫째 에큐메니칼 운동을 지지하는 이들은 단일교회를 목표로 하는 이들과 교회의 친선과 연합만을 목표로하는 이들 둘로 대별되며 둘째 친선과 협조만을 위한 에큐메니칼 운동은 앞으로도 계속 참여 하기로 하지만 단일 교회를 지향하는 운동에 대해서는 반대한다는 것 셋째 각교회에 에큐메니칼 운동에 대한 바른 교육을 위해 필요한 팜프렛 제작, 인돈, 마삼락 명신홍, 김형모 네사람을 추가로 에큐메니칼 연구위원에 위촉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W.C.C.를 찬성하는 쪽과 찬성하지 않는 쪽사이에 문제가 발생하였다. 총회의 화해노력에도 불구하고 연동교회와 승동교회에서 각각모여 통합과 합동으로 다시 장로교가 분열되는 아픈 결과를 만들어 내고야 말았다.

 

32. 정체성 파악의 시기 :

 

50년대 세차례의 분열을 맞은 한국장로교회는 1960년대 이후 자신들이 걸어온 신학의 길을 반추하며 "우리가 어떻게 나가야 할것인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정체성 파악 문제로 고민하던 한국교회는 지금까지의 교파주의에서 과감하게 탈피해 교파를 초월하여 근본주의 성향의 정통주의, 토착화신학, 그리고 복음주의 공동체로 뚜렷이 대별되기 시작하였다.

근본주의 성향의 정통주의는 고신, 합동, 백파, 성서침례교회, 감신의 일부 보수주의, 예성, 매킨타이어의 영향으로 시작되었다. 기독교의 한국화를 추구하려는 움직임은 김신대의 문화-자유주의 ,한신대의 진보주의, 연세대 신학대학의 공동체 안에서 일어났다. 토착화 신학운동의 요인은 첫째 한국에 뿌리내린 전통주의 가 한국의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선교사 및 수입신학을 주창하면서 경직된 정통주의를 고수하려는데에 대한 반동이었다. 둘째, 당시 해방신학등 남미의 토착화 신학에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셋째는 한국의 시대적 배경 즉 정치적인 상황 때문이었다. 이 토착화 신학은 성의신학, 문화신학, 민중신학으로 나타났다.

이런 토착화 운동은 한국의 자유주의 토착화 운동은 한국기독교 발전에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두가지 면을 동시에 가져다 주었지만 한국의 전통적인 기독교인들에게 긍정적인 인상보다는 부정적인 인상을 더 강하게 가져댜 준 것이 사실이다. 토착화의 긍정적인 면은 신학함의 필요성과 과제, 학문성에 있다. 또한 기독교와 문화를 진지하게 고찰 할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였다. 또한 민족주체성 확립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부정적인 면에서는 복음의 지나친 상황화를 만들어 내고 , 기독교와 전혀 이질적인 민족종교와 전통을 접목시키려고 시도함으로 말미암아 복음의 본질을 변질, 왜곡시키고 말았다. 한국자유주의 신학이 반동주의로 흐른다는점과 칸텍스트를 극대화한 나머지 텍스트를 약화시키고 말았다. 종교혼합주의 현상도 나타났다.

1960년대 정체서의 문제가 대두되면서 생성된 또 다른 신학운동은 복음주의 운동이다. 신학적 보수주의를 계승하면서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문화적인 책임을 완수하려는 공동체가 형성되기 시작한 것이다. 1970년대이후 복음주의 공동체가 형성되었다. 이들은 교단을 초월해서 복음주의라는 이름하에 한데 연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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